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c2
데이비드 보더니스 지음, 김민희 옮김, 한창우 감수 / 생각의나무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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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런 경이로운 책을 봤나! 이 책이 경이로운 이유는 바로 이 공식 하나로 우주 탄생과 소멸을 설명한다는 것. 물론 100%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충분히 감탄할 만하다. 자, 그렇다면 이 공식이 어떻게 우주 탄생과 소멸을 설명한다는 것일까. 키워드는 바로 에너지와 질량이다. E와 m.

아인슈타인 이전의 과학자들은 에너지의 세계와 질량의 세계를 분리해서 보았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 질량 보존의 법칙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지.

"내가 이 우주 안에 X만큼의 에너지를 불어넣으리라. 그러면 별들이 점점 타올라서 폭발하고 행성들은 자기 궤도를 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멋진 도시를 건설하게 될 것이다. 그 도시들을 파괴하는 전쟁이 일어날 것이며, 전쟁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또다시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게 될 것이다. 불이 있을 것이고 수레를 끄는 말과 소가 생겨날 것이며, 석탄과 증기 기관과 공장과 강력한 기관차도 생겨날 것이다. 때로 에너지는 인간과 동물의 근육 속에 있는 열의 형태를 띠기도 하고, 때로 폭포의 용솟음이나 화산의 폭발로도 나타날 것이다. 이 모든 다양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에너지의 총량은 변함없을 것이며, 100만분의 1도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p39

"내가 이 세상에 이만큼의 질량을 불어넣으리라. 별들은 점점 커지다가 폭발할 것이고 바람과 빙하에 의해 산들이 만들어졌다가 서로 충돌하여 사라져갈 것이다. 금속은 녹슬고 부서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온갖 변화에도 내가 이 세상에 불어넣은 질량의 총량은 결코 변하지 않으리라. 100만분의 1그램도, 겁의 시간이 흐른다 할지라도. 설령 한 도시가 공격받아 무너지고 건물이 불타버렸다고 하더라도, 모든 연기와 재와 부서진 파편들과 벽돌들을 모아 무게를 잰다면, 처음과 달라진 바가 없으리라. 그 무엇도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으며 가장 미세한 먼지의 무게만큼도 변하지 않으리라." -p54

에너지와 질량을 별개의 것이 아니라 동등한 것으로 보게 된 데에는 빛의 속도의 역할이 컸다. E와 m에 c가 더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 c는 어떻게 발견, 측정했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생략하기로 하고 왜 하필이면 이 공식에 c가 들어가게 됐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속도의 극한치는 빛의 속도이다. 그 무엇도 빛을 따라잡을 수는 없다. 이를 기반으로 이 책에서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이 공식을 설명한다. 성능이 아주 뛰어난 우주선이 빛의 속도와 비슷하게 날고 있다고 가정할 때,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엔진에 연로를 가하면 속도가 증가해야 하지만 빛의 속도에 거의 근접하게 되면 더 이상 빨리 나아갈 수 없게 된다. 조종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빛의 속도를 능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이때 가해진 연로, 즉 에너지는 어디로 간 것일까. 바로 압축되어 질량이 된다. 빛의 속도에 근접하게 되면 연로로 가해진 에너지는 더 이상 속도를 증가시키지 못하고, 이 에너지들은 압축되어 오히려 우주선의 질량을 증가시키게 되는 것이다. 즉,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질량으로 전환되었을 뿐이다. 새로 얻어진 질량의 양과 잃어버린 에너지의 양은 정확히 일치하며 서로 균형을 이룬다.
 
질량 보존의 법칙을 증명한 라부아지에와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증명한 패러데이. 이 둘은 각각의 세계를 보았지만, 그 세계를 다른 세계와 연결시키지 못했다. 질량의 세계와 에너지의 세계를 연결한 것은 바로 아인슈타인이었고, 이 두 세계를 연결한 것은 바로 빛의 속도였다. 질량을 꾸준히 연구하다가, 에너지를 꾸준히 연구하다가 얻은 깨달음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에서부터 얻은 불현듯 한 깨달음. 집에서, 종교를 통해서, 학교를 통해서 배웠던 것들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이 이런 사고를 가능하게 했으리라. 이 시대에는 종교관이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크게 영향을 주는데 제곱의 발견에도 신의 유무가 관여했다. 

