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나무


  처음에는 그것이 그냥 막대기인 줄 알았다. 아주 기다란 막대기. 그런데 다가가서 보니 아니었다. 무지막지하게 큰 가시가 덕지덕지 붙은 엄나무였다. 아파트 출입문 뒤편, 응달진 곳에 1미터 높이의 엄나무를 누가 심어놓았다. 희주는 그 막대기, 아니 엄나무가 눈에 거슬렸다.

  "왜 저런 곳에다 심어놓은 거지?"

  아마도 가시가 있어서 위험하기도 하고, 어떻게든 엄나무는 심어보고 싶고 그래서였을 것이다. 이 동네에는 도무지 상식과 교양이 없는 인간들이 메뚜기처럼 출몰한다. 창문 밖으로 담배꽁초를 계속 내던지고, 물티슈를 비롯해 음식물 쓰레기도 내던진다. 화단에 온갖 화분이며 돌멩이를 모아다가 쌓아두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일 것이다. 희주는 관리사무소에다 그것들을 치워달라고 민원을 넣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치워져서 다시 시간이 지나면 화분과 돌들, 항아리까지 화수분처럼 생겨났다. 아마도 그 사람에게 아파트 화단은 자신이 지분을 가지고 있는 정원인 듯싶었다.

  희주는 엄나무의 밑동을 발로 툭툭 쳐보았다. 자신이 쓰러뜨릴 수 있으면 그렇게 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어찌나 단단하게 심어놓았는지 막대기 같은 그 나무는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쇠막대기 같았다. 그런데 그 쇠막대기의 맨 꼭대기에 보라색 순이 올라오고 있었다. 이 추운 겨울에 나무는 치열하게 사는 중이었다.

  "6호 라인 출입구 뒤쪽에 1미터 정도 되는 엄나무가 있어요. 아파트 공유지를 개인이 무단으로 사용하고 있으니, 처리해 주면 좋겠습니다. 제거하든지, 다른 곳에 옮겨 심든지요."

  집으로 돌아온 희주는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걸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나서, 무언가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아마도 그 보라색 새순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나무는 살아있었다. 관리사무소에서 어떤 식으로 처리할지 궁금해졌다. 그 나무를 그냥 거기에서 자라게 내버려두는 편이 나았을까?

  "당신은 해야 할 전화를 했을 뿐이야. 오히려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서 자라면, 나중에 거칠게 뿌리뽑힐 뿐이지."

  앞집의 노인은 죽어가고 있다. 거동하지 못한 지가 꽤 되었다. 오늘 낮에는 전동 침대 대여회사의 설치 기사들이 다녀가는 것을 보았다. 노인의 나이는 구십을 훌쩍 넘겨서 백 살에 가까웠다. 자식들이 돌아가면서 병간호를 한다. 늙은 딸이 데려온 개가 희주와 남편이 드나들 때마다 짖어댔다. 희주는 저 노인이 올봄을 넘길 것인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봄과 가을에 노인들은 많이 죽습니다. 그래서 그 시기에 사망률이 치솟지요."

  언젠가 TV에 나온 의사가 하는 말을 들었다. 사람은 죽지만, 엄나무는 베어져도 뿌리가 있는 한 살아남을 것이다. 새순이 마치 붉은 피처럼 너무나 선명해서 희주는 그것을 차마 베어버리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걸 심은 인간은 엄나무 순을 잘라서 먹고, 그 가시가 있는 가지를 삶아서 몸보신이나 하려고 했을 것이다. 사람의 삶은 무엇에 쓸모가 있을까? 엄나무는 쓸모가 있으니, 이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살아남을 거라고 희주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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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동


  허리가 직각으로 굽은 할머니가 장바구니 카트를 힘겹게 끌고 가는 것이 보였다. 엄마를 집에 데려다주는 길이었다. 노인은 엘리베이터 앞의 의자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시장에 봄동이 나와서..."

  노인은 우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다. 

  "몇 층 사세요?"

