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제전 - 세계대전과 현대의 탄생 걸작 논픽션 23
모드리스 엑스타인스 지음, 최파일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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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다. 하얗게 폭발하던 벚꽃도 봄비 한 번에 다 저물었다. 이맘때면 T.S 엘리엇의 <황무지 The Waste Land>가 떠오른다. 그 시의 1장 ‘죽은 자의 매장 The Burial of the Dead’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추억과 욕정이 뒤섞고/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그리고 시는 이렇게 이어진다. ‘이 움켜잡는 뿌리는 무엇이며/이 자갈더미에서 무슨 가지가 자라 나오는가? [...] 네가 아는 것은 파괴된 우상더미뿐/그곳엔 해가 쪼아대고 죽은 나무에는 쉼터도 없고/귀뚜라미도 위안을 주지 않고/메마른 돌엔 물소리도 없느니라./한줌의 먼지 속에서 공포를 보여 주리라.’
 
모드리스 엑스타인스의 <봄의 제전>을 읽으면 ‘황무지’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에서 1, 2차 세계대전의 폭발 징조를 읽어낸 이 탁월한 책은 T.S 엘리엇의 황무지처럼,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처럼, ‘봄’을 그저 새로운 시작, 탄생으로만 보지 않는다. 모든 탄생에는 소멸이, 죽음이, 새로운 시작을 위한 희생이 있음을, 그리고 그 희생에는 분명 폭력이 따를 수밖에 없음을 주목한다. 사실 처음에는 현대의 탄생을 알린 발레 작품과 세계대전을 하나의 주제로 엮어서 풀어낸다는 것이 조금은 의아하기도 했고, 그게 과연 가능할까 싶기도 했다. 그러나 이 책 <봄의 제전>은 이런 의구심을 말끔하게 해소해준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13년 파리에서 초연한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은 역동적인 에너지와 희생 제물의 죽음을 통해 삶을 찬미하는 작품이다. 오늘날, 현대 음악사에 큰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평가받는 것과 달리 당시에는 의상, 안무, 음악 모든 면에서 그즈음의 상식과 어긋난, 아주 파격적이고 전위적인 내용으로 그 시절 청중들에게 폭동에 가까운 항의와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스트라빈스키는 이 작품을 창작할 당시 “나는 제물로 선택된 처녀가 쓰러져 죽을 때까지 춤추는 이교도 제사 의식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78쪽) 말했는데, 그 이미지가 무척 강렬했는지 자신의 작품에 애초에 ‘제전’이 아닌 ‘제물’이라는 제목을 붙이려 했다고 한다. 이 사실, 그러니까 ‘제물’의 이미지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봄의 제전’의 테마는 탄생과 죽음, 거기에서 비롯된 에로스와 타나토스, 원시성과 폭력성이다. 그런데 이때 희생 제물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새로운 탄생을 위한 죽음은, 그 죽음을 위해 바쳐지는 목숨은 정녕 아무런 가치도 없고, 새로운 탄생을 위해 죽어 마땅한, 그렇기에 숭고하고, 영웅으로 추앙받으면서 사라지는 것에 만족해야 할 그런 소멸일까?

엑스타인스는 ‘봄의 제전’ 테마에는 도덕적 목적이 결여되었다고 지적한다. 윤리가 존재하기 이전, 개인 이전의 원시적인 인간의 모습이 자연 속에서 그려질 뿐이며, 이 작품에서의 재탄생, 삶과 죽음은 뚜렷한 윤리적 논평 없이, 도덕적인 ‘양념 없이’ 그려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오직 넘치는 에너지와 환희, 피할 수 없는 숙명만이 있으며 희생양은 애도는커녕 영예롭게 기려질 뿐이라고 말한다. 희생양으로 지목된 처녀는 어떤 이해나 해석의 기미조차 없이 무조건 희생 제의에 합류해야 한다. 이 작품에서 희망을 찾는다면 그것은 도덕이 아니라 ‘삶의 비옥함과 에너지’(95쪽)에 있을 뿐이다.

스트라빈스키와 호흡을 맞추어 ‘봄의 제전’ 창작과 초연에 깊이 관여했던 다길례프 또한 예술가는 도덕과 무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예술가의 자율성과 도덕은 상호 배타적이라고 믿었다. 도덕과 같은, 사회적으로 수용 가능한 행동에 집착하는 사람은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으며 예술가는 이상적인 자유를 얻기 위해 도덕은 고려하지 말아야 한다고 믿었다. 아방가르드에서 흔히 말하듯 ‘도덕은 추(醜)의 발명품이자 추의 복수’(65쪽)였다. 이 관점, 그러니까 새로움에 대한 혁신과 폭발적인 에너지가 있을 뿐, 도덕이나 윤리가 사라진, 그러므로 새로운 탄생을 위해 기꺼이 바쳐진 희생양의 죽음에 애도가 아닌 열렬한 영광만으로 칭송하는 분위기는 19세기 말, 20세기 전반의 현대적 의식 해방에 대한 강박감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무렵 유럽의 정신을 보여준다.

