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수(信號手)


  "동민아, 너 내가 하던 알바 하지 않을래?"
  "그게 뭔데?"
  "신호수. 그 왜 있잖아, 건설 현장에서 차량 통제하고 그런 거."
  "그거, 일당이 얼마나 되냐?"
  "난 15만 원 받았어. 근데 넌 초짜라 그보다는 조금 줄 거야. 한 13만 원 정도?"
 
  동민은 자신에게 필요한 돈 200만 원을 벌려면, 경수가 말한 그 신호수 일을 며칠이나 해야 할지 계산해 보았다. 보름 좀 넘게 일하면 그 정도 돈을 마련할 수 있다니, 뭔가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신호수 일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가끔 지나가다가 건설 현장에서 신호봉 들고 도로 통제하는 사람을 본 적은 있다.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신호수였다. 보기에는 그렇게 힘든 일 같지 않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길바닥에서 오만 먼지를 들이마시며 차들이 오가는 위험한 도로 위에서 하는 일이었다. 경수가 받았다는 그 15만 원은 어떤 면에서는 목숨을 담보로 하는 대가이기도 했다.

  "빌어먹을 자식."

  동민은 그렇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자신의 졸업 작품 촬영을 맡은 민규를 향한 말이었다. 민규는 원래 동민이 생각했던 촬영 감독은 아니었다. 친하기도 하고 실력도 좋은 경수에게 촬영을 맡길 생각이었다. 그러나 경수가 졸업 작품 제작비를 마련하느라 아르바이트를 하는 바람에 동민의 계획은 어그러지고 말았다. '꿩 대신 닭'이라고 하는 수 없이 민규에게 촬영을 맡겼다. 민규는 동민과 그다지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동기들 사이에서는 카메라를 잘 다룬다는 평가를 받기는 했지만, 그 성질머리가 문제였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뜻이 관철될 때까지 고집을 피웠다. 속된 말로 '곤조(根性)'를 심하게 부렸다. 그런 민규라도 졸업 작품 촬영 시즌이 되자, 너도나도 데려가려고 난리였다.

  "뭐, 시나리오는 나쁘지 않네."

  동민의 시나리오를 본 민규가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그 말을 동민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웃기는 자식이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민규의 호의에 기댈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가 짜증스러웠다. 어쨌든 민규는 동민의 단편 영화를 촬영하기로 약속했다. 동민은 비로소 안심했지만, 그 안심이 불쾌한 악몽으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민규는 감독인 자신의 의도를 무시하고, 핸드 헬드(Hand-held, 삼각대와 같은 고정장비 없이 카메라를 손에 들고 촬영하는 기법)로 촬영하겠다고 우겼다. 정적인 드라마를 무슨 생각으로 핸드 헬드로 찍겠다고 그러는 건지, 동민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프리프로덕션(Pre-production) 단계에서 말을 꺼냈다면 어떻게 조율하던가, 민규를 하차시키든가 했을 것이다. 그런데 촬영이 시작된 현장에서 그렇게 뻗대니까, 동민은 속수무책으로 민규의 뜻에 끌려가고 말았다.

  "이 영화의 미장센을 생각하면 핸드 헬드가 맞다고."

  저 머저리 같은 자식이 미장센(Mise-en-scène)이 대체 뭔지나 알고 지껄이는 걸까? 민규는 그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자신에게는 그런 민규에게 맞설만한 독하고 대찬 구석이 없었다. 촬영 현장에서 마치 감독이 된 것처럼 설쳐대는 민규의 꼴을 동민은 감내하기로 했다. 그 졸업 작품에는 제작비 350만 원이 들어갔다. 그리고 그 돈은 요양보호사 일을 하는 모친이 힘들게 모은 돈이었다. 동민의 어머니는 영화 공부를 하는 아들의 뒷바라지를 제대로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곤 했다. 동민은 학자금대출과 알바로 어떻게 학교는 다닐 수 있었지만, 제작비를 마련하려면 휴학을 해야할 판이었다. 비슷한 처지의 경수도 그래서 지난 학기를 쉬고 알바를 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내어준 돈으로 동민은 졸업 학기에 작품을 찍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피 같은 돈이 '민규'라는 골칫덩이 때문에 버려질지도 몰랐다. 그러므로 동민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을 참아내기로 했다. 어차피 저 자식은 다시는 볼 사이가 아니다. 어떻게든 잘 달래어서 촬영을 끝마치는 것이 중요하다. 동민은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아니, 색감이 왜 이런 거야?"

