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다, 먹는다, 싼다, 읽는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거의 꾸준히 하고 있는 행위이다. 이 가운데 ‘읽는다’는 자고 먹고 싸는 일에 비해 조금 뒤늦게 시작했다. 언제부터 읽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한글을 빨리 익힌 편은 아니라서 읽기도 그다지 빠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글씨를 알고 난 후부터는 늘 읽었다. 말없이 얌전히 책만 읽는 아이-내 유년 시절의 초상화를 그린다면 이런 모습일 것이다. 또래와 노는 일보다 책 읽기가 더 좋았고 그런 성향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기보다, 그 공허하게 느껴지는 시간보다 혼자 책 읽는 시간이 좋다.
‘지상의 다락방’- 알라딘의 내 서재 이름이다(다락방 생각해서 지은 거 아님). 홀로 책 읽기 좋았던 어린 날의 그 다락을 떠올리며 지은 이름이다. 내가 좋아하는 책 속의 한 구절,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와도 일맥상통한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못하면 입안에 가시가 돋치는 게 아니라, 마음에 가시가 돋는다. 한 글자도 읽지 못하는 날은 괴롭다. 고통스럽다. 에이, 거짓말! 반문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그런데 정말이지 나는 그렇다. 그게 무엇이든 한 글자라도-아니 이건 너무 부족하다- 몇 쪽이라도 읽다 잠들지 않는 날은 잘못 산 기분이다. 술에 취한 날도 무조건 읽다 자야 한다. 읽지 못할 것 같은 날에는 아침이든 점심이든 그 어느 때라도, 어디서라도, 틈을 내서라도 조금이라도 읽어야 한다.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강유원, <책과 세계>)라는 말도 있는데 이 정도면 병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읽지 못하면 우울하다. 나는 책 읽기를 왜 이토록 좋아하는 것일까.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책을 펼치면 그곳이 어디든, 누구와 함께 있든 혼자만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하고는 크게 공감한다. 혹시 나도 이랬던 것은 아닐까? “예부터 세상 속에 섞여 살기가 버거운 사람들은 책 속으로 도피해왔다. 이 범주에 속하는 사람은 사람보다 책과 함께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 아스퍼거증후군 초기 사례연구에는 책에 파묻혀 병동 구석에 앉아 있던 여덟 살 소년이 등장한다. (...) 인간의 행동은 불안정하고 예측하기 어렵지만 책은 언제나 한결같다. 이 소년이 학교 친구들보다 책을 더 편안하게 느낀 이유도 비슷하다. (<읽지 못하는 사람들>, p.149) 공교롭게도 내 오래된 일기 속에서 이런 구절을 발견한다. ‘인간과 책_ 인간은 너무 가변적이다. 역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사는 수밖에 없다. 책은, 그것도 오래된 책은 변하지 않는다. 내가 어쩌면 책을 읽는 이유(2017년 11월 6일)’
그런데 이토록 내게 절대적인 책을 못 읽게 된다면, 아니 읽을 수 없다면 내 삶은 어떻게 될까? 그 생이 살아갈 가치가 있을까? 한 번도 읽지 못하는 삶을 상상해본 적이 없다. 읽지 못하게 될까 봐, 눈을 다칠까 봐 조심하고, 시력이 떨어질까 봐 눈에 좋은 영양제만큼은 열심히 챙겨 먹으면서도 단 한 번도 읽지 못하게 될 내 인생을 상상해 본 적은 없다. 그런데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읽고 나서 ‘읽지 못하는 삶’을 심각하게 떠올려보고는 그것이 아주 잠깐의 가정(假定)에 속했을지라도 진저리를 칠 수밖에 없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런데 <읽지 못하는 사람들>은 당신도 언제든지 문해력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어느 날 갑자기 읽기 능력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그러니까 당신도 ‘실독증’이라는 덫에 걸릴 수 있다고 위협한다. 경고한다.
