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와 나
"정현 씨, 이거 업무용 휴대폰이야. 인턴한테는 이런 걸 주지는 않는데, 요새 책 출간이 몰려서 일이 바빠. 그러니까 전화 오는 거 잘 받아서 업무 일지에 기록해 두고. 물어볼 거 있으면, 나한테 물어보고. 잘 알겠지만, 개인적인 용도로는 쓸 수 없어."
정현은 이 대리로부터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새것처럼 보이는 검정색 휴대폰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위에서 시키는 일로 바빴다. 그런데 거기에다 업무용 휴대폰으로 오는 전화 응대라니, 정현은 머리에 무거운 짐보따리 하나를 더 얹은 느낌이었다. 나는 인턴이다. 이 회사의 최말단 인턴이다. 어쨌든 3개월의 수습 기간을 견뎌야 한다. 이런 것쯤은 아무렇지 않게 해내야 한다. 정현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되뇌면서, 건네받은 휴대폰을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놓았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동안은 자신의 휴대폰을 서랍에 넣어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현 씨, 있다가 2시에는 편집부 회의가 있어. 거기 한번 들어가 봐. 내가 편집부 구 대리한테는 말해놨어. 편집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한번 보는 거야. 장소는 5층 소회의실."
"네, 알겠습니다."
정현이 업무용 휴대폰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데, 이 대리가 그렇게 말하고는 사무실을 나갔다. 오늘은 이래저래 바쁘겠네. 정현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책상 위에 켜진 모니터에는 쓰다만 업무일지 화면의 커서가 깜박이고 있었다. 어디까지 썼더라, 정현은 콧등에 흘러내린 안경을 바로 쓰고는 모니터를 들여다 보았다. 그때였다. 책상 위의 휴대폰에서 징, 징, 하는 진동음이 들렸다. 문자 메시지가 온 모양이었다.
'칼리 헤어샵 이민정 디자이너입니다. 파마하실 때가 된 것 같아서 연락드려요. 이번 주에 오시면, 신년 할인으로 10퍼센트 할인해 드립니다.'
"이게 뭐지?"
정현은 업무용 휴대폰에 뜬 문자 메시지를 읽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전에 휴대폰을 쓴 사람 앞으로 온 것 같았다. 어떤 여자가 썼나 보네. 칠칠하지 못하게 저게 뭐람. 전화번호 이동을 하려면 깔끔하게 정리를 하던가. 정현은 어쩌면 한동안 저런 쓸데없는 문자에 시달리는 것은 아닐까 싶어서 약간 짜증이 났다. 미용실 전화번호를 차단 목록에 넣고는 정현은 작성하던 업무 일지에 집중했다.
'2026년 국가장학금 1차 신청 기한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기한 내에 신청해 주기 바랍니다.'
"아니, 이건 또 뭐야?"
국가장학금 신청에 대한 문자 메시지였다. 대학생인가 보군. 2개의 문자 메시지는 업무용 휴대폰의 이전 주인이 여대생이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그것은 정현에게는 하등 쓸데없는 정보일 뿐이었다. 한 번 더, 정현은 그 안내 문자 전화번호를 차단 목록에 추가했다. 정현이 이 대리로부터 휴대폰을 받은 지 30분도 채 되지 않았다. 도대체 오늘 하루에 몇 개의 전화번호가 차단 목록에 더 추가될지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그렇지 않아도 업무 일지 작성에다, 출판사에 걸려 오는 문의 전화 응대, 자잘한 외부 심부름까지 해야 하는 정현에게 이 휴대폰은 뭔가 애물단지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인턴이라는 자신의 처지에서 싫은 기색을 내비칠 수도 없었다. 모니터의 화면에서는 쓰다만 업무일지의 커서가 깜박거리고 있었다. 모니터 하단에 뜬 시계를 보니, 1시 43분이었다. 2시에는 편집부 회의에 가야만 한다. 정현은 서둘러 오전 업무 일지 작성을 마무리했다.
