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이유>

◉ 삶이 오르막과 내리막, 절망과 기쁨 속에서도 어떤 커다란 계획을 따르고 있었다는 믿음이 든다. 물론 그 과정에서 길을 잃고 방황한 때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진실로 길을 잃었던 적은 결코 없다.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바람이 떠도는 작은 조각을 정확한 길로 부드럽게 밀거나 혹은 맹렬하게 불어주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그 표류하는 작은 조각이 바로 가거의 나였고, 또한 지금의 나이다.


◉ 나는 자신이 어떤 거대한 통일된 힘의 일부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눈물이 흐르도록 깊은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 있었고, ‘가슴 속에 지극한 기쁨이 한없이 차오르게’ 하는 것도 있었다. 특히 아름다운 일몰을 보거나, 태양이 구름 뒤에서 얼굴을 내밀고 새가 노래할 때 나무 아래 서 있거나, 어떤 고대 사원에서 완전한 고요함 속에 앉아 있거나 할 때가 그때였을까? 이 같은 순간에는 어떤 거대한 영적인 힘, 바로 하느님 안에 있다고 강하게 느꼈다.


◉ 업과 윤회라는 개념에 끌렸는데, 그때에도 여전히 전쟁의 공포를 이해하고자 골머리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업이라는 것이 있다면 히틀러와 나치는 다음 생에서 벌을 받게 되고, 전사한 사람이나 죽음의 수용소에서 고문당한 사람은 이전에 지은 죄를 갚는 셈이 된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들은 더 나은 생으로 다시 태어나거나 천당이나 낙원 같은 곳에 가게 될 것이다. 나는 하느님이 나약한 우리 인간에게 도덕적 삶을 완성하는 기회를 단 한 번만 주셨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한 번의 이승 생활 경험에서 실패하게 되면 지옥 같은 곳에 떨어지게 된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한 인간의 삶은 영원과 대조하면 1백만분의 1초보다 더 빨리 지나가는 것이다. 내게 업과 윤회의 개념은 논리적으로 보였다.


◉ 침팬지와 비비, 원숭이들과 함께 새와 벌레들, 활기에 넘치는 숲의 풍부한 생명체들, 결코 멈추지 않고 바쁘게 흐르는 거대한 호수의 물, 셀 수 없이 무수한 별과 태양계의 행성들은 하나의 전체를 형성한다. 모든 것은 하나이며, 모든 것은 거대한 미스터리의 일부분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 일부이다. 평온이 나를 감쌌다. ‘여기는 내가 속한 곳이다. 이 일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이다.’


◉나는 항상 동물과 자연에 더 가까이 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내 스스로에게 다가갈 수 있었고 점점 더 주변의 영적인 힘과 조화되어 갔다. 자연과 함께 홀로 있는 즐거움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정말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어떤 말로도, 갑자기 예견치 못한 순간에 다가오는 아름다움과 영원성이라는 강력하고도 신비로운 지식을 전달해줄 수가 없다. 아름다움은 언제나 거기에 있었지만 진실로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순간은 몹시 드물었다. 그 순간들은 예고 없이 다가오곤 했다. 희미하게 붉어지는 동틀 녘을 바라볼 때, 푸른색과 갈색을 띤 거대한 숲의 검은 그늘이나 살랑거리는 나뭇잎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한점의 유혹적인 파란 하늘을 올려다볼 때, 어둠이 드리워지고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나무 둥치 위에 한 손을 얹은 채 탕가니카 호수의 부드러운 물 위로 흔들리는 초저녁 달의 반짝임을 바라볼 때, 바로 그 순간 영원한 아름다움을 깨닫기도 하였다.


