소수의 고독
파올로 조르다노 지음, 한리나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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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살 때의 일이다. 그때도 글을 잘 쓰던 나는(엥? ㅋㅋㅋㅋㅋ 아무튼 그렇다고 칩시다), 반  대표로 백일장에 나가게 되었다. 집에서 글을 써서 내야 했는데 주제는 ‘우리 가족’이었다. 평소 배우고 익히고 실천한 대로 우리 가족에 대해서 나는 내가 느끼고 생각한바 그대로 솔직하게 글을 썼다. 그러고는 원고지를 책상에 둔 채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엄마가 나를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단잠에서 깨버린 나는 부루퉁한 얼굴로 눈을 비볐다. 엄마는 원고지를 들고는 이게 뭐냐고 물었고, 이러저러해서 쓴 거라고 했다. 그러고는 다시 쿨쿨 자려고 하는데...... 엄마는 이렇게 쓰면 안 된다고 나를 또 깨운다. “왜요? 느낀 대로 쓴 건데....” “아니 그래도 이건 너무....”

너무 솔직했나. 그 글에는 당시 우리 집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엄마와 할머니 간의 극악무도한 고부갈등, 걸핏하면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대드는 백수 삼촌, 엄마와 아빠의 불화(빨래판으로 엄마 등짝을 때리는데 마당의 강아지가 왕왕 짖던 장면을 묘사했다), 무능력하면서 일은커녕 툭하면 우리 집에 모여서 화투판을 벌이던 아빠와 그 친구들… 그런 중에도 아저씨들의 심부름을 하면서 받은 잔돈으로 오락실 가고 장난감 사는 재미를 신나게 썼다. 그걸 읽은 엄마의 얼굴에 난감함이 스치는 것은 당연했으리라. 

엄마는 다시 쓰라고 했는데 자다 깬 그 늦은 밤에! 내 마음에 들게 쓴 원고를 두고, 다시 쓴다는 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너무 졸렸고 다시 쓰기가 너무 막막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엄마 말을 거역해 본 적 없는 나로서는 다시 안 쓸 수도 없고 잠은 쏟아지고… 억울해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왜요, 글짓기는 솔직하게 하는 건데....” “왜요, 엄마가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런데도 엄마는 거짓으로 글을 쓰게 했다. 그 부당함에 눈물만 뚝뚝 흘리면서 종이를 적시고 있으려니 보다 못한 엄마가 창작에 나서서 당신이 부르는 대로 받아쓰게 했다. 그렇게 해서 나의 ‘거짓 우리 가족’ 원고는 완성되었고 받아쓰기를 마치자마자 나는 퉁퉁 부은 눈으로 잠이 들어버렸다.

내 글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였을까. 잠이 부족해서였을까. 다음 날 학교에 도착해서 가방을 열어보니 집에 원고지를 두고 온 것이다. 제출은 오늘까지인데 이걸 어쩌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엄마가 뒤늦게 교실로 그 원고지를 갖고 왔다. 학부모가 찾아왔으니 담임은 마땅히 엄마를 응대했어야 했고 복도에서 그렇게 엄마와 나 담임선생님 셋이 동그랗게 서 있게 되었다. 엄마는 숙제를 놓고 간 나를 나무라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얼마나 지난밤 애를 썼는지 어필하고 싶으셨는지 전후 사정은 생략하고는 “얘가 어제 늦게까지 이거 쓰느라고 잠도 못자서 눈물까지 뚝뚝 흘렸어요. 호호호” 하신다. 헐 이 미친 아줌니.... 입 다물어요! 세상 뒤통수...... 담임은 엄마의 말이 마치 자기를 나무란다고 느꼈는지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엄마가 돌아간 뒤 수업이 시작했고 담임선생님은 교탁에 서서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자기의 능력을 잘 알아야 한다. 능력도 되지 않는데 할 수 있다고 해놓고 정작 하지도 못하면서 눈물 짜고 그러는 것처럼 못난 일도 없다.” 이런 식의 말이었다. 나는 그게 나를 저격하는 말임을 알았다. 아이들도 우리 엄마가 돌아간 뒤에 벌어진 일이라 그게 나를 두고 하는 말임을 모두 알았는지 흘깃흘깃 나를 쳐다보았다. 그때까지 나는 그 선생님을 좋아했는데 저 말을 듣는 순간 좋아하는 마음이 모두 식어버렸다. 나는 내가 하지 못할 일을 하겠다고 나선 적이 없었다. 자기 멋대로 글을 써오라고 했고 자기 멋대로 거짓말은 나쁘다고, 글은 솔직하게 쓰는 것이라고 가르쳐놓고는 거짓으로 글을 쓰게 했다. 그날 이후로 그녀를 용서한 적이 없다. 나쁜 어른이다. 엄마도 이 일에서만큼은 나쁜 어른이었다.

