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오기 전에


  '우리 BP 그룹은 창사 50주년을 맞이하여, 새로운 도약을 준비합니다. 우리 그룹에는 새 시대에 맞는 인재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에 따라 희망퇴직을 단행하고자 합니다. 희망퇴직 신청 요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만 40세 이상, 근속 연수 10년 이상... '

  사내 인트라넷 플로우(FLOW)에 올라온 글을 읽다가, 도경은 가슴이 조여드는 통증을 느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가을부터 소문만 무성하던 2차 희망퇴직 계획이 결국 그렇게 발표되었다. 48살에 근속 연수가 20년. 차장이라는 직함을 달고서 벌써 3년. 부장으로의 승진은커녕, 이제는 희망퇴직 대상자에 자동으로 들어가는 신세가 되었다.

  "이 팀장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인력 개발팀의 박 팀장이 제일 먼저 신청서를 냈다고 그러던데."
  "생각해 봐야지, 뭐. 결국 눈치 싸움 아니겠어?"
  "글쎄. 작년의 1차 희망퇴직 때 생각하면, 아직도 오싹오싹하다니까. 끝까지 버티던 사람들, 그냥 지방 공장으로 다 밀어내고 말이지."

  영업 1팀의 송 팀장이 유들거리는 말투로 도경의 신경을 긁었다. 자기는 희망퇴직 대상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걸까? 하긴, 송 팀장은 창업주 회장 쪽에 어떤 끈이 있다고 듣기는 들었다. 오늘따라 송 팀장의 얼굴에는 개기름이 더 번들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얼굴뿐만 아니라, 패딩 조끼 사이로 삐져나온 퉁퉁한 뱃살도 도경의 눈에 아주 거슬리게 보였다.

  근속 연수 10년에서 15년인 희망퇴직자는 퇴직금과는 별도로 20개월 치의 기본급을 수령한다. 도경은 거기에 해당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신이 희망퇴직을 신청한다면 얼마를 받을 수 있을까? 퇴직금과는 별도로 지급되는 전직 지원금 1500만 원에 자녀 학자금 2000만 원이 더해질 뿐이었다. 그것도 희망퇴직을 신청했을 때에 받을 수 있는 돈이었다. 나중에 퇴직자 명단에 들어가면, 그 돈마저도 받을 수 없다. 도경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말하자면, 그냥 기계의 부속 같은 거지. 나사 같은. 언제든 빼버리고 갈아 끼울 수 있는."

  도경은 사무실로 가는 엘리베이터 대신에 비상구 계단을 내려가면서 그렇게 혼자 중얼거렸다. 비정하다. 더럽게도 비정하다. 최고의 직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자신의 젊은 날을 갈아가며 여기까지 왔다. 20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삶의 명제와 회사의 발전이 기묘한 줄타기를 해온 세월이었다. 도경은 회사가 삼켜버린 자신의 육신과 정신을 생각했다. 이제 머리는 희끗희끗해졌고, 꼭 기억해야 할 것을 잊어버리는 때도 자주 있었다. 휴지 하나도 떨어져 있지 않은 이 정갈하고 매끈한 건물은 그런 도경의 일부를 게걸스럽게 먹은 것이다. 알 수 없는 분노와 허탈감이 계단을 내려가는 도경의 다리를 휘청거리게 했다.

  '은별 마을 1단지의 재건축 안전진단 통과를 축하합니다.'

  그날 저녁, 퇴근을 하는 도경의 눈에 아파트 입구의 커다란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도경이 사는 이 아파트는 45년이 된 낡은 아파트였다. 은행 융자를 무리하게 받아서 겨우 마련한 집. 도경이 자신의 집을 은행과 공유하지 않게 된 것은 이제 겨우 3년이 되었다. 집 한 채는 건졌군. 도경은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이 아파트에 재건축 광풍이 몰아닥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몇억에 이른다는 재건축 분담금을 무슨 수로 마련한단 말인가? 어쩌면 자신의 인생에서 최대의 투자라고 할 수 있는 이 오래된 아파트는 멀리 날아가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신, 왔어? 저녁은 먹었지? 난 너무 졸려서 일찍 자려고. 엊그제 김장해놓고 나니 진이 다 빠져."

  아내는 하품을 하더니 작은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의 코 고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작년부터 부부는 각방을 쓰기 시작했다. 신경이 예민한 도경은 아내의 코 고는 소리를 더는 견디기 힘들어졌다. 그래서 부부는 각방 생활에 합의했다. 그즈음, 지방의 대학에 진학한 아들이 기숙사로 들어가면서 23평 아파트의 공간에는 여유가 생겼다. 아내는 아들이 가져가지 않은 짐들을 대충 정리해서 창고에 넣었다. 그리고 그 방을 자신의 방으로 꾸며서 썼다.  

  "어느덧 11월의 마지막 주말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제 가을도 슬슬 막바지라고 할 수 있는데요. 다음주부터는 본격적인 겨울 추위가 시작됩니다. 그동안 포근했던 날씨 때문에 이 추위가 더 매섭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집에 오면 습관적으로 틀어놓는 뉴스 채널에서는 기상 캐스터가 날씨 뉴스를 전하고 있었다. 이제는 겨울이군. 그럼, 그 영화를 봐야겠네. 해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도경이 봐야만 하는 영화. 도경은 거실 TV 장식장의 맨 아래 서랍을 열었다. 거기에는 모서리가 닳은 대학 노트 1권과 DVD가 하나 있었다. 그러니까 언제부터였지? 이 영화를 보기 시작한 것이...

  "혹시 여기에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이 있나요?"

  카운터 안쪽에 커튼이 쳐진 방에는 덩치 큰 남자들이 한창 포커를 치고 있었다. 주인 남자는 포커를 치다 말고, 마지못해 카운터로 나왔다.

  "그런 건, 우리 가게에 없어. 딴 데 가보는 게 좋을 거야."

  팔뚝에 푸른 닻 무늬의 문신을 한 남자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도경에게 말했다. 그러고는 다시 포커판으로 돌아갔다.

  "야, 가자. 좀 무섭네. 저 사람들, 조폭 똘마니들 같지 않냐?"

  도경이 가게 진열장에서 쉽게 발을 떼지 못하는 정운에게 말했다.

  "근데, 도경아. 여기 괜찮은 물건들 좀 있는데? '베니스에서의 죽음'도 있어. 이거 당연히 해적판이겠지만, 화질이 우리가 가진 것보다 좋을 수도 있잖아."
  "그만 해. 저 남자가 하는 말 들었지? 우리더러 나가라는 거야. 그냥 가자."
  "그래도..."

