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litical Correctness’. 사전을 검색해 보면 이렇게 나온다. ‘정치적 정당성(차별적인 언어 사용·행동을 피하는 원칙)’(옥스퍼드), 그런데 몇몇 사전에서는 이런 토를 달고 있다. ‘[美, 경멸적] 정치적 공정, 올바른[진보적] 정치관; (소수파나 약자인 인종·성 등에 대한) 편견[차별] 없는 언동(약어 P.C.)’ 여기서 [美, 경멸적]이라는 부분이 눈에 띈다. 소수자나 약자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적인 언어, 행동을 피하는 운동을 뜻하는 ‘정치적 올바름’(이하 PC)이 미국에서이긴 하지만 어쩌다가 조롱이나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일까? 최근엔 한국에서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현상을 종종 볼 수 있다. 예컨대 ‘PC충’이나 ‘프로불편러’, ‘인권충’, ‘입진보’, ‘인권팔이’, (넓은 의미로는) ‘강남좌파’ 같은 단어들이 ‘정치적 올바름’을 향한 조롱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정치적 올바름>의 저자 강준만처럼 나도 정치적 올바름을 지향한다. 그리고 그 운동이나 그런 흐름은 사회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때로는 아, 진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이 지경까지 해야 하나 싶을 때가 있다. PC에 대한 피로도가 확 몰려드는 순간이라고나 할까. 내가 처음 PC에 회의감이 들고 대체 이게 무엇을 위한 운동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적은 거의 10여 년 전이다. 그때만 하더라도 블로그가 매우 활발하게 이용되던 시기로, 나 또한 블로그를 하면서 마음이 맞는 몇몇 이웃을 만나 소통하고 지냈다(그들 중 몇몇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젠더 관련 책 저자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비슷한 관점과 의견을 갖고 있었기에 블로그 이웃으로 잘 지냈던 것 같다. 그러다 어떤 일로 미묘한 차이가 발생했고, 결정적으로 내가 어떤 댓글을 보게 되면서 사이가 벌어지고 말았다. 조두순 사건과 관련한 시각 차이에서였다. 나와 내 친구(친구들 또한 블로그 이웃이었다)들은 그 사건을 두고 격분하지 않을 수 없어서 험한 말을 입에 담았는데(예컨대 화학적 거세, 사형시켜 마땅하다 등등), 그들은 그 사건에서조차 너무나 세련된 태도로 화학적 거세만이 답이 아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결국 남성(성기)중심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사형이라니 운운하는 게 아닌가.

나는 그들의 그런 주장을 담은 글과 댓글들을 보면서 아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중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블로그에 나와 내 친구들이 보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는지 뒷말을 하듯이 ‘그분들은 (한국에선) 좀 다른 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분들조차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는 걸 보고 좀 충격받았다'고 달았더라. 그 댓글을 보고는 솔직히 그간의 모든 우정이 사라지고 만 느낌이었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그 세련된 PC에 질려 “분노할 때는 분노할 줄 아는 것도 용기”라고 마지막 댓글을 달고는 이웃으로서의 인연을 끊었다. 화학적 거세가 답이 아니라는 것도, 페니스를 제거하면 성범죄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사형 제도를 찬성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런 극악무도한 사건 앞에서 맹렬하게 분노하기보다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PC를 추구하는 그 나이스한 태도가 먼저였을까? 그때 내가 느낀 PC에 대한 피로감은 말로 다 표현 못할 정도이다. 그때 그 조두순이 출소했다. 가해자가 거리를 활보할 때 피해자는 이사를 갔고, 또 다른 피해를 염려하는 그 지역 사람들도 속속 그 지역을 떠났다는 기사를 최근에 읽었다. 그때의 그 블로그 이웃은 피해자가 숨어야 하는 현실을 보면서도 여전히 예전과 똑같은 주장을 할지 궁금하다.