뉴턴은 뛰어난 과학자이기도 하지만 유신론자들에 의해 거의 뉴턴의 이론은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예를 들어 mv와 mv제곱. 현대에는 mv제곱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과거에는 mv가 절대적이던 시절도 있었다. 뉴턴에 따르면, 마주 오던 자동차가 충돌했을 경우 자동차의 덩어리만 남고 두 자동차가 가지고 있던 v는 사라지게 된다. 서로 상쇄되는 것이다. 두 자동차가  한때 가지고 있던 에너지가 완전히 소멸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신이 등장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이렇게 상쇄된 에너지만큼 누군가가 시계 태엽을 감듯이 조정해 주는 것이다. 바로 이 신의 유무가 mv와 mv제곱의 세계를 갈랐다. 제곱의 세계에서는 두 자동차는 충돌한 후, 에너지는 상쇄되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금속 조각들을 퉁겨나가게 하고 바퀴를 뜨겁게 달구며 어지러운 소음을 울리면서 그 존재를 유지하게 된다. 이는 신의 손길 따위는 필요 없다, 세상은 스스로 움직인다는 걸 의미했다. 

지금이야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들도 당시에는 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던 것들. 과학자들은 스스로 신의 존재에 눌려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고 간혹 다른 생각을 했던 과학자들은 쉽게 세상 속에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그래도 시간은 만병통치약인 듯. 시간이 흐르며 과학적 증거 앞에 많은 부분들이 바로 잡혔고, 누군가가 자신의 앞길을 막았을 경우에는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끈질기게 버틴 후, 자신의 연구를 계속해 나가기도 했다. 

질량 보존의 법칙, 에너지 보존의 법칙, 이 둘은 별개가 아니라 서로 동등하다. 그리고 빛의 속도. 빛의 속도 제곱. 아인슈타인의 공식은 바로 앞선 사람들이 연구해 온 업적들을 그의 눈부신 통찰력으로 한데 묶어낸 것에 다름없었다. 그 누구도 이를 한데 묶어내지 못했을 뿐. 아인슈타인이 세상에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아인슈타인의 공식을 통해서 세상에 없던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낸다. 바로 원자 폭탄이다. 

이 공식이 어떻게 발전해 나가는지를 설명하는 장에서는 원자 폭탄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양성자니, 중성자니 하는 것들도 나오는데 원리는 간단하다. 질량을 에너지로 전환시켜라! 사람들은 핵 속을 들락거릴 수 있는 중성자라는 것을 발견했고 이 중성자를 입자들이 과포화 상태인 원자 속에 투입하여 핵 전체를 흔들어 놓아 결국에는 폭발로 이르게 만들 수 있었다. 사라진 질량은 빛의 속도의 제곱이라는 엄청난 환산인자의 힘을 받아 꼭 그만큼의 거대한 에너지가 되어 나타난다. 아직 과학기술이 따라주지 않을 뿐, 작은 종이 한 장으로도 무시무시한 폭발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말미엔 우주 창조와 종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태초의 우주는 엄청나게 조밀했고 엄청나게 압축되어 있었다. 에너지만이 존재하던  그때, 그 높은 밀도는 거대한 양의 방사선을 E=mc2의 E에서 m쪽으로 밀어 넣어졌고 그 결과 질량으로 대변되는 우리 세계가 만들어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태양이니 지구니 하는 것들도 언젠가는 모두 폭발하여 산산이 부서지고 그 부서진 조각들은 블랙홀 속으로 압축되어 들어간다. 그렇게 우주의 모든 것을 먹어치운 블랙홀은 언젠가는 그마저도 소멸해 버리고 최후의 질량은 에너지만을 남겨두고 사라져 버리게 된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막대한 공간 위에 흩어져 있는 방사선. E가 m이 되었던 여행은 m이 다시 E가 되면서 끝나게 된다. 

