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말이지, 아버지의 일생을 한번 생각해 봤어. 결국 부모로서의 성공은 자식들이 얼마나 행복하게 잘 사느냐로 판가름 나는 것이지. 우리 아버지는 어떤지 모르겠네."


  아들 슈이치(우에하라 겐 분)는 아버지(야마무라 소 분) 앞에서 태연하게 그런 말을 늘어놓는다. 그 말을 듣는 아버지의 속이 편할 리 없다. 아들 슈이치는 며느리 키쿠코(하라 세츠코 분) 몰래 바람을 피우고 있고, 시집간 딸은 남편과 불화가 심해서 툭하면 보따리 싸들고 친정에 온다. 시아버지 싱고는 아들에게 냉대받는 며느리가 안쓰럽고, 어떻게든 아들 내외의 결혼 생활을 이어가게 하려고 애를 쓴다. 과연 그의 바램대로 아들 내외는 화목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산의 소리(The Thunder of the Mountain, 1954)'는 한 가족의 일상에 내재된 균열과 상처를 담아낸다. '안즈코(1958)'에서 딸을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감싸주는 아버지로 나왔던 배우 야마무라 소가 이 영화에서는 사람 좋은 시아버지로 나온다. 며느리를 아끼다 못해 자식 보다 더 예뻐한다는 불평을 딸과 아내가 쏟아낸다. 그런 아버지를 아들도 못마땅하게 생각할 뿐이다. 영화 속에서 싱고가 자신의 가족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그렇게 살갑지 않다.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가장 걱정하는 동안, 시어머니는 아들 내외에 무관심하며, 친정으로 애들 데리고 온 딸은 속 긁는 소리만 하고, 아들은 밖으로 나돈다. 이 집안 사람들의 가족으로서의 유대와 정서는 여기 저기 균열이 가 있다. 경제적으로는 부유하지만, 그들 내면의 풍경은 황량하다. 


  나루세 미키오가 그려내는 이런 가족 드라마는 결코 편하게 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어떤 문제 하나만 해결하면 잘 풀릴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그 속에는 구불구불하게 얽힌 길이 있으며, 도무지 출구를 찾기가 어려워 보인다. 삶이 가진 복잡성, 그것이야말로 이 감독이 자신의 영화에서 진중하고 치열하게 탐구하고자 했던 주제였다. '산의 소리'에서 주인공 싱고가 맞부닥뜨리는 집안의 문제는 며느리에게 따뜻하게 대해주고, 아들의 바람기를 잡으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싱고에게 며느리 키쿠코의 유산(産) 소식은 예기치 못한 충격을 준다. 그것이 전적으로 키쿠코의 의지로 결정한 일이라는 점은 키쿠코와 이 가족의 결별을 의미한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대에 키쿠코의 그런 주체적이고 강단있는 결정은 오늘날의 관객에게도 나름의 충격을 준다. '자식이 있으면 밖으로 나돌던 남자는 언젠가 돌아온다'고 믿던 시대에 키쿠코는 어렵게 생긴 아이를 스스로 버린다. 더군다나 늘 순종적이고 웃는 얼굴을 보이던 키쿠코가 그런 선택을 했다는 점이 놀라울 뿐이다.


  남편 슈이치는 늘 아내를 '아이 같다'며 못마땅해 하고 비웃는다. 그 말의 뜻은 '순진무구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자로서 그 어떤 매력도 없고 아이처럼 세상물정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런 '아이 같은' 여자를 자신의 아버지는 마음에 들어해서 며느리로 삼았다. 그 시대의 혼사는 대부분 부모의 의지에 따라 결정되었다. 싱고의 딸이 자신의 괴로운 결혼 생활이 아버지 때문이라고 불만을 터뜨리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싱고가 친구의 미망인이 팔아달라고 부탁한 '노(能, 일본의 전통 연극)'의 가면을 흥미있게 들여다 보는 장면이 나온다. '노멘(能面)'이라고 부르는 가면은 표정이 없다. 연기하는 배우들은 오로지 고개의 움직임만으로 인물의 내면을 표현해 낸다. 싱고가 매혹된 '노멘'은 아이의 얼굴이었다. 그는 며느리 키쿠코의 항상 웃는 모습이 순진무구한 아이 같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그의 첫사랑이었던 아내의 언니와도 닮았던 것은 아닐까?