또 다른 사례도 있다. 미투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면서 몇몇 한국 남성 작가들도 고발당했다. 불똥은 의외의 곳까지 확대되어서 기존의 한국 문학(주로 남성 작가들이 지배해온)까지 공격당하기 시작했다. 내가 본 가장 어이없는 비판은 1920~30년대 한국 문학을 싸잡아서 ‘한남문학’이라 칭하면서 김유정의 스토킹 전력을 끌어와 김유정 문학 자체를 ‘스토킹 문학’이라 낙인찍거나 <메밀꽃 필 무렵>의 허생원과 동이의 관계를 비판하면서 ‘싸튀충 한남 문학의 절정’이라 조롱하거나 <운수 좋은 날>의 김 첨지가 설렁탕을 사와서는 다 죽은 아내를 발로 차며 우는 장면(“이런 오라질 년, 주야장천 누워만 있으면 제일이야! 남편이 와도 일어나지를 못해!” / “설렁탕을 사다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을 끌어다가 한남문학은 이래서 소비하면 안 된다 등등의 논리를 펼치고 있는 모습이었다. 문학은 시대를 반영한다고 생각하기에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의 한국 사회는 그랬구나 하면서 읽는다. 책을 읽는 관점이 조금 달라져서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던 부분이나 장면들이 거슬릴 수도 있다. 그러면 아, 내가 이런 부분은 이제 못 읽겠다, 좀 불편하구나 하고 넘어가면 되지 않을까? 그런데 그걸 소비하는 다른 사람들까지 싸잡아서 이렇게 저렇게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한남문학을 여전히 소비하는 당신은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한, 무지몽매한 사람이라고 딱지를 붙이고 조롱한다.

내가 그냥 그런 문학을 더는 못 읽겠어서 더 이상 찾지 않는 것과 그런 나를 전시(정확히는 과시)하면서 그렇지 못한 타인에게 딱지를 붙이는 행위에는 큰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노먼 메일러의 폭력적인 면과 마초적인 면을 못마땅하게 여겨 굳이 그의 작품을 읽지 않는 것과 노먼 메일러 작품을 읽는 사람에게 그런 폭력적인 인간의 작품을 소비하다니, 당신도 그의 폭력 행위를 옹호하고 동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비난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를 좋아한다. <차이나타운>이나 <피아니스트> 같은 영화를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물론 그의 작품 중에는 망작도 많다). 그럼에도 <차이나타운>이나 <피아니스트> 같은 영화 때문에 신작이 나오면 궁금해진다. 그런데 로만 폴란스키는 누구나 다 알 듯이 아동성범죄자이다. 나는 거기에 대해서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가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의 작품은 궁금하다. 이것도 누군가에게는 비난받아 마땅한 행태일 것이다. 당신처럼 비윤리적인 소비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로만 폴란스키 같은 사람이 여전히 영화를 만들고 거장으로 추앙받으며, 문화 권력자로 행세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문화예술 작품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람만이 창작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내용만을 담아내야 할까? 이런 세계는 또 다른 디스토피아가 아닐까?

윤리적 소비에 관한 말이 나오니 또 떠오르는 사건도 있다. 이 책에서도 조금 다른 관점으로 다루고 있긴 하지만 싸이의 ‘300톤 물폭탄 흠뻑쇼’에 관한 것이다. 이 논란은 PC로 중무장한 사용자들이 많은 트위터에서 활발하게 일어났는데, 가뭄으로 고통받는 시국에 물폭탄 쑈가 웬말이냐며 싸이에 대한 비난은 콘서트에 가는 사람들을 향한 비난으로 이어졌다. 콘서트를 비판하는 나는 깨어있는 사람이고, 콘서트에 가는 사람은 개념 없는 무지한 사람이라는 이분법적 잣대도 뚜렷하게 보였다. 최근에는 트위터에서 남양을 소비했다는 이유만으로 비난받는 사람을 보기도 했다. 요즘은 이런 윤리적 소비, 가치 소비-인권 보호와 폭력 반대를 지향하는 브랜드 제품을 구매하거나 갑질 논란이 있는 회사 불매 운동, 비건 제품이나 유기견 기부 제품을 구매하는 행위-를 지향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남양 불매, 쿠팡, 마켓컬리 불매, 스타벅스 불매, SPC 불매를 자랑하듯이 공개한다. 여기까지는 그렇다 쳐도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비난하면서 당신은 개념 없는 사람이라고 몰아세우는 행위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강준만은 “나는 기본적으로 PC 운동의 취지와 당위성엔 동의와 지지를 보내면서도 동의와 지지를 보낼 뜻이 있는 사람들까지 등을 돌리게 만드는 운동 방식의 문제엔 비판적인 입장”(<정치적 올바름>, 30쪽)이라고 밝힌다. 그가 말하는 운동 방식의 문제는 결국 ‘과유불급’이라 말할 수 있는데 그는 이것을 “인간에 대한 예의”로 압축해서 표현한다. “PC운동이 애초에 ‘인간에 대한 예의’에서 출발한 것임에도 어떤 사람들이 그 예의를 지키지 않거나 소홀히 대한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너무 거친 비판을 퍼부음으로써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는 건 모순”(30쪽)이라는 것이다.