여기서 질문, 정말 끝나게 될까? 우리 우주는 정말 E->m->E의 여행으로 끝나게 될까? 글쎄..오히려 뫼비우스의 띠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여행이 E->m인지, m->E인지, 이 둘의 무한 반복인지 알 수 없는 그런 여행. 시작은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그 끝은 없는 그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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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천재 이제석 - 세계를 놀래킨 간판쟁이의 필살 아이디어
이제석 지음 / 학고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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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이 책 사기다. 친구가 오래전부터 권하길래 읽어봤는데 대체 이 책의 어느 부분에서 나와의 공톰점을 찾아야 하는 것이냐!! 저자는 루저에게 있어 등대와 같은 존재는 아니다. 왜냐, 저자는 알고보면 위너였기에.

저자는 어릴때부터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재능이 있는지, 어떤 길을 걸을 것인지 알고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재능이 있는지, 앞으로 무얼 하며 살아갈 것인지 고민하는 청춘에게 정말로 이 책은 길잡이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인가.

글쎄. 오히려 이 책은 지나친 스펙주의가 불러 온 폐혜 속에 한국이 놓쳐버린 인재에 대한 이야기이지 않을까. 지방대이지만 그 지방에서는 알아주는 대학에 알아주는 학과를 과톱으로 졸업한 저자. 어릴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자신이 그린 만화를 친구들이 돌려 볼 정도로 재능이 있었던 저자. 이런 저자를 대한민국은 영어 성적이 없다는 이유로, 혹은 지방대 출신이라는 이유로 박대했고 이에 저자는 작정하고 스펙을 만들러 간다.

그래, 이 책은 스펙 만들어 성공한 사람 이야기이다. 재능은 있었지만 영어 성적이 없어서 서류통과 못 하던 젊은이가 이 갈며 뉴욕으로 유학 간 이야기이다. 게다가 뉴욕 가서 공부하며 아, 그동안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가 아니라 역시, 한국에서 내가 했던 것들은 옮았어!라는 걸 증명해 보인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이 책이 가지는 의의는 오히려 광고인들에게 있지 않을까 싶다. 루저였던 청춘이 하루 아침에 위너가 된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만의 광고 철학과 비전을 가지고 있는 광고인이 말하는 자신의 광고 도전기, 성공기, 그리고 앞으로의 광고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저자는 광고로 홍익인간 하리라고 말한다. 이러한 비전이야말로 이 책이 지니는 의의일 것이다. 나 또한 광고계에 대해 관심을 가지며 좋은 광고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저자는 그 방향을 공익광고로 잡았지만 나는 상업광고 속에서 좋은 광고를 만들고 싶었다. 광고주의 이익을 철저히 반영하면서서 그 밑바탕엔 공익의 코드를 깔아놓는 것. 예를 들면 초코파이 광고를 한다고 할 때, 아프리카에서 우물을 파는 노동을 한 후 다 같이 초코파이를 돌려 먹으며 "정"이라는 걸 강조한다면, 이것은 한국인의 정을 초코파이에 빗대어 초코파이를 광고함과 동시에 이처럼 한국인의 정을 나눕시다!! 하면서 아프리카 원조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 지점이지 않을까. 저자와 나의 공톰점을 찾을 수 있는 것은. 매개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주류사회를 지향하며 주류사회에 편입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신념을 펼칠 수 있는 길을 걸어가는 것. 자신만의 판을 펼치는 것.

이 책 속에는 TV광고보다 인쇄매체, 옥외광고 등이 더 많았다. 흔히 광고라고 하면 가장 먼저 TV를 생각하기 마련인데 TV 외의 매체로 TV 못지 않은 광고 효과를 내는 것을 보면서 대자본에 대한 소자본의 승리 같은 통쾌함이 느껴졌다. 어떻게 보면 TV라는 한정된 매체보다 그 외의 매체가 창의력을 발휘하기에는 더 좋은 도구이지 않을까 한다.