◉ 말을 버렸을 때 다가오는 새로운 깨달음을 말로 묘사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아마도 모든 것이 신선하고 놀라웠던 어린 시절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 같았는지도 모르겠다. 말은 경험을 풍부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많은 것을 빼앗아 가버리기도 한다. 우리는 벌레 하나를 보고 즉시 어떤 특징들을 추상해내고 그것을 파리라고 분류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인지적 연습을 통해서 경이의 일부는 사라져간다. 일단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을 분류하고 난 다음에는 더 이상 그것들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지 않게 된다. 말은 합리적인 자아의 일부분일 뿐, 잠시 동안 그것을 포기하면 직관적인 자아가 좀더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 우리는 언어를 가지고 우리가 누구이며, 왜 여기에 있는가라는, 다른 생명체는 할 수 없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이렇게 고도로 발전된 지성을 가졌다는 것은, 확실히 인간 종-하느님의 존재를 믿는지 안 믿는지와는 상관없이-의 생각 없는 행동에 의해 그 존재의 지속이 위협받고 있는 다른 생명체들에 대해, 우리에게 책임이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하느님을 인정하지는 않지만 진화적 사건으로 우리가 이 세계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들이 환경에 대해 더 책임감을 가지고 행동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만약 하느님이 없다면 세상을 올바로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들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모든 것은 안전하게 ;‘하느님의 손’ 안에 있다고 믿으면서 인간적 책임감을 외면한 채 하느님만 의지하는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나는 ‘하느님은 스스로 돕는 자들을 돕는다’라고 배워왔다. 우리는 책임을 져야만 한다. 이런저런 식으로 파괴해 온 지구를 치유하고 정화하는 데 모두 자신의 역할을 해야 한다.


◉ 나는 우리의 모든 뛰어난 지성과 고귀한 포부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공격성이 침팬지의 그것과 단지 비슷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더욱 악질적이라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를 생각하였다. 인간은 기본적인 본능을 초월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욱 나쁘다.


◉ “너희의 적들을 사랑하라.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라. 너희를 증오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라. 그리고 악의적으로 너희를 이용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 “남을 판단하지 말아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 받지 않을 것이다.”


◉ 문화적 종분화는 분명히 세계 평화의 장벽이다. 우리가 ‘지구촌’보다 더 작은 집단을 중요시하는 한, 편견과 무지를 계속해서 키워나가게 될 것이다. 조그마한 집단의 부분이 되는 것은 아무런 해악도 없다. 실제로 수렵 채집 집단적 성향으로 인해 작은 집단은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또한 완전히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내부의 친구 집단을 만들어준다. 그것은 마음의 평화를 얻도록 해준다. 위험은 오직 우리 집단과 달리 생각하는 다른 어떤 집단 사이에 날카로운 선을 긋고, 도랑을 파고, 지뢰밭을 만듦으로써 생긴다.


◉ “분노 위에 태양이 지도록 내버려두지 말라”


◉ 인간의 사악한 행동이 침팬지의 공격적인 행동보다 훨씬 더 악할 수 있듯이, 이타적이고 자기 희생적인 행동 또한 유인원들의 이타적 행동보다 훨씬 더 영웅적일 수 있다. 이미 보았듯이 침팬지는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어려움에 처한 동료의 즉각적인 필요에 응답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정교한 지성으로써 자신이 감당해야 할 당시의 대가 뿐만 아니라 장래의 대가들을 다 알면서도 희생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인간분이라고 확신한다.


◉ 나는 우리의 일부분인 정신 또는 영혼이 지속될 것이라는 점을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죽음 자체를 두려워한 적은 없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죽어가는 과정이다. 다른 사람들도 아마 마찬가지일 것이다. 죽음은 너무도 자주 질병이나 고통과 관련되며, 오늘날에는 온갖 튜브들고 약물로 생명을 유지시키는, 죽음에 대해 존엄하지 못한 현대적인 병원 치료와 연결된다. 그것도 삶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한 방식이다. 나는 우리 모두가 아마도 돌연사를 바라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때가 오면 이 세상을 빨리 떠나고 싶은 것이다.