강준만의 주장에 따르면 너무 거친 비판은 주로 언어본질주의 문제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누군가를 본질이 담긴 단어로 딱지 붙이기를 할 때 언어는 곧잘 현실을 왜곡한다. 즉 어떤 사람이 무심코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했을 때 그건 ‘인종차별적인 발언이다’라고 지적하는 것과 당신은 ‘인종차별주의자다’라고 말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PC에 근거한 비판은 곧잘 후자의 딱지 붙이기를 하는 경향이 있고 이런 본질주의적인 딱지 붙이기는 일반 대중에게 필요 이상의 반발을 초래해 원래 의도한 사회 약자에 대한 보호에 막대한 지장을 줄 뿐만 아니라 PC운동을 일상적 삶의 상식을 무너뜨리는 엘리트 중심의 운동으로 인식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30쪽)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른바 ‘트럼프 현상’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반(反)엘리트 우익 포퓰리즘이 미국을 넘어서 서구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갖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을 가능성마저 제기하게 되었다고 한다. 미국의 PC 피로증과 서양의 많은 진보좌파 지식인들이 PC비판에 나선 것은 이런 딱지 붙이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강준만의 지적은 정치적 올바름을 지향하는 이들이 한번쯤은 새겨들어볼만한 주장이 아닐까.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정치적 올바름은 계급 관점에서도 도전을 받고 있다는 부분이다. 먹고사니즘에 급급한 이들에게,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조차 버거운 이들에게 정치적 올바름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남양이나 SPC 불매 운동을 생각하기 이전에 오늘 남양 우유가 저렴하니까, 오늘 파리바게트 빵이 대폭 세일하니까 자연스레 손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제 퇴근길에 보니 집 근처에서 남양유업이 두 달 동안 무료로 우유를 배달받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끊을 수 있다고 소비자를 유혹하고 있던데, 당장 주머니가 가벼운 사람이라면 이 유혹을 뿌리치기 쉽기 않을 것이다. 채식주의를 지향하는 것도 계급 문제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값싸게 소비할 수 있는 인스턴트 음식을 보라. 대부분 육류가 포함되어 있다.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식품을 소비하는 게 경제적으로도 비용이 더 들고 더 수고롭다. 그런데 이런 이들에게도 당신은 비윤리적인 소비를 한다고 비난하고 가르치려고 드는 게 온당할까?

계급 문제를 앞세워 PC를 비판하는 대표적 이론가인 지젝은 PC를 경제적인 계급 불평등을 은폐하는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주요한 이데올로기적 방패’(48쪽)라 말한다. 또한 지젝은 PC는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기본적 동질성은 손대지 않은 채 문화적 차이를 위한 싸움에서 대리 분출구를 발견한 것”이며 “PC 전투를 벌이고 있는 동안 자본주의는 승리의 행진을 하고 있다”(49쪽) 말한다. PC를 포함한 정체성 정치 전반에 대한 진보좌파적 비판도 많다. 이런 비판은 ‘인종, 성, 종교 등 여러 기준으로 분화되어 각 집단의 권리를 주장하는 정체성 정치가 경제적 정의의 문제를 도외시하면서, 극심한 빈부격차, 도시 황폐화, 자원 낭비 등 진정한 사회 문제엔 침묵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50쪽)고 지적하기도 한다.

PC의 ‘정의롭고 깨끗하고 올바른 상황만을 지향하는 문화적 경향’을 가리켜 “살균된 문화”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는 “병든 문화의 다른 이름”이라는 비판에는 나도 동의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문화예술 작품에서조차 지나친 PC를 요구하는 경향은 숨이 막힐 지경이다. 최근 한국 문학은 정치적 올바름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성소수자가 등장하지 않는 작품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이것도 좀 이상하지 않은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만든 정치적으로 올바른 영화와 문학 작품만을 고집할 거라면 문화예술 작품을 왜 소비하는가? 특히 이런 경향은 “표면적인 올바름과 건강함과 건전함과 미담 너머에 있는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불평등을 보지 못하게”(49쪽)만들기도 한다. “정치적 올바름은 마치 테러처럼 나름의 생명력과 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보다 고차원적인 이상’이라는 명분 아래 어느 틈에 재능, 자발성, 열정,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사고를 무디게 만드는 파괴적이고 비윤리적인 힘이 되고 있다.”는 어느 미국 언론인의 지적도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영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프라이는 공개적으로 PC를 반대한다고 밝혔다. 그는 좌파이자 동성애자이다. 그의 처지를 보면 PC를 지지하는 게 당연할 것 같은데 왜 반대하는 걸까? 그는 자신이 궁극적으로 PC에 반대하는 이유는 그가 일생동안 혐오하고 반대해왔던 것들이 PC에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설교조의 개입, 경건한 체하는 태도, 독선, 이단 사냥, 비난, 수치심 주기, 증거 없이 하는 확언, 공격, 마녀사냥식 심문, 검열 등이 PC에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좀 더 관용적인 사회를 만든다는 고매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해야지 단순히 어떤 용어나 언어를 만들어내서 사람들이 그 불편하고 멍청한 표현을 쓰도록 강제하는 건 핵심이 아니”(85쪽)라고 덧붙이기도 한다.

