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litical Correctness’. 사전을 검색해 보면 이렇게 나온다. ‘정치적 정당성(차별적인 언어 사용·행동을 피하는 원칙)’(옥스퍼드), 그런데 몇몇 사전에서는 이런 토를 달고 있다. ‘[美, 경멸적] 정치적 공정, 올바른[진보적] 정치관; (소수파나 약자인 인종·성 등에 대한) 편견[차별] 없는 언동(약어 P.C.)’ 여기서 [美, 경멸적]이라는 부분이 눈에 띈다. 소수자나 약자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적인 언어, 행동을 피하는 운동을 뜻하는 ‘정치적 올바름’(이하 PC)이 미국에서이긴 하지만 어쩌다가 조롱이나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일까? 최근엔 한국에서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현상을 종종 볼 수 있다. 예컨대 ‘PC충’이나 ‘프로불편러’, ‘인권충’, ‘입진보’, ‘인권팔이’, (넓은 의미로는) ‘강남좌파’ 같은 단어들이 ‘정치적 올바름’을 향한 조롱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정치적 올바름>의 저자 강준만처럼 나도 정치적 올바름을 지향한다. 그리고 그 운동이나 그런 흐름은 사회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때로는 아, 진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이 지경까지 해야 하나 싶을 때가 있다. PC에 대한 피로도가 확 몰려드는 순간이라고나 할까. 내가 처음 PC에 회의감이 들고 대체 이게 무엇을 위한 운동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적은 거의 10여 년 전이다. 그때만 하더라도 블로그가 매우 활발하게 이용되던 시기로, 나 또한 블로그를 하면서 마음이 맞는 몇몇 이웃을 만나 소통하고 지냈다(그들 중 몇몇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젠더 관련 책 저자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비슷한 관점과 의견을 갖고 있었기에 블로그 이웃으로 잘 지냈던 것 같다. 그러다 어떤 일로 미묘한 차이가 발생했고, 결정적으로 내가 어떤 댓글을 보게 되면서 사이가 벌어지고 말았다. 조두순 사건과 관련한 시각 차이에서였다. 나와 내 친구(친구들 또한 블로그 이웃이었다)들은 그 사건을 두고 격분하지 않을 수 없어서 험한 말을 입에 담았는데(예컨대 화학적 거세, 사형시켜 마땅하다 등등), 그들은 그 사건에서조차 너무나 세련된 태도로 화학적 거세만이 답이 아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결국 남성(성기)중심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사형이라니 운운하는 게 아닌가.
나는 그들의 그런 주장을 담은 글과 댓글들을 보면서 아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중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블로그에 나와 내 친구들이 보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는지 뒷말을 하듯이 ‘그분들은 (한국에선) 좀 다른 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분들조차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는 걸 보고 좀 충격받았다'고 달았더라. 그 댓글을 보고는 솔직히 그간의 모든 우정이 사라지고 만 느낌이었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그 세련된 PC에 질려 “분노할 때는 분노할 줄 아는 것도 용기”라고 마지막 댓글을 달고는 이웃으로서의 인연을 끊었다. 화학적 거세가 답이 아니라는 것도, 페니스를 제거하면 성범죄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사형 제도를 찬성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런 극악무도한 사건 앞에서 맹렬하게 분노하기보다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PC를 추구하는 그 나이스한 태도가 먼저였을까? 그때 내가 느낀 PC에 대한 피로감은 말로 다 표현 못할 정도이다. 그때 그 조두순이 출소했다. 가해자가 거리를 활보할 때 피해자는 이사를 갔고, 또 다른 피해를 염려하는 그 지역 사람들도 속속 그 지역을 떠났다는 기사를 최근에 읽었다. 그때의 그 블로그 이웃은 피해자가 숨어야 하는 현실을 보면서도 여전히 예전과 똑같은 주장을 할지 궁금하다.
또 다른 사례도 있다. 미투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면서 몇몇 한국 남성 작가들도 고발당했다. 불똥은 의외의 곳까지 확대되어서 기존의 한국 문학(주로 남성 작가들이 지배해온)까지 공격당하기 시작했다. 내가 본 가장 어이없는 비판은 1920~30년대 한국 문학을 싸잡아서 ‘한남문학’이라 칭하면서 김유정의 스토킹 전력을 끌어와 김유정 문학 자체를 ‘스토킹 문학’이라 낙인찍거나 <메밀꽃 필 무렵>의 허생원과 동이의 관계를 비판하면서 ‘싸튀충 한남 문학의 절정’이라 조롱하거나 <운수 좋은 날>의 김 첨지가 설렁탕을 사와서는 다 죽은 아내를 발로 차며 우는 장면(“이런 오라질 년, 주야장천 누워만 있으면 제일이야! 남편이 와도 일어나지를 못해!” / “설렁탕을 사다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을 끌어다가 한남문학은 이래서 소비하면 안 된다 등등의 논리를 펼치고 있는 모습이었다. 문학은 시대를 반영한다고 생각하기에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의 한국 사회는 그랬구나 하면서 읽는다. 책을 읽는 관점이 조금 달라져서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던 부분이나 장면들이 거슬릴 수도 있다. 그러면 아, 내가 이런 부분은 이제 못 읽겠다, 좀 불편하구나 하고 넘어가면 되지 않을까? 그런데 그걸 소비하는 다른 사람들까지 싸잡아서 이렇게 저렇게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한남문학을 여전히 소비하는 당신은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한, 무지몽매한 사람이라고 딱지를 붙이고 조롱한다.