많은 이들이 오늘날 일어나는 대부분의 전쟁은 한 국가가 자기의 막힌 체제를 돌파하고자 손쉽게 이용하는 수단임을 알고 있다. 체제에 빈틈이 생기거나 그 체제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을 때, 내부 단결을 꾀하고, 새로운 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외부의 적을 이용하는 것이다. 전쟁은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기에 그 허물어진 폐허 위에는 새로운 시작, 출발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죽음과 소멸 후에 새 생명이 탄생하듯이 말이다. 그렇기에 종종 기존의 체제와 관습, 도덕 등을 타파하고 혁신을 외치면서, 이 폐허 위로 이제 새로운 삶이,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면서 전쟁은 이용된다. 1914년의 1차 세계대전도 처음에는 변화와 확립의 기회로 여겨지며 환영받았다. 보수적인 가치관을 대변하던 영국에 맞서 혁신과 쇄신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던 독일은 20세기 초반 그야말로 전 세계에서 넘치는 활력과 기술적 탁월성의 화신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그 독일이 보기에 전쟁은 부르주아 양식과 편리함의 위선에서 벗어나는 ‘해방’의 장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 무렵 독일은 뛰어난 ‘모더니즘’ 국가였다. 억압과 위선에 사로잡힌 구세대에 대한 반항의 일부로서 베를린은 해방 도시의 면모를 확고히 보여주었다. 이런 분위기는 영국 출신의 작가,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자전적 소설인 <베를린이여 안녕>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셔우드는 케임브리지 대학 시절 베를린으로 떠나 그곳에서 수년 동안 머물렀는데, 그런 선택에는 동성애자였던 그의 성정체성이 큰 역할을 한다. 그 무렵 베를린은 국제도시로서 독특한 활기와 매력이 넘쳤는데, 무엇보다 동성애와 동성애에 대한 용인은 사회 고정관념의 해체와 본능의 해방을 뜻했다. 세기말 독일에서의 성적 해방은 동성애에 국한하지 않았다. 코르셋과 벨트, 브래지어 등에서 몸을 해방하려는 움직임이 존재했다. 물론 아이러니하게도 이처럼 찬란한 해방구였던 베를린은 불과 30~40년 뒤 나치의 부상과 함께 가장 강력한 억압의 공간이 되고 만다.

이렇게 ‘해방의 추구와 반란 행위 뒤’에 자리하는 전위적인 충동들, 아방가르드적 개념은 해방과 반란을 문화 행위자 및 사회, 정치적 행위자, 반란 행위 전반에까지 과감히 확장해 나갔고, 모더니즘은 이 시대의 주요 충동으로 간주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14년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개입하게 된 물리적 충돌을 정신적 의미로 받아들인다. 전쟁은 단지 하나의 관념일 뿐, 영토 확장을 노린 음모가 아니라는 것이다. 독일에서 전쟁은 정신에 대한 궁극의 시험이자 활력, 문화, 삶에 대한 시험으로 여겨졌다. 즉 아방가르드가 전쟁 전부터 공격해온 물질주의의 진부함, 위선, 압제에 맞서 환기해온 그런 가치들을 전쟁이 구원해준다고 믿은 것이다. 전쟁을 해방과 자유와 연결 짓는 현상이 널리 퍼져 있었고 헤르만 헤세조차도 “전쟁의 가치들을 대체로 꽤 높이 평가한다.”(163쪽) 말하기에 이른다. 토마스 만 또한 전쟁을 부패하는 현실에서의 해방구로 여겼다. 전쟁은 새 시대의 창조에 이바지하며, 죽음이 아니라 삶의 문제, 생기와 에너지, 덕성을 확인하는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대다수 독일인에게 전쟁은 세계를 바꾸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고, ‘미래로, 진보로, 혁명으로, 변화로 가는 통로’(227쪽)였다.