  정운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진열장에서 몸을 돌렸다. 그 가게를 나온 도경과 정운은 대학로의 비디오 가게들을 하나씩 훑어나갔다. 하지만 두 사람이 찾는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정작 그 영화를 구한 곳은 가톨릭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성 바오로 서점에서였다. 미디어 선교를 하는 수도회에서 신자들의 영성 생활에 도움이 되는 비디오테이프도 대여하고 있었다. 도경은 서점에 가서 회원 가입을 하고, 비디오를 빌렸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복사본을 하나 만들었다. 그들이 속한 영화 동아리 회원들을 위한 소장 자료로 쓸 생각이었다. 그렇게 만든 복사본을 가장 먼저 빌려 간 사람은 정운이었다.

  시네필(Cinephile). 도경과 정운은 영화 동아리 시네필의 창립 멤버였다. 회원이라고 해봐야 일곱 명이었지만, 그마저도 동아리방에 나오는 사람은 도경과 정운, 영호, 이렇게 셋이었다. 영호는 영화 감상보다는 영화 연출에 더 관심이 많았다. 영호가 감독들의 영화 연출에 대해 열변을 토하면, 도경과 정운은 그냥 심드렁하게 들었다. 둘은 영화사 책에 나온 명작 영화들을 쉽게 구할 수 없는 현실에 답답함을 느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서울 시내 비디오 가게 곳곳을 누비며 다녔다. 가끔은 그들이 보고 싶은 영화를 구할 때도 있어서, 둘의 나들이는 주말의 순례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그 주말의 순례는 채 1년이 지나지 않은 그해 늦가을에 갑작스럽게 끝나버렸다.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을 찾아낸 지 1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영호야, 정운이랑 연락이 안 되네. 혹시 너한테 전화 온 거 없어?"
  "야, 정운이는 너하고 더 친하잖아. 아, 잠깐. 그러고 보니까, 월요일 전공 필수 수업에 안 나오기는 했네. 전화를 안 받는 거야?"
  "응. 문자를 보내도 답이 없어. "

  영호와 정운은 경영학과 동기였다. 동아리방에는 줄이 나간 기타 하나가 있었다. 그 기타를 하릴없이 뜯던 영호가 기타를 내려놓았다.

  "뭐, 별일이야 있겠어?"
  "그렇겠지?"

  도경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정운은 도경과의 비디오 가게 나들이를 아주 즐거워했다. 오히려 도경이 귀찮아서 가지 않으려고 하면, 영화에 대한 열정이 부족하다면서 도경을 닦달할 때도 있었다. 그런 정운이 지난 주말에 전화도 받지 않고, 문자 메시지에도 답이 없었다. 어디가 심하게 아픈 건가? 독감이 유행이라는데, 독감이라도 걸려서 드러누웠나? 도경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화요일 오후를 보냈다. 영호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밤 9시 무렵이었다.

  "도경아. 여기, 한성 병원 영안실이야. 정운이가 여기 있어."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걔가 왜 거기 있어?"
  "암튼 와봐라. 전화로는 말 못 해."

  영호의 쉬어버린 목소리는 뚜, 하는 신호음과 함께 끊어졌다. 영호의 말대로 정운은 영안실에 있었다. 그곳에서 도경은 정운의 아버지를 보았다. 갑작스럽게 자식을 잃은 정운의 부친은 황망한 표정으로 영안실 복도 의자에 앉아있었다.

  "이렇게 와줘서 고맙네. 정운이가 좀 험하게 가서, 장례식은 치르지 않기로 했어. 이해해 주게나."

  도경은 정운이 호텔에서 투신자살했다는 말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도경이 아는 정운은 영화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친구였다.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을 볼 수 있게 되었다며, 정운은 얼마나 기뻐했던가? 그래서 도경은 정운이 동아리방에 있는 그 테이프를 빌려 가서 1달 동안 반납하지 않아도 내버려두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자신의 삶을 그렇게 마감한 것일까?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도경은 반쯤 넋이 나가서는 내려야 할 역을 한참이나 지나쳤다. 그런 도경이 집에 돌아온 시각은 자정 무렵이었다.

  "빌어먹을 자식. 그렇게 가는 법이 어디 있어? 멀쩡히 잘 살다가, 왜?"

  그런데, 도경은 과연 정운이 멀쩡히 잘 살았던 것인지 자신은 알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경이 정운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은 그저 가정 환경과 주변 인물들에 대한 파편적인 정보일 뿐이었다. 정운의 부친은 강남에서 잘 나가는 학원 강사이며, 정운이 중학교 3학년 때 부모가 이혼했다는 것. 정운에게는 6개월 정도 사귄 여자 친구가 있다는 것. 정운이 원래 가고 싶었던 학과는 영문학과였다는 것. 그 모든 것은 정운에게서 들은 이야기였다. 그런 사실 정도로는, 도경 자신이 정운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영안실에서 도경이 돌아온 후 이틀이 지났다. 동아리방에서 도경은 혼자 영화를 보고 있었다. 프랑수와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는 도경이 이미 여러 번 본 영화였다. 하지만 도경은 그냥 뭐라도 틀어놓아야 했다. 도경은 정운의 죽음이 슬프기는 했지만,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마침내 영화 속 주인공 소년은 바닷가에 도착했다. 정지 화면 속에 갇힌 그 막막한 눈빛이 어쩌면 정운과 닮아있는 듯싶기도 했다. 그때, 누군가 동아리방의 문을 노크했다.    

  "아, 자네가 있어서 다행이군."

  정운의 부친이었다. 아들의 사물함에 있는 물건을 챙겨가기 위해 학교에 들렀다고 했다.

  "사물함에 이게 있어서... 자네에게 주고 가는 게 맞을 것 같아서 말일세."

  정운이 부친이 흰색의 커다란 비닐봉지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냈다. 두꺼운 대학 노트와 비디오테이프 하나였다. 대학 노트의 표지에는 '영화 감상문'이라고 검정 사인펜으로 적혀있었다. 그리고 그 비디오테이프는 정운이 빌려 가서 1달 동안 돌려주지 않았던 '희생'이었다. 도경은 어정쩡한 자세로 정운의 부친이 건넨 그 물건들을 받았다. 비디오테이프는 동아리의 자료니까 돌려받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정운의 영화 노트를 받는 것은 좀 내키지 않았다.

  "이건, 정운이가 좋아한 영화를 기록한 것일 텐데요. 제가 받아도 될지."
  "어차피 나는 그걸 봐도 모르지 않나? 아는 사람이 보는 게 낫지. 보고 쓸모없다 생각하면 버려도 괜찮아."
  "아, 네..."