<소수의 고독>의 알리체에게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알리체는 스키학교가 끔찍하다.  그냥 스키를 타는 것은 괜찮지만 스키학교는 대회로 이어진다.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면 아빠의 얼굴이 어떻게 일그러질지 생각만으로도 두렵고 무섭다. 게다가 스키학교의 강사 에릭은 아빠의 지나친 간섭과 질문 등등에 지쳐 알리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알리체도 그걸 느낄 정도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오늘은 스키대회가 있는 날이고.... 알리체의 긴장한 방광은 벌써 몇 번씩이나 화장실을 들락거리게 하고도 왠지 또 오줌이 나올 것만 같다. 너무 긴장한 탓일까 아니면 아침에 우유를 괜히 마신 것일까 이번에는 오줌이 아니라 배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슬로프 정상에서 알리체는 그만 바지에 똥을 싸버리고 말았고.... 이걸 어쩌지 아빠가 알면 또 얼마나 화를 낼까 아이들이 알면 얼마나 놀릴까, 에릭이 알면 한심하다는 듯이 똥싸개라고 부를지도 몰라... 고민 끝에 대열에서 일탈하고.... 그렇게 눈 덮인 정상에서 안개가 자욱한 정상에서 길을 잃고 하염없이 슬로프 아래로 아래로 추락한다. 이 끝없는 눈에 파묻힌 꼬마 소녀는 과연 구조될 수 있을까......

그즈음 다른 곳- 마티아와 미켈라 쌍둥이 남매가 있다. 쌍둥이 남매임에도 신은 너무도 불공평하게 한 사람에게 모든 재능을 몰아주었다. 축복받은 쪽은 마티아이다. 천재와도 같은 두뇌를 가진 이 소년. 그렇다면 마티아는 행복해야 할 텐데 세상 불행은 제 홀로 등에 다 진 것 같다. 어른아이…. 벌써부터 노쇠한 느낌이다. 왜일까? 자신에게 그 좋은 두뇌를 준 것은 그렇다 치자. 왜 하필 쌍둥이 남매인 미켈라는 백치와도 같은 존재로 태어나게 한 것일까. 그렇다,  미켈라는 쓸모없는 두뇌를 갖고 태어났다. 미켈라의 공간과 시간 인지 능력은 전개념기에 머물러 있다. 엄마와 아빠는 마티아에게 기대를 걸수록 미켈라의 존재가 눈엣가시 같기만 하다. 게다가 그 짐을 은연중 마티아에게 떠넘긴다. 학교에서 미켈라를 돌보는 건 온전히 어린 마티아의 몫이다. 아이들의 눈에도 미켈라는 이상한 존재, 덜떨어진 존재이다. 그러니 이 미켈라와 늘 붙어 있는 마티아에게도 선뜻 다가서기가 어렵다. 

그러다가 마치 호혜처럼 마티아가 생일파티에 초대를 받는다. 난생처음 파티에, 또래들의 모임에 초대를 받은 것이다. 마티아는 기쁘면서도 한숨이 나온다. 엄마는 분명히... 또... 미켈라를 데리고 가라고 하겠지. 미켈라는 아마 거기서 음료수를 쏟아 엎을 테고 우우 이상한 소리를 지를 테고, 아이들에게 힘을 쓰다 쓰러뜨릴지도 몰라. 이 모든 일이 내 몫이 될 텐데 차라리... 차라리 생일파티에 가고 싶지 않다.... 그러다가 혹시 하는 마음에 마티아는 묻는다. “엄마, 미켈라는 두고 저 혼자 가면 안 돼요?” 혹시는 역시다. 엄마는 당연히 미켈라도 데리고 가야 한다면서 마티아에게 신신당부한다. 거기 가서도 미켈라를 잘 돌봐야 한다고. 터벅터벅 즐겁지 않은 파티를 향하는 마티아의 무거운 발걸음. 미켈라를 잡은 손이 그날따라 더 버겁다. 그러다가 마티아는 아주 단순한, 어린아이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는 선택을 한다. 미켈라를 공원에 홀로 두고 친구 집에 가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꼼짝 말고 기다려! 금방 올게!” 미켈라가 그렇게 그대로 가만히 공원 벤치에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친구 집에서 노는 둥 마는 둥 허겁지겁 돌아온 마타아의 눈에 미켈라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영원히.



“이제야 그는 깨달았다. 선택은 한순간이지만 그 결과는 남은 생애 내내 지속된다는 걸.” 


그날 알리체가 슬로프 정상에서 대열에서 벗어나는 선택을 한 것, 그날 마티아가 미켈라를 혼자 공원 벤치에 두는 선택을 한 것. 이 선택들은 아이들의 자발적인 선택이긴 하지만 정말 과연 그러할까. 그럼에도 그 선택의 결과는 너무나 참혹하다. 알리체는 다행히 목숨은 건지지만 절름발이 장애인이 된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자기 몸은 자기가 통제하고 싶다는 욕구 때문에 자라난다는 것이 끔찍해 심각한 섭식장애를 앓는다. 마티아는 그날 이후로 타인과의 단절은 물론 미켈라에 대한 죄책감을 어쩌지 못해 스스로 자기 몸을 해하고 또 해한다. 자해의 충동은 좀처럼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상처투성이인 마티아의 몸을 보면서도 알면서도, 그 뛰어난 두뇌로 학업 성적은 우수한 아들이 아무 문제없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아니 그렇게 믿기로 선택한 마티아의 부모. 부모들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저마다 큰 고통을 안고 그 고통이 남긴 상처를 몸에 새기고 살아가는 알리체와 마티아. 이 두 사람이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고 서로를 이해하고, 가까워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르겠다.


