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나 혼자서만 마라톤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분이 있다. 이분은 말 그대로 마라톤을 하신다. 몇 해 전 어느 가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시더니 이번 주말 춘천국제마라톤에 참가한다고, 마음속으로 응원을 부탁한다고 말씀하시고는 자리에 앉으셨다. 그때 나는 그분이 이제까지와는 달리 보였다. 그러고 보니 지방질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바싹 마른 몸에 꼬장꼬장한 걸음걸이 등이 정말 마라토너를 떠올리게 했다.
내가 이 회사에 들어온 지도 벌써 n년 가까이 되어 가니, 그게 n년 전인 것 같다. 그때 이후로 해마다 가을쯤이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번 주말에 춘천국제마라톤에 참여한다고 말씀하시며 응원을 부탁하는 게 그분의 연례행사처럼 되었다(물론 지난해에는 코로나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지 못하셨다). 그분에게는 일종의 의식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나는 겉으로는 단 한 번도 표현한 적은 없지만 속으로는 진심으로 응원을 보냈다. 저 나이에도 해마다 마라톤을 참가할 수 있다는 정신, 그리고 그 목표를 위해 아침마다 일정 거리를 달리고 회사에 오신다는 그 자기 관리가 말할 수 없이 존경스러웠다.
얼마 전에 이분이 다른 분과 말씀 나누는 걸 우연히 듣게 되었다. 점심시간에 짬을 내서 여권 사진을 찍고 오셨다는데, 다른 분이 “이 난리통에 어디 가시려고요?” 질문 하니, “여권 갱신해두려고요.” 하신다. 나는 본의 아니게 대화를 엿듣다가 이분이 올해 70세가 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른 분이 “여권 갱신했다가 어디 가려고요?” 하니, 로마에서 열리는 마라톤 대회에 꼭 한번은 참가하고 싶다고 소망을 밝히셨다. 예전에 듣기론 마라톤 할아버지는 베를린 마라톤 대회는 다녀오신 적이 있단다. 그러니 이번에는 로마 마라톤에 꼭 나가겠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려니 문득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심심한 맛 때문에 좋아하는 만화 <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가 떠오르기도 했다. 이 만화에는 우연히, 아주 뒤늦은 나이에 BL 만화에 빠지는 할머니가 등장한다. 아니, 이 할머니가 주인공이나 다름없다. 할머니의 나이는 무려 75세. 그런데 이 할머니가 BL 만화 덕후인 여고생과 알게 되면서 둘 사이에 서서히 우정이 싹튼다. 이 여고생은 할머니가 좋아하는 만화를 추천하고 빌려주기도 하는데, 알고 보니 할머니가 푹 빠진 작품의 작가는 연재를 너무나도 띄엄띄엄 해서 다음 만화는 1년 후에나 나올지 확신할 수 없는 실정이다. 할머니에겐 이 1년 후라는 시간이 굉장히 길게만 느껴진다. 이듬해에도 자신이 살아 있을지 어떨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읽다가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늙어간다는 것은 이런 거구나, 완간되지 않은 만화를 기다릴 때도 이듬해에 이 책을 읽을 수 있을지 어떨지 확신할 수 없는 것…….
71세에 언젠가 로마에서 달릴 날을 꿈꾸며 여권을 갱신하는 할아버지와 75세에 완간되지 않은 만화를 이듬해에도 읽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할머니. 인생은 길기도 하고 참 짧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