  정운의 부친이 그렇게 가고 나서, 그날 오후에 영호가 동아리방에 들렀다. 도경은 영호한테 정운의 아버지가 동아리방에 들렀다고 이야기했다.

  "아니, 그 노트를 왜 너한테 주냐? 아무리 정운이가 우리 친구라 해도, 이제는 죽었잖아. 너도 좀 꺼림칙할 거 아냐?"
  "그거야 그렇지만..."

  도경은 정색을 하면서 말하는 영호에게 왠지 모를 거리감을 느꼈다. 하긴, 영호는 정운과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기는 했다.

  "야, 그냥 버려. 버려도 된다고 했다면서. 내가 어디서 들으니까, 죽은 사람 물건, 함부로 보관할 거 아니라고 하더라. 더군다나 정운이 걔는..."
  "내가 알아서 할게."

  도경은 영호가 그 뒤에 덧붙일 말이 듣기가 싫어서, 영호의 말을 성급히 잘랐다. 저 녀석, 생각보다 아주 차갑네. 저렇게까지 말할 건 뭐람. 도경은 내심 영호의 반응에 서글픔과 분노가 밀려왔다.

  "그러니까, 벌써 25년이나 흘렀네."

  그 세월 동안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은 조악한 화질의 복사본 비디오테이프에서 DVD로, 그리고 영상 파일로 재생할 수 있는 시대로 바뀌었다. 도경은 낡은 비디오테이프를 버리고, 정식 발매된 DVD로 사서 보관했다. 그리고 1년에 한 번,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이 영화를 보았다. 그러니까 도경은 이 영화를 25번도 넘게 본 셈인데, 도경은 여태까지 '희생'이란 영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영화는 너무나도 어려웠고, 너무나도 지루했다. 도경이 졸다가 눈을 뜨면, 주인공 남자는 자전거를 타고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또 졸다가 눈을 뜨면 어느새 영화는 마지막에 이르렀다. 마침내 나무가 불타는 장면이 나오면, 도경은 정지 버튼을 눌렀다. 그렇게 '희생'을 보는 것은 도경이 한 해를 마감하기 위한 일종의 의식(儀式) 같기도 했다. 
 
  늘 그러했듯, 도경은 이번에도 '희생'을 보면서 꾸벅꾸벅 졸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영화 속의 나무가 불타고 있었다. 정운은 저 나무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도경은 정운의 부친에게서 받은 영화 노트를 비닐로 밀봉해 놓았다. 그 노트를 보고 싶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들지 않았다. 그건 마치 온갖 불운과 저주가 들어찬 판도라의 상자 같았다. 영호가 말했듯, 그냥 내버리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도경은 차마 그 노트를 버리지 못했다.

  도경은 DVD를 케이스에 조심스럽게 넣고는, 그것을 원래의 자리에 두기 위해 장식장의 맨 아래 서랍을 열었다. 비닐 안에서도 노트는 세월에 삭는 중이었다. 누렇게 뜬 종이 위로 흐릿해진 '영화 감상문'이란 글씨가 드문드문 조각이 나 있었다. 언젠가는 뜯어서 봐야만 하는 노트였다. 어쩌면 그 언젠가가 오늘인지도 모르겠군. 도경은 비닐에 붙여놓은 스카치테이프를 떼었다. 접착력을 잃어버린 테이프가 가루가 되어서 떨어졌다. 25년. 무참히 흘러버린 시간을 생각하니, 마음이 쓰라렸다.

  노트에는 첫 장부터 정운이 감상한 영화의 리뷰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정운이 쓴 첫 번째 영화는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였다. 도경은 트뤼포를, 정운은 고다르를 가장 좋아했었다. 그랬었지. 그렇게 도경은 정운과 함께했던 시네필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노트를 넘겼다. 정운의 영화 리뷰는 두꺼운 영화 노트의 중간 부분에서 끝났다. 그 마지막 영화는 도경도 알다시피 '희생'이었다. 그런데 정운은 리뷰라고 할 것도 없는 매우 짧은 문장만 적어놓았다.

  '어떤 삶은 그렇게 작별할 수밖에 없다.'

  정운의 그 짧은 문장은 도경에게는 심연(深淵)과도 같았다. 도경이 해마다 본 '희생'은 정운의 심연에 대한 막연한 탐색인지도 몰랐다. 그것은 도경이 죽을 때까지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이기도 했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도경의 마음속 아래에 자리한 '왜 그랬을까?'라는 그 질문에 그 어떠한 답도 주지 않았다. 사실 그 답을 찾는다고 해도, 이제 도경에게는 그저 무익할 뿐이었다. 당장 도경이 풀어야 할 문제는 '희망퇴직을 신청할 것인가'이며, 반드시 그 문제의 답을 찾아야만 했다.          

  "어떻게든 버텨야지, 어떻게든."
 
  마음이 갑갑해진 도경은 거실에 드리워진 암막 커튼을 천천히 걷었다. 새벽 2시 37분. 건너편 아파트에서도 불이 켜진 집은 별로 없었다. 아파트 단지 출입구에 걸린 재건축 안전진단 통과 현수막이 초겨울 바람에 거칠게 펄럭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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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음 초단편은 주말에 올릴 계획입니다.

2. 어떤 글은 좀 더 길게 쓸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시간이 늘 모자릅니다. 이런저런 일이 늘 생겨요. 그래도 일주일에 한 편씩은 써내려고 합니다.

3. 습작용 글이라도, 읽어주는 독자분들이 있어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다음에는 어떤 글을 쓸까, 항상 생각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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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Merry)


  "메리야, 오늘도 한번 나가볼까? 이리 와봐. 아줌마가 옷 좀 입혀줄게."

  아주머니가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부릅니다.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따뜻하고 부드러워요. 그 목소리에는 가식이 없는 친절도 담뿍 담겨있어요. 그래서 아주머니의 손님들도 물건을 잘 사주는 것일지도 몰라요. 아주머니는 솜이 누벼진 겨울옷을 나에게 입혀줍니다. 빨간색 원단으로 누벼진 내 옷의 가장자리에는 보글보글한 양털이 덧대어져 있어요. 그래서 겨울바람도 잘 막아준답니다. 나는 이 옷이 마음에 들어요.