내가 그냥 그런 문학을 더는 못 읽겠어서 더 이상 찾지 않는 것과 그런 나를 전시(정확히는 과시)하면서 그렇지 못한 타인에게 딱지를 붙이는 행위에는 큰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노먼 메일러의 폭력적인 면과 마초적인 면을 못마땅하게 여겨 굳이 그의 작품을 읽지 않는 것과 노먼 메일러 작품을 읽는 사람에게 그런 폭력적인 인간의 작품을 소비하다니, 당신도 그의 폭력 행위를 옹호하고 동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비난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를 좋아한다. <차이나타운>이나 <피아니스트> 같은 영화를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물론 그의 작품 중에는 망작도 많다). 그럼에도 <차이나타운>이나 <피아니스트> 같은 영화 때문에 신작이 나오면 궁금해진다. 그런데 로만 폴란스키는 누구나 다 알 듯이 아동성범죄자이다. 나는 거기에 대해서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가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의 작품은 궁금하다. 이것도 누군가에게는 비난받아 마땅한 행태일 것이다. 당신처럼 비윤리적인 소비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로만 폴란스키 같은 사람이 여전히 영화를 만들고 거장으로 추앙받으며, 문화 권력자로 행세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문화예술 작품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람만이 창작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내용만을 담아내야 할까? 이런 세계는 또 다른 디스토피아가 아닐까?
윤리적 소비에 관한 말이 나오니 또 떠오르는 사건도 있다. 이 책에서도 조금 다른 관점으로 다루고 있긴 하지만 싸이의 ‘300톤 물폭탄 흠뻑쇼’에 관한 것이다. 이 논란은 PC로 중무장한 사용자들이 많은 트위터에서 활발하게 일어났는데, 가뭄으로 고통받는 시국에 물폭탄 쑈가 웬말이냐며 싸이에 대한 비난은 콘서트에 가는 사람들을 향한 비난으로 이어졌다. 콘서트를 비판하는 나는 깨어있는 사람이고, 콘서트에 가는 사람은 개념 없는 무지한 사람이라는 이분법적 잣대도 뚜렷하게 보였다. 최근에는 트위터에서 남양을 소비했다는 이유만으로 비난받는 사람을 보기도 했다. 요즘은 이런 윤리적 소비, 가치 소비-인권 보호와 폭력 반대를 지향하는 브랜드 제품을 구매하거나 갑질 논란이 있는 회사 불매 운동, 비건 제품이나 유기견 기부 제품을 구매하는 행위-를 지향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남양 불매, 쿠팡, 마켓컬리 불매, 스타벅스 불매, SPC 불매를 자랑하듯이 공개한다. 여기까지는 그렇다 쳐도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비난하면서 당신은 개념 없는 사람이라고 몰아세우는 행위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강준만은 “나는 기본적으로 PC 운동의 취지와 당위성엔 동의와 지지를 보내면서도 동의와 지지를 보낼 뜻이 있는 사람들까지 등을 돌리게 만드는 운동 방식의 문제엔 비판적인 입장”(<정치적 올바름>, 30쪽)이라고 밝힌다. 그가 말하는 운동 방식의 문제는 결국 ‘과유불급’이라 말할 수 있는데 그는 이것을 “인간에 대한 예의”로 압축해서 표현한다. “PC운동이 애초에 ‘인간에 대한 예의’에서 출발한 것임에도 어떤 사람들이 그 예의를 지키지 않거나 소홀히 대한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너무 거친 비판을 퍼부음으로써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는 건 모순”(30쪽)이라는 것이다.
