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딱 이맘 때쯤이었던 것 같다. 11월 초, 아직은 가을이 남아있다 싶었는데 갑자기 추위가 몰아닥쳤다. 왜 그날 두터운 외투를 입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덜덜 떨면서 굿을 보러 갔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 '공연 예술의 이해'라는 과목을 듣고 있었다. 강사 선생이 그날 수업을 끝내면서, 굿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한번 가보라고 이야기를 꺼냈다. 좀처럼 보기 드문 진적굿이라면서, 만신의 집주소를 알려주었다. 만신과는 개인적으로도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던지, 자신의 이름을 대면 대접도 괜찮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진적굿. 무당이 자신의 몸주신과 모시는 여러 신들에게 올리는 감사의 굿이다. 무당은 일반적으로 재갓집이라고 하는 자신의 고객들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굿을 하는데, 이 진적굿은 무당 자신이 오직 스스로를 위해서 하는 굿이다. 나는 그 때까지 굿은 보기는 했어도, 진적굿은 본 적이 없었다. 아무래도 무당 개인을 위한 굿이다 보니, 그 굿은 무당의 재갓집 신도들, 신딸과 신아들, 개인적 친분이 있는 이들에게만 참석이 한정되어서 그런 면도 있었다.
굿을 처음 본 것은 대학 시절, 종교학 강의를 들을 때였다. 중간 보고서 과제가 타종교 체험을 해보고, 그걸 써오라는 것이었다. 마침, 운현궁에서 명성왕후 해원굿(한맺히고 원통한 것을 푸는 굿)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굿을 보러 갔었다. 정말이지 그 굿은... 내게는 진정한 문화 충격이었다. 타살거리('거리'는 연극의 '막'개념이라고 보면 된다. 굿은 여러 거리로 이루어지는데, 타살 거리는 돼지나 소를 제물로 바치는 굿이다)에서 커다란 돼지를 삼지창으로 세우는 것이며, 무당이 생고기를 씹어먹는 것은 놀라웠다. 온갖 화려한 무복으로 갈아입으면서 춤을 추고, 공수를 내리는 것까지 모든 것이 흥미롭고 기이했다. 그 굿은 샤머니즘에 대한 내 관심의 시작점 같은 사건이었다.
만신의 집은 인천에 있었다. 한국 전쟁 이후, 한강 이북의 강신무들이 대거 내려와서 정착한 곳이 인천과 부평, 그 근방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황해도 굿의 명맥을 있는 이들이었다. 내가 보기로 한 진적굿의 K만신은 황해도 굿의 대가인 김금화의 신딸로, 나름 이름있는 무당이었다.
마당에 들어서자, 커다란 솥에서 연기가 나고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면서 분주히 움직였다. 내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서있자, 꽤 나이든 여성이 굿을 보러 왔냐고 물었다. K 만신이었다. 만신은 풍채가 아주 좋았다. 뭐랄까, 목소리까지 걸걸해서 여장부 같았다. 나는 강사 선생의 이름을 대고, 그 소개로 왔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배고프지 않냐며 식사부터 하라고 했다.
만신이 나를 데리고 2층에 올라가니 무척 큰 주방에서는 음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만신은 주방에서 일을 하는 사람에게 상을 좀 차려오라고 일러두고는, 나를 안방으로 안내했다. 안방에는 웬 중년 남자 하나가 드러누워서 자고 있었다.
"뭔 잠을 이렇게 늘어지도록 잔다냐. 어여 일어나."
남자는 턱이 떨어질 정도로 하품을 하더니, 겨우 일어나 앉았다. 어제 밤새도록 굿을 뛰느라 그랬다면서 눙쳤다. 가만히 얼굴을 보니 낯이 익었다. 명성왕후 해원굿에서 본 박수 무당이었다. '아이구, 아재요, 여기서 또 보는구만요', 라고 속으로만 말했다. 7, 8년이나 흘렀을까, 박수 아재는 그다지 늙지도 않은 것 같았다. 박수 아재가 방을 나가고나서 방에 앉아있으려니, 이런저런 음식들이 차려진 밥상이 들어왔다. 정말 강사 양반이 친분이 대단한 모양이네 싶었다.
