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글쓰기
1.
그는 40대 초반의 프로그램 개발자이다. 업계에 발을 들인 후, 나름대로 좋은 경력을 쌓았다. 운이 좋게 몇몇 대학의 강의를 맡아서 하기도 했다. 강의료가 대단한 수입은 될 수 없었지만, 그것은 그의 실력이 인정받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하지만, 회사에서 그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었다. AI의 도입으로 기업은 이제 개발자가 하던 업무를 좀 더 싼 값에 아웃소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퇴사의 압력을 더는 견뎌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더이상 버티는 것이 의미가 없는지도 몰랐다. 언제 나가느냐는 단지 시간문제였을 뿐이다.
그가 재취업으로 생각한 업종은 몸을 쓰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노가다', 막노동이었다. 그가 보기에 그의 직종에서 이전과 같은 연봉으로 재취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자리 자체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그와 같은 중견 개발자를 고액 연봉으로 써줄 기업들은 없었다. 그는 그가 앞으로 좀 더 오래 버틸 수 있는 직업이 어떤 것일까를 숙고했다. 체력에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어쨌든 지금이라도 차근차근 경력을 쌓으면, 아파트 공사 현장 같은 일자리에서 안정적인 수입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까지 사무실에서만 일해온 그가 이런 선택에 주저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가장이었고, 부양해야 할 처자식이 있었다.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쌀쌀한 초봄의 어느 날 새벽, 그는 미리 봐둔 인력사무소의 문을 두드렸다. 사무소의 소장은 그를 친절히 맞이했고, 일자리가 생기면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그는 며칠 지나지 않아 작은 공사현장에 배정되었다. 그에게는 타고난 성실성과 끈기, 일머리가 있었다. 곧 그는 정기적인 수입이 들어오는 아파트 공사현장에 배치되었다. 그가 일하는 모습을 눈여겨 본 현장 책임자들이 그를 데려가려고 애를 썼다. 그것이 5월의 일이었다. 그는 다가올 여름의 더위가 두렵지만, 또 앞으로의 일이 기대된다고도 했다.
2.
내가 들르는 문학 커뮤니티에서는 지망생들이 신춘문예 응모 원고를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화두는 글쓰기에 있어서 '생성형 인공지능(Generative AI)'의 활용 문제이다. 사용자가 입력한 프롬프트에 반응해서 작성되는 글을 문학으로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 공모전의 응모 요강에 명시되어 있듯, 현시점에서 그렇게 만들어진 글은 응모가 불가능하다. 만약에 공모전에 당선된다면, 그것은 당연히 취소된다. 주최측에서 걸러낼 수만 있다면 말이다.
'이제 우리들의 경쟁자는 인공지능이라고.'
누군가 댓글에 그렇게 뇌까렸다. 나는 그 댓글을 보고, 정말로 그럴까에 대해 생각했다. 얼핏 보기에 그 말은 맞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글을 쓰는 사람, 작가에게 있어서 진정한 경쟁자, 어쩌면 적일 수도 있는 존재는 지금도 끊임없이 글을 토해내는 AI가 아니라 독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진정으로 마음이 아팠다.'
자, 이런 문장을 독자인 당신이 읽었다고 하자. 그 옆의 텍스트에도 그와 같은 문장이 있다. 하나는 인간 작가가 쓴 것이고, 하나는 생성형 인공지능이 써낸 것이다. 같은 문장이지만, 써낸 주체가 다르다. 그 문장이 지닌 무게를 독자인 당신은 어떻게 느끼고 평가할 것인가? 우리가 알고 있듯, 인공지능은 감정이 없다. 인간만이 느끼는 감정의 개별성, 고유성이 AI에게 있을 리가 만무하다. 하지만 당신이 목도하는 것은 똑같이 쓰인 문장일 뿐이다. 인간이 경험하고, 사유하고, 느끼면서 써낸 글이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글보다 더 우월하고 가치 있다고 무엇으로 입증할 것인가?
'이 바보들아, 너희들은 대체 프롬프트 사용법도 모르면서 앞으로 무슨 글을 쓰겠다는 거냐!'
또 다른 댓글에는 커뮤니티의 지망생들에게 일갈하듯, 누군가 그렇게 휘갈긴 댓글이 있다. 아직까지 인공지능의 글솜씨라는 것은 대단한 게 아니라고. 우린 심사 위원을 믿어야 해. 그런데 모르겠다. 내년은 어떻게 될지. 그 밑에는 자조하는 듯, 그런 댓글이 달려있다. 이것은 현재 공모전을 앞둔 지망생들의 불안하고 우울한 현실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나는 언젠가 독자들이 생성형 인공지능이 써낸 글을 별다른 거부감없이 문학 텍스트로 받아들이게 될 시점이 오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오기로 예정되어 있는 미래처럼 보인다. 물론 인간 작가가 써낸 글의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옹호하는 일군의 독자들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어쨌든 시장과 자본은 그러한 독자들의 반응에 따라 움직인다. 출판사는 출판 텍스트 생성의 지분을 인공지능에 할당하는 새로운 사업 모델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시무시한 돈의 위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3.
동시집 원고를 쓰기 시작한 것이 이제 2달이 다 되어간다. 공모전의 응모 요건인 50편은 이제 마지막 1편을 남겨두고 있다. 아마도 여유 있게 몇 편을 더 써낸 후에 퇴고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다. 이제는 이것이 뽑힐 것이다, 이런 생각은 별로 하지 않는다. 그저 '쓴다'는 행위 자체에 집중하려고 한다.
어렸을 적부터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로, 나는 '글을 쓴다'는 그 명제, 행위가 가진 의미에 대해 요즘 들어서 그처럼 오롯하게 집중을 하며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것은 무슨 공모전에 글을 내서 당선이 되면 등단하고, 그래서 내 책을 내고, 이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오래전에 한문 시간에 배운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뜻이 그처럼 실감 나게 느껴지는 때도 없다. 내가 알던 이전의 세계, 인간의 온전한 힘으로 일구어내고 만들어가는 세계, 그 뽕나무밭에 물이 차오르고 있다. 시시각각, 이 물이 도대체 어디까지 차오를지 아무도 모른다. 앞서 언급한 40대 개발자의 일자리가 그 물에 떠밀려 갔다. 글 쓰는 작가 나부랭이라고 별수가 있으랴, 나는 혼자서 조소한다.
어쨌든 그래도 글을 써내고 있다. 또한 나는 여름을 견뎌낸 초보 막노동 개발자의 이야기도 기다리고 있다. 그는 아직 그 후일담을 써내지 않았다. 몸이 상하지 않게 매일 허리와 무릎에 보호대를 차고 노동 현장으로 나간다고 그는 썼다. 나 또한 나의 글을 붙잡고 거세게 밀려드는 물살 위를 불안하게 유영하고 있다. 이 인간적인 글쓰기가 어떻게 살아남는지에 대해서 언젠가 증언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