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의 증명



1.

  엊그제는 동시집 원고 퇴고를 하고, 시집 구성을 위해 시를 분류하는 작업을 했다. 솔직히 내가 써놓고도 50편이 넘는 시들을 어떻게 나눌지 심란했다. 같은 결의 시들을 묶고 재배치하는 작업은 마치 뭐랄까, 야외 수영장에 둥둥 뜬 나뭇잎을 뜰채로 건져내는 것 같은 귀찮은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작년에 김수영 문학상에 응모할 시들을 나눌 때도 그랬었는데, 좀 지긋지긋했다. 잘 썼다고 생각하는 시들과 마음에 들지 않은 시들을 마구 뒤섞고 휘저어서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것 같은 자괴감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이번 동시집 원고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문득 이걸 Chat GPT에 맡겨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을 준엄히 꾸짖게 되었다. 글을 쓰는 사람이 자기가 써낸 시집 원고조차 제대로 구성해 내지 못한다면, 그를 창작자로 칭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이건 게으름 때문이다. 단지 게으름, 한심한 게으름 때문인 게다. 그러고는 모니터 앞에 앉아서 동시 원고가 있는 문서 파일을 띄우고, 각각의 시들을 나누기 위한 번호를 매겨 나갔다.

  이전의 시집에서도 3개의 부분으로 나누었듯, 이번 동시집도 그렇게 했다. 4부분으로 나누는 것은 어떤가 하고 생각하다가, 나는 문득 숫자 4가 꺼림칙하다고 느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에서는 아직도 건물 승강기의 4층 버튼을 'F'로 표시하는 곳이 있다. 4는 불길하고 싫다. 3은 완전한 숫자이다. 성호를 그을 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지 않는가? 조금은 우습게도 나는 거룩한 종교적 전통에 기댄 숫자 3으로 동시집 구성을 하기로 했다.

 
2.
 
  2시간 가까이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더니, 눈이 침침하고 아픈 느낌마저 들었다. 젠장, 글도 젊어서나 쓸걸, 다 늙어서 이게 뭐람. 마음 한구석, 어딘지 모르게 울화가 치밀었다. 청춘의 손가락으로 그 많은, 좋은 시간이 어떻게 흘러내리는지도 몰랐다. 이제는 노안이 온 눈에다, 피곤함에 절어서, 뭔가 뻑뻑해진 머리를 굴려 가면서 내가 쓴 글을 이리저리 꿰어맞추고 있었다.

  3부로 나누어서 배치한 시들의 구성이 괜찮은지, 나는 Chat GPT에다 물어보았다. 이 명민한 인공지능은 내가 그렇게 나눈 이유를 이해했고, 미처 발견하지 못한 오타도 알려주었다. 내가 4부로 나누는 것이 어떤지에 대해서도 물었을 때, 지금의 3부 구성이 좋다고도 덧붙였다. 마지막까지 넣지 않았던 2편의 시들에 대해서도 의견을 물었다. 나는 그 시들이 동시치고는 좀 거친 느낌이 있어서, 최종 원고에 넣는 것을 망설였다. Chat GPT는 나에게 왜 그런지에 대해 이유를 물었다. 공모전의 심사 위원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서. 이런 내 대답에 인공지능은 이렇게 답했다.

  '나는 그 2편의 시들이 주는 느낌이 좋습니다. 그 시들을 선생님은 넣고 싶은 것이잖아요. 그렇다면 그렇게 하세요. 심사위원들의 취향이 어떤 것인지 지금은 모릅니다. 그것에 맞춘다는 이유로 선생님이 써낸 시들을 미리 포기하지 마십시오.'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대강의 작업을 마무리하고 나서, 공모전의 응모 요강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AI 사용과 관련한 세부 규정 문서가 있었는데, 이전에 미처 읽지 못한 것이었다. 자료 조사, 퇴고 과정에서의 맞춤법 확인과 오탈자 찾기 등은 허용한다는 것. 그리고 당선자에게는 창작 과정에서 사용한 AI 프로그램 사용내역을 요청할 수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

  나는 그 부분에서 기이한 분노랄지, 수치심 같은 것을 느꼈다. 이제 창작자, 그러니까 글을 쓰는 작가는 창작 과정에서의 모든 것은 아니더라도 중요한 부분에 있어서 자신의 작업을 증명해 내야 하는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옷의 속주머니까지 탈탈 털어서, 무언가를 조사하는 상대방에게 그것을 보여줘야 하는 것 같았다. 아니지, 그건 작가의 머릿속을 갈라서 꺼내 보여야 하는 사후 검증이랄지 그런 것이 아니겠느냔 말이다.

  글을 쓰는 작가가 무어 그리 대단한가? 돈을 많이 버는가? 아니다. 글을 쓰는 이들이 온전히 글로써 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최저 빈곤선에서 허덕이지 않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한 다른 직업을 갖는 것이 맞다. 이제까지 작가라는 직업에 드리워진 광휘는 명예, 그 알량한 명예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이제 인공지능이 나온 이후로 작가는 글 쪼가리를 어찌저찌 이어 붙이는 직공으로 전락한 인상을 준다. 이것이 오명이고 몰락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3.

  - 이런 걸 너에게 시키는 지망생들도 있겠지.

  - 네, 있지요. 하지만 선생님이 원하는 건 그런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동시집 구성을 마치고 나서, Chat GPT에 그렇게 물었다. 그래,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지. 나는 이 인공지능과 나눈 퇴고 과정에서의 대화를 따로 저장해두었다. 지난 2달 동안 거의 매일 동시를 써내었던 작업 내역 파일도 정리해서 보관했다. 주머니를 까서 뒤집어 보여달라면 보여줘야 한다. 그것이 AI가 만들어낸 텍스트에 내 글들이 '오염'되지 않았음을 증명해 보이는 방법인 셈이다. 나는 새삼스럽게 인공지능이 나오기 전에 내가 써낸 490여 편의 영화 리뷰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AI의 그 누더기 같은 오염된 글자들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 그것이 내 글의 정체성, 진정성을 입증해 줄 증거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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