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민이 유기견을 맡게 된다는 애기를 처음 들었을 때 기범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소속사 차를 몰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석민의 잔일을 본 게 벌써 2년이다. 하지만 그 2년 동안 단 한 번도 석민이 동물을 만지는 걸 본적도 없거니와 하다못해 단 한마디의 애기라도 꺼내는 것을 들은 적도 없었다. 동물뿐이 아니었다. 석민은 원래 말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못됐거나 쌀쌀한 사람은 아니다. 그는 그냥 연기를 좋아했고 그 외에 다른 것에는 별반 관심이 없을 뿐이다. 기범은 나중에야 좀 차가워 보이는 그의 이미지가 새로 시작하는 영화와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그런 프로그램에 한 번쯤 나가줘야 된다는 말로 석민을 설득하는 이매니저를 보고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는 강아지를 만지는 것조차 꺼려했다. 때 묻은 털이며 고약한 냄새도 깔끔한 그의 성격에 맞지 않았지만 그는 그냥 물컹대는 털북숭이 동물 그 자체가 꺼려지는 것이었다. 촬영은 쉽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었다. 방송사측은 방송사측대로 프로그램을 펑크 낼 수가 없었고 소속사측도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석민의 거부반응이 더 심해서 걱정이긴 했지만 방송사와의 계약문제 때문에 촬영을 먼저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정작 주인공인 강아지를 구출하긴 했지만 강이지는 누구의 손길도 받지 못한 채 구석에서 작은 몸을 떨고 있을 뿐이었다.
기범은 그런 강아지를 보면서 옛날 집에 버려두고 온 자신의 애견이 생각났다. 집은 경매로 넘어갔고 집에서 들고 나올 수 있는 것이라곤 옷가지 몇 개가 전부였다. 개조차도 갖고 갈 수 없는 상황인데다가 당장 잘 곳이 없어서 친척집에 얹혀살게 된 판국에 개까지 데리고 나올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개를 놓고 온 그는 일주일이 넘게 밥을 제대로 넘길 수가 없었다. 결국 힘들게 돈을 준비해서 어떻게든 다시 데려올 생각으로 찾아 간 집에는 개집만 덩그러니 있을 뿐 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팔려버린 개를 어디서 찾겠는가. 그는 찾을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바로 자신 앞에서 웅크리고 있는 저 작은 강아지 위로 자신이 버리고 온 그 개의 얼굴이 자꾸 겹쳐진다.
“바리, 네 이름은 바리가 좋겠다.”
기범이 강아지를 안았다. 그리고 촬영은 계속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석민도 바리를 그렇게 꺼리지는 않게 됐다. 그렇다고 살갑게 대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무심히 대했다. 본래 주인이 그렇다 보니 바리에 관련된 모든 일은 거의 기범이 다 했다. 매달 정해진 날짜가 되면 병원엘 데려갔고 매일 밥그릇과 물그릇을 채워주었다. 시간 날 때마다 놀아주고 가끔은 산책도 시켜주고 또 몇 번은 동생 아인이 입원해 있는 병원에 몰래 데려가기도 했었다. 그는 이전에 자신이 버린 개에게 보상이라도 하는 것처럼 바리를 더 아끼고 사랑했다.
기범은 위로를 받고 있는 것은 오히려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까지 유서 한 장 남겨두지 않고 빚만 남긴 채 한강에 투신하셨다. 발견된 거라곤 신발과 겉 옷, 그리고 신분증과 천 원짜리 두 장이 들어있던 지갑이 다였다. 빚은 그나마 남아있던 집과 친척들의 도움으로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었지만 아인이 투석비와 계속되는 입원으로 늘어만 가는 병원비는 그가 아무리 애를 써도 감당하기 힘겨웠다. 어떻게 해서든 돈을 모아서 수술비를 마련해 놓고 싶었지만 매일이 같은 그의 수입으로는 목돈을 쉽게 만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바리를 보면 그는 잠시 그런 걱정이나 근심을 잊을 수가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바리의 깨끗한 검은 눈동자를 마주 보고 있는 순간에는 마음 놓고 웃을 수 있었다. 도움을 받는 것은 바리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프로그램이 거의 끝날 때쯤에는 속으로 자신이 바리를 기르겠다고 이미 마음을 먹은 뒤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매니저가 자신을 사무실로 불렀다. 그리고 기획실장방에서 나오면서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를 마주보고 있는 다른 사무실로 불러들였다.