  동민은 영화의 모든 촬영이 다 끝나고 처음으로 본 촬영본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영화의 화면은 마치 뿌연 푸른색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시푸르뎅뎅했다. 어느 공포 영화에서 나올법한 으스스한 분위기였다. 내 영화는 드라마지, 호러가 아니라고! 동민은 좌절하고 말았다. 그 모든 사달은 민규가 카메라의 '화이트 밸런스(White Balance, 카메라의 색온도 조절 기능)'를 잘못 맞추고 작업한 데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어, 그 버튼이 살짝 내려가 버린 줄도 모르고 찍었네. 어쩌겠냐? 촬영하다보면 이런저런 일이 있는 법이지."

  동민은 유들거리는 말투로 그렇게 말하는 민규의 낯짝을 후려치고 싶은 충동마저 들었다. 문제는 그렇게 망친 영화를 복구하는 비용이었다.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세상의 많은 일은 돈이 있으면 어떻게든 해결될 수 있다. 동민의 엉망이 된 졸업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실력이 좋은 색 보정 업체에 일을 맡기면 어느 정도는 해결이 될 문제였다. 그리고 그 비용이 200만 원이었다.

  "건설 기초 안전교육 이수증은 받아왔죠?"
  "네, 여기."

  동민은 백팩의 맨 바깥 주머니에서 작은 카드 모양의 이수증을 꺼냈다. 신호수 일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이수증이었다. 고작 4시간짜리 강의를 듣고서, 동민은 차들이 쌩쌩 무섭게 내달리는 도로 한복판에 서게 될 예정이었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쉴 새 없이 비집고 들어오는 컨테이너 사무실은 냉골이나 다름없었다. 작은 히터 하나에 의지하면서 책상에 앉아있는 중년의 경리 아줌마가 짠해 보였다.

  "자, 내가 필요한 물품을 줄게요. 자세한 건, 저쪽 현장의 빨간 조끼 아저씨 보이죠? 그 아저씨가 설명해 줄 거고."

  동민은 경리로부터 무전기와 안전 조끼, 안전봉, 안전모를 건네받았다. 운전면허도 없는 자신이 어떻게 도로 위에서 차들이 잘 지나다니도록 할 수 있을지, 동민은 걱정이 되었다. 마치 전투 경험도 없는 신병이 곧바로 격전지에 투입되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박 군 대신에 오는 학생이구나. 이 일이 처음에만 좀 힘들지, 하다 보면 다 익숙해져서 할 만해."

  빨간 조끼를 입은 작업반장은 50대 초반의 남자였다. 남자는 꽤 덩치가 있었다. 거기에다 구레나룻을 길러서 그런지, 약간의 위압감도 느껴졌다. 이런 거친 건설 현장에서 일하려면 저 정도의 체격은 되어야 하는 건가? 동민은 키는 큰 편이지만 비쩍 마른 자신의 몸을 생각했다. 신호수도 자신과 같은 사람이 하면 차들이 우습게 볼 것만 같았다.

