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여자


일주일에 세 번
어르신 목욕 차량이
아파트에 온다

즐거운 목욕 시간
만수무강하십시오
알록달록 목욕차의
쓸쓸한 손짓

늙는다는 건
약함과 수치심을
견뎌야 하는 것

휠체어의 할머니는
개운한 표정을 지으며
집으로 돌아간다

정오, 차가 떠날 무렵
구정물이 시커멓게 긴
뱀허물의 흔적을 남기며
하수구로 스며든다

메슥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겨우 집에 들어선다

아메리카노 한 잔과
잘 삭은 마늘종장아찌 한 접시
그리고 커피 사탕 2개

이상한 초여름의 식탁
수도승처럼 바투 자른
머리는 아직도 자라지 않았다
살아있으니, 괜찮아
늙은,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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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 링크: 개별난방 공사에 대해 생각함 3 
https://blog.aladin.co.kr/sirius7/15607635



  며칠 전, 아파트 입구 게시판에 입주자대표회의 결과 공지문이 붙어있었다. 늙다리 거수기들의 그렇고 그런 회의록. 그런데 눈길을 끄는 항목이 있었다. 보일러 기사의 계약만료에 관한 것이었다. 계약만료, 해고, 잘리는 것, 뭐 다 똑같은 이야기다. 이제 아파트의 중앙난방 보일러를 담당하는 기사는 더는 필요 없다. 그 직원은 이 더운 여름에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보러 나가야 할 것이다.

  지난 2주 동안은 새 가스관을 매립하는 공사가 있었다. 개별난방을 하게 되면 이전보다 가스 용량의 수요가 엄청나게 커지기 때문에 대용량의 가스관 매설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려면 아파트 주변 도로를 죄다 파헤치고 새로 가스관을 매립해야만 한다. 포크레인이 아침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무지막지하게 도로를 깨부수는 소리를 냈다. 그런데 그렇게 파헤치는 도로는 2년 전에 새로 포장한 것이다. 도로포장 사업은 주민들의 숙원 사업이기도 했다. 그동안 낡은 보도블록은 걸을 때마다 패이고 부서져서 불편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장기수선충당금이 모일 때까지 기다려서 마침내 도로 공사를 했다. 그 공사 대금이 내 기억으로는 대략 1억 5천인지, 아무튼 2억 좀 못되는 금액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도로가 파헤쳐지고 있었다.

  공사업체에서 가스관 매설을 끝내고 다시 포장해 놓은 도로 상태는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상태가 좋았던 아스팔트는 중장비로 죄다 긁혀있었고, 보도블록은 너덜더덜한 상태였다. 이 꼬라지가 보기가 그랬던지, 입주자대표회의에서도 말이 나왔던 모양이다. 재포장 공사 입찰을 해서 다시 공사를 하겠다는 거다. 미친 거냐? 장기수선충당금이 지들 돈 아니라고 그렇게 마구 써재끼고 있었다. 웃긴 건, 이 아파트 단지에서 거기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그저 집값 오르고, 자기 집 관리비 조금 아끼면 그만인 것이겠지.

  개별난방 전환공사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던 몇몇 사람들의 목소리도 잠잠해졌다. 구청 담당자가 현장 실사를 나왔는지도 알 수 없다. 그 결과에 대해 알려주기로 했는데, 입주자대표회의의 반대편에 서 있던 사람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서는 아무런 공지문을 내지 않고 있다. 나는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문제를 제기하려면, 개별난방 전환 안건 상정과 주민 투표 과정에서 했었어야 맞다. 그때는 죄다 쌍수 들고 찬성하더니, 공사 시작하고 다 헤집어 놓는 단계에 와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다니. 그냥 등신인 거겠지.

  관리사무소에서 게시한 공용부분 개별난방 공사대금은 5억 원이 넘는다. 아마 이번 공사로 장기수선충당금은 바닥에 이르렀을 가능성이 크다. 당분간 이 아파트 단지의 필요한 공사 따위는 생각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2년 전에 도로 포장에 쓰여진 억대의 돈은 이번에 길바닥에서 녹아버렸다. 입주자대표회의의 머저리들이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었다면 이런 식의 근시안적이고 퇴행적인 사업 추진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걸 보면, 남의 돈 쓰는 일은 참 우스울 정도로 쉽다.