  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주려고 노인에게 물었다. 하지만 노인은 대답 대신에 장애인 전용 버튼의 숫자를 얼른 눌렀다. 8층이었다.

  "말할 기운도 없어."

  노인의 카트에는 봄동과 함께 여러 가지 채소가 들어있었다. 그 무거운 것을 끌고 어떻게 온 것일까? 기운이 너무 없는지, 노인의 말소리는 물크러지고 곰팡이가 핀 귤 같았다.

  "조심해서 가세요."

  지팡이가 없으면 걷지를 못하는 엄마와 함께 내리면서 나는 인사했다. 집에 들어온 나는 TV를 켰다. 케이블 채널을 빠르게 돌린다. 엄마가 좋아하는 '현장르포 특종세상'이 나온다.

  "이거 좀 보고 계세요."

  "너는 어디로 가는 거냐? 넷째는 언제 온다니?"

  나는 엄마가 말하는 넷째가 어디에 사는지 알지 못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네 마트에 들렀다가 봄동을 보았다. 한 봉지에 3천 원이었다. 비싸지 않은 것 같아서 샀다. 그런데 나는 봄동을 어떻게 요리하는지 모른다. 엄마는 나에게 요리라는 것을 가르쳐준 적이 없었다. 봄동은 보통 겉절이를 해서 먹지. 나의 부엌에는 고춧가루도 없다. 언제부터인가 매운 것을 조금만 먹어도 속이 쓰렸다. 어쨌든 봄동의 잎을 톡, 톡 뜯어내었다.

  다음날, 엄마에게 점심을 차려줄 때 그 봄동을 식탁에 내놓았다.

  "달구나. 달아."

  나는 8층의 노인이 앞으로 봄동을 먹을 수 있는 날들에 대해 문득 생각해 보았다. 노인은 팔순을 쉬이 넘긴 것처럼 보였다. 굽은 허리로 장을 힘겹게 봐올 정도면, 분명히 혼자서 살고 있을 것이다. 16평의 이 낡은 복도식 아파트에는 독거노인들이 많이 산다. 나는 그래서 이 아파트를 노인동이라고 부른다.

  엄마의 집을 나올 때, 아파트 앞에는 익숙한 녹색의 목욕 차량이 보였다. '효녀 심청이 목욕 서비스'라고 커다란 글씨가 박힌 차. 차에서는 희뿌연 오수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언젠가 엄마는 그 차를 보고는, 자신의 부모를 남한테 목욕시키게 하는 자식들이 불효막심하다면서 분개했다. 나의 오른팔은 테니스 엘보에 시달려서 고무팔이나 다름없다. 나는 그 목욕 차량을 지나오면서 아픈 오른팔을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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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이어서 시집 2부를 올립니다. 



탐구생활(探究生活) 1부 링크

https://blog.aladin.co.kr/sirius7/17025932

 

 


2부     명랑(明朗)  



명랑(明朗)


사다새


희망(希望)


빗방울


상괭이


오늘의 날씨


거짓말


월매(月梅) 정육점


눈물길


그렇게


건너가다


싸구려에 대한 명상


빨강


숙이 아줌마


면도날


납골당(納骨堂)


다시마












명랑(明朗) 