◉ 자신이 자라온 배경과 문화와 직접적인 환경을 넘어서는 능력은 위대한 영적 지도자들과 성인들의 변함없는 특징이었다. 우리가 도덕적 진화를 가속화하고 인간의 운명에 조금이라도 빨리 도달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일이지만 결코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인간 존재로부터 성인으로 진화해야만 한다. 당신과 나 같이 범상한 사람들은 성인, 적어도 작은 성인이 되어야만 한다. 가장 위대한 성인과 스승들도 초자연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우리처럼 살과 피로 이루어졌으며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들도 우리처럼 숨쉴 수 있는 공기와, 비록 많은 양은 아닐지라도 마실 것과 먹을 것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영적인 힘, 신을 믿었다. 바로 이 믿음이 ‘그 안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움직이고 존재할 수 있는’ 위대한 영적인 힘에 닿을 수 있도록 했다. 그들은 그러한 에너지로 살아갔고, 이것을 깊이 호흡하여 피 속에 흐르게 하고 그로부터 힘을 얻었다. 우리 모두는 그들의 삶 동참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 나는 우리 인간들이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도덕적인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너무 나도 잘 알고 있듯이,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침팬지들을 관찰했고, 내 손으로 오래 전 석기 시대 조상들의 뼈를 다루어 왔다. 나는 언제부터 우리가 수백만 년의 오랜 세월을 거쳐 여기까지 왔는지를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향하고 있는 방향이 어디인지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모든 인간들이 진정한 성인이 될 날을 수백만 년이고 기다리고 있을 여유가 없다. 적어도 지금과 같은 속도로 환경을 파괴한다면 말이다. 그래서 나는 단지 한 사람 한 사람이 조금씩이라도 더 성인다워지도록 노력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분명히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 앞으로 중요한 과제 중 특히 의학과 수의학도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살아 있는 동물을 사용하는 실험을 대신할 수 있는 대안을 찾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동물 실험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시각을 가져야 한다. 유감스럽지만 항상 어느 정도의 동물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관행이 비윤리적이라고, 그리고 하루 빨리 그러한 관행을 근절시켜야 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과학이 동원할 수 있는 그 경이로운 지적 능력을 동물 실험을 없애는 작업에 모아야 한다. 불가능한 것을 성취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찬 인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우리는 희망을 가져도 될 것이다.

동물들이 필요 이상으로 겪는 고통의 상당 부분은 물론 과학이 책임져야 하기는 하지만, 동물을 학대하는 잘못은 과학자들만 범하는 것은 아니다. 수십억의 동물들이 식용으로 밀집 사육되는 과정에서 형언할 수 없는 고통, 공포, 비참함을 경험하고 있다.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축사나 나무 상자 안에서, 도살장으로 운반되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는 과정에서, 그리고 가장 심하게는 도살장에서조차 그들은 고통을 받는다. 야생동물들은 사냥을 당하고, 덫에 걸리고, 독에 중독된다. 살아 있는 동물을 교역하는 과정, 서커스나 쇼를 위한 훈련 과정, 또는 애완용 동물 산업에서 다양한 종의 동물들이 무시무시한 착취를 당하고 있다. 그리고 무수한 ‘짐을 나르는 동물’들이 야만적인 학대를 받고 임T다.

지난 40년 동안 동물의 밀집 사육이 급증하였다. 최대 생산을 위해 살아 있는 존재들에게 조립 라인 방식을 적용하는 이러한 유형의 사육은, 거대 기업들에 의해 소농들이 밀려나면서 널리 채택된 것으로 농업의 산업화를 의미한다. 나는 피터 싱커의 책 ‘동물 해방’을 읽고 이러한 사실을 처음 알았는데, 그 책에는 새로운 사육 방식이 매우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암탉들은 ‘배터리 사육법’의 경우에는 가로 41센티미터, 세로 46센티미터의 우리 안에 다섯 마리씩 넣어지기 때문에 가끔 동족을 공격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부리를 자르는데, 거꾸로 한 줄로 매달아서 기계에 통과시켜 부리를 자른다. 이러한 절단은 매우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부리의 잘린 부분은 평생 동안 감각이 매우 예민한 채로 남아 있게 된다. 돼지들의 경우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우리에 넣어진다. 오물이 쉽게 씻겨내리도록 고안된 슬레이트 바닥에 서 있기 때문에, 그들의 발은 상처가 나고 변형되며, 다리는 운동 부족으로 약해져서 도살장으로 가는 길에 체중을 견디지 못하고 부러지는 일도 허다하다. 새끼를 낳는 암퇘지들은 철로 된 고리로 고정되어서 문자 그대로 움직이지 못하며 실수로 새끼를 짓누르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예민한 코를 가진 돼지들에게 가장 끔찍한 악몽은, 인간의 둔한 후각으로도 고통스러운 배설물의 악취와 암모니아 냄새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식육용 송아지들은 돌아설 수도 없을 정도로 작은 우리에서 키워진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고기를 하얗게 만들기 위해, 그들은 계속 어두운 곳에서, 그리고 철분을 섭취하지 못하도록 관리된다. 철분을 섭취하려는 그들의 열망은 너무도 강해서 자신들의 소변을 마실 정도라고 한다.