  "이 군이 할 일은 말이지, 아주 간단해. 건설 현장에 필요한 차들 말고는 절대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거야. 덤프트럭, 여기 일하는 사람들 차량, 이런 거는 들여보내. 나머지는 입구에서 커트, 알았지? 여기가 인근 마을을 지나는 샛길이라서, 동네 주민들이 차 가지고 오기도 하거든. 그런데 못 지나다니게 하니까 불만이 있지. 그런 사람들도 잘 다독여야 하고. 욕을 좀 먹을 수도 있을 거야. 그럴 땐,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여."

  동민이 일하게 된 곳은 김포 인근의 도로 확장 공사 현장이었다. 그곳에는 끝없이 펼쳐진 비닐하우스가 있었다. 동민은 서울시를 좀 벗어난 곳에 이런 농지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수도권의 웬만한 곳에는 죄다 아파트가 들어서는 판국이라, 아직도 이런 농촌 풍경이 남아있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하지만 이곳의 풍경도 언젠가는 단조로운 고층 아파트로 대체될지도 몰랐다. 동민이 신호봉을 들고 서있는 이 도로를 확장하는 것도 그때를 대비한 사전 작업일지도 몰랐다.

  "야, 이 새끼야! 너 일 똑바로 안 해? 얼른 그거 치우고, 나 들여보내 줘야 할 거 아냐?"

  시멘트를 잔뜩 실은 덤프트럭 기사가 차창을 내리고는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동민은 주변 풍경을 보느라, 트럭이 어느새 현장 입구까지 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출입구 주차를 금지하는 노란색 표지판을 치우고 트럭을 들여보내야만 했다. 기사의 고함에 화들짝 놀란 동민은 얼른 표지판을 치웠다. 그리고 안전봉을 크게 휘두르며 트럭이 지나가게끔 했다. 시멘트 가루에다 바닥의 흙먼지가 더해지며 동민의 얼굴과 옷은 금세 더러워졌다. 집채만 한 크기의 트럭이 바로 자신의 코앞까지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것도 무서웠다. 민규 녀석이 그 화이트밸런스 버튼만 제대로 살펴봤더라면, 지금 뒤집어쓴 먼지와 욕설은 결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서, 시푸르죽죽한 화면을 고쳐놔야 했다.

  "뭘 그런 거 가지고 고민해? 돈 200만 원이면 해결될 일 아니야? 작품이 중요하지. 그 업체 정도면 싼 거야. 거기 색 보정 잘하는 건 너도 알잖아?"

  석호는 가볍게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동민이 후반 작업 비용이 나가게 되어서 고민이라고 하자 한 말이었다. 작품이 중요한 걸 누가 모르나? 석호의 그 웃음이 동민의 고민을 비웃거나 가볍게 여겨서 한 말이 아님을 동민은 잘 알았다. 석호에게는 돈 200만 원을 마련하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석호 저 자식은 참 재수 없네. 돈 200이 누구 집 애 이름이냐? 자기가 부자면, 남도 그렇게 다 돈이 썩어나는 줄 아는 모양이네."

  석호는 부자였다. 진짜 부자였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재벌 BK 그룹의 방계 자손이었다. 영화과에 들어온 재벌 4세라니, 석호는 입학 당시부터 화제를 몰고 다녔다. 석호가 듣는 교양 수업에는 언제나 예쁜 여학생들로 미어터졌다. 어떻게든 재벌가 아들에게 눈도장을 찍고 싶어하는 여학생들이 끊이질 않았다. 동민은 그들을 바라보는 석호의 표정을 4년 동안 흥미롭게 관찰했다. 그것은 경멸이나 무시가 아니라, 철저한 무심함이었다. 마치 기차를 오랫동안 탄 여행객이 풍경을 지루하게 보는 것과도 비슷했다. 석호의 그 무관심한 표정은 일반 사람들과 자신은 태생부터 다르다고 여기는 지독한 선민의식에서 오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므로 동민은 자신과 석호에게는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갑작스럽게 써야만 하는 돈 200만 원이 전혀 고민이 되지 않는 세계에서 석호는 살고 있었다. 그것이 동민과 석호의 세계를 나누는 결정적인 차이였다.     

