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터(Butter)


  "뭘 그렇게 오래 들여다봐? 그 코트 마음에 들어?"
  "응. 지호 아빠, 이 코트 좀 만져봐 봐. 얼마나 부드러운지 몰라. 보니까, 캐시미어가 47퍼센트나 들어갔어. 그래서 그런가 너무 부드러운 거야."
  "그렇게 마음에 들면 그냥 하나 사. 가만있자, 가격이 얼마야?"
 
  경희는 코트 소매에 달린 가격표를 들여다보는 남편의 표정을 살폈다. 경희의 예상대로 남편은 흠칫 놀라더니, 얼른 가격표가 붙은 소매 깃을 내려놓았다.

  "350이라니, 이건 좀 비싸네. 내가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사줄게."

  35만 원짜리였다면, 경희의 남편도 흔쾌히 그 코트를 사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경희가 본 그 코트의 가격은 350만 원이었다. 그것도 연말 세일 행사로 나온 가격으로 그 코트의 가격은 원래 450만 원이었다.

  "코트에 금가루라도 뿌렸나, 뭐가 그렇게 비싸?"
  "아마, 그 코트가 그만한 값어치를 하는 모양이지."

  경희와 남편은 그렇게 말을 주고받으면서 매장에서 나왔다. 그들이 나온 매장의 간판에는 '앤 마리(Anne Marie)'라는 검은색의 로고가 선명하게 박혀있었다. 그저 플라스틱 글자에 불과해 보일 뿐인 그 로고에는 고고한 매력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할리우드 여배우들과 세계의 갑부 여성들이 사랑하는 코트. 그것이 '앤 마리'라는 브랜드의 가치를 결정했다. 경희는 그저 만져보기만 했을 뿐인 캐시미어 코트에서조차 주눅이 드는 느낌이었다. 그 매장에 있는 캐시미어 100퍼센트 코트는 유리 상자 안에 진열되어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가격표가 붙어있지 않았다. 무척 비싼 옷이겠지. 저런 옷을 돈 주고 사서 입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경희는 새삼스럽게 그런 것이 궁금해졌다.

  휴일의 프리미엄 아웃렛 매장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원래 몰리는 방문객들에다가, 연말연시 선물을 사기 위해 온 사람들까지 더해졌기 때문이다. 주차장에서 차를 타고 나오는 데에만 30분이 넘게 걸렸다. 겨우 지상 주차장으로 나오자, 추적추적 내리는 빗방울이 차의 유리창에 부딪히며 흘러내렸다.

  "이거 좀 길이 막히겠는걸."

  남편은 약간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와이퍼의 작동 레버를 아래로 내렸다. 쓱싹쓱싹, 하는 소리와 함께 와이퍼가 빗방울들을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난 괜찮으니까, 천천히 가요. 아무래도 빗길 운전은 조심하는 편이 낫지."

  경희는 뒤쪽으로 서서히 멀어지는 아웃렛 매장을 한번 쳐다보았다. 350만 원이라고 적혀있는 코트의 커다란 가격표가 건물의 꼭대기에서 깃발처럼 펄럭이는 것만 같았다. 그냥 입어보기라도 할 걸. 매대의 옷걸이에서 코트를 꺼내지도 못하고, 그저 코트 원단만 만져보고 나온 자신이 한심스러워졌다. 매장 안에는 코트를 걸쳐보고 거울에서 맵시를 보는 사람들도 여럿이었다. 그런데 경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차피 사지도 않을 거, 괜히 입어보면 더 감질날 것도 같았다.

  "지호 녀석, 그냥 지방대 약대라도 들어가면 얼마나 좋아? 그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공대를 뭐하러 간다고 그러는지. 나 원 참."
  "나나 당신이나 걔 고집 못 꺾어. 알면서 그래요?"
  "아니까 속이 터지지. 어른들 말 들어서 하나도 손해날 게 없는데. 아마 나중에 후회하겠지. 그러다 정신 차리면 좋은 거고."

