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은 개인의 신화요, 신화는 집단의 꿈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 좋은 서방 이야기’는 한 사람의 마음 상태와 그 사람이 꾸는 꿈이 얼마나 밀접한 관게를 맺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하지만 그렇기만 한가? 한 개인은 그 개인이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위대한 꿈은 꿀 수 없는가?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다. 우리에게는 의식과 무의식이 있다. 의식에 저장된 것은 언제나 재생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 의식은 컴퓨터 디스켓 같아서 일정한 용량 이상은 저장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한때 분명히 기억하고 있던 정보를 필요할 때 기억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때 우리는 정보를 ‘잊어버렸다’고 말한다. 분석심리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가 ‘잊어버린’이 정보는 영원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 의식에서 사라졌을 뿐 사실은 무의식에 저장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까맣게 잊었던 것들을 생생하게 기억해낼 때가 이따금 있는 것이다. 의식의 내용이 무의식으로 사라질 때가 있는 것처럼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솟아오를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인 카를 구스타프 융 박사의 주장에 따르면, 한번도 의식된 적이 없는, 전혀 새로운 내용물이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솟아오르는 경우도 있다. 융 박사는 이러한 무의식을 ‘집단 무의식’이라는 특별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한 개인의 무의식에는 그 개인의 의식에서 흘러들어간 정보도 있고, 지금까지 인류가 진화하면서 집단적으로 경험한 내용물, 따라서 개인은 의식해본 적이 없는 정보도 있는데, 융 박사가 ‘집단 무의식’이라고 부르 것이 바로 개인은 의식해 본 적이 없는 정보다.

바로 이 집단 무의식이 있기 때문에 많은 예술가, 철학자, 심지어는 과학자까지도 여기에서 솟아오른 영감을 통하여 놀랄 만한 업적을 이루어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가령 프랑스의 수학자 푸앵카레, 독일의 화학자 케쿨레는 그들의 과학적 발견이 무의식에서 문득 솟아난 회화적 계시 덕분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영국의 작가 스티븐슨은 인간의 ‘이중성’ 혹은 인간의 ‘다중성’을 잘 나타낼 이야깃거리를 찾아 오래 고심하다가, 꿈에서 받은 계시를 통해 저 유명한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의 줄거리를 완성해냈다고 고백하고 있다.


♣ 나는 “지극한 진리는 언어로 전할 수 없다.”는 말을 의심한다. 하지만 “지극한 진리는 언어로 전해질 수 없지만 지극한 진리를 전하는 언어에 가장 가까운 것이 신화”라는 철학자 쿠마라스와미의 말을 좋아한다.


♣ 세멜레 이야기를 나는 이렇게 읽는다. 신들이란 원래 ‘믿음’의 대상이지 ‘앎’의 대상이 아니다. 신들의 초월적인 권능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는다. 인간은 신들을 볼 수도 없고 보아서도 안 된다. ..........하지만 인간은 역시 연약한 존재라서 신들이라는 존재가 퍽 궁금하다. 헤라는 바로 인간의 이런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어리석은 세멜레로 하여금 제우스의 광채에 타 죽게 만든 것이다.

 

 

♣ 신들은 원래 여러 가지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 딱 한 가지, 딱 두 가지, 딱 세 가지, 이런 식이다. 가장 위험한 것은 딱 한 가지의 소원이다. 신들이 들어주는 딱 한 가지 소원은 위험하다. 까딱 잘못하면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미다스는 소원 성취했다가 혼이 났고, 카싼드라는 예언하는 능력을 얻었지만 설득력을 잃어 트로이아 전쟁 중, 그리고 끝난 뒤에 온갖 고생을 다 하다가 죽었다. 시뷜레도 그렇다. 영생 비슷한 것을 내려달라고 하면서 청춘까지 빌 수는 없는 일이다.

 

‘어떤 사람의 소원이 무엇인지 알면 그 사람이 어떤 인간인지 알 수도 있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소원이 없는 삶, 더 바랄 것이 없는 삶이 반드시 양질의 삶일 리야 없겠지만, 삿된 소원, 삿된 꿈이 우리를 누추하게 하는 것은 분명하다.