  "이쪽으로는 가실 수가 없어요. 돌아가셔야 합니다."

  동민은 자신 쪽으로 다가오는 흰색 승용차를 향해 신호봉을 흔들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네가 뭔데 가라 마라야? 나 여기 사는 주민이야. 그냥 지나가게 길 비키라고!"
 
  승합차의 조금 열린 창문으로 짧은 스포츠머리의 젊은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얼핏 보기에 동민과 비슷한 또래거나 좀 어린 것 같았다. 아, 쓰레기 새끼. 동민은 속으로 욕했다.

  "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여기가 공사 현장이라서요. 불편하시겠지만 좀 돌아서 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웃기고 있네. 내가 돌아가려면 10분을 뺑뺑이 돌아야 해. 여기로 가면 5분이면 된다고. 비켜, 비키라고. 병신 새끼, 지랄하고 있어."

  동민의 눈에는 시퍼렇게 물든 자신의 졸업 영화와 돈 200만 원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참아야지. 참아야 한다. 동민은 무슨 말을 하면 저 미친놈을 돌려보낼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도무지 저 자식은 말을 들어먹을 것 같지 않았다.

  "아이고, 선생님. 불편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선생님이 협조 좀 해주시면 저희도 얼른 공사를 끝마칠 수 있거든요. 제가 이렇게 고개 숙여 부탁드립니다. 폐 끼쳐서 정말 죄송합니다."

  빨간 조끼의 작업반장이 어느새 달려와서 운전자를 달래고 있었다. 반장은 연신 고개를 숙이면서 손을 비비고 있었다.

  "부탁을 할 거면 이렇게 해야지. 어디서 뻣뻣하게 고개 쳐들고 명령을 하고 있어? 당신이 책임자야? 저런 멍청이 새끼 세워두고 일하지 말라고. 알았어?"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악을 쓰던 놈이 드디어 차창을 올리고는 차를 돌려서 떠났다.  

  "이 군, 내가 하는 거 봤지? 다음에는 이렇게 고개 팍 숙이고 해야 해. 저런 놈들은 답이 없어. 저 자식 눈빛 좀 봐라. 저런 성질머리 가지고 언젠가 더 미친놈 만나면 대가리 깨지는 것밖에 더 있겠냐. 그냥 나 죽었네, 하고 상황을 잘 넘겨야지. 내가 동물 다큐를 아주 좋아하거든. 거기 보면 그런 거 나와. 무서운 천적 만날 때, 가만히 죽은 척하는 거. 그런 거야."

  반장은 동민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다시 현장으로 돌아갔다. 동민은 반장의 식견에 조금은 감탄했다. 생각해 보니, 자신은 학교에서 영화 속의 세계만을 무수히 들여다보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거칠게 구른 저 남자는 인간의 본질을 나름대로 꿰뚫고 있었다. 동민은 이제 곧 떠나게 될 학교 밖의 세상을 떠올렸다. 과연 그곳에서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거기에는 오늘 만난 저런 미친 놈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 동민은 진짜로 죽은 척을 하면서 미친 개에게 물리지 않고 지나갈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생존을 위해 고개를 숙인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배워야 할 가장 필요한 덕목인지도 몰랐다.

  "일은 좀 어때?"

  동민이 한숨 좀 돌리고 앉아있을 때, 경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그냥 정신이 하나도 없다. 오늘이 첫날이니까, 어떻게 하다 보면 늘겠지. 그래도 경수 네 덕분에 알바 구했어. 정말 고맙다."
  "고맙기는.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서로 돕고 사는 거지. 어휴, 너도 그 민규가 사고 친 것만 아니면 그 고생하겠냐?"
  "야, 걔 이름 꺼내지도 마라. 내가 그 자식, 자기 단편은 어떻게 찍었나 볼 거야. 더러운 성질머리에 입만 살아서는."
  "엊그제 만났는데, 촬영은 대충 끝난 모양이더라. 무슨 칸 영화제에 낼 거라는 둥, 어쩌고 그러던데. 그냥 속으로 웃었지."
  "아, 그 말 들으니까 정한 선배 생각나네. 그 선배가 칸 단편에서 상 탔잖아. 근데, 그 선배는 뭐하고 사는지 모르겠네."
  "너, 소식 못 들었나 보구나. 그 선배 취업했잖아. 셔터맨. 부인이 약사거든."
 