  요새 아파트 재활용품 분리수거장을 지나가다 보면 오만가지 물품들이 다 나온다. 아마도 다용도실에 보일러를 설치하면서, 다들 그곳에 되는대로 쌓아두었던 살림살이들을 이번 기회에 정리하는 모양새다. 나도 커다란 화분 5개와 오래전에 비싼 돈 주고 산 김치통을 버렸다. 쓰지도 않은 새 김치통은 너무 컸다. 내가 버린 것들은 내놓자마자 누군가 다 가져가 버렸다. 그렇게 이 아파트 사람들은 헌 살림살이를 정리하고, 대신에 새 가전제품과 가구를 들여놓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가전제품 회사와 가구 배달점의 큰 트럭이 드나든다.

  어제는 엘리베이터에 공사업체의 새 공지문이 나붙었다. 공사대금 마감일을 알리는 종이였다. '공사대금을 마감일까지 납부해주지 않으면, 난방이 개시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딜 가나 돈을 늦게 내는 사람들은 있는 법이니까. 그런데 그 공지문의 문구는 기묘한 협박조로 들렸다. 저런 업체에서는 돈을 못 받으면 어떤 방식으로 돈을 받아낼까? 미수금을 받기 위해 해당 세대의 문을 두드리나? 아니면 용역 깡패? 설마, 그건 아니겠지. 나는 엘리베이터가 집에 도착하기까지 그렇게 그냥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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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골함


길을 걷다가 버려진 볼펜을 보았다
허연색 볼펜 심이 삐죽이 드러난
고장난 볼펜,
글씨가 써지지 않을까 그래도

허옇게 세어버린 머리를
감추고 싶어서 숏커트를 했다
고장난 인생,
꾸역꾸역 살아지더군 그래도

너가 사는 집은 어떨까
궁금했던 적이 있었지, 젊은 날
얼굴 반반한 내 후배가
거길 갔다고 들었어
왜 내가 아니라 그 애였을까

안경을 쓴 못생긴 남자가
내 앞으로 달리며 지나가
문득, 나는 그리움이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이어달리기임을 깨닫는다
쉬었다가 다시 일어나
달리는 세월의 경주

이제 너는 어느 납골당의
조그만 유골함에 누워있지
조각난 그리움들
아픈 손거스러미의 시간
손톱깎이로 짧게 잘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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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일러, 팝콘


드디어 장맛비가 내린다
쩍쩍 들러붙는 72퍼센트의 습도

딱, 딱, 따닥, 따닥, 딱, 딱

식탁에 앉아 맛대가리 없는
인스턴트커피를 마시며
나는 낡은 집의 퀴즈를 푼다

1) 냉장고의 냉매가 흐르는 소리
2) 오래된 화장실의 타일이 깨지는 소리
3) 나무 문지방이 갈라지는 소리

아니오.

새로 설치한 보일러 연통에
빗방울이 튕기면서 내는 소리

개별난방 공사가 끝나고
아파트 보일러 기사는
한여름의 길바닥으로 밀려났다
대신에 누군가의 삶은
더럽게 윤택해졌을까

이제 비가 올 때마다
연통이 팝콘을 튀기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참으로 신경질 나게
재수 없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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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워서 쓰는 시


시를 배워서 쓰라는 말을
하는 머저리가 있었다
시를 배워서 쓰라니
시가 배워지는 것이더냐

요즘 나오는 시집을
읽으라는 말도 들었다
그 조울증 걸린 단어들의
아무말 대잔치를
나더러 연구하라는 것이냐

내가 하나 알려주지
창작을 하려는 사람은
자기의 삶에서
글을 퍼 올려야 하는 거야
달리 말하면 두고두고
파먹어야 할, 진저리나는
인생의 상처 같은 게
있어야 하는 거지

그런 것도 없으면서
무슨 글을 쓴다고 그래
자기 안에서 퍼낼 게 없으니
맨날 남의 인생을 주워 담고
다른 사람 글을 짜깁기하고
그런 등신같은 짓을 하는 거지

시를 배워서 쓰라고 하는
너 같은 머저리는
평생 문단 따라지
신세로 사는 거야

아무도 안 읽는 
너의 구석진 블로그에다
매일 시를 써내는 패기도
없으면서 누구한테 시를
배워서 쓰라는 거냐

어디서 주워들은 말로
남의 눈을 흐리지 말고
네 글과 인생이나 돌아봐
내 단언컨대
배워서 시를 쓰는 너는
시의 언저리를 맴돌다
철조망에 걸쳐진
뱀허물처럼 사라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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