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


베란다에 널어둔 빨래를 걷는데
얼굴에 눅진한 어떤 기운이 느껴진다
가느다란 실 같은 아, 유령거미가
그 조그만 몸뚱이로 그 넓은 공간을
횡단하면서 이리저리 너는 참,
열심히도 사는구나

결국 사람을 먹지도 못할 거면서
보잘것없는 입으로 끊임없이 실을 토해내고
결국 눈물을 써내지도 못할 거면서
어떻게든 글씨를 세상에 욱여넣으며

살아야지, 1, 2, 3, 4, 숫자대로 점을 이어서
그렇게 닿을 수 있는, 내가 알 수 없는,
아주 작고 또 거대한 사물들에게 살아있다고
슬픔은 너만의 것이 아니라고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하나의 실로
이어져 스러지는 우주의 가스 구름으로
흐를 거라고 밤새, 유령의 집을 지을
거미에게 자그맣게 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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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시(散文詩)


산문시를 혐오한다 아주 매우 많이
요즘의 시는 거의가 다 산문시인데
나는 그 시들을 볼 때마다 플라나리아(planaria)가
떠오른다 그래, 중학교 생물 시간에 배운 그 플라나리아
몸뚱이를 칼로 잘라내어도 작은 살점에서 머리가 생기고
눈이 생기고 그렇게 작은 플라나리아가 생겨버리는,
수학의 정석(定石)과 성문 기본 영어 같은 어디서 굴러먹던
시론(
) 책을 달달 외워서는 말이지, 그걸 가지고 열심히 연습하고
기출 문제 연구하듯 그렇게 대가리 터지게 시를 써
말하자면 이런 거,

구관조를 씻기거나
고양이가 나를 먹어버렸다거나
쓰레기가 당신을 줍는다거나

리얼리즘의 시대는 진작에 가버렸다구
이제 일상을 비틀어서 환상의 세계를 창조해야지
언제까지 현실 묘사에 목을 매고 살 것이냔 말이지
자신이 창조주가 되어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 내던가

이딴 소리를 지껄이면서, 플라나리아가 득시글거리는
산문시를 기계처럼 찍어내면서, 야, 그래서 네가 쓰는 시가
이 세계의 진보에 발가락의 티눈만큼이라도 기여를 했느냐고
너의 구멍 난 심장에 손가락이나 넣어보고 말을 해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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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文身)


너의 시는 미친 여자애의
웅얼거리는 소리 같아
어긋난 말들의 천치(天痴)

너와 너의 시 선생은 판박이지
너, 판박이 알아?
내가 어렸을 적에 말이지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들
얇은 스티커에 그려진 그거
팔에다 문대기면 그대로 그려져

시간이 지나면 닳아 없어지는
그딴 판박이 따위
차라리 너만의 문신을 새겨

먼바다를 향해가는 조타수
언젠가 정착하길 바라면서
작지만, 무거운 닻 모양은 어때?
검푸른 잉크로 한 땀 한 땀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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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시


망설이다가
하릴없이 걷다가
쓰린 속을 부여잡고도 쓴다

마음에 들지 않은 애새끼
얼굴을 괜히 쓰다듬어보듯
그래도 나가서 잘 놀거라
짐짓 따뜻한 말 한마디

그렇게 뒤돌아서면
살짝 얼굴을 찡그리면서
괜히 내보냈나 싶어져
많이 쓰다 보면 나아지겠지
그런 우스운 말은 하지 말아

모든 시는 실패한 시야
누군가 슬며시 웃으며 말했어
그렇군,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언제고 다시 두드려 보게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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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골당


네 아빠는 명이 짧았지 그렇게 일찍 갈 게 뭐냐
엄마는 납골당에 올 때마다 그 말을 한다

남자는 납골당에 들어서자마자 처절하고 격렬한
울음을 쏟아내었다 나는 남자가 편하게 울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하지만 그는 단 5분 만에 울음을
그치고 편안해진 얼굴로 납골당을 떠났다 아마도
그의 눈물이 짜디짜질 때쯤, 다시 이곳을 찾을 것이다

스물셋 나이의 아가씨는 엄마와 함께 그곳에 잠들어 있다
엄마가 먼저 떠난 길을 한 달 후에 딸이 따라갔다
그곳에서 엄마와 함께 잘 지내렴
나는 위패(位牌)에 적힌 글귀를 몇 번이고 다시 읽어 보았다
이제 홀로 남은 그가 잘 살아주길 바라면서

비쩍 마른 몸으로 흔들흔들 그네를 타던 아빠를 기억한다
아빠는 소설을 하나 쓰고 싶어했는데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나는 영화를 한 편 찍고 싶었지만 여적지 아무것도 찍지 못했다

쓰여지지 않은 이야기를 생각한다 어떤 인생의 이야기는
속으로 삼켜질 뿐이고 옷장 속에서 미소를 짓는 해골처럼
나는 옷장문을 열었다가 가만히 도로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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