"일은 좀 어때요? 이 대리님이 마구 굴려서 힘든 건 아닌지 몰라."
회의실에 들어와서 막 자리에 앉은 정현에게 말을 건 사람은 편집부의 구 대리였다. 약간 퉁퉁한 체격에 목소리까지 걸걸한 구 대리는 머리까지 짧게 잘라서 남자처럼 보였다. 편집부의 직원은 5명. 그 가운데 맨 막내 사원인 선호 씨만 빼고 모두 여자였다. 출판사도 이젠 여초 직장이 되었나 보군. 정현은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위화감을 느꼈다. 정현이 배치된 마케팅부에서도 5명의 정직원 가운데 남자는 이 대리뿐이었다.
"아직은 업무 파악을 하느라 좀 정신이 없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병아리 시절에는 다들 그래요. 오늘 회의는 그냥 일상적인 거니까, 부담가질 필요는 없어요. 메모하거나 그러지 말고. 그냥 수다 좀 떠는 거죠. 업무와 관련된 수다."
구 대리가 그렇게 눙치는 말에 정현의 긴장한 마음도 조금은 펴지는 것 같았다. 회의의 주제는 새로 출간될 젊은 작가들의 단편선집 편집에 관한 것이었다. 정현은 자신의 자리에 놓인 프린트물을 살펴보았다. 거기에는 선집에 실린 작가들의 간략한 소개와 소설의 목차가 적혀 있었다. 책에 실릴 단편은 9편인데, 놀랍게도 그 소설의 작가들은 모두 여자였다. 세상에, 남자 작가들은 전멸한 모양이군. 정현의 관심사는 시였다. 요새 주목받는 젊은 시인들 가운데 여성들이 좀 더 눈에 띄기는 했지만, 정현이 좋아하는 남자 시인들도 몇몇 있었다. 그런데 소설의 경우는 좀 다른 것 같았다. 만약 괜찮은 소설을 써내는 남자 작가가 있다면, 그 단편선집에 실리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정현은 혼자 속으로 그렇게 반문했다.
"유리아 작가님은 소설을 2편 보내왔는데, 어떤 걸 뽑는 게 좋겠어요? 다들 읽어본 소감을 말해봅시다. 나는 '엄마는 바다로 갔다'가 좋았는데."
편집부장이 빠진 회의를 이끄는 사람은 구 대리였다. 구 대리의 말에 이어서 편집부 팀원들의 이런저런 의견 제시가 이루어졌다. 정현은 잘 알지도 못하는 내용이라,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서는 프린트물을 괜스레 뒤적여 보았다. 프린트물의 맨 하단에는 선집에 실릴 평론도 있었다.
'우리 시대의 작가들은 페미니즘을 근원적으로 장착해야 한다.'
정현은 그렇게 시작되는 평론을 뜨악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니, 페미니즘을 말하지 않으면 소설도 쓰지 못하나? 이건 뭔가 강제하는 느낌이군. 정현은 그 평론을 천천히 읽어 나갔다. 그리 길지 않은 그 글을 읽고 나니, 삶은 계란을 꾸역꾸역 먹다가 목이 막힐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현은 자신의 텀블러 뚜껑을 열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너무 우리들끼리만 말한 것 같다. 정현 씨 이야기도 좀 들어봐야지. 편집부 회의에 들어와 보니, 어때요?"
"아, 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책이 만들어진다니, 흥미롭네요."
정현은 딱히 할 말이 없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편집부의 막내 선호 씨가 정현에게 질문을 던졌다.
"여기에 나온 작가 중에 정현 씨가 읽어보고 관심을 가지는 작가가 있어요?"
"어, 그게 저는 소설보다는 시를 더 좋아해서요. 김은수 작가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어서..."
"그러면, 우리들 회의하는 거 듣는 게 좀 괴로웠겠다. 그래도 간략하게 소감이라도 말하고 회의 마무리하죠."