 

 

♣ 나는 신들의 은총이 내려 불가사의한 힘이 주어진 물건에 관한 여러 나라 신화를 읽을 때마다,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는 것을 본다. 케팔로스와 프로크리스 이야기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 유형도 있다. 신들의 특별한 은총, 또는 인간이 지어낸 불가사의한 시설물들이 그 나라 공주에 의해 유린되는 경우다. 나는 한 나라의 영웅이 등장하고, 이웃나라 공주가 등장하면 아연 긴장한다. 이웃 나라 왕이 신들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받았을 경우, 그 은총이 나라의 안위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경우 나는 그 왕에게 경고한다. 왕잉, 딸을 조심하시오. 하고 경고한다.

  자, 어떤 나라에, 신들의 특별한 은총이 내려 인간은 ‘절대로’ 범접할 수 없는 어떤 물건이 있다. 이웃 나라의 왕자가 접근을 시도한다. 하지만 왕자 혼자의 힘으로는 거기에 접근할 수도, 그것을 파기할 수도 없다. 그런데 그 나라의 공주가 왕자에게 홀딱 반한다. 공주는 아버지와 조국을 배신하고 문제의 물건을 파기함으로써 왕자의 뜻을 따른다. 하지만 공주는 왕자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 스퀼라, 아리아드네, 메데이아 이야기는 이런 구조로 짜여 있다. 그리스 신화에만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거의 모든 문화권이 이런 신화를 보유하고 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이야기가 있을까? 있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야기’가 그것이다.


♣ 나는 신화를 믿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나는 믿는다고 대답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고는 한다. 나는 신화를 믿는다. 신화를 믿는다고 해서 대리석으로 아름다운 여자를 깎아놓고 내 색시가 되게 해달라고 아프로디테에게 비는 식으로 믿는 것은 아니다. 내가 믿는 것은 신하의 진실이다. 퓌그말리온의 진실과 그가 기울이는 정성이다. ‘퓌그말리온 효과’라는 말은, 스스로를 돌아보되 희망과 기대를 버리지 않을 경우에 나타나는 효과를 뜻하는 말로 지금도 줄기차게 쓰이고 있다.

 

♣ 신화는 언제 한 번 꾸었던 내 꿈의 내용물 같기도 하고, 언제 한 번 들었던 남의 꿈 이야기 같기도 하다. 신화에 가장 가까이 닿아 있는 이야기 형식이 바로 설화다. 설화는 신이 등장하지 않는 신화이기도 한데, 민간에 널리 퍼져있는 민간 설화를 우리는 특별히 '민담'이라고 부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하오면 어르신네 시는 어떤 것입니까?”

   “제 값어치로 홀로 우뚝한 시. 치자에게 빌붙지 않아도 되고 학문에 주눅이 들 필요도 없다. 가진 자의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되고 못 가진 자의 증오를 겁낼 필요도 없다. 옳음의 자로써만 재려 해서도 안 되고 참의 저울로만 달려 해서도 안 된다. 홀로 갖추었고, 홀로 넉넉하다. ”

  “하지만 사람은 모여 살아야 하고 제도며 문물에 얽매이게 마련입니다. 무언가로 가려 주고 채워주지 않으면 안 될 몸도 있습니다.”

  “시인은 바로 그러한 것들에서 벗어난 자다. 그 모든 것을 떨쳐 버린 뒤에야 참다운 시인이 난다.”

  “그래서 무얼 얻습니까?”

  “시다. 그걸로는 벼슬도 생기지 않고 공명도 오지 않고 재물도 얻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때로는 그 한 구절로 셋 모두를 갈음할 수 있는 게 시다.”

  “그런 시가 있습니까?”

  “있지. 우쭐거리기 좋아하는 것들이 못나고 덤벙대는 것들을 꼬드겨 위와 아래를 만들고 제도니 법이니 예의니 하는 것으로 세상을 옭기 전에는 모든 시가 바로 그랬다. 못나고 덤벙대는 시인들이 스스로 코를 꿰고 제 코뚜레를 우쭐대기 좋아하는 것들에게 넘겨주기 전에는.”


★ “사람들은 그 시를 어디에 씁니까?”