앞으로도 저자가 직관적이면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광고를 많이 만들 수 있기를 바라며..아울러..나도 하루 빨리 내 이상을 펼칠 수 있는 판을 벌릴 수 있기를 바라며...이상 리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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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을 파하라 - 대한민국 No.1 크리에이터의 파격적인 창의창조론
송창의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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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내 인생에 빛 볼 날이 생긴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내가 잘 되기를 빌어주신 모든 분, 그리고 나에게 곱지 않은 말일지라도 말 한마디 보태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고. 지금의 나는 오롯이 나 스스로 형성된 것은 아니다. 다 나를 거쳐 간 사람, 내가 거쳐 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러한 내가 형성된 것이다. 관계. 저자는 바로 이 관계의 중요성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인생에서 이 관계라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영향력이다. 미디어가 곧 영향력이듯이. 쌍방향으로 주고받는 커뮤니케이션 속에 내가 형성되고 네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것은 프로그램 또한 마찬가지이다.

송창의라는 사람이 살아온 인생, 그리고 그 인생 속 모든 관계가 그의 창작물의 밑거름이 되었다. 송창의라는 분은 참 잘난 분이긴 하지만 그 모든 프로그램은 오로지 송창의라는 한 인물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송창의 씨에게 본인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말 한마디 보태 준 분들 덕분에 탄생했다. 그리고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송창의 씨기에 자신이 후배들에게 있어 무엇을 해 주어야 하는지도 잘 아시는 것이다.

송창의식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것도 방송계에 입문하고 싶은 친구들이라면 주의 깊게 볼 점인 것 같다. 인형에 줄을 달아 사람이 직접 움직이는 마리오네트 인형극을 볼 때, 그 장면을 멀리서 잡으면 마치 한 편의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그것을 클로즈업하는 순간,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에서 조잡한 인형이 되어 버린다. 바로 이 지점이다. 영애씨를 찍기 위해 어떤 미디어(도구)를 도입했는지,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미디어로 우리는 어떤 것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

지금의 나는...30대에 접어드는데 그래서인지 청춘이라는 단어 앞에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 고민이 되곤 한다. 한창 청춘이라 하기에도 뭣하고 그렇다고 이미 내 청춘은 지나가 버렸다고 하기에도 뭣하다. 하지만 이 구절을 보며 나는 내 위치가 어디인지를 깨닫는다. "청춘은 빠르게 지나간다. 하지만 이 시간은 평생을 두고 길고 짙은 그늘을 드리운다." 지금 나는 아직 내 청춘이 다 지나가 버린 것은 아니지만 내 청춘이 내 인생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다는 것을 감지하기 시작한 때이다. 그래서 아쉽고, 또 아쉽고, 불안하고, 또 불안하다. 내가 과연 내 청춘을 잘 보냈던 것일까, 잘 보내지 못했다면 앞으로의 내 인생의 짙은 그림자는...어떻게 드리워질 것인가....


불안하고 막막하지만, 끝까지 가 보기로 했다. 끝까지 파 보기로 했다. 끝까지 파 본다면, 설사 그게 똥일지라도 얻는 게 있을 것 같다. 이것저것 해 보다가 중간에 포기해 버리면 난 내 남은 평생,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에 짓눌려 살게 되진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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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네기 인간관계론 (반양장)
데일 카네기 지음, 최염순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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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은 지 얼마나 지났다고...리뷰를 쓰려고 하니 막상 이 책의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 이 부분! 이러면서 모서리 끝을 살짝 접어놓지 않았다면 리뷰조차 쓰지 못할 뻔했다. 이래서 어른들이 하는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 데일 카네기는 이미 경고했던 것이다. 여러 번 반복해서 읽으라고.

데일 카네기의 충고가 아니더라도 이 책은 충분히 여러 번 반복해서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었다. 워낙 유명한 책에는 이상하게 손이 잘 안 가는 고약한 습성 때문에 이 책을 인제야 읽었다. 그리고 그러한 책들이 늘 그렇듯이 그렇게 유명한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에 동의하게 된다.

이 책은 '습관적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은' 재능을 일깨워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렇게 그 재능을 일깨워 준다고는 해도 이 책이 각자에게 의미 있는 책으로 남을 것인지 그렇지 못할 것인지는 행동력에 달려 있다. 알면 뭐하겠는가. 본인이 직접 사용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인 것이 처세술인 것을.