구 대리의 말에 편집부 사람들이 정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음, 그러니까 제가 보기에는 이 선집에 실리는 작가들이 다 여성 작가더라고요. 남성 작가의 글도 한 편 싣는 것이 어떤가 싶은 생각도 들고 그러네요. 그러니까 그게, 균형을 맞춘다는 측면에서요."
정현은 자신의 말에 뭔가 분위기가 싸해지는 것을 느꼈다. 요새 소설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한마디 보태려다가 쓸데없는 혹을 붙인 것만 같았다. 정현은 솔직하다 못해 약간은 나이브한 자기 모습에 절로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선호 씨, 정현 씨가 읽어볼 만한 책들 좀 챙겨서 줘 봐."
구 대리는 그렇게 말하면서 회의실 문을 나섰다. 정현은 편집부 사람들이 떠난 회의실 책상에 혼자서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아니, 자신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 않는가. 왜 획일성을 강제하는가? 정현은 살짝 억울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음날, 정현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어제 좀 신경을 써서 그런가 보네. 책상 오른쪽 맨 위쪽의 서랍을 열고 타이레놀을 찾았다. 딱 한 알 남은 타이레놀이 참으로 반가웠다. 저 약도 사놔야겠다. 약값도 많이 올랐던데. 정현은 혼잣말을 하면서, 알약을 삼켰다. 건너편 침대의 문국은 정현의 기척에 잠에서 깬 것 같았다.
"몇 시냐?"
"이제 8시 반 좀 넘었네. 나 때문에 깬 거야?"
"깨기는 뭘. 아침잠도 젊었을 적에나 쏟아지지. 이젠 늙어서."
"웃기는 소리하네. 야, 스물여섯이 늙은 거냐?"
"늙었지, 늙은 거야."
정현은 문국의 우스꽝스러운 푸념에 피식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대학에 다닐 때는 공부하느라, 군대에 갔을 때는 얼른 시간이 흘러가길 바라면서, 그러다가 졸업반이 되고 허덕허덕하다가 겨우 인턴사원 명찰 하나 달고 있으니 어느덧 스물여섯이었다.
"너, 방 비우는 날이 언제더라?"
"2월 3일. 학사 관리실 게시판에 그렇게 적혀있더라고. 엊그제 문자로도 알려주고. 오늘 주말이니까, 신림동 쪽에 방 좀 알아보려고."
"내가 같이 가줄까? 혼자보다는 낫잖아."
"그러면 나야 좋지. 내가 점심 살게."
정현은 방을 보러 가는 자신과 동행해 주겠다는 문국의 제안이 고마웠다. 정현이 이 학사에서 머물 수 있는 날은 이제 보름 남짓 남았을 뿐이었다. 이 기숙사는 시내 중심가에 자리한 낡은 건물이었다. 정현의 고향 유지가 서울에서 공부하는 유학생들을 위해 세운 학사였다. 기숙사에 당첨되는 것도 어려운 지방 학생 입장에서 이런 혜택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벽에는 군데군데 금이 가고, 건물의 외벽 페인트칠이 벗겨진 이 학사를 이제 정현은 떠나야만 했다. 정현은 무언가 서러운 느낌도 들었다. 보잘것없지만 작고 따뜻한 방의 아랫목에 있다가 내쫓김을 당하는 것만 같았다. 새로 구해야만 하는 자취방은 어떨지 걱정스럽기도 했다. 모든 것이 비싼 이 서울 바닥에서 과연 가난한 사회 초년생인 자신이 살만한 집이 있을까?