   “작은 쓰임은 언제나 뚜렷하지만 큰 쓰임은 반드시 그렇지가 않다. 송곳을 만드는 것은 무얼 뚫기 위해서이고, 노끈을 꼬는 것은 무얼 묶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조화옹이 천지 만물을 지어 낸 까닭은 한 마디로 쉽게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천지 만물이 아무 쓸모없는 것인가.”

   “그 같은 큰 쓰임은 쓰임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미물에서부터 사람에 이르기까지 천지는 갖가지 쓰임을 가졌을 것인바, 어느 것은 맞고 어느 것은 아니라 하겠습니까? 결국 천지의 큰 쓰임이란 것은 없고, 거기 깃들인 만물의 작은 쓰임이 있을 뿐입니다.”

   “없다는 것과 일일이 다 말하지 못한다는 것은 다르네. 천지의 큰 쓰임이란 만물의 작은 쓰임을 다 합친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혹시 어르신께서는 작은 것을 너무 키워 못쓰게 하고 계시는 것은 아닙니까? 바늘을 절구공이만 하게 만들어서는 바늘로도 절구공이로도 쓰지 못합니다. 장자는 새를 너무 키워 이 세상에는 살 수 없는 새를 만들었고, 부처는 인을 너무 키워 사람의 몸둘 바를 어렵게 했습니다. 어르신네는 시를 너무 키워 시를 없이하고 게시는 것은 아닌지요...”

   “원래 큰 시를 오늘날 보는 것처럼 작게 줄인 것은 요순과 공맹을 이은 썩은 선비였다. 그로부터 수천 년, 혹은 인으로 가두고 혹은 예로 얽매고, 혹은 의로 옭죄고 혹은 지로 억누르니 뒤에 온 사람이 어찌 시가 가졌던 그 원래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겠는가. 나는 작은 것을 키워 못쓰게 하는 게 아니라 너무 줄여 놔서 못쓰게 된 걸 이제 원래대로 키워 쓰려는 것뿐이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시가 그토록 큰 쓰임이라면 그 쓰임을 지어 낸 이에게는 큰 얻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시인은 시 그 자체밖에 얻지 못합니까?‘

   “시를 얻음이 바로 큰 얻음일 수 있지.”

   “그 큰 얻음은 어떤 것입니까?”

   “스스로를 자유하게 하고 나아가서는 남을 자유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 자유하게 된다는 것은 무얼 말함입니까?”

   “마음과 몸이 그 얽매임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마음이 그 얽매임에서 벗어난다 함은....”

   “만상이 품은 바 그 원래의 뜻을 바라봄이다. 세상은 온갖 뜻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은 스스로 꾸미고 지어 낸 온갖 거짓과 헛것에 얽매여 그 아름다움도 착함도 참됨도 거룩함도 보지 못한다. 오직 자유하진 마음만이 그것들을 볼 수 있는데, 그 봄은 또한 만듦이기도 하다. 원래 거기 있었으나 아무도 보지 못함은 없음과도 같으니, 그 없음은 그런 봄을 얻어서야 비로서 온전한 있음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원래 시하는 것은 그러한 봄이지만 본다 하지 않고 짓는다 하는 뜻은 실로 거기에 있다.”

   “몸은 시를 얻어 어떻게 자유하게 됩니까?”

   “그 그윽한 경지에 이르면 몸은 사로잡혀 있는 형체에서 벗어나고 갇혀 있는 시간에서 벗어나며 묶여있는 공간에서도 벗어난다.”

   “그럼 결국 시는 도입니까?”

   “시는 도가 아니야. 도도 틀림없이 만상의 원뜻을 보기는 하되 그걸 무언가 다른 하나로 바꾸어 보지. 그러나 시는 있는 그대로 놓아두고 보네. 또 도는 궁극으로 이 세계를 뛰어넘으려 하지만 시는 남아 있어 이 세계와 하나가 되려 하는 그 무엇이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줄 : 쭉쭉 빨 줄
: 쫄 탁
: 같을 동
: 기회 기 

원래 중국의 민간에서 쓰던 말인데,
임제종()의 공안집(:화두집)이자 선종()의 대표적인 불서()인 송()나라 때의 《벽암록()》에 공안으로 등장하면서 불가()의 중요한 공안이 되었다.