고기 먹는 것에 대한 나의 태도가 갑작스럽게 완전히 바뀌었다. 접시에 놓여 있는 고기 한 조각을 볼 때에, 그것이 나를 위해 죽임을 당한 한때 살아 있던 피조물의 한 부분으로 보였고, 공포, 고통,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식욕을 떨어뜨렸다. 그래서 고기를 먹지 않게 되었다. 채식주의자가 되면서 부가적으로 좋았던 일은 건강이 좋아졌다는 사실이다. 몸이 훨씬 가볍게 느껴졌고, 깨끗한 에너지로 가득 찬 것 같았다. 한때는 살아있었던 그 피조물이 그랬던 것처럼, 나쁜 쓰레기들로부터 좋은 단백질을 걸러내야 하는 작업을 하느라 내 몸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었다.

식용 동물의 사육은 다른 문제들과도 연관된다. 수백만 평의 열대 우림이 목우를 위한 목초지로 사용하기 위해, 혹은 사료 작물을 재배하기 위해 베어지고 있다. 아마존의 원주민들이 이로 인해 삶의 터전인 숲을 잃는 문제를 제외하더라도, 지구 전체로 보아서도 이는 매우 소모적인 일이다. 1200평의 기름진 땅은 227-272킬로그램의 식물성 콩단백질을 생산시킬 수 있다고 한다. 이 땅에 식육용 동물을 먹이기 위한 작물을 재배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18-25킬로그램의 동물성 단백질만을 얻을 수 있다.


◉ 아인슈타인 - “모든 살아 있는 피조물들과 아름다운 자연 전체를 포괄할 수 있도록 동정심의 범위를 넓힐 것”


◉ 슈바이처 - “우리는 동물까지도 포함하는 경계 없는 윤리를 필요로 한다.”


◉ 마하트마 간디 - “동물들을 대하는 태도를 가지고 그 나라 사람들을 판단할 수 있다.”


◉ 피타고라스 - “지구는 풍부하여, 깨끗한 음식, 피를 흘리거나 도살을 필요로 하지 않는 진수성찬을 마련하고 있다. 야수들만이 고기로 배룰 채운다.”


◉ 조지 버나드 쇼 - “우리는 싸우지 않으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은 것으로 배를 채우고 있다”


◉ 벤자민 프랭클린 - (동물을 먹는 것에 대해) “정당한 이유가 없는 살해”


◉ 레오나르도 다빈치 - “묘지, 그들이 먹은 동물들을 위핸 공동 묘지”


◉ 내 생각에 잔인함은 인간의 죄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이다. 살아 있는 피조물이 감정이 있고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피조물들에게 고통을 가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죄를 짓는 것이다. 그 피조물이 인간이건 동물이건 간에 스스로를 잔인하게 만드는 것이다.


◉ 슈바이처 -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단순히 기도만을 하지 않는다. 그는 생명을 지키기 위한 전투에 자신을 투신할 것이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도 주변 생명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똑같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 헨리 란트비르트 - “심하게 상처를 받은 마음, 절망에 빠진 영혼이 어디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가? 인간이라는 존재 안에 무엇이 존재하기에 그러한 황폐함과 절망에서도 생존할 수 있게 되는 것인가? 그것은 하느님일 수밖에 없다... 하느님 외에 누가 그럴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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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들은 남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납득할 수 없어한다.