이리 오너라


명랑을 가만히 불러낸다

명랑은 거친 맨발에 민머리를 하고 있었다

배움은 짧았으나 성품은 유순하였다

눈은 매우 가늘어서 늘 세상이 잘 보이지 않았다


명랑은 타고나는 것입니다


명랑에게 명랑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물으니

명랑은 나에게 그렇게 답하였다


명랑이 사는 집의 대문은

녹이 슬어서 마치 피를 흘리는 것 같았다

명랑은 늘 쪼들렸다

그래도 조그만 입으로 웃음을 떨어뜨리면서

칠칠맞지 못하게 돌아다녔다


한번은 명랑이 울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왜 울고 있느냐 물으니

갖고 있는 명랑이 다 바닥이 나서

더는 먹을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


나는 명랑에게 딱히 줄 만한 것이 없어서

피(粥)죽을 한 그릇 쑤어 주었다

명랑은 피죽이 붉은 색이 아니라며 신기해 하였다

명랑은 피(粥)를 한번도 본 적이 없으므로

어리석게도 그리 말하였던 것이다


까끌까끌한 알갱이가 가난한 손톱 같아요


마침내 명랑은 죽그릇을 비우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사다새 



죽은 고등어를 먹으며 언제까지 살아야 할까

물음표는 꼬리를 질질 끌면서 창살을 빠져나간다

일부러 울지 않은 것이 몇 해인지 잊어버렸다


이 동물원의 지하에는 하늘다람쥐가 산다

비막(飛膜)이 찢어져 너덜너덜해진 다람쥐가 물었다


다시, 날아갈 수 있을까?


나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사육사의 손을 심심해서 쪼아버렸더니

부리를 망치로 부숴버렸다

마시는 물이 피가 되어 흐른다


그 사막에는 피를 마시고

피어나는 들꽃들이 있다

다리가 부러진 친구들이 모두 떠난 곳


조각난 부리를 그러모은다

죽은 표범의 뼈바늘로 정성스럽게 꿰맨다

하늘다람쥐의 갈라진 옆구리도 이어 붙인다

새벽의 모래가 스르륵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희망(希望) 



흐린 표정을 지으며 너는 서 있다

너의 머리 위로는 작은 구름이 떠다닌다

언제든 자그마한 빗방울이 내릴 수 있는


너를 간절히, 여러 번 부른다


너의 얼굴에 흘러내리는 빗물을 보았는데

어쩌면 울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너에게 솔기가 닳은 행주를 건넨다

몇 번 쓰다 버릴 행주였지만

정성스럽게 감침질을 한 행주

죽어서 버려야만 하는 것들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는 습관이 생겼다


너는 아픈 허리를 조심스럽게 펴고

허우적거리며 머리의 구름을 밀쳐낸다

단단한 초록색의 구름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꼬리가 잘린 도마뱀이 춤을 춘다





