대충은 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기에 그런가 보다 하면서 보게 되는데 그런 가운데서도 특히 인상적인 부분이 있었다면 바로 이 대목이다. '소크라테스의 비결을 활용하라' 편에 보면 상대방으로 하여금 "네"라는 대답을 이끌어 내도록 요구하고 있는데 바로 이 "네"라는 반응이 청중의 심리 상태를 긍정적으로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니오"는 무엇을 이끌어낼까?
바로 인체의 모든 기관이 한데 어우러져 육체적인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 지금 당장 소리 내어 말해 보아라. "네"라는 말을 할 때의 몸의 상태와 "아니오" 라는 말을 할 때의 상태. 확연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왜 상대방으로 하여금 "아니오" 라는 대답을 이끌어 내면 안 되는지. "네"와 "아니오" 사이의 신체적 변화처럼 바로 이렇게 즉각적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해 주는 방법!
여담이지만 유연하게 돌아가며 상대방으로 하여금 "네"를 반복하게 하는 것. 이거 사실은 내가 예전에 동생 혼낼 때 자주 쓰던 방법이었다. 동생은 내 질문에 "네""네" 하면서 대답하는 사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게 되고 용서를 빌게 되었던 것이다.

이 책은 인간관계론을 다룬 책이기에 사람을 대할 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고 주문하는 내용이 중요한 부분이겠지만 그보다 더 의미 있는 대목은 왜 그래야 하는가에 대한 분석이다. 그중에서 사람에 대한 분석 중, 사람은 누구나 동정받고 싶어한다는 부분이 있었는데 세상의 3/4은 동정심에 굶주려 있다는 것이었다. 주위에서 종종 볼 수 있을 것이다. 늘 아프다며 징징거리는 사람, 세상에서 자기가 하는 일이 가장 힘든 사람 등등. 늘 사람은 누군가의 동정과 이해를 갈구하기에 그것을 제공해 주면 인간관계가 한결 수월해질 거라는 것이었다. 동정받은 사람은 자신의 아픔을, 어려움을 알아주는 것 같은 사람에게 마음을 열게 되어 있으니. 문제는...너무 노골적으로 그런 걸 요구하는 걸 보거나 정말 오로지 자신만이 세상에서 제일 아프고 힘들다는 사람들을 보면...저 사람이 무엇을 요구하는 건지 알겠으면서도 절대로 그걸 제공해 주고 싶어지지 않는 나의 악마적인 마음이겠지.

바로 이 대목에서 인간관계론의 함정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주라,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 하지만 상대방이 원하는 것은 우리 자신도 원하는 것이다. 물론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론이긴 하지만 그러한 방법론 이전에 나 또한 인정받고 싶고 위로받고 싶은 그 마음이 바로 우리네 인간관계의 장애물이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렇다면 결론은 인간관계를 잘 해 나가려면 나 자신을 버려라??? 자신의 욕구를 잠시 내려놓고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며 인정해주는 것. 이건 뭔가 인간관계론의 영역이기보다는 의식혁명 수준의 영역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비즈니스 상이나 외교적 사안에는 의식혁명의 수준이라기보다는 수완의 문제이겠지만 그래도 우리, 궁극적으로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사람을 조종하고 움직인다기보다는 그야말로 서로 잘 어우러져 지내기 위해 인간관계를 공부한다고 생각하고 싶기에.

마지막으로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의미는 바로 글이 되어 서평으로 쓰이는 내용이 아니라 읽으면서 아, 이래야지, 저래야지 하며 내 가슴 속에 새긴 말들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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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니까 청춘이다 - 인생 앞에 홀로 선 젊은 그대에게
김난도 지음 / 쌤앤파커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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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니까 청춘이다. 이 얼마나 시적인 표현인가.
나는 바로 이 시적인 표현이 싫어서 이 책을 읽지 않았다. 우리 청춘엔 낭만이 없을 정도로 너무 아픈데, 이런 낭만적인 타이틀이라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굳이 관심 가지지 않았다고 할까.