  나는 아주머니가 입혀준 옷을 입고 아주머니의 품에 안겨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갑니다. 아파트 출입구에는 아주머니의 전동카트가 있어요. 아주머니가 파는 야쿠르트가 있는 카트입니다. 네, 우리 아주머니는 야쿠르트를 배달하고 판매합니다. 아주머니는 새벽 6시쯤에 지점에 가서, 자신의 카트에 물건을 담아 돌아옵니다. 그리고 가족의 아침 식사를 준비합니다. 7시 반, 아저씨와 아들 형석이가 일어나서 아침을 먹습니다. 오늘의 메뉴는 시금치 된장국과 계란말이, 엊그제 손님이 김장했다면서 건네준 겉절이군요. 아주머니는 내 밥그릇에도 사료를 부어줍니다. 오늘 먹을 물도 새로 갈아주고요.

  "오늘은 바람도 그렇게 불지 않고, 낮에도 그리 춥지 않대. 밖에서 지내기 괜찮을 거야."
  
  아주머니는 초록색의 예쁜 목줄을 나의 목에 조이지 않게 묶어줍니다. 아주머니는 작은 바구니에 나를 넣습니다. 흰색의 요크셔테리어인 나는 몸집이 자그마해요. 그래서 그 바구니에도 어렵지 않게 들어갑니다. 그렇게 나는 아주머니와 오늘 하루의 일과를 시작합니다. 오전의 일과는 물건을 배달하는 것으로 채워집니다. 아파트 2개 단지가 아주머니의 구역입니다. 아주머니의 야쿠르트를 받는 손님들의 집에다 물건을 걸어둡니다. 아주머니는 걷고, 또 걷습니다. 급하다고 뛰지는 않아요. 언젠가 그렇게 뛰다가 크게 다친 적이 있거든요.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아주머니는 아무리 바빠도 심호흡을 하면서 천천히 걸어요.

  대략 30집 정도를 배달하고 나면, 아주머니도 잠시 쉽니다. 보온병에 담아온 물로 커피믹스를 한 잔 타서 마셔요. 나한테도 개껌 하나를 주고요. 아주머니가 늘 카트를 세워두고 쉬는 장소가 있어요. 아주 삐딱하게 휘어진 커다란 소나무 아래 주차장입니다. 그 소나무는 너무 휘어져서 쓰러질 것 같은데, 작년에 관리사무소에서 단단한 철 받침대를 세웠어요.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아늑한 느낌이 드는 곳이지요. 아주머니가 이번에 사 온 개껌의 맛은 바베큐 맛인데, 좀 별로예요. 그래서 나는 조금만 씹다가 그냥 놔둡니다. 이러면 아주머니가 다음에는 이 개껌을 사지 않을 테니까요.

  "언니, 나왔구나. 나 늘 마시는 걸로 하나만 줘 봐."
  "자, 여기 있어. 오늘은 알바 안 나가?"
  "아휴, 나 그 일도 그만둘까 봐. 그 집 애들이 워낙 말도 안 듣고 까탈스럽게 구네."
  "애들이 많이 힘들게 해?"
  "내 자식이 울고 떼쓰는 것도 짜증나는데, 남의 자식은 뭐 말할 게 있어? 언니, 그 있잖아. 주는 것 없이 얄미운 사람. 그 집 애들이 그렇다니까. 큰 아이는 따박따박 말대꾸하고, 작은 애는 툭하면 울고. 아, 진짜 돌겠더라니까. 게다가 그 애들 엄마는 어떻고? 등하원 도우미를 무슨 지가 부리는 파출부쯤으로 생각하나 봐. 애들 샌드위치 만들어서 먹이세요, 학용품도 사다 놓으세요, 이러는 거야. 샌드위치는 자기가 알아서 만들어 놔야지. 나더러 음식까지 만들라고? 나 원 참."
  "그건 좀 그렇다. 간단한 간식 챙겨주는 것까지는 할 수 있지만, 만들어서 주라니."
  "하여간, 요새 젊은 엄마들 사고방식이란 게 그렇더라고. 돈을 좀 주면, 사람 마구 부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 등골까지 빼먹으려고 들어. 말하자면 상식이란 게 없어. 기본적인 상식."
  "남의 돈 버는 일이 쉽지가 않지."
  "그래, 언니. 그거라도 좀 해서 애들 학원비라도 보태려고 했는데."
  "얇게 입고 나왔네. 날 추우니까 얼른 들어가."
  "언니도 오늘 하루 고생해."

  3단지의 슬비 엄마입니다. 나는 우리 아주머니한테 '언니'라고 불러서, 진짜 동생인가 했어요. 그런데 아주머니를 '언니'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아주머니의 손님인 줄 알게 되었지요. 손님들이 아주머니를 부르는 호칭도 다양해요. 저 할머니가 아주머니를 어떻게 부르나 들어보세요.

  "야쿠르트 여사님, 왔어?"
  "어르신, 아침 식사는 하셨어요?"
  "응, 그냥 대충. 늙으니까, 입맛도 없어. 하루 세 끼 먹는 것도 번잡스러워."
  "그래도 잘 챙겨서 드셔야죠. 오늘은 날도 추운데, 털모자하고 장갑 챙기신 건 잘하셨어요. 밖에 나오실 땐 꼭 그렇게 하세요."
  "우리 손녀딸이 꼭 현관 신발장에다 놔둬."
  "그런 손녀가 있어서 얼마나 좋으세요."
  "갸도 이제 짝을 만나서 결혼하니까."
  "아, 그래요? 언제요?"
  "내년 봄에. 이제 손주들도 다 여워버리면, 내 죽을 날만 남은 게지."
  "아이고, 무슨 말씀을 그리하세요. 제가 사탕 하나 드릴게요. 이거 커피 사탕인데, 맛있어요."
  "고마워. 난 야쿠르트 사 먹지도 않는데, 이런 것도 주고."
 
  고향이 해남이라 해남 할머니로 불리는 저 할머니는 매일 저렇게 아주머니를 찾아옵니다. 전동 휠체어를 힘겹게 끌고요. 아주머니에게 뭔가를 사는 일은 없지만, 아주머니는 늘 사탕이나 초콜릿 같은 것을 챙겨서 드려요.

  "아줌마, 나 커피 하나만 줘 봐."

  어휴, 저 중년 남자는 정말 재수 없어요. 반말지거리에다가 차에서 돈을 휙, 던지는 거 하며. 나 같으면 도로 돈을 내던지겠지만, 우리 아주머니는 바닥에 떨어진 돈을 얼른 주워요. 그리고 커피하고 거스름돈을 공손히 건넵니다.

  "찬 음료인데, 괜찮으시겠어요?"
  "응. 많이 팔아!"