빗방울 



세탁실에서는 비가 샌다

빗방울이 구불구불 기어다닌다


나는 빗방울을 틀어막으려 했지만

빗방울이 내 손목을 꺾어버렸다


빗방울에 얻어맞은 세탁기가 소리를 질렀다

꺼억꺼억, 다 죽어갈 것처럼

세탁기는 사실 죽을 때가 되었다

이십 년을 살아온 세탁기는

요새 쇳조각을 뱉어내고 있다


빗방울이 삐딱하게 웃으며

죽어보라 말한다


오늘도 뜨개질을 한다

빗방울의 기대가 어긋난다






























상괭이 



어린 상괭이는 부둣가에 드러누워 있었다

허여멀건한 배를 드러내고는

아기 손톱같은 이빨에는 피가 흥건했다


이런 게 진짜야


사진 선생은 연달아 셔터를 눌러대었다

학생들은 진저리를 치며 자리를 떴다

그 부둣가에는 도무지 사랑할 만한 것이 없었다

어부들은 아침부터 사진 찍는다고 욕설을 퍼부었고

선착장의 인부는 바다를 향해 오줌을 내갈겼다


사각의 프레임 밖에서 버려지고 잊혀진 것들

상괭이가 나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차마 셔터를 누르지 못했다


오늘 아침, 상괭이가 웃으며 걸어나왔다

스무 번의 여름이 지나갔다





























오늘의 날씨 



어제의 일기장을 펴고

오늘의 날씨를 적는다

키보드에 커피를 쏟았다

킬리만자로의 농부가 하늘을 본다

커피나무에서 흉년을 수확한다

아직은 불모(不毛)의 계절

오지 않은 즐거운 일기를 기다린다 





































거짓말 



거짓말을 잘하는 비결은

거짓말을 거짓말처럼 하는 것이다


버마비단뱀을 목에 칭칭 두르면

멋진 목도리가 된다

숨이 막히지 않을 정도로만 두르고

평온한 목소리로 말한다


나는 매끄럽게 속아넘어갔다


진짜겠지


어제는 아침 일찍 커튼을 열자

버마비단뱀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월매(月梅) 정육점 



아주머니는 왼손에 검은색 목장갑을 끼고 있었다

고기 자르는 기계에 손가락 하나를 잃었기 때문이다

아주머니의 정육점은 엄마의 단골 가게였다


월매(月梅) 정육점


작달막한 체구에 늘 웃는 얼굴이었던 아주머니의 가게는 잘 되었다

아주머니의 남편도 정육점에서 같이 일했지만

내 기억 속에 늘 고기를 썰어서 내어주던 사람은 아주머니였다

가끔은 아주머니의 이름이 월매라고 생각했다


정육점은 아주머니의 살림집과 이어져 있었다

한번은 엄마가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작은 방 문턱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일고여덟 살 된 아이 하나는 TV 만화를 보고 있었고,   

내 또래일지 아니면, 좀 어리게 보이는 형은

방바닥에 엎드려 공책에 무언가를 끄적거렸다


어느 날, 아주머니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육점을 홀로 꾸려가던 아저씨는 몇 년 지나지 않아 문을 닫았다

내가 중학생 때의 일이다


오늘 아침, 식탁에 가만히 앉아있는데

월매 아주머니가 건너편에 와서 앉았다

아주머니의 잃어버린 손가락에

분홍색 손톱이 잘 자라고 있었다






















눈물길 



다운 증후군을 앓는 늙은 아가씨가

뽀로로 음료수를 마시고는

커다란 콘칩 봉지를 웃으며 뜯는다

너무나 새까맣게 염색을 한 엄마는

딸이 건넨 음료수병을 버리러 일어선다


불행의 얼굴은 판박이처럼 비슷하다

나는 아픈 왼쪽 얼굴을 쓰다듬으며 걷는다


집으로 오는 늦은 엘리베이터에서

9층의 여자와 마주친다

여자에게는 자폐증을 앓는 아들이 있다

여자는 나즈막하게 노래를 부른다


오 솔레 미오(O Sole Mio)


나폴리의 태양은 울고 싶지만

그 눈물길은 막혀있다

여자는 막힌 눈물길을 우회하여

가끔 컹컹 짖는 흰색의 강아지와

행복한 저녁 산책길에서 돌아온다



























그렇게 



엄마는 그릇을 옷장에 넣어둔다

엄마는 자식이 넷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그 가운데 하나가 어디 사는지 모른다


네가 고생이 많구나

엄마가 그렇게 되어서


그렇게는 참으로 기이한 말이다

그렇게 인생이 흘러가지 않는 것이 좋다

아주머니의 딸은 그렇게 납골당에 있다


그의 우울증은 오래되었다

나는 그가 잘 버텨내길 바란다

평범하지 않게 그렇게

































건너가다 



그곳을 건너가지 못했다

발만 동동 구르면서

붉은 눈의 항구가 묻는다

건너갈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냐고


늙어버린 배는 삐걱삐걱 소리를 낸다

끝이 갈라진 노를 힘겹게 저으며 떠난다

밤은 병든 푸른색이다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민머리 독수리가 굽은 등을 쪼아댄다

먼저 죽은 이의 퉁퉁 부은 얼굴이

뱃머리를 붙잡고 울고 있다


후회하는 돛이 세 갈래로 찢어지며

왼쪽 팔에 기다란 흉터를 새긴다

울음이 얼어붙고 말문이 닫힌다

멀었던 귀가 들리기 시작한다


물이 노래한다

물을 건너간다


























싸구려에 대한 명상 



싸구려 복숭아를 샀다

조막만 한 게 단맛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괜찮아, 설탕을 좀 얹어서 먹으면

올해는 복숭아 풍년이라는데

또 싸구려를 사고 말았어


싸구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

왜 이렇게 신맛이 많이 날까

신맛의 커피를 혐오한다

커피는 쓴맛, 기름진 쓴맛이 나야 하거늘


싸구려 남방을 입고 나간다

4천 원짜리, 메이드 인 방글라데시

남방을 입을 때마다

무너진 봉제 공장에 깔려 죽은 

먼 나라의 재봉사들이 생각나

언젠가 내가 입을 수의(壽衣)를 입듯

경건한 마음으로


오래전, 싸구려 비디오 가게에서

희귀 영화를 찾아다녔어

중년의 주인 남자는

친구들과 포커를 치고 있었지


타르코프스키(Tarkovsky)의 '희생'이 있나요?