어느 날, 은행에 갔더니 은행 한 쪽에 작은 도서관이 있더라. 그 날은 은행이 좀 붐비는 날이라 난 시간을 좀 때워야 했고 때마침 이 책이 있길래 대체 이 짜증나는 낭만적인 타이틀의 책에 뭐가 있길래 베스트 셀러로 이름이 높은지 한번 읽어보자 싶었다. 뭐 어차피 그냥 대충 한번 보고 싶었던 거니까 정말 대충 읽었다. 그때 한 반 정도 봤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을 잊었다.

9월 초, 나는 대학 시절 알던 동생에게 책 선물을 받았다. 바로 이 책이었다. 은행에서 잠깐 보다 말았지만 나름 괜찮은 책인 것 같다고 느꼈고, 또 뒷 부분도 궁금했기에 반갑게 받아들었다. 그리고 읽어 본 이 책.

우선 단점부터 말하자면 역시나 이 책은 낭만적이었고 심지어 대상 독자의 폭도 좁았다. 위로 받고자 빼어든 책에서 오히려 소외감을 느낄 여지도 없잖아 있다고 할까. 그래도 자신이 대상 독자층 안에 있다면 상당히 유의미할 수도 있는 책이었다.


프롤로그에 저자는 이십대 초반, 그 청춘에 대해서 가장 화려하면서도 어두운 시기, 자기연민, 나태를 낭만이자 로망으로 미화, 무척 똑똑하게 행동하는 것 같지만 인생 전반을 놓고 바라볼 때는 너무나도 바보 같은 결정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시기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지나고 나야지만 알 수 있는 정말 아까운 시간들이다. 아니, 어쩌면 그 순간 내가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 틀을 깨기가 무척 어려운 시기. 그걸 알기에 저자는 조금이라도 청춘들에게 힘이 되고 자극이 되고 싶어 이 책을 쓴 것이다.

이 책에서 내가 공감한 것은 재테크에 대한 부분이었다. 데뷔하자마자 적금에 드는 개그맨은 뜨지 못한다는 말을 하면서, 당장의 돈 몇 푼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우선은 자기 자신에게 투자할 것을 주문한다. 늘 주경야독을 하는 나로서는 이러한 돈 문제가 늘 고민이었고, 먹고 살기 힘든 상황 속에서 무엇을 위해 돈을 버는가를 잊지 않는 것은 계속 꿈꾸기 위해 내가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무엇을 위해 돈을 버는 가를 잊고서 오로지 돈을 위해 돈을 버는 것과 무언가를 위해 돈을 벌어 놓고서는 정작 그 무언가를 위해 돈을 쓰지 않는 것. 이 두 가지가 내가 가장 경계해야하는 것이었다.

바로 오늘만해도 이런 일이 있었다. 어제 추가 접수한 KBS한국어능력시험 대비를 위해 서점에 책을 사러 갔는데 책 값이 기본 3만원이었다. 수험료가 2만원이었는데 책 값은 기본 3만원이라니. 내가 사고 싶었던 책들은 3만원 3만5천원 이렇게 하길래 이걸 살까 말까 무척 고민했다. 집에 국어능력인증시험 책은 하나 있는데 그냥 이 책 보고 공부할까 싶기도 했고. 결국 책을 사기는 했지만 조금 싼 책으로 골라서 샀다. 늘 이런 문제가 힘들다. 내가 쥐고 있는 돈은 한정적인데 이 돈으로 집세도 내야하고 생활도 해야하고 갑자기 뜻하지 않은 일로 큰 돈이 들어가기도 하고...이런 와중에도 그냥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정말 실패할지도 모르는 내 꿈을 위해 과감하게 투자하는 것. 그게 어려운 거지.

나에게 있어 작년은...슬럼프였다. 실패했다는, 내 노력이 보상받지 못했다는 생각에 나는 나락으로 떨어졌고, 그리고 나태해졌다. 내가 나태해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무지 힘이 나질 않았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부패해가고 있었고 저자의 말대로 내 영혼과 육신이 슬퍼지고 있었다. 슬럼프일 때 이 슬럼프를 극복해 낼 수 있는 방법은 역시나 허공을 딛고 날아오르는 수 밖에 없었다. 그 누구도 나를 끌어올려 주지 않는다. 스스로가 갈구해야하고 노력해야한다. 이 얼마나 잔인한가. 그걸 하지 못해 슬럼프가 온 것인데...그것만이 나를 구할 길이라니.

