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말이지, 아버지의 일생을 한번 생각해 봤어. 결국 부모로서의 성공은 자식들이 얼마나 행복하게 잘 사느냐로 판가름 나는 것이지. 우리 아버지는 어떤지 모르겠네."


  아들 슈이치(우에하라 겐 분)는 아버지(야마무라 소 분) 앞에서 태연하게 그런 말을 늘어놓는다. 그 말을 듣는 아버지의 속이 편할 리 없다. 아들 슈이치는 며느리 키쿠코(하라 세츠코 분) 몰래 바람을 피우고 있고, 시집간 딸은 남편과 불화가 심해서 툭하면 보따리 싸들고 친정에 온다. 시아버지 싱고는 아들에게 냉대받는 며느리가 안쓰럽고, 어떻게든 아들 내외의 결혼 생활을 이어가게 하려고 애를 쓴다. 과연 그의 바램대로 아들 내외는 화목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산의 소리(The Thunder of the Mountain, 1954)'는 한 가족의 일상에 내재된 균열과 상처를 담아낸다. '안즈코(1958)'에서 딸을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감싸주는 아버지로 나왔던 배우 야마무라 소가 이 영화에서는 사람 좋은 시아버지로 나온다. 며느리를 아끼다 못해 자식 보다 더 예뻐한다는 불평을 딸과 아내가 쏟아낸다. 그런 아버지를 아들도 못마땅하게 생각할 뿐이다. 영화 속에서 싱고가 자신의 가족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그렇게 살갑지 않다.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가장 걱정하는 동안, 시어머니는 아들 내외에 무관심하며, 친정으로 애들 데리고 온 딸은 속 긁는 소리만 하고, 아들은 밖으로 나돈다. 이 집안 사람들의 가족으로서의 유대와 정서는 여기 저기 균열이 가 있다. 경제적으로는 부유하지만, 그들 내면의 풍경은 황량하다. 


  나루세 미키오가 그려내는 이런 가족 드라마는 결코 편하게 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어떤 문제 하나만 해결하면 잘 풀릴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그 속에는 구불구불하게 얽힌 길이 있으며, 도무지 출구를 찾기가 어려워 보인다. 삶이 가진 복잡성, 그것이야말로 이 감독이 자신의 영화에서 진중하고 치열하게 탐구하고자 했던 주제였다. '산의 소리'에서 주인공 싱고가 맞부닥뜨리는 집안의 문제는 며느리에게 따뜻하게 대해주고, 아들의 바람기를 잡으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싱고에게 며느리 키쿠코의 유산(産) 소식은 예기치 못한 충격을 준다. 그것이 전적으로 키쿠코의 의지로 결정한 일이라는 점은 키쿠코와 이 가족의 결별을 의미한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대에 키쿠코의 그런 주체적이고 강단있는 결정은 오늘날의 관객에게도 나름의 충격을 준다. '자식이 있으면 밖으로 나돌던 남자는 언젠가 돌아온다'고 믿던 시대에 키쿠코는 어렵게 생긴 아이를 스스로 버린다. 더군다나 늘 순종적이고 웃는 얼굴을 보이던 키쿠코가 그런 선택을 했다는 점이 놀라울 뿐이다.


  남편 슈이치는 늘 아내를 '아이 같다'며 못마땅해 하고 비웃는다. 그 말의 뜻은 '순진무구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자로서 그 어떤 매력도 없고 아이처럼 세상물정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런 '아이 같은' 여자를 자신의 아버지는 마음에 들어해서 며느리로 삼았다. 그 시대의 혼사는 대부분 부모의 의지에 따라 결정되었다. 싱고의 딸이 자신의 괴로운 결혼 생활이 아버지 때문이라고 불만을 터뜨리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싱고가 친구의 미망인이 팔아달라고 부탁한 '노(能, 일본의 전통 연극)'의 가면을 흥미있게 들여다 보는 장면이 나온다. '노멘(能面)'이라고 부르는 가면은 표정이 없다. 연기하는 배우들은 오로지 고개의 움직임만으로 인물의 내면을 표현해 낸다. 싱고가 매혹된 '노멘'은 아이의 얼굴이었다. 그는 며느리 키쿠코의 항상 웃는 모습이 순진무구한 아이 같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그의 첫사랑이었던 아내의 언니와도 닮았던 것은 아닐까?


  "당신은 미인이었던 내 언니와 결혼하려고 했죠. 언니가 일찍 죽지만 않았다면 말이에요. 불쌍한 언니..." 


  좌절된 첫사랑과 별다른 애정없이 이어진 결혼 생활, 아내의 애정은 과도하고 무분별하게 아이들에게 투사되었고 제멋대로 자라났다. 결국 그의 노년에 그가 목도하는 가정의 균열은 당연한 것이다. 키쿠코는 그 근원을 들여다 보면서 자신의 결심을 굳혔을 것이다. 사랑이 없는 결혼은 그 어떤 것으로도 지탱해 나갈 수 없는 것이라고.


  여름에 해바라기를 보면서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던 시아버지와 며느리는 스산하고 메마른 겨울 공원에서 만난다. 어쩌면 그 두 사람이 다시 만날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서로 못다한 말들을 가슴에 꾹꾹 눌러담으며, 대화의 끝무렵에 싱고는 공원의 경치가 좋다고 말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겨울의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며 사라진다. 시아버지와 며느리로 만났지만, 가장 인간적으로 가까웠던 그 둘의 마지막은 그렇게 쓸쓸하고 외로웠다. '설국'으로 유명한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이 원작인 이 영화는 나루세 미키오가 가장 좋아하는 자신의 작품이기도 했다. 절제된, 그러나 좌절된 정념(念)의 여정을 '산의 소리'는 담담히 그려낸다.



*사진 출처: fando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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