■ 나의 인생에 있어 '나'는 당연히 행복해야 할 존재였다. 나라는 개체는 이다지도 나에게 소중한 것이었다. 내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해서 꼭 부끄러워할 일만은 아니라는 깨달음, 나는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그랬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내가 내 삶에 대해 졸렬했다는 것, 나는 이제 인정한다. 지금부터라도 나는 내 생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되어 가는 대로 놓아 두지 않고 적절한 순간, 내 삶의 방향키를 과감하게 돌릴 것이다. 인생은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생애를 걸고라도 탐구하면서 살아야 하는 무엇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 가난한 삶이란 말하자면 우리들 생활에 절박한 포즈 외엔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는 삶이란 뜻이다.


■ 해질 녘에는 절대 낯선 길에서 헤매면 안 돼. 그러다 하늘 저켠에서부터 푸른색으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프거든...


■ 철이 든다는 것은 내가 지닌 가능성과 타인이 지닌 가능성을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에 다름 아닌 것이다.


■ 소소한 불행과 대항하여 싸우는 일보다는 거대한 불행 앞에서 차라리 무릎을 꿇어 버리는 것이 훨씬 견디기 쉬운 법이다.


■ 인생이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주리는 정말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억울하다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쉽다. 상처는 상처로밖에 위로할 수 없다.


■ 사랑이란 그러므로 붉은 신호등이다. 켜지기만 하면 무조건 멈춰야하는 위험을 예고하면서 동시에 안전도 보장하 붉은 신호등이 바로 사랑이다.


■ 사랑은 그 혹은 그녀에게 보다 나은 ‘나’를 h여주고 싶다는 욕망의 발현으로 시작된다. ‘있는 그대로의 나’보다 ‘이랬으면 좋았을 나’로 스스로를 향상시키는 노력과 함께 사랑은 시작된다. 솔직함보다 더 사랑에 위험한 극약은 없다. 죽는 날까지 사랑이 지속된다면 죽는 날까지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절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 주지 못하며 살게 될 것이다. 사랑은 나를 미화시키고 나를 왜곡시킨다. 사랑은 거짓말의 유혹을 극대화시키는 감정이다.


■ 사랑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자에게는 스스럼없이 누추한 현실을 보여 줄 수 있다. 얼마든지 보여 줄 수 있다. 그러나 사랑 앞에서는 그 일이 쉽지 않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이름의 자존심이었다.


■ 세상의 숨겨진 비밀들을 배울 기회가 전혀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몹시 불행한 일이다. 그것은 마치 평생 동안 똑같은 식단으로 밥을 먹어야 하는 식이요법 환자의 불행과 같은 것일 수 있다.


■ 인생은 짧다. 그러나 삶 속의 온갖 괴로움이 인생을 길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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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티잔(courtesan), 얼핏 보기에 이 단어는 매우 음란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머리에 스치는 이러한 다소 외설적인 상상으로는 이 단어의 함축된 의미를 다 헤아릴 수 없다. 어떤 사전에는 코르티잔을 '부유한 남자들이나 귀족들과 관계를 가진 창부(娼婦)'였다고 하고, 또 어떤 사전을 보면 '정부(情婦)'라고 나와있다. 하지만 코르티잔은 양쪽 모두였거나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코르티잔을 단순히 창부였다고 말할 수 없다. 루이 15세의 애첩이었던 마담 뒤바리가 한때 상류층 남자들을 상대로 매춘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후에 백작부인이 된 모가도르는 젊었을 때 사창가에서 일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코르티잔이 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출세였고 높은 삶으로의 도약이었다. 엄밀히 말해, 코르티잔은 사창가에 살거나 거리로 나가지 않았고, 엄밀히 말하자면 뒤에서 조종하고 착취하는 포주가 없었다. 또 코르티잔들은 정부나 아내에 가까운 좀더 지속적이로 친밀한 역활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받은 대가는 응분의 보상 차원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루이 15세는 마담 드 퐁파두르를 만난 지 얼마 안되서 현재 프랑스 대통령의 거처인 엘리제 궁을 포함하는 사유지를 하사했고 이후에서 여러차례 부동산을 받았다. 카스틸리오네 백작부인이 리자드 윌리스와 12시간을 보내는 화대로 1백만 프랑을 받기도 하였다. 성공한 코르티잔은 그들이 소유한 시내 아파트와 성과 별장에 값비싼 장식을 하고 화려한 드레스와 보석들로 치장을 하기도 했다. 그들에게 이런 패물은 성공의 상징이며 은퇴 후의 자금이기도 했다.