맥락을 간과한 채 모두에게 ‘정치적 올바름’을 강요하는 행태, 자기과시를 위한 도덕- 이것이 현재 한국 사회에서 PC에 대한 피로감을 증폭하는 데 한몫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나를 과시하며 그런 나는 선(善)이고 그렇지 못한 타인은 악(惡)으로 규정하는 이분법적 세계관을 PC를 소리 높여 외치는 사람들이 지향하는 바는 아닐 것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지 않는 PC- 이 말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한국 사회도 트럼프를 대통령 자리에 앉힌 미국의 전철을 밟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미 그렇게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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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2-10-06 16:59   좋아요 9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의 글에 상당부분 동의하면서도 일부 의문이 드는 지점이 있어요.
PC에 대한 회의와 지적이 시기적절하게 등장했다고
생각하긴하는데 ‘PC이다 아니다‘를 구분하는것조차 완전히 객관적일수는 없다는 점이예요.
(극단적인 경우를 예외로 하더라도)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논란이 폭발한 시점도 의미있다고 생각해요.
디지털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익명에 숨어 자기 의견을 말하는 공간이 활성화되었고
이른바 유명인들도 가세해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시점이죠.
다양한 의견이 충돌하는 과정에서는 극단적인 사람들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데(눈에 띄기도 하고요)
PC와 혐오자들이 그런 면에서 양 극단을 잘 보여주는것 같고 또 양상이 비슷하기도 하고요.
그렇긴해도 PC라는 낙인찍기의 파급력도 무시할 순 없어요. 미디어의 발달로 이제 겨우 목소리를 찾기 시작한
사람들조차 덩달아 오명을 뒤집어쓰고 입에 재갈이 물릴 수 있다는게 제가 의문을 가지고 우려하는 부분입니다.
아무튼 이 책을 저도 꼭 읽어보겠습니다.^^

잠자냥 2022-10-06 17:25   좋아요 8 | URL
네 미미 님 말씀대로 어디까지가 pc이냐 아니냐의 기준도 다를 수 있다고 봅니다. 가치 판단이 들어가는 부분은 객관적일 수 없지요. 혐오와 역차별로 넘어가면 더 의견이 분분해질 것 같고요. 이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죽여서는 안 되겠지요. 이 책에서는 그에 대한 사례로 이준석의 장애인 이동권 시위에 관한 논평을 예로 들기도 합니다. 이 부분도 흥미로웠어요. 미미 님이 직접 읽어보시면 저와는 또 다른 생각을 하시리라 믿습니다~

공쟝쟝 2022-10-06 21: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 그래서... 제가 친히 잠자냥님에 대한 미움받을 용기로 시작한 디지털과 페미니즘 독후감을 안 읽으신 건가요? 공쟝쟝이 너무 PC해서? ㅋㅋㅋㅋㅋ
이 책은 강준만님의 전작 <싸가지 없는 진보>랑도 일맥상통하네요. 자기 과시를 위한 도덕이라니... ㅋㅋ 뭐 그런것도 같습니다. 저는 pc를 자기를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있느냐 없느냐로봐요. (그 정도의 인식에 가 닿기 위한 노력을 부정하진 않고요) 그리고 언제나 자기의 언어를 가진 사람들은 그걸 자신을 지키는 무기로도 사용하지만 때로는 공격의 무기로 사용할 수도 있죠. 저의 경우 제 지적/언어적 열망은 어떤 권력에의 욕망과 다름 아니라는 걸 스스로는 인식하고 있고, 그걸 갖추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서 가끔 화가나기도 하지만... 이제 권력을 누군가를 죽이고 살리는 것이 아니라 책임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정희진의 (이것도 정희진이 푸코 해석한 글 어딘가에서 읽었던 것 같은 데) 문장에 동의해요. 즉 저는 저를 설명할 수 있는 쾌감을 제공하는 어떤 언어/권력을 갖고 있구나 하고 스스로 인식하고 점점 더 인식하게 되는 것 같아요.
여튼 자기의 말에 책임감을 느끼고 그걸 감당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 밖에 답이 없다는 생각예요. 언어가 없는 사람들은 언어를 만들어야겠지만요.