  지호는 나름 괜찮은 수능 점수를 받았다. 부부는 아들에게 안정적인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약대 진학을 권유했지만, 지호는 듣지 않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물리학을 공부하겠다고 했다. 지호는 명문대의 공대에 합격했다. 하지만 부부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월급쟁이로 산다는 것이 파리 목숨처럼 얼마나 손쉽게 내쳐질 수 있는 것인지 지호는 알지 못할 터였다. 그렇다고 그들의 자식이 학자로 대성할 그런 머리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것이 부부의 마음을 갑갑하게 만들었다. 포근한 겨울 날씨에 내리는 비가 뿌연 안개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경희가 보기에 지호의 앞날은 그 안개 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안개 속에 있는 것은 아들의 진로뿐만이 아니었다. 자신과 남편의 미래도 그러했다. 회사에서 중년의 관리직 부장으로 남편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부부에게 어떤 제대로 된 노년의 청사진이 있었던가? 없는 것 같았다. 아니, 없었다. 아무런, 그 무엇도 없었다.

  "사탕 가진 거 있어? 있으면 하나 좀 줘 봐."
  "응. 핸드백에 늘 갖고 다녀. 나이 드니까 자꾸 잔기침이 나서." 

  그들의 차는 횡단보도의 신호대기에 걸려 잠시 멈추었다. 경희는 핸드백에서 사탕을 하나 꺼내어 남편에게 건넸다.

  "어쨌든 올해는 무사히 넘어갔군. 작년에 희망퇴직으로 몇 명이 쓸려나간 줄 알아? 139명이야. 뭔가 회사에서 칼을 갈았다는 느낌이 들더라고. 이 악물고 말이야. 나중에 들으니, 그 퇴직 비용을 계열사에서 꾸어서 마련했다더군. 그러니까 돈 많이 드는 늙은 직원들 나가라, 이거지. 돈만 있었다면, 올해도 내보냈을 텐데 못했지. 하지만 내년엔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회사 상황이 많이 안 좋은 거야?"
  "안 좋지. 근데 그게 직원들 때문이 아니라, 시대적인 흐름 때문에 그래. 그러니 구조조정에 들어가는 거지. 웬만한 연구 개발도 다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돌리고. 아마 몇 년 이내에 그룹에서 계열사 정리하고, 본사를 그냥 관리부서 규모로 줄여버릴 것 같아."

  경희는 남편에게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되는 건데?'라고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런 걸 물어보았자, 별다른 대답을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남편의 기분만 처지게 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든 걸까?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경희는 돈을 맘껏 써본 적이 없었다. 

  "넌, 아주 돈을 많이 벌게 될 거야. 네 주변을 돈이 산처럼 둘러쌀 거야."

  경희는 숙이 아줌마가 자신에게 해준 그 말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숙이 아줌마가 세상을 뜬 지 얼마나 되었더라. 경희는 속으로 그 햇수를 헤아려 보았다. 벌써 20년이네. 숙이 아줌마는 늘 돈에 쪼들리며 살았다. 그건 아줌마가 가난한 남자를 만나 결혼했기 때문이다. 아줌마의 남편은 별다른 기술도 없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장사를 했다가 망하기를 반복했다. 아줌마는 어쨌든 살림에 보탬이 되기 위해 다양한 부업을 했다. 역학을 배운 것도 그랬다. 사주 관상을 볼 줄 알면 돈이 좀 될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경희가 수능시험을 치른 다음날, 아줌마는 경희의 집에 왔다가 그 말을 해주었다.

  그때부터 그 말은 경희에게 하나의 거대한 주문이 되었다. 어쨌든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역학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짜 아줌마의 점괘이기는 했지만, 경희는 그 말을 믿었다. 그래,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난 부자로 살아갈 운명인 거야. 경희는 사는 것이 힘들 때마다 그 말을 되새기곤 했다. 하지만 그 부자의 운명은 쉽사리 다가오질 않았다.

  "아니, 폭팔이 뭐야? 폭발이지. 어휴, 진짜 요새 애들 맞춤법이 엉망진창이네."