“프로그램 거의 끝나가는 데 뭐 특별한 게 없다. 생각했던 거 보다 석민이가 워낙 동물을 싫어해서 프로그램도 기대만큼 못 나왔고.”
그러더니 이매니저가 서랍에서 통장과 도장을 꺼내 기범에게 내밀었다.
“500만원이다. 석민이 오늘 호주 촬영가니까 그 사이에 개새끼 밖으로 던지고 대충 물건 좀 갖고 가고. 뭐, 그동안 갖고 싶었던 거 있으면 몇 개 챙겨도 되고. 무슨 말인지 알지, 기범아? 네가 수고 좀 해줘야겠다.”
그날 밤 기범은 하루 종일 밤거리를 돌아다녔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는 이미 듣지 말아야할 말을 듣고 말았다. 그가 일을 하지 않더라도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그가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직장도 잃고 몸도 버리게 될 것이다. 사실을 알고 있는 그를 기획실에서 그냥 내버려 둘리 없었다.
“오빠 그럼 바리 이제 우리가 기르는거야?”
아인의 얼굴이 눈에 어른거렸다. 어려서부터 엄마를 닮아 몸이 약했던 아인이. 집에 있을 때보다 병원에 누워 있는 날이 더 많은 가여운 자신의 동생. 이제 그에게 남은 피붙이는 아인이 하나뿐이었다.
술도 잘 못 마시는 기범이 아파트 앞 공원에서 소수 한 병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이어서 두 병, 세 병. 쉬지도 않고 마셨지만 정신은 더 또렷해졌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축축한 무언가가 그의 온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바리는 여느 날처럼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꼬리를 흔들고 얼굴을 핥고 까만 눈동자를 빛내며 자신을 반겨 주었다. 도저히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품속에서 자는 바리의 얼굴 위로 아인의 얼굴만이 점점 더 선명해질 뿐이었다. 기범은 결국 바리를 안고 아파트 베란다로 나갔다. 바리는 잠이 덜 갠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내민 팔이 떨리기 시작한다. 그의 팔이 떨리는 것인지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바리가 떠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기 시작한 그의 손이 순간 확하고 펴졌다가 이내 다시 움켜든다. 그가 재빨리 손을 아래로 뻗어 있는 힘껏 쥐어보지만 손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단지 저 아래에서 무언가가 바닥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만이 그의 귀에 또렷이 들려올 뿐이다. 그는 몸을 돌려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게워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다 던지고 망가뜨렸다. 방으로 들어가 서랍을 열고 손에 잡히는 대로 액세서리 몇 개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아파트를 나왔다. 하지만 본인은 어떻게 집을 나왔는지 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한 낮에 태양 볕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뜬 기범은 자신이 어디 와 있는지를 안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경매로 넘어간 예전 자신의 집 담벼락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는 불과 몇 시간 전에 자신이 한 일을 떠올리고는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차라기 다시 잠들기를 바랐지만 기억은 점점 더 선명해져만 갔다. 그는 가슴을 치며 바리를 불렀다.
“바리야… 바리야아.”
순간 환영처럼 바리가 꼬리를 흔들며 담벼락을 따라 기범에게 달려온다. 그가 너무 기뻐서 언제나처럼 팔을 내미는데 바리가 다 오는가 싶더니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다. 앞으로 뻗은 그의 손이 허공을 움켜쥔다. 마치 어젯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