소수(素數)는 의심 많고 고독한 수다. 그 때문에 마티아는 소수에서 경이를 느끼곤 했다. 때로는 소수들이 실수로 그런 수열에 놓여, 목걸이에 꿰인 진주들처럼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때는 소수 역시 다른 평범한 수들처럼 되고 싶었는데 어떤 이유에선가 그럴 수 없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 대학 1학년 때 마티아는 소수 가운데 좀 더 특별한 수가 있다는 걸 배웠다. 수학자들은 그들을 ‘쌍둥이 소수‘라고 부른다. 쌍둥이 소수는 근접한, 거의 근접한 두 수가 한 쌍을 이루는데, 그 사이엔 항상 둘의 만남을 방해하는 짝수가 있다. 11과 13이라든가 17과 19, 또는 41과 43 같은 수들이 그렇다. 인내심 있게 계속 세어나가면, 이 쌍둥이 소수들이 점점 희소해지는 걸 발견하게 된다. 오직 기호로만 이루어진 고요하고 규칙적인 세계에서 길을 잃은 채 더욱 고립된 소수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 그때까지 만난 쌍둥이 소수들은 우연의 산물이며, 결국 그들의 진정한 운명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불안한 예감이 밀려온다. 그래서 더 세어볼 마음이 들지 않아 그만두려는 찰나 서로 꼭 붙어 있는 한 쌍의 쌍둥이 소수를 만나게 된다. 수학자들 사이에선 계속 수를 헤아리다보면 언제나 다음 쌍둥이 소수가 나타난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비록 발견될 때까진 어디에 위치하는지 단언할 수 없지만.


의심 많고 고독한 수, 상처받은 소수(素數) 같은 마티아와 알리체. 그 두 사람은 마치 ‘쌍둥이 소수‘처럼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에게서 숨 쉴 공간을 찾지만 그 사이엔 “항상 둘의 만남을 방해하는 짝수가 있다,” 알리체와 마티아 사이의 이 짝수는 무엇일까? “1이 아니면 9인” 마치 “ 이진법처럼” 그 두 사람 사이를 방해하는, 가로막는 존재가 짝수 같은 존재, 그러니까 각자의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단순하다. 물론 알리체와 마티아 각자에게 다른 사람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결국 “그 짝수”는 두 사람 마음에 존재했던, 극복 불가능했던 바로 그것이 아니었을까. 바보 같은 이 두 사람의 선택에 끝내 통곡하게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알리체와 마티아가 “비록 발견될 때까진 어디에 위치하는지 단언할 수 없지만.” “더 세어볼 마음이 들지 않아 그만두려는 찰나 서로 꼭 붙어 있는 한 쌍의 쌍둥이 소수를” 마침내 그 어느 때고 발견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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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6-11-03 17: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 그러구먼요. 소수라고 해서 적은 수의 사람들 소수少數라고 생각했는데 이 소수보다 더 외로운 소수prime number이구먼입쇼. 저도 조만간에 이 책 읽을 건데, 독후감은 내년을 기약하는 걸로... ㅎㅎ
글쎄 이런 게 진짜 잠자냥 표 낚시라니까요!

잠자냥 2026-11-03 17:28   좋아요 1 | URL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구나! 폴스타프! 🤣

망고 2026-11-03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딩 잠자냥님 순수하셨군요 밤에 울면서 글짓기 다시 하는 잠자냥님 일화 짠한데 귀여워요😭
소수는 또 그 수학에 나오는 소수였구요 소수자라서 고독하다는 뜻인 줄. 오별이라 또 파닥파닥

잠자냥 2026-11-03 17:43   좋아요 1 | URL
저 아직도 좀 화 나서 가끔 엄마한테 저때 이야기 할 때 있어요. ㅋㅋㅋ 뒤끝 작렬 ㅋㅋㅋㅋㅋ 저 담임 이야기는 아주 크고 나서야 했음. 그나저나 이 책의 소수에는 망고 님이 말한 그 두 가지 의미 다 담겨 있습니다.

페넬로페 2026-11-03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자냥표 낚시에 낚일 것 같습니다.
소수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흥미롭네요.

어릴 때 새겨진 진한 기억은 잘 지워지지 않는 것 같아요.
그 시절 담임들은 어휴~~

독서괭 2026-11-03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그 난감했을 어머니 마음이 이해가 되면서도 울며 다시 써야했던 자냥이 너무 짠함..🥺 원래 글짓기 했던 내용들만 쭉 봐도 엄청 잘 썼을 것 같은데요. / 이 책 내용이 넘 슬프네요. 어른들이 죄가 많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