  나는 저런 인간들을 보면요, 뭔가 인간의 밑바닥을 보는 것 같아요. 막돼먹은 인간이잖아요. 상대방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도 없고. 아주머니가 겉으로는 태연해 보여도, 마음이 안 좋은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저런 사람들한테 물건 팔고 나면 꼭 내 머리를 쓰다듬으세요. 부드럽게, 하지만 거기에는 이상한 서글픔 같은 것이 느껴져요.

  "형석 엄마! 나, 오늘 정말 기분 좋다. 우리 민우가 코뿔소에 붙었거든."
 
  근데 저 민우 엄마가 말하는 '코뿔소'가 무엇일까요? 내가 보잘것없는 작은 강아지의 삶을 살아가고 있기는 하지만, 코뿔소가 머나먼 아프리카 대륙의 동물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요. 민우 엄마가 말하는 코뿔소는 아프리카의 코뿔소는 아닌 것 같고. 좀 더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네요.

  "정말 잘 됐다. 거기 들어가기가 그렇게 힘들다면서."
  "아휴, 그러게. 오죽하면 코뿔소 붙으면 명문대 입학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그러겠어."

  아, 이제 알겠어요. 저 코뿔소는 아마 어디 대단한 입시학원쯤 되나 봅니다. 민우 엄마는 자기 아들이 거기 붙었다고 저리도 자랑하는 것이고요. 그런데 저 이야기를 듣는 나는 은근히 부아가 치미네요.

  "이제 민우 엄마도 마음이 좀 놓이겠다. 다른 사람들은 준비를 많이 해도 떨어졌다 그러던데. 민우가 잘했나 보다."
  "우리 애가 아빠 머리 보다 내 머릴 닮아서 그래. 민우 아빠는 돈 버는 머리만 있지. 아우, 아무튼 기분 정말 좋아. 우리 민우 먹이게 제일 비싸고 기운 나는 걸로 한 10개만 줘."

  어휴, 저 말본새하고는. 아무튼 저 여자는 참 재수가 없어요. 남편은 돈 잘 벌고, 자기는 머리 좋다고 자랑 늘어지게 하고. 아주머니는 그저 조용히 미소 지으며 비닐봉투에 음료 10개를 담습니다. 여자가 가고 나서, 아주머니가 또 내 머리를 아주 많이 쓰다듬었어요.

  "메리야, 점심 먹으러 집에 갈까? 아줌마도 배가 좀 고픈데."

  아주머니는 오전 일과를 마무리하고 집으로 갑니다. 아주머니의 집은 아주 가까워요. 아주머니는 카트를 아파트 출입구 주차장에 놓고, 바구니에서 나를 꺼냅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의 12층 버튼을 누릅니다. 나는 아주머니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오늘 아주머니의 얼굴은 좀 지치고 어두워 보이네요. 마침내 집에 도착했어요. 아주머니가 손을 씻고, 부엌에서 아침에 남은 국을 데웁니다. 나는 거실의 푹신한 러그에 앉아서, 거실 벽에 걸려있는 아주머니네 가족사진을 봅니다. 아주머니와 아저씨, 그리고 형석이. 아주머니는 통통하고, 아저씨도 키가 크고 체격이 좀 큰 편이에요. 형석이도 그런 부모님을 닮아서 살이 쪘어요. 나는 형석이의 유순하고 해맑은 미소를 참 좋아해요.

  아주머니가 국을 데우고 나서, 나한테 사료를 조금 덜어서 줍니다. 나는 밥 생각이 없어서 별로 먹지는 않았어요. 그 재수 없는 민우 엄마 때문에요. 아주머니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거든요. 아주머니는 밥상을 차려놓고는 드실 생각이 없는지, 그냥 가만히 있더라고요. 나는 식탁으로 가서 아주머니 옆에 앉아있었어요.

  "밥을 차려놓기는 했는데, 별로 먹고 싶지가 않네. 메리야, 밥맛이 없는 이런 날도 다 있어. 항상 아침 배달하고 나면 배가 고픈데 말이야."

  왈왈. 나도 아까부터 기분이 안 좋아서 좀 소리 내 짖고 싶더라고요. 그렇게 짖고는 거실과 부엌을 왔다갔다했지요. 아주머니는 데운 된장국을 음식물 쓰레기통에다 넣고는, 냉장고에서 요구르트 하나를 꺼내어서 마셨어요. 그거라도 먹지 않으면 오후 일을 할 수 없으니까요. 그러고 나서 아주머니는 소파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어요. 피곤하시겠지요. 아침 6시부터 계속 일을 했으니까요. 나도 아주머니 옆에서 까박까박 졸았어요.

  아주머니가 다시 집을 나선 것은 오후 1시쯤입니다. 오후에는 거리 판매를 주로 해요. 정해진 장소에서 손님들을 기다리는 것이지요. 오전에는 주차장의 소나무 아래였다면, 오후에는 아파트 스포츠 센터 앞에서 손님들을 기다립니다. 거기는 스포츠 센터 이용객들도 있고, 유동 인구도 많은 대로변이거든요. 오늘은 날도 그리 춥지 않고, 햇빛도 따사롭게 느껴집니다. 아마 올해의 마지막 가을날일 거 같아요. 나는 아주머니의 카트에서 거리의 은행나무가 노랗게 흔들리는 것을 바라봅니다.

  "엄마, 아들 왔다."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오후 수업은 안 하고 조퇴한 거야?"
  "응, 머리가 아파. 그냥 공부하기 싫어."

  아주머니는 머리를 가볍게 두들기는 형석이를 보고 웃었어요. 형석이는 오늘도 오후 수업을 땡땡이치나 봅니다. 자주 그러는 편이에요.

  "엄마, 내가 의자 가져올게."
  "엄마 의자에 네가 앉아. 엄마는 좀 서 있어도 괜찮아."
  "아냐. 그건 엄마 꺼. 나는 내 꺼 가져올 거야."
  "괜찮대도 저러네."

  형석이는 스포츠 센터 주차장으로 가더니, 거기 화단 구석에 처박혀 있는 연두색 플라스틱 의자를 하나 가져옵니다.

  "엄마, 이거 봐. 이거 좋은 의자!"
 
  형석이는 기쁜지 큰 소리로 아주머니한테 말합니다. 의자를 가져오던 형석이가 함박웃음을 터뜨리자, 아주머니 얼굴에도 미소가 번집니다. 형석이는 카트 옆에 의자를 놓고 거기에 앉습니다. 그리고 바구니에 있는 나를 꺼내어 무릎 위에 올려놓았어요. 나는 산책가고 싶어서, 형석이의 무릎에서 발을 좀 굴렀지요.