  안개를 뚫고 아웃렛에서 돌아온 그날 저녁, 경희는 자기소개서 원고를 교열하다가 헛웃음이 나왔다. '무난하다'를 '문안하다'로 쓴 것을 하도 읽다 보니, 경희는 '문안하다'가 맞는 말처럼 느껴져서 고치지 않고 넘어가는 때도 있었다. 이런 애들이 대학에 가서 도대체 무슨 공부를 한단 말인가? 교정이 끝난 자기소개서 원고 뭉치를 식탁 한쪽 구석으로 밀어놓고는, 경희는 삐딱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저녁 내내 경희가 교정을 본 자기소개서는 세 건. 한 건당 3만 원씩 받고 있으니까, 9만 원을 번 셈이다. 그것들을 들여다보느라, 고개를 숙여서 그런지 경희의 목은 뻣뻣해져 있었다.

  "아, 먹고 살기 참 힘들다."

  도대체 숙이 아줌마가 말한 돈의 산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렇게 힘들게 일을 하고 나면, 경희는 자신도 모르게 숙이 아줌마의 말을 떠올렸다. 그래, 아줌마가 그냥 초짜 역술가라서 엉터리 말을 한 것일 뿐이야. 그런 말을 믿다니, 나도 참 어리석지. 그렇게 되뇌면서 경희는 찻물을 끓이기 위해 식탁에서 일어났다. 한파주의보가 내려진 저녁, 보일러의 실내 설정 온도는 17도였다. 아무리 한파주의보가 내렸다고 해도, 실내 온도가 그 정도까지 내려가는 일은 없었다. 당연히 경희의 집 보일러는 돌아가지 않았다. 스웨터에 오리털 파카를 껴입은 경희는 펭귄처럼 보였다. 옷을 껴입으니, 걸음걸이도 둔했다. 천천히 뒤뚱거리면서 경희는 가스렌지 앞으로 걸어갔다. 타타타... 가스레인지의 불꽃이 점화되는 소리를 냈다. 

  "홍차가 다 떨어졌네."

  경희가 찻잎 쪼가리 몇 개 남은 홍차 캔의 반짝거리는 바닥을 보는데, 남편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일 아침 추운데 출근하려면 힘들겠네. 경희는 보일러의 실내 설정 온도를 23도로 높였다. 웅, 하는 소음과 함께 보일러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자신이 추운 것은 견딜 수 있어도, 돈을 벌어오는 가장의 육신을 힘들게 하는 일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홍차 캔을 하릴없이 내려놓고, 경희는 차를 끓이기 위한 것을 찾아보았다. 냉장고 한구석에 말라비틀어진 생강차 조각이 든 통이 보였다. 저걸 우려서 마시면 되겠네. 마침내 찻물이 끓는 소리를 내었다.

  알싸한 생강의 맛을 느끼면서, 경희는 아까 작업해 놓은 교정 원고를 인터넷에 업로드했다. 경희가 해놓은 일감을 올린 곳은 교정 전문 플랫폼(platform) 사이트였다. 그 사이트는 등록된 구직자들에게 들어온 교정 원고 일감을 배분해 주고, 그에 따른 수수료를 받았다. 이 사이트에서 일반적인 자기소개서 1건을 교정해 주는 비용은 5만 원이다. 그러니까 경희는 플랫폼 사이트에 2만 원의 중개수수료를 지급하고, 그 차액인 3만 원을 받는 셈이다.

  "어휴, 날강도 놈들."

  경희는 역의 플랫폼에 서 있는 자신을 상상했다. 누군가 자신의 지갑에서 아무렇지 않게 정해진 돈을 빼가고 있었다. 그것이 플랫폼 노동자로서 경희의 현실이었다. 경희는 오늘 일한 15만 원어치의 일감에서 6만 원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참으로 기가 막힌 시스템이었다.

  '문화 여고 37회 동창회의 밤 행사 일정'

  휴대폰을 잠시 들여다보던 경희는 동창회 알림 문자를 발견했다. 그 문자에 이어서 온 문자는 미주의 것이었다.

  '이번에는 너도 와라. 이제 애도 대학에 보냈겠다, 마음 편하게 보자고.'

