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종말


1.

  지난주에 인터넷 쇼핑몰에서 찰현미를 주문했었다. 올해 햅쌀이고, 상품평도 괜찮았다. 이전에 그 판매자한테서 보리쌀을 구매한 적이 있었는데, 그 보리쌀이 좋았다. 그래서 믿고 구매한 것인데, 받아보니 쌀의 상태가 몹시 나빴다. 도저히 햅쌀이라고는 볼 수 없는 품질이었다. 부서진 쌀들이 많았고, 검게 변한 쌀알들도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나는 일단 사진을 찍어두었다. 5kg의 쌀을 반품할 것인지, 그냥 먹을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쌀을 먹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처음에는 고객센터에 컴플레인만 할 생각이었다. 반품하기가 귀찮았다. 고객센터에 글을 남기기 전에 chat GPT한테 대강의 이런 이야기를 썼다. 이 인공지능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문제가 있는 쌀을 억지로 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일단 사진을 찍어두고, 고객센터에 반품 요청 글을 쓰세요. 제가 그 내용을 넣어 글을 작성해 드리겠습니다.' 그러고는 chat GPT는 고객센터에 보낼 글을 곧바로 화면에 띄웠다.

  나는 이제까지 고객센터 문의 글을 인공지능에게 맡겨서 써본 적이 없었다. 그런 사소해 보이는 글조차, 나에게는 온전히 내가 해내야 하는 고유한 작업이었다. 그런데 chat GPT가 써낸 반품 요청 글을 보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의 요지를 정확하게 담고 있었다. 나는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2.

  지난주에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읽었다. 내가 읽은 것은 돈키호테의 전편(前篇)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돈키호테가 모험을 떠났다가 집으로 되돌아오는 과정을 그렸다. 세르반테스가 죽기 전에 쓴 후편에서, 돈키호테는 죽음을 맞는다. 어쩐지 나는 그 후편은 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쳐버린, 아니 미친 척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기사의 죽음을 마주하는 것이 무언가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오래된 소설을 읽으면서 느낀 내 생각은 이러하다. 이 소설에는 계속해서 독자를 집요하게 잡아 붙드는 힘이 있었다. 그것은 세르반테스의 머리와 삶 속에서 끌어올린 '이야기'의 힘이었다.

  어떻게 하면 독자를 매혹시키는 그런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소설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내 머릿속에는 그 질문이 떠나질 않았다. 나에게 이야기란, 소설이 담고 있는 그 세계는 순전하게 작가의 노력으로만 이루어진 성채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인공지능의 등장 이후로, 작가의 글쓰기는 창작의 과정을 증명해 내야 하는 작업이 되어가고 있다. 각종 공모전에는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 쓴 작품은 당선이 취소될 수 있다는 경고문이 반드시 명시되어 있다. 공모전 주최 측에서 무슨 프로그램을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그것으로 창작물에 있어서 인공지능의 협업을 탐지해 낼 수 있을까? 나는 그 부분에 대해 무척 회의적이다.

  나는 내가 쓰는 글에서, 창작자가 갖는 고유한 권한, 그러니까 그 글이 만들어내는 세계를 장악하고 통제한다는 그 감각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그 어떤 방식으로도 인공지능의 도움이 들어가지 않는 나의 글을 써내고 있다. 내가 손으로 써낼 수 있을 때까지, 만약 언젠가 손의 힘이 빠지게 된다면 목소리로 녹음을 해서라도 나의 글을 써낼 것이다. 그것은 글을 쓰는 내가 결코 타협할 수 없는 나만의 글쓰기 방식인 셈이다.

  그런데 그런 나의 글쓰기, 그리고 내가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세상과 독자들에게 나아갈 수 있느냐는 문제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고 뒤흔드는 이야기를 써낼 수 있다면, 시장은 그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방식에는 관여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창작물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의 협업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며, 어떤 면에서 지금은 과도기일지도 모른다. 유전자가 생존을 위해 생명체를 선택하고 그 진화 과정을 온전히 조율해 냈다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적 관점이랄지, 그런 것이 내 머릿속을 스친다. 그러니까 이야기는 어떤 식으로든 살아남을 것이고, 인간만이 그것을 만들어내는 시대는 이제 저물고 있다는 비관주의적 미래-인간 작가의 입장에서-에까지 생각이 뻗치고 마는 것이다.

 
3.

  10월이 되었지만, 늦더위의 끈질긴 기세는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고 있다. 긴팔 남방을 입고 나갔더니, 옷장 속에 진작에 넣어버린 반소매 옷이 생각날 지경이었다. 일요일의 산책길, 나는 이미 오래전에 단종된 아이리버(iriver)의 MP3 플레이어에 유선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었다. 그 시절의 아이리버는 절대 망하지 않을 첨단의 기업처럼 여겨졌다. 작년이었나, 컴퓨터의 스피커를 사려고 검색하다가 거기에 아이리버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보고 좀 놀랐다. 메이드 인 차이나의 싸구려 스피커에 아이리버의 이름이 붙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넷스케이프(Netscape)의 'N' 자 아이콘이 깜빡거리는 인터넷 화면이 나오던 때, 나는 대학생이었다. 이제 넷스케이프란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은 '아재' 소리를 들을 것이다. 스마트폰 혁명과 인공지능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나의 세대는 나름 격동의 한 세대라고도 할 수 있다. 나는 아이리버와 유선 이어폰이 고장 나기 전에는 내다 버릴 생각이 없다. 그런 구닥다리 세대라 하더라도, 나는 지금 시대의 '이야기'가 어떻게 생존해 나갈 수 있을지 그 방식에 대해 꽤 흥미를 가지고 보고 있다. 아니지, 어쩌면 약간의 두려움과 슬픔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써내는 '이야기의 종말'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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