코르티잔은 유부남의 숨겨둔 정부와는 달랐다. 코르티잔들은 그들이 치장하고 다니는 보석과 마찬가지로 자랑거리였다. 그들은 버젓이 연인과 함께 공공장소와 사교장소, 카페, 레스토랑, 무도회장을 드나들었고, 집에서 그의 친구들을 접대하기도 했다. 19세기 실엄가들 사이에서는 코르티잔을 두는 것이 일종의 예의였다. 동성애자들까지도 그렇게 해야 체면이 서는 것처럼 느꼈다. 하지만 정부와 코르티잔의 가장 큰 차이점은 코르티잔이 유명인사였다는 사실이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인기 연예인인 셈이었다. 그들은 왕, 섭정, 황제, 관료, 자본가, 작가와 화가의 친구로 염문을 뿌리고 다녔고, 그들의 옷차림과 행동은 계속해서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끊임없이 주간지의 기삿거리가 되었다.


코르티잔은 수준 높은 교양을 갖추어야 했다. 그들은 상류층의 말투와 옷입는 법, 유행하는 헤어스타일, 우아하게 걷는 법, 춤과 피아노 연주를 배워야 했다. 식사 예절은 물론 궁중의례를 포함하는 여러가지 예법을 알아야 했다. 전에는 글조차 읽지 못했을지라도, 오페라와 문학과 역사에 조예가 깊어야 했다. 실제로 많은 코르티잔들은 뛰어난 지성을 보인다. 모가도르를 비롯한 일부 쿠르티잔들은 소설을 썼고, 툴리아 다라고나는 수필을 발표했으며, 베로니카 프랑코는 시인으로 인정받았다. 또 많은 코르티잔들이 자서전을 집필했다. 그들은 확실히 특출한 인물이었다. 그들이 활약하는 시기, 여성에게는 많은 제약과 통제가 있었다. 그러나 코르티잔들은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말대로 스스로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하면서 남자와 거의 동등한 위치에서 여성으로서 유례없는 지적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만일 코르티잔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현대 문학이나 현대인의 감성은 지금과 달라졌을 것이다. 보들레르의 시, 발자크, 뒤마 부자, 졸라, 플로베르, 콜레트의 소설에는 코르티잔들이 등장한다. 지금 우리 세대의 미학을 정의하고 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줄거리의 중심에 한 코르티잔이 있다. 또 다수의 오페라 작품들과 연극 대본들은 모두 코르티잔의 이야기와 전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

 

♠ 그들은 현재의 시간을 스스로에게 유리하게 사용하는 한편 상상력의 영역을 확장해 미래를 내다볼 수도 있었다. 어떤 문화가 기존의 틀을 깨고 관습에서 탈피하는 대담한 전환을 할 때마다 종종 코르티잔들이 그 역사에 혼몫을 했다는 사실은, 미래보다 현재에 몰두하는 것이 시간의 진로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특별해질 수 있었을까?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의 추측에는 근거가 있다. 그들이 일찍부터 겪었던 가난과 생존에 대한 두려움은 그러한 극적인 드라마 전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충격적인 사건들, 상실감 그리고 불행을 겪다보면 인생의 매 순간이 한 방울도 헛되이 흘려 보내서는 안 되는 소중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동시에 아슬아슬한 탈출과 뜻밖의 행운으로 도식적인 줄거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적절한 타이밍이 그토록 매력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마치 종교인이 신을 갈구하듯, 또는 무신론자라면 자신의 내면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낄 때처럼 그녀를 원하게 만든다.

  이 덕목은 이론보다는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면 좀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코르티잔들의 인생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적절한 타이밍의 예 말이다. '웃음을 파는 여인‘으로 알려진 만큼 코르티잔들은 적절한 타이밍으로 남자를 웃게 해줄 수 있어야 했다. 또한 옷을 잘 입기 위해서도 어떤 옷을 언제 입어야 하는지 알아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절묘하게 때를 맞춰서 희롱을 걸어야 했다. 이처럼 코르티잔들이 하는 거의 모든 일에는 타이밍이 요구되었다.