  아들의 입시 때문에 마음 졸이며 지내온 3년이었다. 남의 자식 잘되었다는 소식 들으면 속이 시끄러워질까 봐, 경희는 동창회에 가지 않은 지가 꽤 되었다. 하지만, 지호가 좋은 대학에 합격하고 보니 경희의 마음에도 여유가 생겼다. 궁금해지네. 다들 어떻게 지내는지. 경희는 식탁 건너편, 불이 꺼진 지호의 방을 응시했다. 아들은 친구들과 졸업 여행을 간다고 제주도로 떠났다. 이제, 아들을 곁에서 품어온 스무 해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조만간 지호는 자신의 날개를 펴고 부부의 곁을 떠날 것이다. 경희는 부부만 남게 될 그 집의 시간에 대해 잠깐 생각했다.

  '앤 마리에서 기쁜 크리스마스 소식을 전합니다. 이제까지 없었던 특별한 세일! 올해가 지나가기 전에 이 행운을 꼭 붙잡으세요.'  

  경희는 동창회에 입고 갈 옷을 생각하다가, 오늘 아웃렛에서 본 앤 마리 코트를 떠올렸다. 그래서 들어가 본 앤 마리 홈페이지에서는 세일을 알리는 작은 팝업창이 떴다. 세일 품목을 클릭해서, 자신이 오늘 본 코트가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경희가 쇼핑몰에서 상품을 정렬하는 순서는 낮은 가격순이었다. 경희가 보았던 연갈색의 그 캐시미어 코트가 제일 상단에 떴다. 코트의 할인된 가격은 250만원이었다. 경희는 자신의 통장 잔고가 얼마인지 헤아려 보았다. 그 통장은 원고 교정으로 받는 돈이 입금되는 통장이었다. 아마도 거기에 남은 돈은 270만 원 언저리였을 것이다. 지호의 대학 등록금에 보태기 위해서 모아놓은 돈이었다. 앤 마리 코트를 사고 나면, 남는 돈은 20여만 원 정도가 될 것이다.

  그 코트는 꼭 사야만 하는 옷인가? 그렇게 스스로에서 물으면서, 경희는 코트 사진이 뜬 상품 페이지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아직까지 그런 가격대의 옷을 사 입어본 적이 경희에게는 한 번도 없었다. 겨울을 나는 옷은 10년도 넘은 오리털 롱패딩 하나뿐이었다. 다운 패딩이라고는 하지만, 깃털 함유량이 50퍼센트 정도라서 패딩은 좀 무겁게 느껴졌다. 거기에다 봉제선으로 가끔 삐져나오는 깃털들 때문에 패딩은 얇은 담요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솜으로 된 싸구려 패딩을 하나 샀지만, 막상 사고 보니 그 무게감이 거추장스러워서 옷장에 처박혀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옷의 무게에 민감해졌다. 적어도 250만 원짜리 앤 마리 코트는 무겁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캐시미어가 들어갔으니 따뜻하기까지 할 것이다. 경희는 그 코트가 자신에게 정말로 필요한 옷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오랜만에 나가는 동창회에 낡은 롱패딩 따위를 입고가고 싶지는 않았다.

  경희가 그 코트의 구매 버튼을 눌렀을 때, 경희가 주문하려는 M 사이즈의 잔여 수량은 겨우 2벌뿐이었다. 경희는 마치 홀린듯 코트의 카드 결제를 끝냈다. 그렇게 코트를 주문하고 나서, 경희는 250만원이라는 코트의 가격을 다시금 생각했다. 그 돈은 경희가 3만 원짜리 교정 원고를 83건을 하고도 1만 원이 더 필요한 금액이었다. 노안이 온 눈으로 눈알이 빠지게 모니터에 뜬 글자들을 들여다보면서 받는 돈이었다. 경희는 자신이 충동구매를 한 것이 아닌지 잠깐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 코트를 산 결정을 구태여 되돌리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판매자 앤 마리에서 발송한 상품을 금일 배송할 예정입니다. 배송 예정 시간은 16시에서 17시 사이입니다.'