그날 하루 동안 정현은 문국과 함께 신림동의 원룸 빌라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자신의 마음에 드는 집을 찾는 것은 마치 모서리가 맞지 않는 퍼즐을 억지로 구겨서 끼워 넣는 일과도 같았다. 월세가 싼 곳은 화장실이 낡았고, 인테리어가 괜찮아보이는 어느 원룸은 방음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정현이 부동산 중개인이 안내하는 동안, 살짝 벽을 두들겨 보니 '텅텅'하고 울리는 소리가 났다. 말만 원룸이지 싸구려 고시원 방이나 다름없었다. 정현이 보고 나온 어느 원룸 빌라에는 문신한 중년 남자가 드나들었다. 정현은 이 서울 바닥에서 싸구려 월세방 구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임을 실감했다.
"젊은 양반, 그렇게 까다로우면 방 못 구해. 돈이 없으면 기대를 좀 접던가."
정현과 함께 원룸촌을 돌며 방을 보여주던 중개인 영감이 정현에게 한마디했다. 정현은 영감의 좀 무례한 말투에 불쾌감을 느꼈지만, 다른 말을 더하지는 않았다. 영감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영감의 말마따나 자신은 돈이 없었고, 까다로운 기준도 가지고 있었다.
"정현아, 아까 봤던 그 전철역 근처 원룸 빌라 말이야. 그 정도면 괜찮은 거 같아. 그 정도 방에 월세 35만 원이면 나쁘지 않아. 관리비 8만 원이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다른 데 보다는 깔끔하잖아. 보니까, 드나드는 사람들 행색도 멀끔해 보이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기는 해."
"영감탱이 말은 그냥 넘겨. 그런 거 신경쓰다가는 속만 상한다."
정현은 문국과 함께 고시촌 근처의 돈가스 체인점에 들어가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추운 날 나와서 고생해 준 문국에게 뭔가 괜찮은 것을 사주고 싶었지만, 그 돈가스도 1인분에 15000원짜리였다. 오히려 문국이 그 옆 가게의 12000원짜리 칼국수를 먹자는 것을 정현이 돈까스를 사겠다고 했다. 너무 튀겨서 질깃거리기까지 한 돈가스를 우물거리면서 정현은 가게 밖으로 보이는 고시촌의 거리를 응시했다. 흐린 날씨 때문인지 창밖의 풍경은 어딘지 음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날씨처럼 정현의 마음도 잔뜩 구름이 낀 것처럼 느껴졌다.
신림동에서 돌아온 그날 오후, 정현은 자신의 짐 정리를 하고 있었다. 이사를 하기 전에 미리 버릴 것은 버리고 해서, 가져갈 것들을 간소하게할 생각이었다. 징, 징. 책상 위에 놓아둔 정현의 업무용 휴대폰이 진동음 소리를 내었다. 정현은 주말에도 업무용 휴대폰을 살펴봐야했다. 이 대리가 인쇄소에서 연락올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회사에 두지말고 가져가라고 했기 때문이다.
'김수지 님, 롤프 쇼핑몰 물류센터 채용 담당자입니다. 주말 아르바이트 배정이 완료되었습니다. 통근버스 출발 장소는 첨부한 링크를 눌러서 확인해주세요.'
파마할 때가 다 되었고, 국가 장학금도 신청해야 하는 이 문자의 주인공은 주말에 쇼핑몰 물류센터 알바를 하러 나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여대생의 이름은 김수지였다. 정현은 그 문자 메시지 번호를 수신 차단 목록에 넣기 위해 설정 버튼을 눌렀다. 다소 귀찮은 일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렇게 짜증이 나지 않았다. 얼굴도 모르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젊은 여성이 열심히 살아가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정현은 기묘한 동질감마저 느꼈다.
주말을 보내고 출근한 월요일, 정현은 이 대리와 함께 인쇄소에 가기로 되어있었다. 새로 출간할 시집과 계간지의 인쇄 품질을 보기 위한 외근이었다. 인쇄소라고 해서 뭔가 허름하고 시끄러운 공장 같을 거라고 생각한 정현은 깔끔한 건물의 외관에 좀 놀랐다. 인쇄소 안의 풍경도 마찬가지였다. 밝은 조명 아래에 자동화된 설비에서 쉴 새 없이 찍어내는 종이들이 반짝거리면서 빛을 내고 있었다.
