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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감옥에서 - 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권혁태 옮김 / 돌베개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서경식, 그를 알게 되면서 마음이 아픈 순간들이 있었다. 하나의 멍에를 가슴 깊숙하게 묻고 살아간다는 것은 굉장히 고통스러울진데, 그는 그 고통을 하나 하나 차근차근 말한다. 그것은, 대변이다. 그만 고통스럽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고통을 가진 사람들을 대변하는 것, 항변해주는 것, 그가 아름다운 이유이다. 

디아스포라 라는 운명을 짊어진 그에게는 풀어내야 할 것들이 많다. 끊임없이 글을 쓰고, 토론에 참여하고, 비판을 서슴지 않는 것도 누군가가 해야할 일이기에, 그것이 자신이 해야할 역할임을 알기에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이번에 나온 평론집 <언어의 감옥에서>는 조금도 무겁고, 진지한 문제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고뇌의 원근법>에서 만났던 부드러움보다는 책임을 회피하는 일본과 조국에게 실랄한 비판을 했던 글들이 모여 있다.  

'디아스포라'의 입장에서 써온 글이기에 이전의 책들에서 나왔던 이야기들이 반복되는 것도 있지만, 처음 서경식이라는 사람을 접하는 독자라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와 만나게 될 것이다.  

국어 내셔널리즘이 지배적인 국가에서, 태어나면서부터 모어와 모국어가 같은 사람들은 언어 다수자다. 언어 다수자는 자신의 언어에 의심을 품지 않는다. 그들의 언어는 그대로 자신이 속하는 나라의 국어다. 오직 그것만이 표준이고 다른 표준적 언어는 없다. 재일조선인은 자신에게 비모어인 조선어를 아무리 잘해도 끝내 마음이 편해질 수가 없다. 표준은 언제나 자신의 밖에 있기 때문이다. - 41p 

그가 뛰어넘을 수 없는 경계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다수자 사이에서 살면서 소수자를 배려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 언제나 다수가 될 수 없는, 그렇기에 아주 사소한 문제도 무시된다. 그것은 겪지 않은 사람은 모르기에 언제나 참담하다. 디아스포라로 살았던 파울 첼란, 프레모 레비, 아메리 모두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었다. 자신에게 고통을 준 나라의 언어로 산다는 것, 자신의 고통을 그 나라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생각한 고통 이상이었다.

이 책의 평론들에서 줄곧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책임이다. 침략 전쟁을 책임지지 않고 회피하려는 일본,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우리나라의 책임 회피, 디아스포라들의 고통에 대해 관심갖지 않는 국가의 책임 회피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국가가 잘못한 것은 국민의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그 자리에 없었다고 해서, 그 잘못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는 게 국민이다. 국가의 명령이었다고 해도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는 국민에게 있으며, 잘못되었던 것을 바로잡고 사과해야 하는 것도 국민 하나 하나의 몫이다.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라 국가의 잘못이었다고 말한다면, 국가에 속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미 국가나 국민이나 모두 책임을 회피하는데 급급하다. 지식인들 조차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괴변이나, 얼토당토 않은 딴 소리를 늘어놓아 그의 마음을 더 무겁게 했다.  

세계적으로 보아도 과거에 식민지 지배를 받은 지역 사람들이 요구하는 사죄와 보상은 오랫동안 묵살되어 왔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제국주의 지배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뜻한다. 식민지 지배 책임의 부정이라는 방어선은 소위 선진국이 국제적으로 연계해서 깔아놓은 공동의 방어선이다. 거꾸로 말하면 일본에 조선 식민지 지배 청산을 요구하는 것은 제국주의 지배와 식민지 지배 청산을 요구하는 전 세계쩍 조류에 부합하는 보편적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 326p   

이제는 우리나라 사람들조차 관심이 없는 '위안부' 문제가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사죄, 그리고 합당한 보상. 하지만, 가해자들은 한 몫 잡으려 한다는 괴변으로 그들에게 더 상처를 주고 있다. 위안부로 고통 받은 세월을 보냈음에도 일본에 정착해 재일조선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소수자. 그들은 국민과 국가라는 커다랗고 어마어마한 괴물에 대항할 수 없다. 철저하게 봉쇄하고 비난하고 막아서는 가해자들. 겉으로는 화해했다는 듯, 합의되었다는 듯 이야기하지만, 결국 고통은 소수자들의 몫이다.  

소수자 쪽이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판단에 의해 "이해를 받으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수자(가해자, 차별자) 쪽이 소수자에게 그런 노력을 요구하는 것에는 나의 전 존재를 걸고 반대한다. 이는 차별구조가 온전되고 있는 이유를 피차별자 쪽의 노력 부족으로 전가하는 데 편리한 레토릭이기 때문이다. - 312p 

아직도 풀리지 않은 문제들이다. 언제 풀릴지 알지 못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는다.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역사도 사람도 외면하는 그들과의 싸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그 싸움은 아직도 계속 된다. 이 책의 평론 중에 80년대에 쓰여진 글들도 있다. 21세기에 묶여서 나왔다는 것은, 그때 한 이야기들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계속 논의되어야 하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국가와 국민의 경계, 국가의 책임과 국민의 책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또한, 소수자의 고통과 다수자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것들이 소수자들에게는 얼마나 큰 상처가 될 지 생각해본다. 이것은 비단 디아스포라들만을 국한에서 생각할 문제는 아닐 것이다. 모어와 모국어 사이에서, 재일조선인과 한국인 사이에서, 어디에 서야하는지 혼란스러운 위치에서 다수자들의 무언의 강요는 그에게 담론을 이끌어낼 힘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라는 개념을 어떻게 내려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진지하게 해봐야 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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