  사흘 뒤, 그렇게 앤 마리의 코트가 경희의 집 현관문 앞에 놓여있었다. '개봉 시 커터 칼 사용 절대 금지', 라고 시뻘건 색깔의 경고문이 커다란 박스 상단에 선명하게 박혀있었다. 경희는 박스 옆면으로 이어진 테이프의 끝부분을 찾아서 손톱으로 테이프를 뜯어냈다. 갱지 같은 종이 완충재가 잔뜩 들어있어서 그것들을 조심스럽게 덜어냈다. 비닐 포장에 싸여있는 연갈색의 앤 마리 코트를 꺼내는 경희의 손이 떨렸다. 그저 코트일 뿐인데도, 그 코트에서는 신비로운 기운이랄지 그런 것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코트를 입어보니, 사이즈도 자신에게 잘 맞았다. 무엇보다 옷이 전혀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름의 두께감이 있는데도, 어떻게 코트를 입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코트의 질감이 무척 부드러워서 옷이 쉽게 상하지는 않을까 싶은 걱정도 들었다. 경희는 코트 소매를 손가락으로 한번 꾹, 하고 눌러보았다. 그러자 코트의 옷감은 눌린 자국도 없이 되살아났다. 비싼 옷은 이렇구나. 경희는 감탄했다.

  "야, 너도 앤 마리 코트 샀냐? 여기가 동창회장이 아니라, 앤 마리 매장 같네."

  동창회가 열리는 호텔 로비에서 경희를 본 미주가 그렇게 말했다. 미주가 입고 있는 코트도 앤 마리였다. 검정색의 코트를 입은 미주는 원체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이라 마치 화보 모델처럼 보였다.

  "넌 남이 입은 코트만 봐도 다 아냐?"

  경희는 자신이 말하지 않았는데도, 단번에 알아 본 미주가 신기했다.

  "그런 게 보는 눈이라는 거야. 명품이란 게 왜 있겠니? 알아보는 사람들끼리만 알아보는 거지. 너 돈 좀 썼겠다."
  "돈 좀 쓴 게 아니라, 무리를 했지. 아웃렛에서 봤는데, 정말 사고 싶더라고."
  "앤 마리 코트가 예쁘기는 하지. 예쁜 정도가 아니라, 사람을 혹하게 하거든. 나도 이번에 세일해서 또 하나 샀으니까."

  미주의 남편은 대학교수였다. 미주는 친정이 부유한 편이라, 남편의 월급만으로 살림을 꾸리면서 살지는 않았다. 그런 미주에게 앤 마리 코트는 경희처럼 무리해서 사야만 하는 옷은 아니었다.

  "자, 그럼 어디 한번 들어가서 구경이나 해볼까? 누가 누가 자랑을 늘어지게 하는지."

  미주는 코트의 느슨해진 벨트를 힘을 주어 매고는, 로비의 소파에서 일어났다. 경희는 미주의 뒤를 따라 쭈뼛거리면서 동창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이런 고급 호텔의 행사장 분위기가 경희에게는 무척 어색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 경희의 눈에 미주가 신고 있는 붉은 색 하이힐과 손에 든 녹색 핸드백이 보였다. 명품을 잘 모르는 경희였지만, 딱 봐도 그 신발과 가방은 비싼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경희는 자신의 굽 낮은 검은색 단화와 바닥의 귀퉁이가 살짝 헤진 회색 핸드백을 보았다. 250만 원짜리 앤 마리 코트와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아들이 이번에 의대에 붙었다면서?"
  "아휴, 그래. 우리 민준이도 애를 썼지만, 나도 정말이지 피를 말리면서 살았다니까."

  경희와 미주가 앉은 옆 테이블에서 수선스러운 말소리가 들렸다. 의대생 아들을 두게 되었다면서, 한껏 고개를 세운 사람은 문영이었다. 저렇게 잘난 척하는 건 여전하군. 경희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사람의 본성에 대해 생각했다. 문영의 아버지는 중소기업체 사장이었다. 원체 돈이 많은 집안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었다. 고등학교 시절, 선생들조차 문영에게는 좀 비굴하게 구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문영은 공부를 그리 썩 잘하지는 못했다. 그저 그런 대학을 졸업하고 피부과 의사와 결혼했다. 청담동 사모님 소리를 들으면서 편하게 살아온 문영이었다.

  "아들이 쟤 머리를 닮지는 않았나 보네. 지방대 의대이기는 해도, 어쨌든 의대는 의대지."