공안은 화두라고도 하는데, 깨우침을 위한 물음의 요체이자 수수께끼로, 책으로 말하면 제목과 같은 것이다. 선을 수행하는 승려들은 하나의 공안만 가지고도 평생을 참구하기도 한다. 그만큼 몇 자 안 되는 공안일지라도 그 속에는 깨달음의 이치가 숨어 있어 그 뜻을 말로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반면 공안의 원래 뜻이 공공기관의 문서라는 점에서 보면, 일단 깨닫기만 하면 더하거나 뺄 것이 없이 그 뜻이 명백해지는 것이 공안이다. 그러나 깨달음을 말로 표현하기 위해 문자의 뜻에 얽매이는 순간 깨달음은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고, 다시 관념에 빠진다. 선종에서는 이러한 관념의 세계를 용납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공안은 최소한의 언어만을 사용한다.

줄탁동기 역시 깨우침과 관련된 공안이다. 병아리가 알 속에서 나오려면 먼저 스스로 알을 깨기 위해 부리로 알을 쪼아야 한다. 그러면 알을 품던 어미닭이 소리를 알아듣고 동시에 밖에서 알을 쪼아 안팎에서 서로 쪼아댄다. 여기서 병아리는 깨달음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수행자이고, 어미닭은 수행자에게 깨우침의 방법을 일러주는 스승이다.

새끼와 어미가 동시에 알을 쪼지만, 그렇다고 어미가 새끼를 나오게 하는 것은 아니다. 어미는 다만 알을 깨고 나오는 데 작은 도움만 줄 뿐, 결국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은 새끼 자신이다. 이 말은 스승은 깨우침의 계기만 제시할 뿐이고, 나머지는 제자가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한다는 말이다. 깨달음에도 때가 있어 깨달아야 할 때 깨닫지 못하면 헛일이라는 뜻도 들어 있다.

H.헤세의 《
데미안》에 나오는 "병아리는 알을 깨고 나온다"도 이와 같은 뜻이다. 줄탁지기·줄탁동시라고도 하고, 줄탁으로 줄여 쓰기도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적멸보궁 [寂滅寶宮]


석가모니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신 전각을 말한다. 보궁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 최초의 적멸도량회(寂滅道場會)를 열었던 중인도 마가다국 가야성의 남쪽 보리수 아래 금강좌(金剛座)에서 비롯된다.

《화엄경(華嚴經)》에 따르면, 깨달음을 얻은 부처는 처음 7일 동안 시방세계(十方世界) 불보살들에게 화엄경을 설법하기 위한 해인삼매(海印三昧)의 선정에 들었다 한다. 이 때 부처 주위에 많은 보살들이 모여 부처의 덕을 칭송하였고, 부처는 법신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과 한몸이 되었다.

따라서 적멸보궁은 본래 두두룩한 언덕 모양의 계단(戒壇)을 쌓고 불사리를 봉안함으로써 부처가 항상 그곳에서 적멸의 법을 법계에 설하고 있음을 상징하던 곳이었다. 진신사리는 곧 부처와 동일체로, 부처 열반 후 불상이 조성될 때까지 가장 진지하고 경건한 숭배 대상이 되었으며 불상이 만들어진 후에도 소홀하게 취급되지 않았다.

오늘날 한국에서 적멸보궁의 편액을 붙인 전각은 본래 진신사리의 예배 장소로 마련된 절집이었다. 처음에는 사리를 모신 계단을 향해 마당에서 예배하던 것이 편의에 따라 전각을 짓게 되었으며, 그 전각은 법당이 아니라 예배 장소로 건립되었기 때문에 불상을 따로 안치하지 않았다. 다만 진신사리가 봉안된 쪽으로 예배 행위를 위한 불단을 마련하였다.


한국에는 신라의 승려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 가져온 부처의 사리와 정골(頂骨)을 나누어 봉안한 5대 적멸보궁이 있다. 양산 통도사(通度寺), 강원도 오대산 중대(中臺)의 월정사(月精寺), 설악산 봉정암(鳳頂庵), 태백산 정암사(淨巖寺), 사자산 법흥사(法興寺) 적멸보궁이 그것이다.