  "당신은 미인이었던 내 언니와 결혼하려고 했죠. 언니가 일찍 죽지만 않았다면 말이에요. 불쌍한 언니..." 


  좌절된 첫사랑과 별다른 애정없이 이어진 결혼 생활, 아내의 애정은 과도하고 무분별하게 아이들에게 투사되었고 제멋대로 자라났다. 결국 그의 노년에 그가 목도하는 가정의 균열은 당연한 것이다. 키쿠코는 그 근원을 들여다 보면서 자신의 결심을 굳혔을 것이다. 사랑이 없는 결혼은 그 어떤 것으로도 지탱해 나갈 수 없는 것이라고.


  여름에 해바라기를 보면서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던 시아버지와 며느리는 스산하고 메마른 겨울 공원에서 만난다. 어쩌면 그 두 사람이 다시 만날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서로 못다한 말들을 가슴에 꾹꾹 눌러담으며, 대화의 끝무렵에 싱고는 공원의 경치가 좋다고 말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겨울의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며 사라진다. 시아버지와 며느리로 만났지만, 가장 인간적으로 가까웠던 그 둘의 마지막은 그렇게 쓸쓸하고 외로웠다. '설국'으로 유명한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이 원작인 이 영화는 나루세 미키오가 가장 좋아하는 자신의 작품이기도 했다. 절제된, 그러나 좌절된 정념(念)의 여정을 '산의 소리'는 담담히 그려낸다.



*사진 출처: fando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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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자 위에 놓인 귤 하나, 그 작은 것으로부터 상상하지 못했던 생활을 꾸려가는 거야."


  결혼을 앞둔 딸에게 아버지는 너무 경제적인 조건에 얽매이지 말고 소박한 것에서 출발하라고 그렇게 충고한다. 정말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어린 시절 '안즈(살구)'라는 애칭으로 불리웠던 안즈코(가가와 교코 분)는 유명한 소설가 아버지(야마무라 소 분) 밑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다. 안즈코에게 아버지는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하고 현명한 인생의 상담자이기도 하다. 여러 구혼자들을 만나 보다가, 결국 어린 시절부터 동네에서 같이 자란 료키치(기무라 이사오 분)와 결혼하게 된 안즈코. 그러나 결혼 생활은 생각보다 어렵고 마음의 갈등은 커져 간다.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안즈코(Little Peach, 1958)'에는 결혼의 풍경, 그것도 꽤나 고통스럽고 괴로운 내면의 풍경이 펼쳐진다. 마치 접힌 부채가 펼쳐지면서 보이는 그림처럼, 접혔을 때는 알 수 없었던 결혼의 실체가 안즈코에게 다가온다. 자신의 부모처럼 서로를 아껴주고 존중하며 사랑으로 살아가는 결혼 생활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남편 료키치는 소설가로 성공하기를 꿈꾸며 글을 쓰지만, 가진 재능은 턱없이 부족하고 오직 자존심만이 하늘을 찌른다. 장인의 명성에 대한 질투는 아내에 대한 온갖 짜증과 트집잡기로 이어진다. 이 남자의 행동은 그야말로 찌질함의 극치를 이룬다. 그럼에도 안즈코는 어떻게든 결혼 생활을 이어가려고 애를 쓴다. 여성 관객들에게 '안즈코'는 고구마 백 개쯤 먹은 답답함과 울분을 선사하고도 남음이 있다. 


  안즈코와 장인에게 돼먹지 못한 언사와 행동으로 일관하는 남편 료키치. 그의 찌질함과 무례함은 영화 내내 스크린을 뚫고 나올 기세이지만, 속 깊은 이 부녀()는 묵묵히 감내할 뿐이다. 도대체 왜, 안즈코는 결혼 생활을 쉽사리 그만 두지 못하는 것일까? 그토록 곱게 키운 딸의 시련과 고생을 보면서도 아버지는 묵묵히 딸의 결정을 기다리기만 하는가? 그것은 어쩌면 그 시대가 다 그러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흠은 남자에게는 순간이지만, 여자에게는 평생을 가지."