"이렇게 인쇄 과정 전반을 살펴보는 걸, 인쇄 감리라고 하는 거야. 책 출간 전에 인쇄 상태를 보고 조정하는 일이지."
정현은 이 대리가 담당 라인의 인쇄 주임을 만나는 동안,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출판사 블로그에 올릴 게시글 때문이었다. 그냥 노비가 따로 없네. 사진도 찍고, 전화도 받고, 탕비실 청소도 하고. 정현은 마음에 드는 구도가 나올 때까지, 여러 번 휴대폰의 카메라 버튼을 눌렀다. 자신이 찍은 사진을 보면서, 최종본을 고르는데 휴대전화가 짧게 2번의 진동음을 내었다.
'김수지 님의 늘봄 네일 숍 예약이 완료되었습니다. 1월 8일 오후 3시 30분에 뵙겠습니다.'
주말에 열심히 알바하더니, 그 돈으로 손톱도 다듬나 보군. 수지야, 돈을 힘들게 벌었으면 좀 아껴 써라. 외모, 그까짓 거 다 한 꺼풀이야. 차근차근 돈을 모아야, 나중에 주식계좌 개설할 쥐꼬리만 한 자금이라도 되지 않겠니. 정현은 자그맣게 궁시렁거리면서, 차단 목록에 네일 숍 번호를 추가했다. 젠장, 언제까지 이런 번호들을 눌러서 차단해야 하지? 정현이 꾹꾹 휴대폰의 버튼을 누르고 있는데, 이 대리가 다가왔다.
"정현 씨, 좀 와서 얘기 나누는 거나 듣지. 뭐해?"
"아, 네. 업무용 폰으로 자꾸 이전 사용자의 문자메시지가 와서요. 그거 차단하느라..."
"그게, 전에 쓰던 폰이 깨지는 바람에 신규로 개통했더니 그런가 보네. 좀 번거로운가? 대부업체 독촉 전화 그런 건 아니지? 한동안 차단 계속하는 수밖에. 점심때 됐으니, 나가서 밥이나 먹자."
월요일은 언제나 바빴다. 정현은 인쇄소에서 돌아온 후에, 저녁에 있을 저자 강연회 지원 준비 작업을 했다. 미리 건네받은 강연 원고를 대충 훑어보고, 어색한 부분이 없도록 수정했다. 강연이 끝난 후에는 사인회가 있을 예정이어서 펜과 종이도 넉넉히 챙겼다. 정현이 그렇게 준비하고 있는데, 누군가 책상 위에 책 서너 권을 두고 갔다. 편집부의 선호 씨였다.
"시간 날 때, 한번 읽어보세요."
책상 위에 놓인 책의 맨 위 표지에는 '세계 페미니즘 걸작 단편선'이라는 글씨가 박혀있었다. 정현은 그 아래 책들의 책등도 살펴보았다. '오늘의 한국 문학', '우리 시대의 젊은 여성 작가들', '페미니즘의 역사'. 정현은 그 제목들을 읽다가 뭔지 모를 답답함이 느껴져서, 책들은 모니터로 부터 좀 먼 구석으로 밀어냈다.
"아, 이것도 가져가야지."
정현은 업무용 폰을 들고는, 혹시 자신이 확인하지 못한 전화나 문자 메시지가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새 문자 메시지가 있었는데, 백화점 화장품 매장의 카드 결제 완료 문자였다. 결제 금액은 15만 4천 원이었다. 정현은 물류센터 주말 알바를 하는 여대생의 씀씀이가 좀 남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은 그렇게 힘들게 아르바이트하면 돈을 좀 아껴 쓰거나 할 텐데, 수지는 그렇지 않았다. 이름이 있는 체인점 미용실에서 파마를 했고, 네일 숍에서 손톱을 다듬었으며, 백화점에서 화장품을 샀다. 국가장학금 신청을 할 수 있는 요건이 되려면, 그렇게 집안이 여유가 있지도 않을 터였다.