이러한 ‘풍요로운 창조의 발작 속에서 환상은 더 많은 환상’을 낳는다. 참상은 정신적 성취로 탈바꿈하고 전쟁은 평화가, 죽음은 삶이, 절멸은 자유가, 기계는 시가, 무도덕성은 진리가 됐다. 죽음을 삶과 연결 짓는 이런 태도는 ‘봄의 제전 속 희생 장면의 대규모 재연’(342쪽)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전쟁이 길어질수록 권태와 함께 병사 개개인에게 의문이 생기기 시작한다. 병사들에게는 아이러니와 환멸이, 소외감이, 기존 사회질서와 그 가치들로부터 떨어져 나왔다는 주변적 느낌이 자리 잡기 시작한다. <봄의 제전>은 이 전쟁의 희생 제물인, 이름 없는 병사들, 스트라빈스키의 ‘제물’이 틀림없는 그들의 정신적 변화를 추적하면서 빠르게 질주하는 현대의 삶과 더불어 속도와 새로움에 환호하느라, 가치와 신념 체계는 등한시 한, 그로 인해 전쟁이라는 ‘제전’이 어떤 제동장치도 없이 유럽 곳곳에서 질주하게 되었음을 지적한다.

인류는 참으로 어리석어 새로움, 혁신에 대한 환호는 멈출 줄을 몰라 나치즘이 대두할 수 있는 싹을 틔우기에 이른다. 나치즘은 미래, 멋진 신세계를 향한 앞뒤 가리지 않는 돌진으로 다시금 인류의 눈길을 끈다. 나치즘은 처음부터 끝까지 장대한 볼거리였다. 다른 무엇보다 의식과 선전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깃발과 휘장, 제복, 의전행사, 충성 맹세, 끝없는 구호 반복 등 컬트이자 숭배 현상으로 받아들여진다. 주로 시각과 청각에 집중했고 말이 글보다 우위에 있었다. 드라마와 춤, 음악, 라디오와 영화는 문학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괴벨스의 라디오를 통한 선전선동이나 레니 리펜슈탈의 선전 영화 <의지의 승리>가 그 증거이다. 실업자와 원한에 찬 사람들, 현 체제에 분노하고 성난 사람들의 반란을 긍정의 상징으로 간주하면서 히틀러는 그들을 대변한다. 패배와 실패, 인플레이션과 불황, 국내의 정치적 대혼란과 국제적 굴욕 등 독일인의 마음속의 울분을 부추기며 ‘광란의 종교적 축제를 방불케 하는 나치 운동 속에서 자신과 똑같은 작은 클론을 수백만 명’(541쪽) 만들어 낸다.

이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의 아방가르드적 세계- 해방구로 인식되었던 독일 베를린의 풍경과 맞닿아 있다. 그때 아방가르드 집단은 하층계급과 사회적 추방자들, 매춘부, 범죄자들에게 매혹되었지만 그러한 관심은 ‘사회복지나 사회 재편에 대한 실제적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저 인간 개성에 대한 제약을 제거하려는 욕망에서 시작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층민을 향한 관심은 단지 상징적이었고 “구속과 의무가 없는 도덕”(84쪽)이었을 뿐이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크고 작은 ‘제전’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꼭 전쟁을 떠올리기 위해 저 먼 나라까지 눈을 돌릴 필요가 있을까. ‘원한에 찬 사람들, 현 체제에 분노하고 성난 사람들의 반란을 긍정의 상징으로 간주’하면서 그들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고 그들을 대변했던 히틀러가 만든 체제가 인류에게 가한 엄청난 해악을 기억해야 한다. 독일인의 마음속 울분을 부추기며 히틀러는 자신을 닮은 수백만 클론을 양산했다. 약자를 향한 혐오와 차별을 부추기는 정치인들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크고, 거기에 동조하는 클론들이 많아지고 있는 21세기 대한민국도 ‘제전’ 중은 아닐까. 그리고 그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희생양들은 소리 없이 죽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1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 아방가르드가 그토록 통렬하게 공격했던 정의, 존엄성, 예의범절, 절제의 관념, 법에 대한 존중 등의 가치들은 더는 새롭지 않고 낡은 것이기 때문에 전복해 마땅한 것일까?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도덕법칙은 영구한 명판에 새겨져 있다”(203쪽)는 액턴 경의 말도 “확고한 미덕을 갖춘 인간만이 완전히 자유롭다고 진실로 말할 수 있다.”(203쪽)는 J.S. 밀의 말도 도덕과 윤리가 길을 잃은 채 혁신만 부르짖는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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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4-18 21:5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런게 명품리뷰인가요 자냥님 👍 하 ㅠㅠ 이 책 사고싶어지잖아요 ㅠㅠ

잠자냥 2022-04-18 22:39   좋아요 1 | URL
ㅎㅎ 글항아리책 책꽂이에 꽂아두면 왠지 배부른 느낌이 절로 드는 책이죠~

유부만두 2022-04-18 22: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침 전 바이마르 문화 책 읽었는데!!!
이 책도 찜 하겠습니다.