  여기에서 흠이란 '이혼'을 뜻한다. 아버지는 딸의 이혼 가능성을 언급하는 아내에게 그렇게 말한다. '이혼녀'라는 사회적 낙인(烙印)이 평생을 가던 시절에 지지고 볶으며 살더라도 결혼이라는 울타리를 유지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건 마치 딜레마 같다. 서서히 말라 죽으나, 남은 생애 동안 엄혹한 비바람 속에 서 있거나. 물론 지금 시대의 정서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결혼 생활의 본질, 즉 상대방을 배려하고 인내하면서 매번 새롭게 닥치는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은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그다지 변함이 없다. 그것이 힘든 사람에게 출구로서의 '이혼'이 안즈코가 살던 시대 보다는 좀 더 쉽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나루세 미키오는 3년여의 짧은 결혼 생활 이외에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그 결혼 생활의 끝은 그에게 깊은 우울감을 남기기도 했다. '안즈코'에서 그가 그려내는 결혼의 풍경은 지독한 혐오의 감정까지는 아니지만, 근본적인 회의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남편과 친정을 오가는 어정쩡한 생활을 이어가면서 안즈코의 내면은 더욱 더 피폐해질 뿐이다. 영화의 초반부에는 결혼 전, 여유있고 평안한 표정으로 피아노를 치던 안즈코의 모습이 나온다. 그러나 곤궁한 결혼 생활은 피아노마저 팔게 만든다. 궁기 가득한, 생기 잃은 안즈코에게 결국 결혼이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과연 안즈코는 다시 피아노 앞에 앉을 수 있을까? 영화의 결말은 그 대답을 유보한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결혼의 풍경이 칙칙한 회색의 것이기는 하지만, 영화 속 인물들의 대사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유머 감각이 가득하다. 이 영화는 원작이 있는데, 1956년에서 이듬해까지 '동경신문'에 연재되었던 무로우 사이세이의 동명 소설이 그것이다. 원작이 가진 탄탄한 구조와 뛰어난 문장을 영화 속에서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예를 들면, 안즈코가 아버지의 군대 시절 이야기를 듣다가 결혼을 평생 복무해야 하는 지겨운 군대 생활로 비유하는 부분이 그러하다. 그런가 하면, 남편 료키치가 안즈코에게 좋은 소설이란 어떤 것인지 의견을 묻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에 대한 안즈코의 답이 걸작이다.


  "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하셨어. 소설은 미인과 같다고. 뭘해도 예쁜 사람이 있잖아. 목소리나 걷는 모습 같은 거 말야. 소설도 그렇게 완전한 것이 되었을 때 편집자가 사려고 한다고."


  글에 대한 재치있는 비유라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 그 말을 들은 찌질한 남편은 그럼 내 소설은 추녀인가 보군, 하며 이죽거린다. 그런 생동감 있는 대사들이 이 영화의 우울함을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한다.


  '안즈코'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일본인이 쓴 리뷰를 읽게 되었는데, 그는 이 영화의 영문 제목 'Little Peach'에 이의를 제기했다. 원래 '안즈'는 '살구(apricot)'에 해당하는 단어이고, 영어 자막에서도 그렇게 표기하면서(안즈코가 구혼자와 통성명을 하는 장면에서 단 한번 언급된다) 왜 제목을 '작은 복숭아'로 쓰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일본인의 시각에서는 그런 것이 살짝 걸리는 부분인가 보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렇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어린 아이에게 '살구 같다'라는 표현 보다는, '복숭아 같다'라는 것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영어 단어 'peach'가 가진 의미도 '예쁜 아이, 멋스러운 사람'이란 뜻이다. 그 어여쁜 안즈코가 결혼으로 인해 생고생을 하면서 망가지는 모습을 보아야 하는 괴로운 영화. 나루세 미키오가 그려낸 결혼의 풍경은 그러했다.



*사진 출처: tiff-jp.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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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해당 영화의 스포일러가 '약간' 들어있습니다.


 

  20분. 그것은 내가 영화를 볼 것인가를 결정하는 최소 감상 시간이다. 대개 괜찮은 영화들은 그 시간 기준에 그럭저럭 들어온다. 아주 좋은 어떤 영화들은 그 시간을 넘기는 인내심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흔하지는 않다. 그런데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One Cut of the Dead, 2018)'는 그 20분을 넘겨서 무려 37분을 인내할 것을 요구한다. 이 영화의 시작은 그저 그런 좀비 영화의 어느 장면에서부터이다. 도무지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 이 조잡한 좀비 영화에는 한가지 특색이 있다. 원 테이크(single take)로 끊김없이 이어진다는 것. 좀 지루하다, 라고 생각할 즈음에 제목과 함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One Cut of the Dead'는 이 영화 속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영화 속의 영화. 이런 액자 구조 형식은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구조를 택해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하느냐이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는 엄청나게 긴 '한 컷'의 영화 뒤에 숨겨진 세상을 보여주고자 그 방식을 택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효과적인 성공을 거둔다. 이 영화를 보려는 이들은 우선 초반의 37분을 견뎌야만 한다. 그리고 그 인내는 충분히 보답받는다.