점심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한 터라 허기가 졌는데, 밥상이 꽤나 반갑게 느껴졌다. 밥을 얼마나 좀 먹었을까, 안방으로 손님들이 들어왔다. 만신에게 인사를 하러 온 젊은 남녀였는데, 아무래도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다 싶어서 밥상을 들고 나가려 했다. 그걸 보더니 만신은 그냥 있으라는 손짓을 했다.
"우리 일가붙이인데, 이제 막 결혼해서 인사하러 온 거."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 두 사람의 얼굴 표정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만신은 그들에게 덕담을 건넸다. 남자는 자리를 뜨기 전에, 굿 잘 보고 가시라며 예의바르게 인사를 챙겼다. 나는 어색하게 인사를 받았다. 그러고 나서 밥상을 주방에 갖다주고는 굿당이 있는 1층으로 내려갔다.
20평 남짓한, 그리 크지 않은 굿당에는 사람들이 조금씩 오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가득 찼다. 나는 나이든 할머니들이 모여있는 구석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얼마 안있어, 만신이 무복을 차려입고 와서 굿을 시작했다. 신이 실리자, 만신의 모습은 아까 내가 보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이 되었다. 큰소리로 사설(굿에서 무당이 읊는 이야기, 각각의 거리마다 내용이 달라진다)을 쏟아내며, 춤을 추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입구에 자리한 가구를 열더니, 무복들을 모두 꺼냈다. 나는 들어올 때 본 그것이 신발장인 줄 알았는데, 무복이 들어있던 옷장이었다. 무슨 화수분같이 엄청난 무복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많은 옷들은 만신이 무당으로 살아온 오랜 세월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만신은 곧이어 제단앞에서 빙빙 돌았다. 무당이 도는 방향은 반시계 방향으로 그것은 인간의 시간이 아니라 신의 시간으로 진입하는 것을 뜻한다. 만신은 앉아있는 사람들에게도 춤을 추라고 권유했는데, 내 옆에 앉아있는 할머니들이 하나둘씩 일어나더니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는 곧 그들이 그냥 평범한 동네 할머니들이 아니라, 만신의 동료였던 은퇴한 무당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 근처에 앉은 중년 남자는 나와는 달리 그들과 같이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나는 춤을 출 생각도 없었고, 그 자리가 한편으로는 불편하게 느껴졌다. 자리를 입구 쪽으로 옮겨앉았는데, 얼마 안있어 한무리의 사람들이 입구로 쏟아져 들어왔다. 녹음기, 캠코더, 사진기를 들고 온 사람들은 굿을 연구하는 사람들과 관련학과의 학생들, 사진가들이었다. 비좁은 굿당은 발디딜 틈이 없었다. 이런 큰굿에는 늘 그런 사람들로 붐비곤 했다.
탁한 공기 때문인지 머리가 아파왔다. 바람을 쐬려고 마당으로 나왔다. 마당에는 철제 기름통에서 장작불이 타고 있었다. 밖은 어둠이 가득했다.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향해가고 있었다. 굿은 밤새도록 이어질 터였다. 차가운 겨울의 공기가 머리를 더 아프게 만드는 것 같았다. 이방인. 나는 내가 그곳에 어울리지 않는 손님이라고 느꼈다. 나는 만신이 모시는 그 많은 신들을 믿는 재갓집 사람도 아니었고, 또 무교(巫敎)를 연구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굿당에서 그렇게 흥겹게 춤을 추던 구경꾼도 되지 못했다. 굿의 그 무엇이 그토록 꽤나 긴 시간동안 나를 이 자리까지 오게 만들었던 것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은 기이한 매혹이었다. 나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그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그 매혹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음을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그 세계는 관찰자나 연구자의 시선으로 이해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서만 알 수 있는 세계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가진 신앙의 교리에서는 허락되지 않는 일이었다.
나는 대문을 나섰다. 골목길에는 들어올 때 보았던 붕어빵 장수가 그때까지 있었다. 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졸고 있었다. 차갑게 식은 붕어빵들의 수많은 눈들이 왠지 외롭게 보였다. '천원에 열 개'라고 적힌 판지가 바람에 펄럭였다. 겨울로 들어가던 초입의 11월, 오래전 어느 해의 그 굿이 내가 마지막으로 본 굿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