  미주가 커피를 홀짝거리면서 이죽거렸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미주의 밝은 귀는 문영이 그 테이블에서 나누는 대화를 쫓아가고 있었다. 미주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경희도 그러했다.

  "남편이 나한테 정말 수고했다면서, 사고 싶은 걸 말해보라는 거야. 그래서 전부터 눈여겨 본 이 옷을 샀지."

  문영은 그렇게 말하면서, 의자에 걸어둔 자신의 코트를 가리켰다.

  "이게 캐시미어 100퍼센트인데 정말 옷이 가벼워. 처음 입었을 때부터 느낌이 달라. 마치 나한테 딱 맞는 맞춤옷 같아."
  "캐시미어 100퍼센트는 들어만 봤는데, 정말 고급스럽다. 그런데 이런 옷은 얼마나 해?"

  문영의 옆자리에 앉은 동창이 문영의 자랑에 장단을 맞추면서 말을 이어갔다. 문영은 코트의 가격을 묻는 동창의 말에 동창의 얼굴을 잠깐동안 빤히 바라보았다.

  "천이백만 원. 옷이 주는 만족감을 생각하면,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니야."

  문영의 그 말을 듣던 미주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심사가 뒤틀린 것처럼 보이는 미주와는 달리, 경희는 오히려 호기심이 일었다. 천이백만 원짜리 코트는 대체 어떻게 생겼나, 문영이 앉은 의자에 걸쳐둔 코트에 눈길이 갔다. 진회색의 그 코트는 자신이 입은 코트와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두께감은 더 얇아 보였고, 디자인도 무척 단순했다. 경희는 천 이백 만원짜리 코트를 비싸지 않다고 말하는 삶은 어떤 것일까를 생각했다. 갑자기 자신이 입고 있는 250만 원짜리 코트가 싸구려처럼 보이는 것 같았다.

  "경희야, 여기 공기가 좀 탁하지 않니? 행사 시작하기 전에 바깥바람 좀 쐬고 올까?"
  "그래. 어째 나도 머리가 좀 아픈 것 같기도 하고."

  미주는 벗어두었던 코트를 걸쳐 입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희의 마음속에서는 괜히 왔다는 생각이 슬슬 몰려오기 시작했다. 자신은 여기에 왜 오려고 한 것일까? 명문대 공대에 진학한 아들 자랑을 하기 위해서? 아니면 밖에서 앤 마리 코트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어서?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그냥 답답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 매일 저녁 식탁에서 눈이 빠지게 원고를 교정하는 일상이 지겨웠다.

  "너, 아직도 담배 피우니?"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이는 미주를 보면서 경희가 말했다. 미주는 고등학생 때부터 담배를 피웠었다.

  "응. 그런데 많이는 안 피워. 일 년에 한 서너 번? 전번에는 집 근처 공원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아들 녀석한테 딱 걸렸지 뭐야. 근데 걔가 뭐라고 그러는지 알아? 용돈 안 올려주면 할머니한테 이르겠대. 경희야, 내가 자식한테 협박을 당하고 산다. 하하..."

  미주는 어이없다는 듯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래서, 뭐라고 했어?"
  "야, 네 할머니도 이미 다 알고 있어. 그렇게 받아넘겼다니까. 나 원 참."
  "동우는 내년에 고 3이지? 이제 너도 뒷바라지하려면 힘들겠다. 난 어쨌든 후련해. 터널을 빠져나온 기분이야."
  "공부 잘하는 자식 두는 게, 여자한테는 트로피 같은 건데 말이지. 경희 넌 그런 트로피 하나는 있는 셈이야."
  "트로피? 그런 건, 장식장에 한번 넣어두면 꺼내볼 일 없잖아. 자식은 자식대로 자기 인생을 사는 거지. 난 그저 매일 빠듯한 삶이 버거운걸."