  빠르게 찍고, 저렴한 비용으로 그럭저럭 괜찮은 영화를 뽑아내는 것을 신조로 삼고 사는 삼류 감독 히구라시는 어느 방송국으로부터 황당한 제안을 받는다. 요새 유행하는 좀비 영화를 원 테이크로 찍어서 생방송으로 내보낸다는 것. 쉽지 않을 것 같은 이 좀비 영화는 준비 단계에서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쥐뿔도 없는 주조연 배우들의 오만가지 요구를 들어주는 것도 골치 아픈데, 급기야 촬영 당일 두 명의 배우가 약속 장소에 오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 생방송은 곧 예정되어 있고 당장 배우 둘을 구하기도 어렵다. 삼류 감독 히구라시는 자신의 '원 컷' 좀비 영화를 무사히 찍을 수 있을까...


  마침내 시작된 'One Cut of the Dead'의 촬영 현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오로지 '원 컷'을 이어가기 위해 온갖 임기응변을 쏟아내는 스탭들과 배우들에게 그것은 악몽과도 같지만 그 광경을 보는 이들은 폭소를 참을 수가 없다. '삶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채플린의 명언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감독 우에다 신이치로는 하나의 영화 뒤에 숨겨진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들을 이 장르를 타파한 요절복통의 영화 속에 담아낸다. 'ENBU 세미나' 영화 학교의 장편 영화 워크숍의 결과물인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는 재기발랄한 아이디어가 빛난다. 이 재미난 영화에 할리우드에서도 관심을 보였다. 2020년에 리메이크 판권이 팔려서 제작이 예정되어 있다(Variety지 기사 참조).


  이 영화에서 삼류 감독 히구라시에게 닥친 난관을 극복하게 돕는 가장 큰 조력자는 그의 가족이다. 아내는 극중 영화의 분장사 배우 역으로, 딸은 제작 스탭으로 뛰면서 전심전력을 다해 돕는다. 시련과 역경 속에서 무엇보다 빛나는 가족애와 더불어 영화 촬영 현장의 모든 사람이 하나로 뭉치는 동료애는 뭔가 소박하지만 뭉클한 감동도 준다. 하나의 완성된 결과물을 위해 협력하고 그 어떤 희생도 감내하는 이러한 정서는 어쩌면 지극히 일본적인 것과도 맞닿아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와 비슷한 정서를 미타니 코키 감독의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1997)'에서도 볼 수 있다. 생방송 라디오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다루는 이 영화에서 PD는 제멋대로인 성우들을 달래가며 어떻게든 끌어가려고 한다. 그러다 가장 예기치 못한 어려움에 직면하는데, 그런 그에게 구원의 손길이 되어준 것은 방송국에서 오래 일한 나이든 소품 담당 직원이었다. 연장자가 가진 지혜와 오래된 것에 대한 존중, 그것이야말로 엉망이 될 뻔한 라디오 방송을 구한다. 이 코미디 영화는 관객에게 보편적 웃음을 선사하지만, 그 근저에 흐르는 정서는 매우 일본적이다. 집단주의, 그 집단의 소속원으로서 최선을 다해 자신의 역할을 해내며 연장자와 지도자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일본의 드라마와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주제이기도 하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는 한 컷 뒤에 숨겨진 세상의 이야기를 재미나게 들려준다. 비록 누군가에게는 우스꽝스럽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영화일지라도 그것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애를 쓰는지 관객은 새삼 깨닫게 된다. 즐거운 코미디 영화이지만, 이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작동하는 가족주의와 집단주의, 그 견고한 정서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정서가 미국에서 제작되는 리메이크 영화에서는 어떻게 재현될 것인가도 궁금해진다.