  "엄마, 나 메리 산책 시킬래."
  "그럴래? 스포츠 센터 뒤쪽에 공원 있잖아. 그럼, 거기에서 메리하고 좀 놀아라."
  "응. 우리 엄마 사랑해. 화이팅!"

  형석이는 두 팔로 크게 하트를 만들어 보여주었어요. 형석이가 만든 하트를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았어요. 그래서 왈왈, 하고 소리를 내었답니다. 원래는 아주머니가 오후에 이곳에 오기 전에 나와 산책하곤 하는데, 오늘은 좀 힘들어 보였어요. 아무튼 형석이가 일찍 와서 나도 콧바람을 쐴 수 있게 되었네요.

  "빨갛게 빨갛게 물들었네. 노랗게 노랗게 물들었네. 야호! 가을 길은 좋은 길."

  형석이는 나의 목줄을 느슨하게 하고서는, 그렇게 노래를 부르며 천천히 걸었어요. 형석이와 내가 그렇게 기분 좋게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초록색 체육복에 교복 외투를 걸친 남자애 둘이 다가오더라고요. 형석이하고 같은 색의 체육복을 입었네요.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애들인가 봐요.

  "어이, 이형석. 너 여기서 뭐 해?"

  더벅머리에 안경 쓴 남자애가 건들거리면서 그렇게 묻더군요. 나는 걔를 더벅머리라고 부를게요. 아무튼 그 더벅머리가 말하는 걸 보니, 어째 좋은 아이는 아닌 것 같았지요.

  "우리 메리, 산책시키고 있어."
  "메리? 이름도 존나 촌스럽네. 언제 적 메리냐? 지 닮은 강아지 새끼 데리고 다니는 바보 새끼."
  "내가 왜 바보야? 나 바보 아냐!"

  형석이는 그 녀석들과 맞닥뜨린 것이 놀라기도 하고 화가 나서 큰 소리로 외쳤어요. 그러자 더벅머리 옆에 있는 멀대같이 키가 큰 놈이 옆에 있는 단풍나무를 마구 흔들면서 그래요.

  "바보 새끼한테 바보라고 하지, 뭐라고 하냐? 꼭 저렇게 모자란 애들은 지가 바보인지 몰라. 등신같이."

  그 멀대 자식이 형석이한테 그런 말을 퍼붓자, 나는 있는 대로 화가 치밀었어요. 그냥 앞뒤 가리지 않고, 그 멀대의 체육복 바지를 물고는 마구 잡아당겼어요.

  "메리야, 안돼. 그러면 못써. 안돼, 다쳐. 하지 마."
  "야, 이 강아지 새끼가 성깔있네. 바보 주인도 지킬 줄 알고."

  멀대 새끼가 나한테 물어뜯기는 것을 보더니, 더벅머리가 나한테 달려들어서 발로 내 등을 갈겼어요. 나는 등짝이 쪼개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지만, 멀대 자식의 바지를 놓아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어요. 형석이는 어떻게든 나를 구해야겠다고, 내 목을 세게 잡아당겼어요. 나는 형석이의 아귀힘이 얼마나 센지 처음 알았어요.

  "개새끼, 지랄맞기는."

  마침내 형석이가 나를 멀대에게서 떼어놓자, 멀대 자식이 그렇게 욕설을 내뱉더군요. 나는 분이 풀리지 않아서, 그냥 고래고래 있는 대로 짖었어요. 형석이는 그런 나를 꽉 끌어안고 있었고요.

  "야, 가자. 저 바보 새끼, 지 강아지한테 물어뜯겨서 뒈지라지."

  더벅머리가 그렇게 지껄이면서, 흙바닥에 넘어진 멀대를 일으켜 세웠어요. 둘은 나와 형석이를 바라보며 쉴 새 없이 욕을 했어요. 그리고 그렇게 그곳을 떠났습니다.

  "메리야, 괜찮아? 어디 아프지 않니? 형아가 호, 불어줄게."

  형석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단풍나무 아래 벤치에서 그냥 가만히 앉아있었어요. 형석이는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몹시 놀랐는지, 거친 숨을 내쉬었어요. 나는 형석이의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를 들었어요.

  "바보, 바보, 바보!"

  형석이는 그렇게 혼잣말하면서, 자기의 머리를 쥐어뜯더군요. 도대체 저 쓰레기 같은 애새끼들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어떻게 사람이 사람한테 저럴 수 있을까요? 나는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어요. 나의 얼굴은 침과 눈물, 땀이 범벅이 되고 말았지요.

  네, 오늘은 정말 힘든 하루였어요. 나는 저녁에 밥을 먹을 기운도 없어서, 거실 러그에 그냥 드러누워 버렸어요. 형석이도, 아주머니도, 아저씨도 오늘은 모두 저녁을 먹지 않았어요. 아저씨는 늘 그렇듯, 아파트 공원에 운동하러 나갔어요. 형석이는 일찍 자러 들어갔고, 아주머니는 식탁에서 사탕 꾸러미를 나누어 포장했어요. 손님들에게 그렇게 소소한 선물이라도 돌려야, 요구르트 하나를 더 팔 수 있으니까요.

  나는 아주머니가 깔아준 전기매트에서 졸다가, 거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찬바람에 눈을 떴어요. TV 장식장 위의 디지털시계가 11시 37분을 가리키고 있었어요. 다들 잠이 들었나 봐요. 거실에는 작은 무드 등 하나만 켜져 있었으니까요. 나는 조금은 기운을 차리고는, 거실 벽에 걸린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았어요. 어딘지 모르게 그 사진에서는 가라앉은 서글픔이 느껴졌어요. 할 수만 있다면, 그 사진에 조금이라도 행복의 느낌을 불어넣고 싶다.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어요. 언젠가 아주머니가 알려준 내 이름이 생각났어요. 맞아요. 내 이름은 메리(Merry)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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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당(慧火堂) 보살의 그날그날 


  "여긴, 예약을 안 하고 와도 볼 수 있나요?"
  "아이구, 그럼요. 어서 들어와요."

  혜화당 보살은 반갑게 손님을 맞이했다. 손님은 20대 후반의 여자였다. 어깨까지 찰랑거리는 생머리를 가볍게 쓸어 넘기면서, 손님이 신당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여기는 점집 골목 제일 끝자락인데,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요?"
  "대문 앞에 신선 같은 할아버지 그림이 붙어있더라고요. 그냥 그 할아버지가 친근해 보여서요."
  "아, 우리 도사 할아버지."
  "도사요?"
 