 

♠ 흔히들 코르티잔들이 부유한 남자들을 유혹하기 위해 치장을 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많은 여인들이 미를 창조하고 소유하기 위해서 부를 추구했다.


♠ 당돌함은 허세나 오만함이 지니게 마련인 단점과는 거리가 멀다. 허세가 그 밑에 감추고 있는 두려움을 암시하고, 오만함은 씁쓸하고 불쾌한 원망을 담고 있지만 당돌함에는 그런 어두운 울림이 없다. 그보다는 순간적으로 사람들을 긴장시키고 또 분위기를 살리기도 한다.


♠ 당돌함이 진정한 매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교육을 받은 지성과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해리엇은 단순히 무례한 것이 아니라 예의의 목적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상대에게 적절한 예우를 갖추도록 요구했다.


♠ 그런 보잘것없는 삶은 사람들의 사기를 꺾어놓을 수 있다. 그 과정은 눈에 보이지 않고 서서히 진행된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상황에 직면하면 다른 대안을 찾지 못하고 체념해 버린다. 일만 하다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자포자기해서 자기 안에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외면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가능성이 희박하다 해도 그런 운명에서 탈출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자면 사회에서 받은 크고작은 모욕과 수치와 냉대에 대한 반동으로 생길 수 있는 예리한 통찰력과 비상한 의지가 필요하다.


♠ 빛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고들 말한다. 아마 그 이유는 사랑을 하면 종종 빛으로 가득 찬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얼굴이 빛나는 지도 모른다. 스탕달은 그러한 심리 상태를, 나뭇가지를 암염 갱 속에 던져두었다가 두세 달 후에 꺼내면 ‘반짝이는 결정에 덮여서’원래의 나뭇가지는 더 이상 알아볼 수 없게 되는 과정에 비유했다. 그런 점에서 사랑하는 사람은 빛의 근원일 뿐 아니라, 상대방의 욕망과 눈부신 에로스의 아름다움을 반사하는 거울이 되는 것 같다.

 

♠ 그녀의 사랑스러운 미소에 루이 왕은 첫눈에 반해버렸다. 그녀의 얼굴은 너무나도 청순하고 천진난만해서 어려웠던 지난 날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 당돌함과 매력이라는 덕목을 비교하자면 후자가 좀더 강력하다. 잔느의 미소는 대단히 매력적이었다고 한다. 그녀의 미소는 순진함을 넘어서 순결하게까지 보였다. 하지만 순진함만으로는 왕을 유혹할 수 없었다. 그녀는 청순하고 때묻지 않은 듯이 보였지만 알고 있는 것을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성적 지식은 침대에서뿐 아니라 몸가짐과 눈의 표정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미소가 번질 때 일어나는 표정의 미묘한 변화를 비롯한 사소한 동작 하나하나에서 그녀가 육체적인 경험이 풍부하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것이다.


♠ 변화에 대한 대응책, 또는 방치되고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에서 오는 외로움에 대한 반동으로 고집이 세졌을 것이다. 그것이 바람직한 결과를 낳기도 했는데, 이것 역시 외로움 때문이었겠지만 그녀는 그 시대의 젊은 아가씨로서는 보기 드물게 독립심이 강했다.


♠ 부정적인 용어들이 종종 그렇듯이, 여기에도 이상한 아이러니가 생겨났다. ‘몰라토’, ‘쿼드룬’, ‘옥타룬’이라는 단어들은 강력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작용을 했다. 그 단어들이 어떠한 금기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양도할 수 없는 힘을 갖게 된 것이다.


♠ 이 책에서 필자는 모든 사회적 편견 속에서도 그렇게 빛나는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그녀들의 능력을 시대와 순간을 민감하게 인식하는 시간 감각, 아름다움을 향한 욕망, 허례허식을 무시해 버릴 수 있는 당돌함, 뛰어난 지성, 생을 즐길 줄 아는 쾌활함, 우아한 몸가짐, 사람을 끌어당기는 신비스러운 매력으로 분류하고 있다. 아름다운 외모조차 타고난 조건보다는 미를 추구하는 열정과 창조적 재능으로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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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02-07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젊은느티나무 2005-02-08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물만두님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