*사진 출처: empireonl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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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이밍량의 '데이즈(子, 2020)'를 보고나서 나는 그의 '애정만세(1994)'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 주인공 메이는 홀로 공원을 걷다가 갑자기 처철하게 목놓아 운다. 그 영화를 본 지가 꽤 오래되었는데도 나는 아직도 그 장면을 잊지 못한다. 메이의 울음은 소통에 대한 갈망과 결코 해소할 수 없을 것 같은 외로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데이즈'를 보고 메이의 울음을 떠올린 것은 그와는 다른 의미에서이다. 나는 차이밍량의 창작자로서의 마지막을 보았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슬픔을 느꼈다. 이 영화는 그의 영화에 대한 종언()이나 다름없다.


  강(이강생 분)은 지독한 목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통증 때문에 꽤 견디기 힘든 침술 시술을 받기도 한다. 방콕에 사는 젊은 청년 논은 옷 장사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지만, 마사지 일도 부업으로 하고 있다. 강은 방콕의 호텔에서 논에게 마사지를 받는다. 둘은 거리의 음식점에서 같이 식사를 하고 헤어진다. 이것이 '데이즈'의 대략적인 줄거리이다. 러닝 타임 2시간 6분을 어떻게 채운 것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겠다. 지루하고 진부하며 보잘 것 없는 롱 테이크(long take)들의 연속이라고. 적게는 1~2분, 길게는 6~7분에 이르는 쇼트들이 계속 이어진다. 내가 각각의 쇼트들을 세어본 것이 아니라서, 추측하건대 이 영화 전체의 쇼트들은 50개 미만일 것이다.


  이 영화의 비극은 영화를 본 관객이 '게이 포르노'라고 쏟아놓는 독설을 듣는 것에 있지 않다. 이것은 창작자의 종말과도 같다. 한때 눈부신 재능으로 빛났던 영화 감독이 이렇게나 망가질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참담한 기분이 들게 한다. 나는 '흔들리는 구름(2005)' 이후로 차이밍량의 영화를 끊었다. 뭔가 그의 영화 세계가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데이즈'를 본 것은 그의 현재를 한 번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롱 테이크는 낡아빠진 구닥다리 유물의 반복적 재현이며, 극도로 절제된 대사로 의도적으로 무성 영화를 떠올리게 만드는 시도는 자기 기만일 뿐이다. 차이밍량은 베를린 영화제 상영 때에 자막 없이 상영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영화의 대사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부수적인 것이며, 영화의 시원(原)인 무성 영화로 돌아갈 필요성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강은 논과 관계를 마치고 호텔에서 선물로 오르골을 건네는데,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채플린의 '라임라이트(Limelight, 1952)' 주제곡이다. 물론 '라임라이트'는 유성 영화다. 그러나 '채플린'이란 인물은 무성 영화 시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차이밍량은 '데이즈'를 통해 지금 시대 영화의 모든 것을 조소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그런 비웃음은 공허하게 울리며 흩어진다.


  차이밍량의 초기 영화들, '애정만세(1994'), '하류(1997)', '구멍(1998)'이 그토록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던 것은 그 영화들이 가진 보편성에 있었다. 현대인의 고독, 상실감, 소통에 대한 갈망을 자신만의 영화 언어로 그려낸 그에게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이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영화적 영감을 소실한 것 같다. 창작자는 작품으로 관객, 또는 독자와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겪은 고통과 슬픔을 일방적으로 늘어놓으며, 공감과 연민을 '구걸'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길가의 걸인을 떠올리게 만든다. 차이밍량은 '데이즈'로 자신의 고통을 위무받고 싶어하며, 더 나아가서 걸인처럼 관객에게 그것에 대한 동의와 연민을 구걸하고 있다. 참담한 일이다.


  이 영화를 좋은 영화이며 온갖 미사여구로 포장하려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그건 그 사람들의 말이고, 해야할 일일 것이다. 나는 내 글을 쓰며, 나의 일을 할 뿐이다. '데이즈'는 결코 좋은 영화가 아니다. 마치 아마추어가 어설프게 찍은 퀴어 영화 같은 인상을 준다. 이 영화의 간단한 요약은 '늙은 게이의 그저 그런 나날들'이 될 것이다. 이강생이 분한 '강'은 젊은 게이 '논'의 미래이다. 늙고 아픈 육체와 젊고 매끈한 육체는 같은 시간대, 공간 속에 위치하고, 그 둘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차이밍량이 보여주는 이런 대비는 영화적으로 하등 새로울 것이 없다. 나는 이것을 비평적으로 포장할 그 어떤 의지도 갖고 있지 않다.