  나름대로 서글픈 소식이었다. 한때는 반짝거리던 사람이 빛을 잃고 현실에 안주한다는 것은 말이다. 영화를 전공했다고 해서 모두가 영화감독이 될 수는 없었다. 어쩌면 자신과 경수도 각자의 장편을 찍을 기회가 앞으로 오지 않을지도 몰랐다. 도대체 그 많은 영화과 학생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동민의 가슴은 더욱 갑갑하게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참, 동민아. 나 취업했어. C TV 알지? 거기 촬영팀 스태프로 일할 거야. 케이블 채널에서는 잘 나가는 곳이니까, 당분간 밥은 먹고 살겠지 싶다."
  "언제부터 일하는데?"
  "내년 3월. 그때까지 졸업 작품 마무리하고, 또 다른 동기들 촬영할 것도 해주려고."
  "정말 잘 됐다. 넌 실력이 좋으니까, 어디서든 잘 해낼 거야."

  경수와의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동민은 자신의 진로를 떠올려 보고는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경수처럼 촬영 전공도 아니고, 시나리오 전공으로는 먹고 살 방도가 참으로 아득해 보였다. 자신이 발을 들여놓은 영화계라는 곳은 마치 거대한 도박장 같았다. 화려한 불빛에 이끌려서 들어왔지만, 그 도박장의 입구에서 동민이 손에 쥔 것은 몇 푼짜리 칩 한 움큼이었다. 그것이 곧 사라질 테고, 동민에게는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빚을 내서라도 도박을 하다가 폐인이 되어 나가던지, 아니면 일찍 그곳을 떠날 것인지에 대해서.

  "언젠가는 진짜 내 영화를 찍을 거야. 멋진 장편 영화."

  영화과의 아이들은 다들 그렇게 다짐을 하면서 4년을 보냈다. 하지만,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간간이 선배 누군가가 상업 장편 영화를 찍었다는 소식이 들리기는 했으나, 영화감독으로 이름을 이어가지는 못했다. 그저 잊히고 잊힐 뿐이었다.

  '졸업 작품 상영회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드디어 폐관 직전의 충무로 단관 극장에서 동민의 단편 영화가 상영되었다. 작년에 작품을 내지 못한 선배들과 동민의 동기들까지 해서 모두 17개의 단편이 상영되었다. 허름한 극장의 로비에는 졸업생과 그 가족, 지인들로 하루종일 내내 북적였다.

  "무슨 학생 단편을 천만 원 들여서 영화를 찍어? 재벌집 아드님이라지? 아무튼 돈이 많으면 좋긴 좋네. 영화 때깔은 잘 나왔으니."
  "그게 12분짜리잖아요. 그걸 프레임 단위로 계산해 보면, 한 프레임당 돈이 얼마나 되나..."

  화장실에서 나오던 동민에게 로비에서 나누는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렸다. 그들이 말하는 영화는 석호의 졸업 작품이었다. 여름을 배경으로 찍은 그 단편은 낯선 도시에서 만난 젊은 남녀의 우연한 만남과 이별을 담았다. 석호의 단편은 뻔한 스토리를 서정적인 풍광과 빼어난 촬영으로 극복했다. 한마디로 돈의 위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색 보정 작업도 업계 최고의 회사에다 맡겼다고 들었다. 그러니 영화과 학생 수준으로는 나오기 힘든 단편이 된 것이다.