사실, 나는 이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구원을 바라지는 않았던 것 같다. 결국엔 내가 허공을 딛고 날아오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미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알고 있었다고는해도 그 허공을 딛고 날아오른다는 거,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쩌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그 슬럼프에서 벗어나고자 더 발버둥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그냥 때가 되면 날아오를테니...하면서 나를 더 나태 속에 내버려 둔 것은 아닐까....라고 이제서야 생각해 본다.

이처럼 슬럼프에 빠지면 참 극복하기 힘들다. 이제는 슬럼프를 예방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운동도 좀 하면서 몸의 컨디션을 잘 조절하고, 혼자만 놀지 말고 사람들도 좀 만나고. 뒤돌아 보면 나는 가장 바빴던 시기에 가장 많은 일들을 해 냈었고, 그 시간들이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의미있는 시간들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일에만 치여 공부에만 치여 지낸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 속에서 일과 공부, 사생활, 여가시간 등이 적절히 균형을 이루었던 것 같다. 그래서 요즘은 의도적으로라도 이것저것 하려고 하고 몸도 좀 움직이고 사람들과도 교류하려고 한다. 그런 차원에서 서태지 아카이브 라디오 녹취록 쓰는 재능기부도 한 것이었다. 바쁜데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잠시, 바쁘니까 오히려 더 신경써서 하게 될거야, 지금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안 하게 될거야, 라는 생각에 참여했었고 힘들긴 했지만 잘 했다는 생각이다.

이 책의 많은 부분에 공감하고 구절구절들에 고개를 끄덕이고 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최승자 시인의 <삼십 세> 中)

그랬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이 왔다. 서른을 맞이하며 아무 것도 이루어 놓은 것이 없다는 생각과 그렇다고는 해도 이대로 포기하기엔 너무 이르다는 생각. 이 속에서 서른 살은 왔고 나는 계속 이렇게 살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수도 없어 계속 꿈꾸기로 했다. 내게 이 노력에 대한 대가가 주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냥 꿈꾸는 그 과정 자체를 살아가기로 했다. 내가 서른이 되어 얻은 것은 바로 이런 여유아닐까. 이십대, 무언가를 위해 열정을 불태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었던 나. 그렇게 처참히 깨지며 슬럼프 속에 나태와 부패로 내 영혼을 망가뜨리기만 했던 내 이십대.

모두들 'passion'을 꿈꾸지만 'passio'만을 맛보는 시기. 이 아픔들이 곧 열망으로 이어진다면 이것은 그야말로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에 부합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청춘들이 진정으로 아픈 이유는 이러한 아픔의 시기가 보상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아프게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열망 때문인 것이다. 이런 구조적인 틀을 뒤로 한 채, 저자는 열망에는 아픔이 따른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이런 말들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스스로 비판거리를 제공했다.

이덕일씨의 강연에 갔더니 한국인의 '한'의 정서에 대해서 이런 말을 하더라. 그것은 사필귀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우리 시대의 청춘에 대해서 아픔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 시대 청춘들의 가슴엔 아픔이 아니라 한이 가득하다. 지금 청춘들은 열망으로 인해, 그 열망을 이루기 위해 아픔의 시간을 겪고 있기에 아픈 것이 아니다. 어떠한 아픔으로도 그 열망을 채울 수 없기에, 이룰 수 없기에, 그 이룰 수 없는 벽에 부딪힌 아픔들이 가슴에 한이 되어 쌓이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언제까지 이런 낭만적인 말로 그 책임을 청춘들에게만 떠 안길 것인가.

이 책이 조금만 더 청춘들의 아픔에 대해서, 그 근원에 대해서 봐 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시대의 청춘, 저자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진지하게 자신들에 대해 고민하고 노력하며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여전히 아플 수밖에 없었다는 것, 이 점을 조금만 더 알아주었다면, 그리고 책임 있는 어른으로서 그 개선에 대해서도 고민 해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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