  어쩌면 차이밍량은 더이상 영화를 찍고 싶어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좋은 시절은 이미 오래전에 흘러갔다. '데이즈'는 그의 나태함과 영화적 상상력의 부재를 여실히 입증한다. 차이밍량은 이제 은퇴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창작자로서의 그의 진정한 종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끝을 보는 것은 그의 영화를 아끼고 사랑했던 이들에게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다. 나는 '애정만세'의 메이처럼 목놓아 울고 싶은 기분마저 들었다. 



*사진 출처: hollywoodrepor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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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큰 저택을 청소할 수 있겠어?"


  여자는 자신의 가사 도우미들에게 웃으면서 그렇게 묻는다. 여자는 한창 건축 중인 자신의 대저택을 둘러보는 중이다. 이 집은 여자에게는 평생의 숙원과도 같다. 여자는 그 집에 '베르사유 궁전(Palace of Versailles)'이란 이름을 붙였다. 정관사 'The'가 붙지 않았으니, 진짜 베르사유 궁전의 미국판쯤 된다고 할 수 있을까? 정말로 어마어마한 저택이기는 하다. 여자의 이름은 재키, 남편은 데이비드 시겔. 미국에서 부동산과 리조트 사업으로 엄청난 부를 쌓은 재력가이다.


  로렌 그린필드가 2012년에 제작한 다큐 '베르사유의 여왕(The Queen of Versailles)'은 재력가 부부의 화려한 일상을 촬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들이 살고 있는 집은 무려 17개의 욕실이 있는 대저택인데, 새로 짓는 베르사유 궁전은 30개가 될 거라고 재키는 자랑한다. 오랫동안 재키는 베르사유 궁전의 화려함과 웅장함을 본떠서 만드는 새 저택에 어울릴 온갖 앤티크 가구들이며 장식품들을 사들였다. 그것들을 보관하는 전용 창고까지 있을 정도다. 이제 그 '꿈의 집'이 지어지기를 기다리는 일만이 남았다, 고 생각한다.


  부자라고 인생이 그렇게 순탄하게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2007년, 미국의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금융 위기가 이 부부의 일상을 뒤흔든다. 거칠 것 없었던 사업은 자금 흐름이 막히면서 직원들의 대량 해고, 은행의 압류, 자산 매각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다큐를 제작하는 감독에게 이건 생각지 못한 '호재'였는지도 모른다. 급전직하하는 부자의 모습을 담아낼 기회가 흔하겠는가? 꿈의 집 베르사유 궁전의 건축은 중단되고, 그들이 살고 있는 대저택의 일상에도 변화가 생긴다.


  입양한 재키의 조카 한 명을 비롯해 여덟 명에 이르는 아이들을 돌보는 유모와 가사 도우미들, 집안일을 하는 사람들이 우선 줄어든다. 그러자 집안은 재키가 키우는 개들의 배설물들이 나뒹굴며, 수족관의 물고기와 키우던 도마뱀이 죽어 나간다. 주방도 지저분하기 짝이 없다. 아이들은 제멋대로이며 어질러 놓기 바쁘다. 은행에서는 데이비드의 돈줄을 막고 있고 그는 씀씀이를 줄여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재키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엄청나게 많은 물건을 사들이고, 남편의 우울한 기분을 달래준다며 성대한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기도 한다. 재키는 34세에 결혼한 이후로 그렇게 물쓰듯 돈을 쓰며 살아왔다. 그때 데이비드의 나이는 65세. 그는 2번의 이혼 경력이 있는 사업가로 재키는 흔히 말하는 그의 '트로피 와이프(trophy wife)'였다.


  재키의 인생 역전은 미인대회에서 시작되었다. 공대를 나와서 엔지니어로 IBM에서 일하기도 했던 여자는 다닥다닥 붙어있는 칸막이 사무실에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회사를 때려치우고 뉴욕으로 가서 모델일을 하다가 미인 대회에 출전한다. 데이비드를 만난 것도 그 대회의 파티에서였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꽤 순탄하게 이어져 왔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돈 가뭄'에 늙은 남편은 화가 난 상태고, 여자는 삶의 방식을 바꾸고 싶은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다. 이 부부는, 그리고 이 집의 아이들은 이 위기를 잘 견딜 수 있을까...