실독증? 난독증은 들어봤는데 실독증은 또 뭐람?! 이 책에 따르면 실독증은 “더 이상 손글씨나 인쇄된 언어를 읽을 수 없지만 보거나 말하는 등의 다른 일은 계속할 수 있는 신경학적 증후군”을 뜻한다. 읽기능력 상실은 보통 뇌졸중, 종양, 머리손상, 퇴행성 질환으로 인한 뇌손상 때문에 일어난다. 어린이가 읽기를 배우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난독증과는 달리 실독증은 글을 읽을 줄 아는 성인에게 영향을 끼친다. 평생 책을 읽어온 사람이 갑자기 읽은 것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는 상태가 되기 때문에 후천적 문맹이라고도 한다. 갑자기 읽을 수 없게 된 사람을 설명할 용어가 마땅치 않으므로 이 책에서는 이런 환자를 ‘문해력 상실인’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사실 이 책은 ‘읽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때 보통의 사람들이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이들, 그러니까 난독증처럼 글씨를 인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이들부터 살펴본다. 그러나 난독증을 다룬 1장은 나와는 관련이 없는 듯해 관망하듯이 읽었다. 그런데 실독증, 문해력 상실인을 다룬 3장은 남의 일 같지만은 않아서 제아무리 지금 잘 읽고, 읽은 것을 잘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언제든지 그 능력을 상실할 수도 있다고, 인간은 그렇게 나약한 존재라고 새삼 깨달으며 몰입해 읽었다. 이 장에서는 읽기능력을 상실한 후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이들의 사례가 여럿 소개된다. 저자에 따르면 작가나 학자, 편집자처럼 읽기가 거의 한 개인의 정체성을 이루던 사람들일수록 문해력 상실인이 된 이후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경향이 크다고 한다. 신경의학자이자 작가인 올리버 색스는 좌골신경통 때문에 책을 읽을 수 없게 되자 처음으로 자살을 생각한다. “나는 읽어야 한다. 내 삶의 대부분은 읽기다”라고 말했던 그였기에 목숨을 끊을 생각까지 했다는 게 어쩌면 당연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갑자기 읽기능력을 잃어버린 이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읽기능력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단순히 학습 기술을 잃는 것에 그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보다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상실하는 것에 가깝다. 읽기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은 더는 자신을 완전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독증을 겪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알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럽다. 이런 사람들은 더는 읽을 수 없는 상황이 사형선고처럼 느껴진다. “읽기와 문해력으로 얻을 수 있는 사회, 문화, 경제적 혜택”을 비롯해 “현대 사회에서 읽기는 의사소통, 오락, 지식의 원천으로 널리 인식되며 많은 이가 읽기를 의미 있는 삶에 필수적인 지혜의 원천”(p.170)이라는 것을 체득했던 이들이기 때문에 더 그럴 것이다.
실독증 사례에서 보듯이(물론 난독증이나 과독증과 같은 자폐아들의 읽기, 공감각, 환각, 치매 등 이 책에서 다루는 다양한 ‘읽지 못하는 사람들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인간은 단지 눈만이 아니라 뇌로도 본다는 사실을 곧잘 잊곤 한다. 읽지 못하는 날이 올까봐 그저 눈 영양제나 챙겨먹고 시력이 나빠질까, 눈이 다칠까 조심하는 나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 그러나 읽기는 ‘수많은 감정적‧인지적‧지각적‧생리적 과정을 동기화하며 일어나는 복잡한 행위’이다. 때문에 이런 사실을 고려할 때, 읽지 못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도리어 누구나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더 경이롭다. 그렇지 않은가? 이런 면에서 실독증은 읽기가 지적 활동일 뿐 아니라 생리적 활동이며 미세하지만 결정적인 수많은 신체 교환이 제대로 이뤄져야 하는 체화된 행동이라는 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읽기장벽은 누구나의 삶에 끼어들 수 있으며 문해력 상실인은 매끄럽게 이뤄지던 읽기가 시각 인식부터 해독, 의미 생성까지 다양한 신경 활동의 복잡하고 까다로운 조합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드러낸다. 또한 이런 활동이 언제든 오작동할 수 있다는 점을 날카롭게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대체 ‘읽기’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눈으로 글자를 좇아서 그 내용을 이해하는 것만이 읽기일까? 이 책에서 소개하는 어떤 사람은 뇌졸중으로 인해 단어의 첫 글자를 알아볼 수 없게 된다. 그는 사라진 글자를 손으로 따라 쓰는 등 다른 방법을 이용하면 계속 정확하게 읽을 수 있지만 도무지 이런 기술을 사용하려 들지 않는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런 방법은 정상적인 읽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대안적인 문해가 문맹보다 나쁘다고 판단하고는 이런 읽기 방식을 거부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과연 정상적인 읽기일까? 이 책은 온갖 읽기장벽에 부닥친 사람들의 사례를 통해 읽기 과정이 순조로이 작동할 때는 감춰졌던 읽기의 다양한 측면을 살펴보면서 읽기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지 성찰한다.
문해력이 떨어진다고 개탄하는 시대이다. 한 인지신경과학자의 “문해는 문화가 발명한 것”이라는 말도 곰곰 생각해볼 만하다. 읽기는 말하기와 달리 인간의 뇌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읽기가 지위, 특권, 권력을 나타내는 정체성의 중요한 요소이자 의미 있는 삶의 전제조건으로 여겨지는 오늘날, 읽기차이가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을 더 잘 이해하려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또 이제는 읽기가 단순히 언어기호를 해독하고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에서 그치는 과정이라고 보는 좁은 관점도 넘어서야 하지 않을까. “다양한 인지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신경 다양성 운동의 핵심 통찰을 바탕으로 병적이거나 비정상적이거나 ‘읽기가 아닌 것’으로 치부된 활자와의 상호작용 방식에 주목하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p.335)는 이 책의 말처럼 <읽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저 ‘읽기’만이 아닌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세계, 아울러 읽을 수 없는 삶의 고통 또는 읽을 수 있음의 축복까지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