"수지야, 넌 참 편하게도 산다."
정현은 카드 결제 알림 문자의 번호를 차단 목록에 추가하고는 그렇게 혼잣말을 했다. 자기가 번 돈을 어떤 미래의 것을 생각하지 않고, 즉시 현실에 써버릴 수 있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정현은 새로 이사할 원룸의 관리비 8만 원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느껴졌다. 여대생 김수지는 그런 자신과는 아주 다른 사람이었다.
인쇄소와 저자 강연회로 바빴던 월요일이 지나고 목요일이 될 때까지 웬일로 업무용 폰의 알림은 조용했다. 정현은 번거롭게 느껴지던 수지와 관련된 문자 알림이 오지 않자, 어딘지 모르게 허전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금요일 아침이 되었을 때, 막 출근한 정현의 업무용 폰에 들어온 문자 메시지가 있었다.
'김*지님의 그린 비치 호텔 예약이 완료되었습니다.'
그 뒤에 이어진 문자의 내용에는 투숙과 관련된 안내 사항이 있었다. 수지는 강원도 양양의 호텔에서 주말을 보낼 계획이었다. 여대생 김수지는 연애도 열심히 하는가 보네. 정현은 갑작스러운 호텔 예약 안내 문자에 기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김수지는 정현에게 얼굴도 모르는 생판 남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수지가 주말에 호텔에 가기로 되어있다는 사실은 약간의 배신감마저 들게 했다. 정현은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호텔 예약 안내 전화번호를 차단 목록에 추가했다.
"어, 세제가 다 떨어졌네."
토요일 저녁, 정현은 기숙사의 밀린 빨래를 하기 위해 기숙사 세탁실에 있었다. 그런데 세탁물을 세탁기에 넣고 나서 보니, 세제 통은 텅 비어 있었다. 아니, 자기가 쓰고 세제가 떨어졌으면 관리실에 말이라도 해놓을 것이지. 정현은 38명이 사는 이 조그만 학사의 다양한 인간 군상을 생각했다. 컵라면 그릇을 치우지 않고 식탁에 놓고 가는 인간, 화장실 휴지를 떼어다가 방에다 놓고 쓰는 인간, 냉장고에 둔 다른 사람의 요구르트를 훔쳐 먹는 인간, 창밖으로 담배꽁초를 내던지는 인간... 인간이란 얼마나 이기적이고 무례하고 어리석은가. 정현은 그 시간에 호텔에서 누군가와 있을 수지는 어떤 유형의 사람인가를 잠깐 생각해 보았다.
"다음은 사건 사고 소식입니다. 방금 전에 올라온 속보입니다. 강원 방송국의 박충기 기자 연결하겠습니다. 박 기자님, 강원도 그린 비치 호텔에서 투신 사망 사고가 있었다면서요. 어떤 사건인지 알려주시죠."
정현이 관리실로 내려가려는데, 세탁실 옆의 휴게실에서 뉴스 채널의 속보가 들려왔다. 정현은 그냥 지나가려다가, '그린 비치'라는 단어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린 비치'는 수지가 예약한 그 호텔의 이름이었다. 정현은 TV 앞으로 재빨리 다가갔다.
"네, 사건이 발생한 시각은 오늘 오후 7시 30분경입니다. 투숙자 세 명의 시신이 호텔 1층의 화단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구급대가 출동했지만, 3명 모두 투신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이고요. 사망자는 남자 1명에 여자 2명입니다. 23살 여성 김 모 씨, 25살 여성 박 모 씨, 29살 남성 석 모 씨. 경찰은 이들이 어떻게 만나서 사망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 경위를 조사하는 중입니다."
"얼마 전에도 이런 비슷한 소식을 전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인터넷에서 알게 된 사람들이 함께 만나서, 투신 사망하게 된 사건이었는데요. 혹시 이번 사건도 그 사건과 유사점이 있지는 않습니까?"