잠자냥 2022-10-06 21:51   좋아요 2 | URL
아니 왜그러노 ㅋㅋㅋ(아니 에르노가 노벨문학상 받았대서 한번 해본 드립 ㅋㅋㅋ) 아니 요즘 바빠서 북플 잘 못봤어요. 그새 포스팅했군요. 정독하겠습니다- 다만 아니 에르노는 좀 충격이네 ㅋㅋㅋㅋ

<싸가지 없는 진보> 읽지는 않았으나 맥락은 비슷할 거 같습니다. 이 책에서도 싸가지라는 말이 나오거든요. PC를 자기를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있느냐 없느냐로 본다는 말 곰곰 생각해보게 하네요.

공쟝쟝 2022-10-06 22:08   좋아요 2 | URL
와.. 아니!! 에르노!!가!! 두둥.. ㅋㅋ 처음이다, 내가 노벨 문학상에 관심 가져본 후로 내가 아는 사람이 노벨문학상 받은 거..

얄라알라 2022-10-07 04: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살균된 문화‘ 그 문구가 조롱조로 쓰이는 ˝PC˝용법을 확 드러네주네요,
로만 폴란스키의 범죄와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팬들...잠자냥님 말씀 새겨듣고 갑니다. 저도 혹시 [로만 폴란스키]영화 보면서 잠자냥님 지적하신 바로 그 생각 때문에 스스로 떳떳하지 않았었나...돌아보게 되네요

잠자냥 2022-10-07 08:40   좋아요 1 | URL
네 저는 문화에 지나치게 pc 잣대를 들이대는 건 반대합니다. 그렇게 되면 현재만 해도 읽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사라지기 때문에…. 로만 폴란스키 같은 사람의 작품을 소비할 땐 스스로 복잡한 감정이 들죠. 근데 그 잣대로 타인를 재단하고 평가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락방 2022-10-07 09: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음 저는 이 책을 아직 읽진 않았지만 잠자냥 님의 리뷰로 짐작해보는 바 이 책과 그리고 잠자냥 님의 리뷰 모두가 사실은 ‘이렇게 PC한 나‘ 에 취하는 걸 경계하자로 읽힙니다. 저는 때로 PC하자는 주장이나 지적이 정말로 잘못된 점을 고치게 하려는 의도라기 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을 발현한다고 보거든요. 잠자냥 님의 리뷰에도 나오지만,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살아야 하기 때문에, 분노 앞에서도 품위를 잃지 말아야 할까요? 저는 진짜 아니라고 보거든요. 여기에 대해서는 분노가 한무더기 나오므로.. 왜, 괴물을 상대하다가 너도 괴물이 되면 안돼, 라는 말들(심연.. 그거요)이 그 피씨한 나에 취한 자들의 대표적인 근거문이 아닐까 싶은데, 저는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 설사 제가 괴물이 될지라도 으르렁 대겠다고 생각했어요. 뭐, 제가 아무리 그래봤자 원본 괴물을 따라잡을 수는 없지만요. 저는 뒷짐지고 가만히 서서 ‘어허~ 그러면 안돼~ 무릇 인간이란 피씨해야지~‘라고 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습니다.

어휴 댓글 그만 써야지 쓰다가 분노가 올라와서 댓글에 화가 녹아나네요. ㅎㅎ

아무튼 저는 그간 강준만의 책을 읽으며 강준만의 말에 고개 끄덕이는 편이었으므로 이 책을 꼭!!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상 괴물 씀.

공쟝쟝 2022-10-07 09:52   좋아요 1 | URL
단독자 칸트 다부장님은 심연 아무리 들여다 봐도 괴물은 안될 것 같아요. 그러니 이잡듯이 뒤져서 악의 게의름을 꾸짖어주소서!! 아니 게으름 ㅋㅋㅋ

다락방 2022-10-07 09:54   좋아요 1 | URL
근데 나도 생각해보고 또 해봤는데 나는 괴물은 안될 것 같아요. ㅎㅎㅎㅎㅎ
괴물이 되기엔 너무 꼿꼿해..