그런 거는 우리 가게에 없어

비웃는 푸른 돛 문신의 팔뚝

불타는 희생의 나무



















빨강 



빨강의 바다로 간다

손이 비대하게 커진 인간들이

타자기를 두들기며 끊임없이 구토하는

더러운 빨강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픈 빨강의 반점이 웃으며 물었다

칼라민을 아무렇게나 발라주고는

빨강의 입을 조심스럽게 틀어막았다





































숙이 아줌마 



숙이 아줌마는 엄마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아줌마는 교육자 집안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자랐는데,

가난한 남자와 결혼하는 바람에 늘 쪼들리며 살았다 

아줌마는 남편을 돕기 위해 이런저런 부업을 하곤 했다

내가 어렸을 적에 엄마를 따라 아줌마의 문구점에 갔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아줌마는 돈을 좀 벌어보겠다고 명리학(命理學)을 배우러 다녔다 

내가 재수생(再修生) 때의 일이다

아줌마는 이제 막 학력고사를 치룬 내 사주를 봐주었다

나는 무언가 좋은 말을 듣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나의 기대에 걸맞게 아줌마는 이렇게 말했다


아, 너는 정말로 돈을 많이 벌 거야 엄청난 산처럼,

그렇게 넌 돈에 둘러 쌓여있을 거야


숙이 아줌마는 뇌출혈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아줌마는 고혈압이었는데도 혈압약을 먹지 않았다

사이비 도사가 그런 약을 먹으면

일찍 죽는다고 한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내가 서른 살이 되던 해의 일이었다  


버터를 사야지,

내 얼굴에는 기름기가 부족하기 때문에



























면도날 



면도날이 팔랑거리면서 내려온다


면도날 위의 삶

불운은 불공평하게 기울어져 있고

뒤뚱거리며 걷다가 결국 쏟아진다


색색의 조각난 면도날은

아스팔트 바닥에 짓이겨져

불그죽죽한 염료를 내뿜고

더러는 누군가의 머리에 내려앉아

휘파람을 불며 집으로 돌아간다


휘청거리면서 면도날 위를 걷는다

저린 왼쪽 손으로 면도날을 쥐었다

면도날이 조용히 웃었다

































납골당(納骨堂)



네 아빠는 명이 짧았지 


엄마는 납골당에 올 때마다 그 말을 한다


비쩍 마른 몸으로 흔들흔들 그네를 타던 아빠를 기억한다


쓰여지지 않은 이야기들

옷장 속에서 해골이 비소를 들이키며

어떤 인생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려준다

 

나는 옷장의 문을 열었다가 가만히 도로 닫았다





































다시마 



엄마의 집 찬장에서 다시마를 발견했다

몇 년을 묵은 것 같은, 아주 잘 마른 다시마

나는 다시마를 물에 불린다

푸른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요새는 왜 그렇게 흰색 차들이 많으냐?


모두들 흰색의 세계로 도망치고 싶은 것이겠죠

나는 같은 대답을 매일 엄마에게 들려준다


다시마의 세계는 갈색이고 눈물이며 그래서 짠맛이 난다

엄마의 잃어버린 바다와 다시마가 끈적거리는 시간을 천천히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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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제목:  탐구생활(探究生活) 




1부     파동(波動)  



파동(波動)


출근(出勤)


39층


교차로


교양(敎養)


연습생(練習生) 


모서리


마두금(馬頭琴)


여름, 오후 4시


노란콩


가려운 어깨


여학생(女學生) 


참기름


곰 인형


꿈의 자객(刺客)













파동(波動) 