  혜화당은 눈을 동그랗게 뜬 아가씨의 반응이 재밌어서,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무슨 이상한 도인 그런거 아니야. 그림 속의 도사 할아버지는 무당한테 점괘 일러주는 신령님."
  "네, 그렇군요."
  "바깥 날씨가 좀 쌀쌀하지? 따뜻한 대추차나 한잔합시다. 대추차, 괜찮아요?"
  "주시면 고맙죠."

  혜화당은 엊그제 생강과 함께 썰어서 담근 대추차를 티스푼으로 덜어내었다. 알싸한 생강의 향이 풍겼다.

  "자, 대추차 대령이요."
  "아휴, 잘 마시겠습니다."

  혜화당은 대추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아가씨의 안색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결혼 운이 들어와 있군. 아마 남자 이야기를 하려고 왔을 거야.

  "아가씨가 오늘 내 첫손님이야."
  "아, 그런가요? 오후 4시인데, 아직 아무도 안 온 거예요?"
  "응. 그런 날도 있지. 그래도 나, 밥은 안 굶고 살아. 다 신령님들이 보살펴 주니까."
  "그렇군요."

  차를 마시는 동안 아가씨는 거실의 이곳저곳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거실은 뭐 그냥 여느 가정집 같지. 점사는 신당에서 보니까, 차 다 마시면 얘기해요. 여기 히터도 있으니까, 몸도 좀 녹이고."
  "네."

  혜화당은 거실 유리창으로 보이는 바깥을 가만히 응시했다. 잔뜩 흐린 하늘이 꾸물거리는 것이 뭐라도 내릴 기색이었다.

  "눈이 오려나, 비가 오려나... 그런데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프지?"

  혜화당은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두통의 기운에 가볍게 머리를 흔들어 보았다. 이건 진짜 머리가 아픈 두통이 아니라, 신이 오실 때 느껴지는 기운이었다.

  "아가씨 머리가 복잡한가 보네. 이야기나 좀 들어볼까?"
 
  아가씨 손님은 대답 대신에 말없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 날 따라 들어와요. 편하게 그냥 마음속 이야기를 하면 된다우."

  혜화당은 전안(殿內, 신령들을 모신 제단)에 공손히 손을 모으고 짧게 기도를 올렸다. 도사 할아버지, 오늘도 영명한 점괘 들려주시옵소서.

  "아가씨, 생년월일 말해봐요. 태어난 시각도 말해주면 좋지만, 잘 모르겠으면 할 수 없고."

  손님은 갈색 핸드백에서 작게 접은 메모지 한 장을 점사를 보는 찻상에 놓았다. 혜화당은 펼쳐진 만세력 책을 짚어가며, 아가씨의 사주를 종이에다 풀어나갔다.

  "그래, 뭐가 제일 궁금해요? 아가씨가 물어보면 내 대답을 해주지."
  "그게, 그러니까..."

  아가씨는 조그마한 입을 오물거리더니, 뭔가를 말하려다가 이내 침묵을 지켰다.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플까? 지금 내 머리가 막 지끈지끈 아파. 아가씨도 머리가 아프지, 응?"
  "네. 제가 만나는 사람이 두 사람 있는데요. 결혼하려면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해서..."
  "그래서, 내 머리가 이렇게 아프구나. 아휴, 아주 그냥 답답해 죽겠어."

  아가씨는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자그맣게 웃는 소리를 내었다.

  "한 사람은 외모는 뭐 그냥저냥 그렇고, 경제적으로는 무척 안정되어 있어요. 근데 좀 말이 안 통한다고 해야 하나? 그런 게 있고요. 또 다른 한 사람은 외모는 멀끔하고 좋은데, 가진 것은 별로 없고 그래요. 그런데 그 사람하고 있으면 말을 많이 하게 되더라구요. 그러니까 마음이 맞는 거죠. 다만, 좀 그 사람의 환경 자체가 앞이 안 보이는 그런 게 있어서..."
  "그렇구나. 한 사람이 아가씨가 원하는 대로 다 가졌으면 좋을 텐데, 그게 아니라서. 그래서, 머리가 좀 많이 아픈 거지."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누굴 선택하면 좋을지, 저도 마음이 오락가락해서요."

  혜화당은 쌀을 상에 가볍게 뿌려놓고, 이리저리 헤아려 보았다. 쌀점은 혜화당이 가장 익숙하게 하는 점이었다. 

  "근데 뭐 내가 할 말은 별로 없을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말씀인지..."
  "이미 아가씨 마음에 결정이 내려졌다는 거야."
  "그럴 리가요."
  "아니, 솔직하게 좀 자신을 들여다봐요."

  약간은 얼굴이 붉어진 아가씨는 무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더니 이내 말을 이어갔다.

  "네, 어쩌면 마음이 기울어진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그 도사 할아버지가 뭐라 말씀하시는지 듣고 싶어요."
  "할아버지도 그냥 웃기만 하시는데. 내가 암만 무당이어도, 신령님이 말씀을 안 하시는데 어쩌겠어? 그런데 내가 둘 중에 누굴 택하라고 하면 할 거야? 그것도 아닌 것 같아서."

  혜화당은 아가씨의 당혹스러운 모습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돈은 많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남자. 그리고 돈은 없지만 말이 통하는 남자. 과연 자신이라면 둘 중 누굴 택할 것인가? 돈이 인생의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걸 무시할 수도 없다. 서로 이야기가 좀 통한다고, 사글셋방에서 신혼살림 차리는 것을 저 아가씨가 기꺼이 택할까? 두 남자 가운데 누가 더 나은가? 혜화당 머릿속의 도사 할아버지는 부채를 뱅글뱅글 돌리면서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아휴, 우리 할아버지도 참. 손님 앞에서 내 얼굴이나 좀 세워주지. 그래도 오늘 첫손님인데, 내가 할 말이 없어가지고. 할아버지, 말씀 좀 하세요.'

  혜화당은 삐긋이 웃고 있는 도사 할아버지의 부채를 탁, 낚아채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럴 때 수완이 좋은 무당은 대충 둘러대기라도 할 텐데, 난 그런 걸 못 해."
  "아니에요. 사실, 여기 오기 전에 제 마음이 이미 정해진 것도 같고..."
  "무당이 신령님 말씀을 전하기는 하지만, 모든 걸 다 알지는 못한다우. 손님이 앞일을 물어보면 열 개 가운데 한두 개 맞을까 말까 하지. 그런데 지나간 일은 거진 다 맞추지."
  "보살님은 참 솔직하시네요."
  "응, 내가 그런 편이지. 이 나이 되고 보니, 뭘 억지로 꾸며내서 말하고 그런 건 못 하겠어. 아무래도 신령님들이 제일 무섭지, 뭐. 똑바로 그분들 말씀 전해야 하니까."
  "도사 할아버지 말씀을 듣고 싶었는데, 못 듣고 가니 아쉽기는 하네요."