양산통도사
통도사는 금강계단에 진신사리를 봉안해 계율 근본도량 불보종찰(佛寶宗刹)이 되었는데, 부처가 안치되어야 할 대웅전에는 불상이 없고 불당 내부에 동서로 길게 불단만 놓여 있다. 또 불상이 안치되어 있어야 할 자리는 창으로 훤히 뚫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오대산 월정사
월정사 적멸보궁(강원유형문화재 28)은 불사리를 안치한 정확한 장소를 알 수 없고, 다만 전각 뒤쪽의 작은 언덕에 부처의 정골사리[佛頭骨一片)를 모셨다는 기록이 있는 세존진신탑묘(世尊眞身塔墓)가 상징적으로 서 있을 뿐이다.

설악산 봉정암
설악산 봉정암에는 부처의 불사리를 안치한 석가사리탑(강원유형문화재 31)이 있는데, 뇌사리를 안치하였다 하여 불뇌보탑이라고도 한다.

태백산 정암사
태백산 정암사 적멸보궁(강원문화재자료 32)은 다른 네 곳과는 달리 임진왜란 때 유정(惟政)이 왜적의 노략질을 피해 통도사의 진신사리를 나누어 봉안한 곳으로, 산 위에 수마노탑(보물 410)이 있다.

사자산 법흥사
사자산 법흥사에는 진신사리가 안치된 보탑과 자장이 도를 닦았다는 토굴이 있다.

이들 5대 적멸보궁은 불교도들의 순례지이자 기도처로서 가장 신성한 장소로 신봉된다. 그 밖에 대구광역시 달성군의 비슬산(琵瑟山) 용연사(龍淵寺), 경상남도 사천시 다솔사(多率寺) 등에도 적멸보궁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 다양한 무늬와 빛깔과 향기가 있는 것이 모든 성장의 색채이다. 그 색채가 빛이 낳은 고통의 결과라면 찬란한 무지개는 그 고통의 절정일 것이다. 나의 성년식도 그러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그런 색채도 그런 고통도 또한 그런 무지개도 뜨지 않을 것이다. 생의 중간에서 이미 마감이 다가오고 있으므로...... 그리워할 대상이 없이도 그리움이 사무칠 때가 있다. 그때가 내 안의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다.


◉ 어둠이 호수를 천천히 지워갈 저녁무렵이었다. 


◉ 세상을 착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독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솔밭에 바람이 불면 솔 숲은 마치 찻물을 끓이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잎을 몇 차례 우려낸 찻물처럼 여러 번 걸러낸 바람일수록 맑고 깊었다.


◉ 눈부처라면 눈동자에 비친 사람의 모습을 뜻하는게 아닌가.


◉ 은수자들이란 시선을 차단할 것들이 많은 세상을 버리고 혼자 사막이나 광야같은데 들어가 죽음보다 깊은 침묵으로 고독하게 수도생활을 했던 수도자를 말한다. 또 그래야 모든 시선이 흩어지지 않고 내면 속으로만 향한다는 것이다. 사막은, 그러므로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는 가장 고독하고 가장 외로운 곳이란다.


◉ 화두를 깨쳐 새처럼 허공에 발자국도 남가지 않고 훨훨 날아가버릴 수는 없을까.


◉ 애이불상 - 슬퍼하되 결코 감상에 젖지 않는다.


◉ 독해진다는 것은 자기 전 존재와 맞선다는 것이고, 그렇게 발견해 낸 자기를 지켜낸다는 것이고, 그 자기를 통해 세상을 구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 독하지 않아서 무너지는 삶들은, 착하기만한 삶은 노예의 삶인 경우가 많다.


◉ 네가 어디에 있든 작고 낮고 가볍고 그리고 느린 것들의 두 손을 번쩍 들어주며 그들의 이름을 크게 불러주는 사람이 되거라.


◉ 스님이란 무엇인가. 혈연의 이름을 버리고 세속에서 통용되던 때묻은 이름을 버리고 스승으로부터 받은 새 이름을 실천하기 위해 부단히 깨어있는 존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