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아온 날들보다
1.
저는 암 말기 환자입니다. 요새 들어 글 쓰는 일이 재밌어졌어요. 그래서 공모전 이곳저곳에 글을 보내고 있거든요. 그런데 글을 너무 열심히 쓰다보니까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너무 피곤합니다. 저는 어떻게든 공모전에 당선이 되고 싶어요. 이렇게 무리를 하면서 글을 써도 될까요?
2.
나는 불교 신자도 아니면서, 정토회 회원도 아니면서, 정토회 지도 법사인 법륜 스님의 하루를 매일 읽은지가 10년이 넘었다. 사람들의 고민 상담과 같은 '즉문즉설'로 유명한 법륜 스님의 이야기를 읽는 것이 재밌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읽은 '스님의 하루'에는 시한부 환자의 고민이 올라왔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생의 시간을 글쓰기에 전심전력으로 쏟고 있었다. 나는 과연 스님이 무어라고 했을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에 대한 법륜 스님의 답변은 올라오지 않았다.
그렇게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이 무얼까 궁금해하는데, 내가 들르는 문학 커뮤니티에도 그와 비슷한 이야기가 올라왔다. 뇌종양 진단을 받은 30대 남자는 자신의 글을 공모전에 열심히 보내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든 등단해서 책을 내는 것이 목적이라고 했다. 그는 결혼했고, 아이가 있다. 그가 글을 쓰는 이유가 그 아이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이 어쩌면 유일한 유산이 될 것 같아서라고 했다.
처음에는 심드렁하게 무슨 낚시글인가 하고 읽다가, 짧지 않은 행간에서 기이한 진정성이 느껴졌다. 내가 그것을 느낀 부분은 바로 이런 구절에서였다.
'내가 살아온 날들보다 더 오래 남게 될 글을 쓰고 싶다'
아마도 글을 쓰는 이들이 보편적으로 가지는 바람이 그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내가 죽은 후에도 살아남는 글에 대한 간절한 바람. 사실 바람이라기보다 그것은 어쩌면 치열한 욕망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는, 많은 사람이 돈에 대한 열망으로 진저리를 치는 것과 작가의 글쓰기에 대한 그것의 차이는 얼마나 될지 헤아려본다.
3.
톨스토이의 단편 '주인과 일꾼(Master and Man, 1895)'에는 뼛속 깊이 돈에 물든, 사실은 환장했다고 말하는 게 맞는 부자 바실리가 나온다. 내세울 것 없는 부모 아래에서 자란 그는 오로지 돈에 대한 집착과 뛰어난 수완으로 나름의 부를 축적했다. 그에게는 매우 충실한 일꾼 니키타가 있다. 그런 니키타에게는 한 가지 단점이 있는데, 술만 마셨다 하면 도지는 술주정이었다. 일을 하면서 받는 새경을 술 때문에 탕진하느라 니키타는 아내와 자식에게도 천덕꾸러기 신세이다. 게다가 인색하고 교활한 주인 바실리는 니키타의 술병을 빌미로 새경을 깎아 싼값에 일꾼으로 부린다.
바실리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재산을 불릴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하다. 눈발이 흩날리는 날, 바실리는 미리 봐둔 숲을 사기 위해 길을 떠난다. 원래 혼자 가기로 한 길은 아내의 간곡한 권유에 따라 니키타를 마부로 데려가게 된다. 예정대로라면 바실리가 숲의 주인을 만나기로 한 장소에는 반나절이면 도착할 터였다. 그런데 이 여정은 조금이라도 더 빨리 거래장소에 도착하려는 바실리의 조급함 때문에 틀어지기 시작한다. 바실리는 이정표가 있는 대로변의 길 대신에 조금 더 빠른 지름길로 가라고 니키타에게 명령한다.
바실리가 더 빨리 그 숲에 도착하려는 이유는 그 숲을 사려는 경쟁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이들보다 빠르게 가야만 했다. 그에게는 물건의 가격을 교묘하게 후려쳐서 많은 이득을 남기는 나름의 장사 수완도 있었다. 어떻게든 그 숲을 사고 싶다. 그 숲에서 나오는 땔감이며 이런저런 것들은 자신의 재산을 더 크게 불려 줄 것이다. 바실리는 거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차 있다. 점점 더 세지는 눈발 따위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런데 지름길로 들어서면서 계속 헤매고, 날은 점점 더 어두워진다. 바실리와 니키타는 목적지와 동떨어진 인근 마을에서 잠시 멈춘다. 그들을 환대한 마을 유지의 가족은 하룻밤 유숙하고 가라고 여러 번 권유한다. 하지만 바실리는 완강히 거절한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반드시 사야 할 숲과 그것이 가져다줄 돈 생각밖에 없었다. 니키타는 눈과 추위에 얼어붙은 몸을 겨우 녹이고는, 주인의 성화에 못 이겨 다시 길을 떠난다. 니키타의 그런 모습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떠난 길은 점점 더 심해지는 눈보라 속에서 예기치 못한 파국을 향해 간다. 두 사람은 길을 잃는다. 한밤중이었고, 말은 지쳐서 움직이질 못했다. 바실리는 왜 자신이 마을에서 하룻밤을 머물지 않았을까 자책한다. 물론 그것은 돈 때문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세찬 눈발이 휘날리는 길 위에 내다버릴 지경에 이르게 만든 그 돈에 대한 집요한 집착. 서서히 덮치는 죽음의 손길 속에서도 그는 자신이 쌓아온 재산과 앞으로 더 불릴 수 있는 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한다.
이 단편을 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나는 소설의 결말을 말하지는 않겠다. 소설의 결말은 톨스토이의 인본주의적인 사상으로 잘 봉합되지만, 나에게는 그러한 결말보다 주인 바실리의 내면 묘사가 매우 흥미로웠다. 무언가에 사로잡힌 인간이 보여주는 사고의 흐름, 그릇된 판단, 오만과 편견. 바실리의 온 마음을 옥죄는 것은 돈이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명예나 지식이나 뭐 다른 것들일 수도 있다.
나는 돈에 대한 바실리의 탐욕을 비웃었다. 어찌 저리도 어리석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나에게는 바실리의 돈과 같은 것이 없는지 돌이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어떻게든 끄적거리게 되는 이런 글에 대한 것은 어떠한가? 말기 암 환자가 임박한 자신의 죽음을 잊게 만드는 것, 어쩌면 생의 남은 시간 동안 아내와 아이와 보내는 것이 유익할 남자가 기꺼이 그것에 자신을 내던져 버리는 것. 거기에는 글쓰기가 있었다. 글쓰기는 구원처럼 보이지만 속박이고, 어쩌면 저주인지도 몰랐다.
내가 살아온 날들보다 더 오래 남을 글을 쓸 수 있을까? 무수히 많은 이들이 그 질문에 기꺼이 자신의 삶을 걸었고,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거기에는 옳거나 그르다는 가치판단이 놓여있지는 않다. 다만 선택이 있을 뿐이다. 영화사의 기념비적 인물로 남은 위대한 감독이며 배우 오슨 웰스(Orson Welles, 1915-1985)는 말년에 다큐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영화라는 요망한 것이 내 인생을 망쳤다, 고. 그 말을 할 때 웰스의 눈은 붉어졌고, 곧 눈물이 고였다. 나는 이제 그의 괴로운 독백을 가끔 떠올리면서 이해하고, 가슴을 치며, 또 하루의 끝에 다다른다. 무언가에 사로잡힌다는 것의 대가는 때로 그렇게 잔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