"우선, 경찰에서 밝힌 바로는 이들은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닌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경찰은 추가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이들의 소지품과 휴대전화를 수거해서 정밀 감식하고 있습니다. 이후로 조사 결과가 나오는 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정현은 갑자기 맥이 탁 풀리면서, TV 앞의 소파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낡고 터진 합성 가죽 소파는 정현이 앉자마자 부서질 듯한 소리를 내었다. 자신이 뉴스에서 들은 사망자 23살의 김 모 씨는 수지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섣부른 추측일 수도 있었다. 주말에 투숙한 그린 비치 호텔에 젊은 여성이 한두 명이겠는가? 최근 몇 년 동안 양양은 주말마다 젊은 사람들이 몰리는 휴양지라고 들었다. 이번 주에 네일 숍에 가고, 새 화장품을 산 수지가 죽음을 택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다음날 새벽, 정현은 식은땀을 흘리며 악몽에서 깨어났다. 눈코입도 없는 어떤 여자의 얼굴이 도자기처럼 산산조각이 나서 해변가에 흩뿌려져 있었다. 정현은 그것이 수지의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수지가 이제는 세상에 없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정현은 땀으로 범벅된 얼굴을 씻으려고 화장실에 갔다. 아귀가 맞지 않는 화장실 창틀로 들어오는 겨울바람이 매서웠다.
"어휴, 내가 미친 거야, 미친 거라고. 알지도 못하는 여자애 하나 죽은 건데."
정현이 화장실에서 돌아오자, 문국이 졸린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하품하고 있었다.
"야, 수지가 누구냐? 네가 하도 수지야, 수지야, 하고 불러대서 잠에서 깼다. 옛날 여자 친구야? 아님, 요즘 누구 만나?"
"아, 아냐, 아니라고. 아무것도 아냐."
정현은 세게 머리를 내저으며 말을 얼버무렸다. 새벽에 잠에서 깬 것이 약간은 불만스러운지, 문국은 혼자 궁시렁거리면서 다시 잠을 청했다. 침대에 걸터앉은 정현은 업무용 폰의 전원을 켰다. 이제껏 차단해 두었던 수지와 관련된 전화번호를 차단 목록에서 모두 해제했다. 만약에 수지가 살아있다면, 그 문자로 무엇이든 연락이 오기는 올 것이다. 정현은 그 전화번호들에서 어떻게든 무슨 연락이 왔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되었다.
하지만, 보름이 지나는 동안 정현의 업무용 폰에는 수지와 관련된 그 어떤 문자도 오지 않았다. 대신에 정현은 왜 투고한 원고를 읽지 않느냐는 항의 전화를 비롯해, 인세를 언제 입금할 거냐고 재촉하는 작가의 전화 같은 것을 받았다. 그런 전화들을 받을 때, 지치지 않고 대답하는 법은 아주 간단했다. 자신을 기계로 인식하는 것이었다. 정현은 마치 자동응답기처럼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담당자에게 전하겠습니다. 불편을 끼쳐서 죄송합니다."
정현은 생각이 날 때마다, 인터넷 사이트에서 양양 호텔의 투신 사망 소식을 검색해 보았다. 그러나 인터넷 뉴스의 그 어디에서도 후속 보도는 확인할 수 없었다. 매일 이 나라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렇게 세상을 떠난 젊은 사람들의 소식 따위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인지도 몰랐다. 정현은 수지가 확실히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1월의 마지막 토요일에 정현은 신림동의 원룸 빌라로 이사했다. 짐이라고 해봐야 별것도 없었다. 커다란 여행 캐리어 2개가 정현의 살림살이 전부였다. 학사 관리실에서 작은 승합차로 짐을 실어다 주었다. 정현은 땅값 비싼 서울에서 자신을 4년 동안 품어준 이 낡은 기숙사가 너무나도 고마웠다. 이 학사를 세운 고향의 돈 많은 유지(有志) 양반은 지금은 하와이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정현은 얼굴도 모르는 그 영감님이 그곳의 햇살 아래에서 오랫동안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6개월 뒤면 너처럼 이 동네에서 방 구해야겠다."