윗집의 노인은 초능력이 있어요

파동을 만들어서 공격하는 능력이죠

내가 움직일 때마다 파동이 날 때려요

나는 집에서 다리를 절며 걸었고

입술이 제멋대로 실룩거리며

왼쪽 어깨가 가렵기 시작했어요


병원에 가보라는 말은 하지 마세요

그 사람들은 나에게 구속복(拘束服)을 입히고

실험실에 보내어 나의 뇌를 가르겠지요


노인의 A 파동이 천장에서

노인의 B 파동이 하수구에서

두 개의 파동이 새로운 중첩을 만들어 내는데

나는 이곳 아니면 저곳에

잃어버린 몸뚱이를 찾아서

하루 종일 집안을 헤매고 있죠


당신은 파동이 떠도는 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삶도 소문일 뿐이죠

보잘것없고 위대한 소문

당신은 실험해 본 적이 없죠

그러니 증명할 수도 없는 거에요

























출근(出勤) 



발목이 어디론가 사라지는 날이 있다

한 며칠 절름거리면 뼈가 조금씩 자란다


컴퓨터를 켜고 녹음기의 붉은 버튼을 누른다

새빨간 눈의 여자가 녹음기를 들고 덤벼든다

어떻게든 자신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렇게나 마침표를 찍는 인간들

마침표는 쉼표가 아닌데도

그걸 찍는 것을 멋이라고 생각하는 머저리들

도대체 어떻게 이 회사에 들어왔을까

의문이 뭉게뭉게

먹구름이 곧 쏟아지는 소나기로


팀장님은 좀 싸가지가 없네요


점심을 먹다가 체했다

속이 더 쓰릴 줄 알면서도

커피를 들이킨다

















39층


39층의 방화문은 열리지 않는다
39층 이하의 사람들은 옥상으로 갈 수 없다

며칠 전에는 아파트의 정기 소독이 있었다
허름한 옷차림의 노란 염색 머리 여자가 물었다

소독하시겠어요?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소독이 필요한 것은 집이 아니라 사람들이다
온몸에 문신을 한 개가 쉴 새 없이 짖는다
복도에 떨어진 커다란 바퀴벌레의 얼굴
여자는 개 목줄을 길게 늘어뜨리며 지나간다

나는 싸구려 커피를 마시며 천천히 비상계단을 오른다
39층의 방화문 앞에서 녹음기를 켜고 소리를 채집한다
81층의 옥상에 이르는 길고 구불구불한 시간
방화문의 영구 폐쇄를 건의하는 남자의 웃음소리
차별의 몸가짐을 알량한 생애에 걸쳐 학습한 목소리

그들을 올라오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좋은 교육을 받지 못했어요

나를 가르친 선생들은 최고의 대학을 나왔고
유명한 상을 받았으며 길고 지루한 책을 써냈다
그러므로 이제 39층의 계단에 쪼그려 앉아
좋은 교육의 시를 쓴다

81층의 시멘트 하늘과
방화문의 부서진 손잡이에 대하여


















교차로  



노인이 교차로를 모조리 들고 간다

힘에 부친듯 오른쪽 팔에서 왼쪽 팔로

노인이 떨구고 간 오늘의 교차로 하나


직원을 구합니다

가족 같은 분위기, 늘 즐겁게 일해요


가족이 무서워진다

가족이 그의 왼쪽 신경을 끊었고

왼쪽 팔뚝에 우는 아이를 심었다

아이는 화를 꾹꾹 참고

교차로의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린다

초록불은 너무 짧다

길을 건너다 치일 뻔 했다

































교양(敎養) 



아침 6시, 여자는 놀이터에 개를 풀어놓는다

종잇장 같은 하얀 강아지가 드러눕고

여자가 우라지게도 짖는다


위에서 음식물 쓰레기가 떨어지므로

나는 늘 투구를 쓰고 다닌다

가끔 아파트의 하수구가 막히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교양 없는 까마귀가 죽었기 때문이다