  감독 로렌 그린필드는 재력가 부부의 삶에 닥친 풍랑을 감각적으로 담아낸다. 거기에는 부자들의 일상에서 잘 보이지 않는 고용인들의 목소리도 들어있다. 재키의 아이들을 돌보는 필리핀 유모는 돈을 벌어서 죄다 고국의 가족들에게 부친다. 정작 자신의 어린 아들은 못보고 지낸지가 꽤 되었다. 유모에게는 부양해야할 친정 식구들도 여럿이다. 화려한 저택에서 떨어진 한 귀퉁이 작은 조립식 건물은 오로지 침실 한 칸으로 되어있다. 침대는 접이식으로 매우 비좁은 공간이다.


  "우리 아버지는 시멘트로 된 집 한 채를 갖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어요. 그런데 그걸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죠. 그리고 결국 시멘트 무덤에 누워계세요."


  필리핀 보모는 그렇게 말하며 눈물을 훔친다. 자신이 돌보는 이 집구석의 아이들은 이미 수십 대의 자전거가 있는데도 월마트에 가서 자전거며 장난감과 물품들을 미친듯이 사들인다. 그렇다. 세상은 결코 공평하지 않다. 재키는 남편의 사업이 어찌 되든 자신이 받는 스트레스를 값비싼 캐비어 통조림으로 달랜다. 보톡스 시술도 거를 수 없다. 이 여자는 자신의 베르사유 궁전이 지어지지 못할까봐 가슴 아프고 조바심이 난다.


  다큐는 이 부부의 경제적 어려움이 이어지고 있는 도중에 끝이 난다. 세상에서 부자 걱정하는 게 가장 쓸데없는 일이다. 이 부부의 현재는 평화롭다. 데이비드의 사업은 위기를 넘겼고, 재키의 베르사유 궁전은 이제 곧 완공을 앞두고 있는 모양이다. 이 대저택은 미국에서 4번째로 값나가는 집이며, 추정가만 해도 3400억이다. 팔려고 내놓아도 살 만한 사람이 별로 없을지 모른다. 재키의 꿈은 이뤄질 것이다.


  그런데 이 다큐의 반전은 부자의 시련과 곤궁(?)을 그려낸 것에 있지 않다. 이 다큐는 그 화제성 덕분에 2012년 선댄스 영화제, 브리스번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데이비드 시겔의 심사가 무척 불편했던 모양이다. 그는 이 다큐로 자신의 사업체와 관련된 명예가 손상되었다며 제작을 지원한 미국 독립 영화 협회(IFTA)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무려 3년에 이르는 법적 공방이 계속 되었다. 결국 다큐의 저작권에 일정 부분의 지분을 갖는 것으로 감독과 제작사는 합의를 해야했다. 부자 성질 건드리면 뒤끝도 그렇게 지독하다.


  문득 오래전 공부할 때 들었던 '영화와 법' 강의가 떠오른다. 영화 제작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법적인 문제들에 대해 다루는 강의였다. 변호사 양반이 퇴근한 늦은 저녁에 하는 강의였다. 한 학기 동안 배우면서 내가 느낀 것은 그랬다. 미국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표현의 자유'에 그리 관대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 명예 훼손은 '사실의 적시()'와는 관계없이 적용되는 죄목이라는 것. 어쨌든 만약에 대비해서 영화 제작을 하는 이들은 제작의 마지막 단계에서 법률적 조언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 다큐 제작의 경우에는 실제 인물과 사건을 담아낸다는 점에서 더 많은 것들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베르사유의 여왕'은 돈이 썩어나가게 많은 부자에게 닥친 꽤나 심각한(?) 일상의 위기를 면도칼처럼 예리하게 잘 포착해 낸다. 그것이 궁금한 이들이라면 이 다큐가 그 궁금증을 조금은 풀어줄 것이다. 그런데 엄청난 부자라고 해서 그렇게 삶이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그들이 느끼는 주관적 행복은 관객이 보는 것과는 다를 수 있다. 재키의 첫째 딸 빅토리아는 2015년에 약물 과다 복용으로 세상을 떴다. 부부는 딸에게 생긴 비극을 이 다큐의 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다큐를 본 이들이라면 과연 그럴까, 하고 생각할 것이다. 대저택에 사는 그 가족들의 내면이 무질서와 공허함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베르사유의 여왕'이 입증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dogwoof.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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