문국은 정현이 새 원룸에서 짐 정리하는 것을 도와주면서 그렇게 말했다. 문국은 학비를 버느라, 한 학기를 휴학하고 지방의 건설 현장에서 일했다. 학자금 대출이 늘어나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런데 나, 취직이나 할 수 있을까? 넌 그래도 용케 취업해서 인턴이라도 되었는데 말이지. 영문학과는 그래도 불문학과보다 낫지 않냐?"
"그런 게 어딨어? 어문학 계열은 다들 힘들지."
"별로 쓸모도 없어 보이는 남의 나라말을 4년 동안 참으로 열심히도 배웠네."
정현은 영문학, 문국은 불문학 전공이었다. 문국은 쓸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정현의 원룸을 나섰다. 문국을 배웅하고 나서, 정현은 이제는 자신의 방이 된 304호로 들어왔다. 방에는 독서실에서나 볼 법한 작은 크기의 책상이 창가 쪽에 놓여있었다. 정현은 아까 책상 위에 둔 업무용 폰의 화면을 열었다. 혹시라도 연락이 온 것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수지야, 호주로 떠난다는 소식은 들었어. 떠나기 전에 한번 얼굴이라도 보면 좋겠는데. 연락 좀 주라.'
수지는 살아있었다. 아니, 죽은 적이 없었다. 정현은 그 문자 메시지를 보고 나서, 비로소 안도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저 뉴스 소식만 듣고서, 수지가 죽었다고 단정해 버린 자신이 한심스러워졌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정현이 수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여대생이라는 그 한 가지뿐이었다. 그럼에도 정현은 김수지라는 그 여학생이 무척 가깝게 느껴졌다. 어떻게 얼굴도 모르는 생판 남에게서 그런 친근한 느낌이 들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수지는 이제 호주로 떠날 예정이었다.
정현은 수지가 가게 될 호주라는 나라를 떠올렸다. 코알라와 캥거루가 있는 나라. 국토의 대부분이 황량한 사막인 나라. TV의 여행 프로그램에서 본 시드니의 오페라 하우스와 원주민의 신성한 산 울룰루(Uluru)가 있는 나라. 정현은 언제쯤 자신은 그 나라를 가보게 될까를 생각했다. 어쩌면 먹고사느라 바빠서, 살아있는 동안 그 나라를 가볼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다.
"아이구, 박 부장님. 잘 지내십니까? 밥은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시나요? 남의 돈 떼먹고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월요일, 출판사에 가장 먼저 출근한 정현이 탕비실 청소를 하고 있을 때 업무용 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은 정현의 귀에 쇳소리의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전화를 잘못 거셨습니다. 이 전화는 문재 출판사 마케팅부 전화입니다."
"어이, 이봐. 왜 이러셔. 목소리를 들어보니 댁이 박 부장이 아닌 건 알겠어. 하지만 거기에 박 부장이 있는 건 내가 다 알고 있거든. 박 부장 좀 바꿔봐."
"선생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번호를 잘못 아셨어요. 전화 끊겠습니다."
"그래, 끊어봐라 끊어봐! 너, 박 부장한테 그대로 전해. 내가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돈 받아낸다고. 돈 안갚으면 명대로 못살 거라고..."
정현은 위협적으로 을러대는 남자의 말을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전화를 끊고는, 그 번호를 바로 차단 목록에 추가했다. 도대체 과거에 이 전화번호를 썼던 박 부장은 어떤 사람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번호는 뭔가 마가 낀 것 같았다. 오후에 그 쇳소리의 남자는 다른 번호로 전화를 또 걸어왔다. 여대생 김수지가 가고, 새로운 인물 박 부장이 정현의 일상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