공쟝쟝 2022-10-07 09:59   좋아요 0 | URL
응.. 사람이 그래… 꼿꼿하고 자기 보호 잘하고… 성실하기까지… 암튼 타고 나기를 그래…. 근데 정치를 하기엔 또 너무 꼿꼿하고… 그냥 지금 이대로 지내자 ㅋㅋㅋ

잠자냥 2022-10-07 10:03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역시 다부장 님은 제가 척하며 탁하고 알아듣습니다요!
제가 요즘 가장 피곤함을 느끼는 부분도 이렇게 정의로운 나를 과시하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봐서 그런 것 같습니다. 역하다고나 할까... ㅋㅋㅋ 이 책에서는 그런 문제를 지적하기도 합니다. sns에서 리트윗하고 좋아요 누르면서 이렇게 정의로운 나는 오늘도 세계를 위해 이런 일을 했다! 자위하는 문화요. 물론 이런 문화의 긍정적인 면도 있다고 인정하기도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pc가 액세서리가 되어 그런 액세서리를 달지 못한 사람을 무작정 조롱하거나 가르치려고 드는 듯한 태도.. 이런 분위기가 오히려 역효과를 내는 것 같아요(현재 미국이 그런 지경....)

암튼 저도 분노할 땐 분노해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괴물을 상대할 때까지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를 강제한다는 것은 좀 무리라고 생각하고요. 괴물이 아닌데도 pc를 덜 갖춘 아니면 못 갖춘 사람에게까지 괴물처럼 구는 건 경계해야 한다고 봅니다-

단발머리 2022-10-08 2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첫 책에서부터 애정했으나 이제는 멀리 가버리신 ㅠㅠㅠㅠ 그러나 여전히 존경하는 강준만 교수님의 이 책, 꼭 읽어봐야겠어요. PC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지점들이 모두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순간들이었다는 느낌도 들고요.
잠자냥님 글 읽으면서 전 필립 로스가 그렇게나 생각나네요. 나의 보물이며 나의 어둠.....

잠자냥 2022-10-08 23:22   좋아요 2 | URL
아주 멀리 가진 않은 것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PC를 부르짖는 목소리는 여전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갈 길이 멀긴 멀었고요. 다만 아직도 멀었는데 외면받지 않으려면 전략적인 부분에서 좀 수정도 필요하단 생각도 들고 그러네요. 필립 로스 ㅎㅎㅎ 누구나 길티 플레저는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케이 2022-11-09 0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잠자냥님. 전 트위터 계정을 갖고 있고 종종 보는데 거기서도 교류가 전혀 없어서 pc하다는 뜻이 뭔지 잘 몰랐어요.잠자냥님 리뷰보고 pc의 뜻을 정확히 알게 되었어요.
화면 뒤에서 고작 자판 두드리는 걸로 본인들이 뭔가 대단한 정치적 행동을 하는 것처럼 구는 거 너무 이상해요. 우습기도 하고.
전 그들의 사고방식이 꼭 파시스트 혹은 홍위병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정치에 무관심한 이들보다 더 해로운 존재들이예요.
글은 항상 재밌게 읽고 있는데 댓글은 오랜만에 달아요 전 요즘 매일 2시까지 다음날 먹일 애들 먹일 반찬 준비 하면서 지내고 있어요. ㅜㅜ 까다로운 아이 둘 키우는 거 힘드네요...언제쯤 좋아질지ㅜㅜ
잠자냥님 건강하시고 늦가을 정취를 제 몫까지 흠뻑 느끼시길!

잠자냥 2022-11-10 09:37   좋아요 1 | URL
네 이 책에서도 sns를 통해서 좋아요, 누르거나 리트윗하는 등의 행동(손가락만)으로 대단한 정치적 행동을 했다고 자위하는 문화도 위험하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예 안하는 것보다 순기능은 분명히 있다고 인정하기도 하고요...
홍위병 같다는 케이 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아니 그런데, 아가들이 벌써 반찬(!)을 먹을 만큼 자랐나요?! ㅎㅎㅎㅎ
반찬 먹는다고 생각하니 넘 귀엽네요. 케이 님도 아가들과 씨름하면서 ㅎㅎ 즐거운 연말(! 벌써...ㅠㅠ)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