  그렇게 말하는 경희의 눈에 호텔 입구에 세워진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가 들어왔다. 'Merry Christmas!' 글자를 빛내는 금색의 전구가 마치 금화처럼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문득, 오래전 숙이 아줌마가 자신에게 말해준 돈의 산을 생각했다. 힘들 때마다 그것이 운명이라고 믿었던, 돈의 산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자신은 늘 돈에 쪼들렸다. 그것은 매우 복잡한 삶을 산다는 뜻이기도 했다. 경희는 큰돈을 써야 하는 어떤 선택을 할 때, 매번 다양한 경우의 수를 생각해야만 했다. 이것이 나을지 저것이 나을지, 그 선택이 실패했을 경우에 대한 것까지 미루어 짐작해야만 했다. 최저가에 최적화된 삶. 중산층의 언저리를 맴돌지만, 언제든 추락해버릴지도 모르는 삶. 그것이 자신과 남편 앞에 놓인 현실이었다.

  디너로 나온 스테이크는 덜 익은 것이었다. 허기 때문에 몇 조각을 먹기는 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경희의 속은 불편했다. 혼잡한 주말 저녁의 지하철을 타고서는 경희는 힘겹게 집으로 돌아왔다. 경희의 코트는 지하철의 붐비는 승객들에 밀려서 싸구려 담요처럼 짜부라든 것 같았다.

  "개 발에 편자로군."

  아파트 공동 현관 출입문에 다다른 경희는 그렇게 혼자 중얼거렸다. 4자리 비밀번호를 꾹꾹 누르자, 전등이 켜지면서 출입문이 열렸다. 경희가 출입문을 통과하는 순간, 갑자기 문이 세게 닫혔다. 깜짝 놀란 경희가 뒤를 돌아보니, 닫힌 문틈 사이로 자신의 코트 자락이 끼어있었다. 순간적으로 당황한 경희는 코트를 세게 잡아당겼다. 그러자 코트가 주욱 찢어지는 소리를 내었다.

  "아니, 이게 무슨..."

  몇 초만에 문은 다시 열렸다. 하지만 경희의 250만 원짜리 코트는 너덜거리고 있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었다. 황망한 표정을 지으며 경희는 집으로 들어왔다. 낡은 구두에 화풀이하듯, 신발을 벗어서 현관에 내팽개쳤다. 집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연말 모임이 있어서 나간 남편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거실에 발을 내딛자, 냉기가 뼛속을 타고 전기처럼 흘렀다. 겨우 기운을 차리고는 식탁 의자에 앉아서, 경희는 코트를 벗어서 살펴보았다. 코트의 뒷자락이 사선으로 찢어져 있었다.

  "아, 이건 수선도 할 수 없겠네."       

  코트가 솔기를 따라 뜯어졌다면, 어떻게든 수선해서 옷을 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원단 자체가 찢긴 것을 이을 방법은 짜깁기뿐이었다. 앤 마리 코트를 짜깁기해서 입고 다니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우스꽝스러웠다. 경희는 불편했던 속에서 무언가 올라오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냉장고에 탄산수를 넣어둔 것이 떠올랐다. 그거라도 한 모금 마시면 나아질 것 같았다.

  탄산수 한 병이 냉장고 문 안쪽에 있었다. 그걸 꺼내는데, 그 위 칸에 굴러다니는 버터 조각이 눈에 띄었다. 작은 플라스틱 용기에 든 버터였는데, 소비기한이 1달이나 지난 것이었다. 그런 것조차 버리는 것이 아까웠다. 경희는 탄산수는 꺼내지 않고, 그 버터 조각을 꺼냈다. 그리고 식탁에 앉아서 버터의 포장지를 뜯었다. 버터는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경희는 손가락으로 버터를 푹, 찍어서 먹어보았다. 아무 맛도 나지 않는 기름이 목을 타고 술술 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돈이란 삶을 매끄럽게 만들어 주는 버터기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남은 버터를 손가락으로 찍어 먹는데, 녹아버린 버터기름이 식탁 바닥에 내던져둔 코트에 떨어졌다. 연갈색의 캐시미어 코트가 버터를 받아먹고 헤벌쭉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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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글자로 된 꿈을 꿉니다. 오늘 새벽에 꾼 꿈에는 '閉(닫을 폐)'라는 글자가 보였습니다.

  올해의 마지막 단편을 썼습니다. 기다려준 독자분들을 생각했어요.

  새해에 또 다른 단편으로 여러분과 만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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