찻물을 끓이려고 수돗물을 받다가

상어의 이빨 하나를 발견한다

아파트의 저수조에는 30년째 상어가 살고 있는데

오늘 아침 그 상어는 교양을 씹어먹다가

이빨을 부러뜨린 것이다

이곳의 인간들은 이빨이 듬성듬성 빠져있어서

상어의 이빨을 주워다가 대충 끼워 넣는다


싸구려 홍차를 마시면서

푸른 벽돌의 시집을 펼친다

이런 벽돌로 된 집을 지어야지

교양을 꽉꽉 채워 넣은 반듯한 나의 집



























연습생(練習生) 



굴러떨어질 준비는 언제나 되어있다

한번도 죽어본 적이 없으므로

죽어야 끝이 날 것인지 알 수 없다


내일 공연은 없습니다


어기적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진심으로 태연해야 한다

라면 따위를 끓여 먹어서는 안 된다

불어터진 얼굴로는 불가능한 스탠바이(standby)


무대의 한 귀퉁이에 선다는 건

발뒤꿈치에 박히는 가시를 견디는 것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이며


고맙습니다


회전하는 무대 장치가 내 발목을 꺾고는

편히 쉬어요

내일은 당신의 허리를 부러뜨릴 테니


살아남은 뼛조각을 맞추며

휘청휘청 내려가는 지하의 계단

축축한 이끼에 진심으로 미끄러진다
























모서리 



냉장고 문을 열다가 왼쪽 발을 부딪쳤다

절름절름 다친 이리처럼 걷는다

먹잇감을 가진 이리를 따라가다가

인정사정없이 뜯겼다

등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고

하늘은 짙푸르다

돌아갈 집 따위는 언제나 없었다


부러진 발톱을 내려다 본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떨어져 나간 모서리 때문이다

회색의 압력을 견디는 모서리


모서리를 살릴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모서리에 낀 푸른 이끼가

숨을 쉬는 소리를 들었다


이끼가 가느다란 팔을 내밀어

자그마한 집을 짓는다

모서리가 조금씩 자란다




























마두금(馬頭琴) 



나는 이따금 앓아눕곤 하였다

손가락이 제멋대로 움직였고

혓바닥이 굳어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누군가가 나에게 말하길

마두금(馬頭琴)을 배우면 나을 거야


이지러진 지붕의 2층에

79살의 마두금 연주자가 살고 있었다


마두금을 배우기에는 너무 젊군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우산을 펼쳤다

내 앞으로 낙타가 천천히 지나갔다

낙타는 왼쪽 눈이 없었는데

그 눈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낙타에게 우산을 씌워주고는

어긋난 마두금 소리를 흉내내었다

허연 머리카락이 후두둑 떨어졌다




























여름, 오후 4시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 혼자

놀이터 옆 벤치에 앉아있다

가만가만 숨을 내쉬며 천천히 부채질한다

사람들을 기다리는 것이다


누런 염색 머리의 늙은 여자는

비척거리며 걷는 아픈 개를 풀어놓고

말 많은 영감은 젊은 날을 늘어놓는다

누군가 쪄온 옥수수를 나누어 먹으며

그들만의 정겨운 오후 4시


하지만, 오늘은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검은색 스카프를 두른 외로움이

할머니의 어깨 위에 앉아서

재잘거리는 소리를 낸다


어디를 가시오?


이쪽 집에서 저쪽 집으로요


행인이 상냥하게 대답했다


























노란콩 



밥 지을 때 넣을 콩을 씻는다

이 노란콩은 콩물을 좋아하는 아버지를 위해

어머니가 시골에서 사 온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콩은 페트병에서 잠을 잤다

10년 동안 노란콩은 썩지도 않았다


이 콩을 농사지어서 팔았던 여자는

살기가 힘들었는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는 콩을 씻다 말고 콩 하나를 집어서

죽음의 냄새가 나는지 맡아본다

어디서 들으니 오래된 죽음은

지독한 소똥 냄새가 난다고 했다


말간 얼굴의 노란콩은

시치미를 뚝 떼고 눈만 껌뻑거린다


왜 그랬을까?


