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강의실 301호는 내가 무척 좋아하는 강의실이었다. 학교에 처음 들어와서 '영화의 이해'강의를 들은 것도 이 강의실이었다. 301호 강의실은 커다란 스크린과 프로젝터, 그리고 영사실까지 갖춘 강의실이었는데, 본관 건물의 협소함 때문에 이 강의실을 쓰려는 여러 학과의 강의들로 늘 북새통이었다. 강의실 의자 가운데 몇개는 늘 고장난 상태였다. 내가 학교를 오랫동안 쉬었다가 복학하고나서 와보니, 그동안 못쓰는 의자가 늘어나 있었다. 그래도 나는 그 강의실이 참 좋았다. 적당한 경사각을 가지고 있었고, 창가에는 햇볕이 잘 들었다. 뭔가 안온한 느낌을 주는 강의실이었다.
3학년 2학기 때였던 것 같다. 금요일 오후에 서양 미술 비평 강의를 그 강의실에서 들었는데, 그 강의가 끝나고 강의실이 비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보고 싶은 DVD를 가지고 와서 혼자 그 강의실에서 영화를 틀어놓고 보았다. 영화관 스크린 보다는 좀 작지만, 그래도 영화관 혼자 전세내고 보는 느낌은 들었다. 정말이지 학교 다니면서 제일 행복했던 순간이었던 것 같다. 그때 츠지모토 노리아키의 다큐 '미나마타(1971)'도 보았다. 자막이 없었지만, 일본 드라마에 미쳐서 살았을 때라 대충 일본어를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다큐의 끝무렵이었나, 자신들의 잘못을 결코 인정하지 않고 그 어떤 배상도 거부하는 회사 측 관계자들을 향해 피해자 가족들이 절규하는 장면이 있었다.
"あなたが にんげんですか!"
'당신들, 인간 맞아? 인간이 맞냐구!'라고 한 여성이 분노로 외쳤다. 나는 드문드문 알아듣던 일본어를 그 부분에 이르러서는 마치 동시통역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고통을 호소하는 한 인간의 진정성과 정의로운 분노, 그 절절함이 가슴을 후벼팠다.
'지옥의 묵시록(1979)'은 공중파에서 이전에 보았는데, 그래도 큰 화면에서 한번 다시 보고 싶어서 틀었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에 나오는 '발퀴레의 기행'이 흐르는 가운데 미친듯이 쏟아지는 공중 폭격 장면을 보고 나니, 그냥 혼이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점심도 먹지 못한 상태라 크래커를 하나 뜯었는데,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영화 속의 장면장면들을 보고 있노라니, 속이 메슥거렸다.
영화는 온갖 기행과 광기의 집합체 같았다. 이 영화는 결코 분석 따위가 필요한 영화가 아니다. 영화 전편에 걸쳐서 흐르는 그 미쳐버릴 듯한 기운은 보는 사람의 뇌수를 따라 흐르면서 전염되는 것 같았다. 이런 느낌을 베르너 헤어초크의 '아귀레, 신의 분노(1972)'에서도 받았는데, 나중에 그 영화 자료를 찾으면서 알게 된 사실은 실제 촬영 현장도 거의 혼돈과 파괴, 광기로 점철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영화는 그렇게 가장 근원적인 감정에 접근하기에 좋은 도구이기 때문에, 레니 리펜슈탈은 '의지의 승리(1935)'를 만들어 히틀러에게 날개를 달아줄 수 있었다.
시간이 좀 흐르자, 화면 속에서 마틴 신이 맡은 윌러드 대위는 커츠 대령을 찾기 위한 여정을 지루하게 이어가고 있었다. 뭔가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마침내 말론 브랜도가 분한 커츠 대령이 나오는 장면에 이르렀다. 말론 브랜도가 보여주는 그 무성의하고 제멋대로인 연기는 대체 뭔가? 도대체 이 영화 어디에서 커츠 대령의 연기가 압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저 작자가 감독 꽤나 힘들게 했겠다 싶은 생각에 이르렀다.
실제로 말론 브랜도는 대사도 제대로 외우지 않았고, 자신이 생각해낸 대사로 연기하기 일쑤였으니 코폴라는 진찌 미칠 지경이었을 것이다. 커츠 대령의 이미지를 날렵한 인물로 상정한 감독의 의도와는 다르게 말론 브랜도는 체중 관리를 하지 못해 엄청난 거구로 나왔는데, 그것이야말로 그나마 커츠 대령의 압도감을 드러내는 데에 유일하게 기여했을 뿐이다. 어떤 이는 말론 브랜도의 연기를 보고 나서 '저 사람은 진짜 공포와 두려움이 뭔지도 모르며, 그 근처에 가본 적도 없는 사람이다. 대한민국 육군 병장 예비역 누구를 데려다 놓아도 저 사람 보다 더 잘할 것'이라고 혹평했다. 나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말론 브랜도는 정말이지 커츠 대령을 대충, 무성의하게 연기했는데, 그것이 커츠 대령이 가진 본래의 무기력하고 지친 모습을 역설적으로 더 잘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영화를 보면서, 원작자인 영국 작가 조지프 콘래드가 만약 이 영화를 본다면 뭐라고 할까, 하는 데에까지 생각이 이르렀다. '암흑의 핵심'은 나에게 그렇게 인상적인 작품은 아니었다. 뭔가 어정쩡한, 말하다가 그만 둔 그런 소설이었다. 작품성으로 치자면, 내게는 콘래드의 다른 소설 '청춘'이나 '로드 짐'이 훨씬 더 인상적이고 좋았다. 불우한 집안 환경 때문에 십대 소년 시절부터 선원으로 바다를 떠돌았던 콘래드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바다가 내 인생의 하버드였다."
그의 그 말대로 선원으로 살았던 그 시간들이 소설이 되었고, 이른바 '해양소설'의 선구자가 될 수 있었다. 창작을 하려면 그렇게 평생을 두고 파먹을 뭔가는 꼭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아주 잘 보여주는 작가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콘래드가 이 영화를 봤다면 좋아했을지는 차치하고, 이런 말을 했을 것 같은 느낌마저 들게 만든다.
"나의 커츠는 저렇지 않다구!"
어쨌거나 윌러드는 커츠 대령을 처치하라는 임무를 완수한다. 마틴 신 혼자 다 해먹는 영화. 이 영화에서 가장 열심히,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는 사람. 미쳐 돌아가는 영화 촬영 현장에서 그나마 정신줄 붙잡고 자기 몫을 해내는 이 배우야말로 가장 마음에 들었다. 감독인 코폴라는 제작비 구하는 문제로 제작자들과 싸우고 난리치느라 힘들었고, 나머지 배우들과 스텝들도 고립된 촬영 현장에서 거의 아노미 상태였다고 하는 것은 영화를 보면 그냥 알게 되는 명백한 사실이다.
"어휴, 미친 영화야, 미친 영화. 죄다 미쳤어."
나는 301호 강의실의 불을 끄고 나오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코폴라는 이 영화가 '반전 영화(反戰映畫)'가 아니라고 누누히 강조했다. 그렇다. 이 영화는 광기, 그 자체에 대한 영화이며, 광기가 스크린 밖으로 흘러내려서 보는 사람마저 감염시키는 영화다. 인간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광기의 그 바닥이 어디인가를 보려면, 이 영화를 보면 된다.
* 사진 출처: vanityfai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