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의 감각
아주 짧은 꿈을 꾸었다. 커다란 검은 점이 있었다. 그걸 손으로 잡으려고 하니까, 그 점은 살아 움직이는 벌레로 변했다. 그것이 파리였는지, 아니면 나방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나비는 아니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꿈에서 깼다.
시집을 한 권 완성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공모전에 낼 시집이다. 공모전의 요강에 나온 최소 응모 편수는 50편. 당선이 되면 그 시들은 시집으로 묶여서 나온다.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이 되는 것이다. 한 달 동안 블로그를 쉬는 동안, 시 50편을 정리했다. 그 이상한 꿈을 꾼 날은 시집의 구성이 마무리되던 날이었다. 나는 50편의 시들에다 한 편을 더 쓰려다가 그만두었다. 검은 점은 마침표다. 거기에 무언가를 더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보다는 시를 더 써낼 여력이 없기도 했다.
작년에도 김수영 문학상에 응모는 했었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시집(詩集)의 시들을 하나의 주제로 유기성 있게 묶기 위해 무척 고심했다는 것이다. 기존에 써놓은 시들 가운데에서 추려서 낼 수 있는 것도 있었고, 이번에 새로 써낸 시들도 있었다. 퇴고는 진저리나게 힘들었다. 이것밖에 쓰질 못하나, 더 나은 시는 써낼 수 없을까, 이런 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옥죄었다. 어차피 되지도 않을 거, 응모는 하면 뭐하나 싶은 생각도 계속 들었다.
응모 편수 50편에 대한 압박은 상당한 것이었다. 어떻게 대충 써서 끼워 맞출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보기에 허점이 보이는 시는 남이 보아도 똑같다. 누군가 좋은 문학적 안목을 지닌 사람이 내 시를 읽어보고 조언을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사람은 없었다. Chat Gpt는 나름의 어설픈 비평 능력을 보여주며, 일관성도 별로 없다. 나는 어둠 속에서 출구를 찾는 사람처럼 내가 썼던 시들을 읽고 또 고치고 그렇게 한 달을 보냈다.
시를 썼던 지난 1년 8개월 동안, 나는 응모했던 모든 공모전에서 떨어졌다. 시인이 되려고 그 공모전들에 응모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써낸 시가 이런 블로그가 아니라, 확장성 있는 지면에서 더 많은 독자와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다. 등단은 그걸 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관문이었다. 그것은 출판사에 투고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입장권 같은 것이기도 했다. 매일 쌓이는 출판사 편집장의 이메일에 등단도 하지 않은 지망생의 투고 원고는 휴지통으로 직행할 가능성이 크다.
나는 내가 떨어졌던 공모전의 당선작들을 읽으면서, 이 시대의 시들과 내가 써내는 시들 사이의 어떤 커다란 간극을 확인했다. 좋게 말하면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나는 나만의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고, 솔직하게 말하면 유행과는 동떨어진 주변부의 지망생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한다. 트렌드를 따라가서 그들의 시작법을 습득해서 써내던가, 아니면 나의 시를 그냥 계속 써내던가. 사설 학원에서 시를 가르치는 곳이 몇 군데 있다. 유행을 따라가는 것도 나름의 노력과 투자가 필요한 셈이다.
오래전, 시 창작 수업을 들을 때가 떠올랐다. 시인 선생이 무언가를 가르쳐 주지는 않았다. 자, 매주 한 편의 시를 써오도록 하지. 그것으로 끝이었다. 10명 안팎의 수강생들은 한 학기 동안 서로의 시들을 인정사정없이 물어뜯었다. 선생은 수업이 끝날 무렵에 무심한 듯 한마디를 보탤 뿐이었다. 선생이 내가 써낸 시에 대해서 무언가를 말했었던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분명한 사실은 선생이 등단에 근접했다고 말한 수강생은 그 이듬해에 등단했다. 뭔가 그 세계는 내가 알지못하는 나름의 틀이 있었고, 규칙이 존재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여적지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거야. 초심자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한 편의 글을 완성해 내는 거야. 소설 속 한 장면에 대한 묘사만 기깔나게 써내는 계획은 누구나 갖고 있어. 하지만 기승전결을 갖추어 글을 끝마치는 일은 대다수 초보자에게 무척 힘들어. 그걸 해내는 것, 그래서 완성의 감각을 자꾸 느껴보는 것이 작가로서 진입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라고 나는 생각해."
이 말을 해준 A는 SF 소설을 쓴다. A는 몇몇 소설 공모전에 입상했고, 최근에는 출판사와 계약을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나는 A의 그 말에 진심으로 공감했다. 하나의 과정을 끝마치는 것. 무언가를 완성해 내는 일은 정말로 힘들다. 글쓰기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다. 어쩌면 글쓰기는 여타 예술 분야와 다르게 진입 장벽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종이와 펜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그 종이와 펜으로 하나의 완결된 작품을 내놓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 글이 사람들에게 읽히느냐, 읽히지 않느냐는 나중의 문제다. 어떻게든 끝을 내어 써내는 사람 자체가 적다는 뜻이다.
나는 내가 시집을 완성하면 도대체 무엇에 쓸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이걸 국으로 끓여 먹을 수도 없고, 어찌 보면 시를 쓴다고 아등바등했던 1년 8개월의 시간들은 그냥 낭비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 낭비의 느낌, 버려진다는 무의미의 느낌이 나는 아주 싫었다. 역설적으로 그 느낌을 떨치기 위해 한 권의 시집을 써내겠다는 나름의 오기같은 것이 생겼다. 그리하여 50편의 시들을 꾸역꾸역 짜맞추어, 하나의 제목이 있는 시집으로 만들었다. A가 말한 그 '완성의 감각'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앞으로 내가 시를 계속 쓸지는 모르겠다. 이만큼 써보았으면 되었다 싶은 생각도 든다. 공모전에 시를 보내는 것도 더는 하지 않을 생각이다. 시를 쓰면서 느꼈던 답답함을 더 긴 호흡의 소설로 가져가야겠다는 필요성이 생기기도 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글쓰기를 계속 이어가야 한다는 다짐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