  석호의 그 단편에 비한다면 동민의 졸업 작품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정신 사납게 흔들리는 핸드 헬드 시점은 관객의 탄식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신호수 일을 하면서 번 돈 200만 원으로 덧칠한 시퍼런 색감은 그나마 정상적으로 보정되었다. 문제는 촬영 때문에 영화의 이야기가 보는 이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었다. 염병할 자식. 다시 한번, 동민은 속으로 민규에게 욕을 퍼부었다.

  "동민아, 애 많이 썼다. 그래도 네가 걱정한 것보다는 잘 나왔어. 너무 속상해하지 마."

  어깨가 축 처진 동민에게 다가와서 경수가 말을 건넸다. 그래도 동민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사람은 경수뿐이었다.

  "사람들이 석호 단편 얘기하더라고. 로비에서 말하는 거 들었거든."

  동민이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응, 그래. 괜찮게 찍었더라. 돈이 들어가면 아무래도 잘 뽑히잖아. 그런데 거기에는 그게 없어. 그걸 뭐라고 해야 하나? 그래, 주름. 주름이 없어."
  "주름? 무슨 주름?"
  "삶의 주름. 사람이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이런저런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잖아. 그런 게 주름을 만드는 거야. 석호의 영화는 아주 매끈하잖아. 석호는 너무나도 평탄하게 살아와서 그런 주름을 만들어낼 틈이 없었던 거지."
  "그런 주름이 있는 게 뭐가 좋아? 난 자글자글한 주름이 이어지는 삶은 싫다고. 어쩔 수가 없으니까, 그냥 주름을 끌어안고 사는 것이지."
  "글쎄.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예술가에게는 주름이 있어야 하는 거야. 그래야만 그 주름에 대해 뭔가를 말할 수 있는 거라고."
  "모르겠다, 난."

  동민은 경수의 뜬금없는 주름 타령에 심드렁하게 답했다.

  "네 단편에는 거칠지만, 그 주름이 있어. 그게 너의 영화를 만드는 거야."

  그 말에 동민은 경수의 얼굴을 새삼스럽게 쳐다보았다. 아, 경수 저 녀석은 무슨 도인처럼 말하네. 분명 경수의 그 말은 동민의 쓸쓸한 마음 한구석을 건드렸다. 경수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졸업 작품 상영회 2부가 시작됩니다. 관객 여러분께서는 입장해 주시기 바랍니다."

  로비에 있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얼마 안있어 '상영 중'이라는 빨간 불빛이 켜졌다. 동민은 상영관에 들어가지 않았다. 혼자서 로비를 서성이던 동민은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응시했다. 동민은 자신의 졸업 작품이 과연 정말로 찍고 싶었던 영화였을까 스스로에게 물었다. 거기에는 조급함과 불안이 깃들어져 있었다. 그 단편은 어떻게든 잘 만들어서 자신의 포트폴리오로 만들겠다는 욕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동민은 자신의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유가 단지 민규의 엉터리 촬영 때문이 아님을 깨달았다. 진짜로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아직 동민의 마음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오라이, 오라이! 기사님, 좋은 아침입니다."

  동민은 여전히 김포의 한갓진 도로변에 서 있었다. 덤프트럭을 여유 있게 들여보내는 동민의 얼굴에는 이내 밀가루처럼 시멘트 가루와 흙먼지가 내려앉았다. 이 공사가 끝나면 동민의 신호수 알바도 끝날 터였다. 그 일이 끝나면, 동민은 무엇을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자신에게 신호봉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 돌아가야 할지 알려주면 좋겠다고. 27살,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낮이었지만 날이 차츰차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눈이 오려나, 비가 오려나. 동민은 꾸물거리는 잿빛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하늘의 구름도 구불거리는 주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조금씩 날리는 눈가루가 동민의 신호봉 위에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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