왜 그랬는지 나도 몰라요




























가려운 어깨 



불길하게 늙어버린 여자가

조화(造花) 상자를 들고 지나간다


여자를 피해서 걷는다

2년째 어깨가 가렵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사부작사부작

불운이 어깨를 파먹는 소리를 듣는다 










































여학생(女學生) 



여학생은 답답하면 5층의 화장실에 갔다

화장실의 높은 창가에 의자를 두고 공부했다

아무도 오지 않는 고장난 화장실


학원의 지하에는 이상한 미로가 있었다

가느다란 뱀이 가끔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연애를 하는 것들은 그곳에서 시시덕거렸다

초록의 썩은 물이 웃음소리와 뒤섞였다


4월, 화장실에서 사고가 있었다

5층 화장실은 폐쇄되었고, 여학생도 학원을 떠났다

미로의 지하와 뱀이 사라진 곳에는 아파트가 들어섰다


여학생은 몸이 아프면 화장실 꿈을 꾸었다


은빛의 화장실에는 출구가 없었다

머리를 빡빡 밀어버린 스무 살 여자애가

회색의 수의(囚衣)에 수갑을 찬 채 걸었다

고개를 숙이고 아주 오랫동안 





























참기름 



이 참기름이 마지막이야


옥이 아주머니가 참기름 2병을 짜오면서 말했다

아주머니는 단골 방앗간에 들러서 기름을 짜오셨다


언젠가 방앗간 집 여자가 고개를 숙일 때, 정수리가 보이더라

그런데 기름에 찌들어 머리의 살갗이 노랗더군

30년을 참기름만 짜고 살면 그런가 보다 했다


나는 참기름을 찬장 깊숙이 넣어두었다

5년 만에 이사를 하게 되면서 그 참기름 2병이 나왔다

참기름의 색은 시커맸다

나는 참기름의 뚜껑을 따고 그릇에 떨어뜨려 보았다

기름에 한 개의 눈과 입, 세 개의 발이 생겨났다

그것은 퍼런색의 줄무늬 벌레로 변했다


벌레는 어기적어기적 걷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인간이 나 몰래 딴살림을 차리고 아이를 두었지

더는 살고 싶지가 않더군

내가 죽고 딸도 날 따라왔어


벌레의 입에서는 쉴 새 없이 누런 물이 흘러나왔다

나는 벌레가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벌레를 하수구에 흘려보냈다

검은 기름이 부엌에 천천히 스며들었다






















곰 인형 



커다란 곰 인형이 이 더운 대낮에

누런 배때기를 드러내고 누워있다

물크러진 코에서는 회색 콧물이 줄줄

튿어진 입에서는 부러진 바늘이 한 움큼

찢어진 분홍 리본을 목에 칭칭 두르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비웃자

바늘이 사람들의 눈을 찔러대어서

비명소리가 아파트를 뒤흔들었다

누군가 구급차를 불렀지만

구급차는 아무도 싣지 않고 떠났다


인형이 불쌍하다며 만진 아이

갑자기 기침이 쏟아지면서

천식 환자의 삶이 시작되었다



































꿈의 자객(刺客)



뱀눈의 남자는 암만 봐도 무서워

온종일 꾸물거리는 날 꿈으로

죽은 포도주 냄새가 올라와 


이 집으로 이사 오고 그 이듬해

윗층의 젊은 아가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어떤 죽음은 기억의 둥지에서 잠을 자


할머니는 나쁜 꿈을 꾸면

마당에 녹슨 칼을 세게 내려치곤 했지

나에게는 끝이 살짝 부러진 칼이 있어


뱀눈의 남자와 싸워야지 

사박사박 숫돌에 칼을 갈고

꿈으로 길을 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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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인 작업 일정이 있어서, 당분간 단편 업데이트는 뜸할 것 같습니다.

  글을 쓰게 되면, 다시 올리겠습니다.


  방문하는 독자분들 모두 새해 새로운 마음으로 기쁘게, 건강하게 잘 지내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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