잠자냥 2022-04-18 22:38   좋아요 1 | URL
바이마르 문화 책과 함께 읽으면 더 고개가 끄덕여질 거 같습니다!

RLead 2022-04-18 23: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잠자냥 2022-04-18 23:33   좋아요 2 | URL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독서괭 2022-04-18 23: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헉 잠자냥님 이건 출판해야 될 글 아닌가요? <봄의 제전>이라는 제목 보고 소설인 줄 알았는데 역사책, 세계대전에 관한 거군요! 재밌을 것 같아요.

잠자냥 2022-04-18 23:34   좋아요 2 | URL
아이고 출판은요, 원 책이 좋으니 리뷰도 좋아보이는 것이랍니다! ㅎㅎ 좀 두꺼운데 언제 한번 읽어보세요~~

초란공 2022-04-19 01: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격리중에 뱃살이 좀 빠졌는데 다시 이 책 읽고 배부른 느낌이라도 느껴야 겠습니다^^

잠자냥 2022-04-19 09:44   좋아요 2 | URL
격리 중에 몸무게가 오히려 덜 나가더라고요? 신기하죠? 아마도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빠졌던 거같아요. 며칠 돌아다니니까 다시 그대로 돌아오더라고요. ㅋㅋㅋ 배부른 느낌에 초란공님도 동참하세요~!

수이 2022-04-19 09: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교보에서 볼 때만 해도 차마 읽을 생각이 안 났는데 정말 미니님 말씀대로 리뷰 읽고나니 사서 읽고 싶어지네요. 그대의 멋진 문장의 힘. 잘 읽고 갑니다.

잠자냥 2022-04-19 09:46   좋아요 2 | URL
ㅎㅎㅎ 읽을 생각 없던 책, 제 리뷰 읽고 읽고 싶어진다는 말만큼 듣기 좋은 소리도 없는 거 같아요! 비타 님 감사감사~! ㅎㅎ

coolcat329 2022-04-20 09: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노리스랑 베를린도 지금 대기중인데 이 책도 꼭 읽어야겠네요.
이 책 중고 알림 신청해놨는데 새걸로 사야겠습니다 ㅎㅎ
잘 읽었습니다. 잠자냥님~

잠자냥 2022-04-20 10:55   좋아요 1 | URL
이셔우드의 베를린 읽기 전에 이 책 읽으면 더 그 작품이 더 잘 이해되실 것 같아요.
저는 반대로 읽었지만 ㅎㅎㅎㅎ

FLAKSUIT 2022-04-24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예술입니다.

잠자냥 2022-04-24 13:5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공쟝쟝 2022-04-28 18: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읽다가 흘리듯 읽으면 안될 거 같아서 ㅋㅋㅋㅋ 일단 이친구도 킵😝

공쟝쟝 2022-04-29 13: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휴~ 잠자냥님 알고보면 이렇게나 글을 단정하게 잘 쓰시는 지적인 분...* (평소에는 EDPS마왕.. 제가 몰라뵙고.. 죄송죄송!)
저는 항상 약한 것은 보호해야 한다- 는 어떤 아주 어렸을 때 부터 주입된 윤리(?)의식 같은 걸 체화해서 살아와서, 이른바 사회적 약자들로 불리는 이들의 분노와 공격성(?)에는 매우 관대한 편이 었는 데 (하지만 정작 가장 낮은 약자의 위치에 여성이 있었다...)- 그건 좀 순진한 생각이었고, 자신의 나약함과 비루한 처지가 방패가되어 (물론 그러기 쉽지만) 쉽게 타자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천천히 조금씩 저 자신의 이입(?)이라고 해야하나 그런 것들을 분리해 나가고 있어요. 쉽지는 않지만. 누가 또 알려준 것도 아니라서. 이 이야길 왜 쓰냐면 마지막 문단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어떤 사회적 정동을 개인적으로는 나 스스로에게 시선을 돌려서... 그렇게 해석합니다. 제겐 이게 클론이 되지 않는 방식 ^^? 음! 잘 읽고 좋아요, 누르고 갑니다! 헤헤.

잠자냥 2022-04-29 16:50   좋아요 0 | URL
아니, 평소에 EDPS마왕인지 어케 알았대?! 그토록 감추었거늘..... ㅋㅋㅋㅋㅋ 여기서 들킴?!
쟝쟝 님의 클론이 되지 않는 방식 아주 마음에 듭니다.

이 글 아이패드 노리고 쓴 건데, 아이패드는커녕 적립금 2만원에 그쳤어요...흙;;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