강준만의 주장에 따르면 너무 거친 비판은 주로 언어본질주의 문제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누군가를 본질이 담긴 단어로 딱지 붙이기를 할 때 언어는 곧잘 현실을 왜곡한다. 즉 어떤 사람이 무심코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했을 때 그건 ‘인종차별적인 발언이다’라고 지적하는 것과 당신은 ‘인종차별주의자다’라고 말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PC에 근거한 비판은 곧잘 후자의 딱지 붙이기를 하는 경향이 있고 이런 본질주의적인 딱지 붙이기는 일반 대중에게 필요 이상의 반발을 초래해 원래 의도한 사회 약자에 대한 보호에 막대한 지장을 줄 뿐만 아니라 PC운동을 일상적 삶의 상식을 무너뜨리는 엘리트 중심의 운동으로 인식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30쪽)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른바 ‘트럼프 현상’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반(反)엘리트 우익 포퓰리즘이 미국을 넘어서 서구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갖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을 가능성마저 제기하게 되었다고 한다. 미국의 PC 피로증과 서양의 많은 진보좌파 지식인들이 PC비판에 나선 것은 이런 딱지 붙이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강준만의 지적은 정치적 올바름을 지향하는 이들이 한번쯤은 새겨들어볼만한 주장이 아닐까.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정치적 올바름은 계급 관점에서도 도전을 받고 있다는 부분이다. 먹고사니즘에 급급한 이들에게,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조차 버거운 이들에게 정치적 올바름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남양이나 SPC 불매 운동을 생각하기 이전에 오늘 남양 우유가 저렴하니까, 오늘 파리바게트 빵이 대폭 세일하니까 자연스레 손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제 퇴근길에 보니 집 근처에서 남양유업이 두 달 동안 무료로 우유를 배달받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끊을 수 있다고 소비자를 유혹하고 있던데, 당장 주머니가 가벼운 사람이라면 이 유혹을 뿌리치기 쉽기 않을 것이다. 채식주의를 지향하는 것도 계급 문제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값싸게 소비할 수 있는 인스턴트 음식을 보라. 대부분 육류가 포함되어 있다.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식품을 소비하는 게 경제적으로도 비용이 더 들고 더 수고롭다. 그런데 이런 이들에게도 당신은 비윤리적인 소비를 한다고 비난하고 가르치려고 드는 게 온당할까?
계급 문제를 앞세워 PC를 비판하는 대표적 이론가인 지젝은 PC를 경제적인 계급 불평등을 은폐하는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주요한 이데올로기적 방패’(48쪽)라 말한다. 또한 지젝은 PC는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기본적 동질성은 손대지 않은 채 문화적 차이를 위한 싸움에서 대리 분출구를 발견한 것”이며 “PC 전투를 벌이고 있는 동안 자본주의는 승리의 행진을 하고 있다”(49쪽) 말한다. PC를 포함한 정체성 정치 전반에 대한 진보좌파적 비판도 많다. 이런 비판은 ‘인종, 성, 종교 등 여러 기준으로 분화되어 각 집단의 권리를 주장하는 정체성 정치가 경제적 정의의 문제를 도외시하면서, 극심한 빈부격차, 도시 황폐화, 자원 낭비 등 진정한 사회 문제엔 침묵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50쪽)고 지적하기도 한다.
PC의 ‘정의롭고 깨끗하고 올바른 상황만을 지향하는 문화적 경향’을 가리켜 “살균된 문화”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는 “병든 문화의 다른 이름”이라는 비판에는 나도 동의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문화예술 작품에서조차 지나친 PC를 요구하는 경향은 숨이 막힐 지경이다. 최근 한국 문학은 정치적 올바름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성소수자가 등장하지 않는 작품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이것도 좀 이상하지 않은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만든 정치적으로 올바른 영화와 문학 작품만을 고집할 거라면 문화예술 작품을 왜 소비하는가? 특히 이런 경향은 “표면적인 올바름과 건강함과 건전함과 미담 너머에 있는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불평등을 보지 못하게”(49쪽)만들기도 한다. “정치적 올바름은 마치 테러처럼 나름의 생명력과 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보다 고차원적인 이상’이라는 명분 아래 어느 틈에 재능, 자발성, 열정,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사고를 무디게 만드는 파괴적이고 비윤리적인 힘이 되고 있다.”는 어느 미국 언론인의 지적도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영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프라이는 공개적으로 PC를 반대한다고 밝혔다. 그는 좌파이자 동성애자이다. 그의 처지를 보면 PC를 지지하는 게 당연할 것 같은데 왜 반대하는 걸까? 그는 자신이 궁극적으로 PC에 반대하는 이유는 그가 일생동안 혐오하고 반대해왔던 것들이 PC에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설교조의 개입, 경건한 체하는 태도, 독선, 이단 사냥, 비난, 수치심 주기, 증거 없이 하는 확언, 공격, 마녀사냥식 심문, 검열 등이 PC에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좀 더 관용적인 사회를 만든다는 고매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해야지 단순히 어떤 용어나 언어를 만들어내서 사람들이 그 불편하고 멍청한 표현을 쓰도록 강제하는 건 핵심이 아니”(85쪽)라고 덧붙이기도 한다.
맥락을 간과한 채 모두에게 ‘정치적 올바름’을 강요하는 행태, 자기과시를 위한 도덕- 이것이 현재 한국 사회에서 PC에 대한 피로감을 증폭하는 데 한몫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나를 과시하며 그런 나는 선(善)이고 그렇지 못한 타인은 악(惡)으로 규정하는 이분법적 세계관을 PC를 소리 높여 외치는 사람들이 지향하는 바는 아닐 것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지 않는 PC- 이 말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한국 사회도 트럼프를 대통령 자리에 앉힌 미국의 전철을 밟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미 그렇게 됐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