  아가씨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그러게. 내가 복채를 안 받을 수는 없고. 바로 갈 건 아니지? 커피 시켜줄 테니까, 커피 마시고 가."
  "커피요?"
  "응, 그 있잖아. 다방 커피. 난 하루 점사 다 보고 나면, 근처 다방에서 커피 시켜서 먹거든."
  "아, 네..."

  아쉬워하던 아가씨의 얼굴이 '다방 커피'라는 말을 듣더니, 조금은 펴진 것처럼 보였다. 혜화당은 휴대폰으로 루비 다방에 전화를 걸었다.

  "응, 늘 시키는 거. 오늘은 손님이 있으니까, 한 잔 더 가져오고."

  혜화당은 그렇게 전화를 끊고는, 아가씨에게 거실로 나가자고 했다. 어느새 날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이렇게 낮이 짧아진 것을 보니, 동지가 얼마 남지 않았구나. 혜화당은 동지 기도를 어디로 가서 할 것인지 잠시 생각했다. 작년에 갔던 강화도 산으로 기도를 갈까? 거기 산은 무척 가팔랐지. 이제는 나이도 먹고 체력도 달려서, 그 가파른 산을 다시 오른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힘에 부칠 것 같았다.

  "보살님, 저 왔어요."
  "아이구, 총알 배송이네. 어찌 이리 빨리 와?"
  "오늘 장사가 영 별로여서. 그래서 보살님 전화 기다렸죠."

  루비 다방의 마담이 생글거리며 거실로 들어왔다. 그러더니 능숙하게 보라색 꽃무늬 보자기를 풀고, 붉은 보온병의 뚜껑을 열었다. 달달한 커피 향이 솔솔 풍겼다.

  "아가씨, 다방 커피가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 그래도 어쨌든 한번 마셔봐. 여기 마담이 커피 잘 타거든."
  "네. 고맙습니다."

  마담은 아가씨 쪽으로 커피잔을 천천히 밀어놓았다.

  "보살님, 오늘은 좀 어땠어요?"
  "오늘? 여기 아가씨 손님 하나야."
  "아이구, 세상에. 보살님도 오늘 영업이 파이구먼요. 호호호..."
  "그래, 파이다, 파이여. 그래도 어제가 좀 괜찮았으니까. 자, 오늘 입금할 돈 35만 원."
 
  혜화당은 마담에게 돈과 은행 카드를 건넸다. 그걸 보더니, 아가씨가 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저기, 은행에 입금하는 일을 시키세요?"
  "응. 돈 입금도 시키고, 또 빼 올 때도 시키고."
  "네? 아니, 그걸 직접 안 하시고 왜..."
  "아, 귀찮아서. 여기 마담이 심부름 잘해주거든. 난 신령님 심부름해야 하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혜화당은 허허롭게 웃었다.

  "근데, 이분이 보살님 돈 가지고 어디 먼데 가버리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래요?"

  아가씨는 이제는 좀 친해진 느낌이 들었는지, 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 다방, 전에 있던 마담 애가 그렇게 내 돈 천만 원 가지고 날랐지."
  "네? 그런 일이 있었어요?"
  "응, 그렇대두. 하하..."

  혜화당의 웃음소리에 아가씨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 마담 언니는 믿으세요?"
  "믿으니까, 돈을 맡기는 거지. 얘 얼굴 좀 봐봐. 어디 돈 가지고 튈 애처럼 보이나."
  "우리 보살님이 그렇게 날 믿으신다니까요. 호호호..."

  아가씨는 약간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혜화당과 마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무당이라고 다 자기 앞일을 알지는 못해. 신령님이 하나하나 다 알려주시는 것도 아니고. 내가 이렇게 말하면, 우리 아가씨가 좀 속았다, 이렇게 생각하려나?"
  "아니요. 그냥 재밌는데요. 보살님이 솔직하신 것도 좋구요."
  "아가씨, 돈 많은 그 남자하고 결혼할 거지?"
  "네, 아마 그렇게 될 거 같아요."
  "내가 그래서 말을 안 했어."
  "알고 계셨군요."

  아가씨가 이제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보살님 이름이 왜 혜화당이에요? 혹시 서울 혜화동과 무슨 인연이라도..."
  "인연은 무슨? 난 인천에서 나고 자란 여기 토박이인걸. 내 이름 혜화는 지혜의 불을 밝힌다는 법명(法名)에서 따왔지. 나한테 오는 손님들, 마음의 짐이나 좀 덜어주고 싶은 마음에서."

  아가씨는 혜화당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 그 사람하고 잘 살아갈 수 있을까요?"
  "살아보고, 힘들면 또 와서 물어보면 되지. 다들 그렇게 해."
  "네. 그렇게 해야겠네요."

  혜화당은 도사 할아버지의 부채가 부드럽게 팔랑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어느새 밖에는 초겨울 저녁의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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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류(逆流)


  "어, 이게 뭐지?"

  소변을 보고 화장실 변기의 물을 내리던 기영은 졸린 눈이 번쩍 뜨였다. 그것은 사람의 손가락이었다. 불어터진 살덩어리에 붙어있는 것은 분명 손톱이었다. 혹시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닌가 싶어서 기영은 눈을 비벼보았다. 변기의 물이 거의 채워지면서 그 이상한 덩어리도 천천히 움직였다.

  "기중아, 좀 일어나봐. 일어나 보라고. 변기에 사람 손가락이 있어!"
  "아, 무슨 일이야? 왜 자는 사람을 깨우고 그래? 뭔 손가락이야?"

  기중은 기영이 자신을 흔들어 깨우자,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대답했다. 짜증이 잔뜩 배어 있는 목소리였다.

  "좀 일어나 보래도. 저거 진짜 사람 손가락이라고."

  기중은 기영의 다그치는 목소리에 마지못해 일어났다. 마루 벽에 걸려있는 시계는 새벽 5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휴, 더 잘 수도 있은 걸 깨워서. 대체 뭔 일이야, 응?"
  "야, 이거 봐라. 이게 사람 손가락이잖아."

  기영은 동생의 손목을 잡아끌고는 화장실 변기 안쪽을 가리켰다.

  "아니, 저게 뭔 손가락이야? 저거 옛날 사루비아 과자 같네. 막대 과자 불어터진 거잖아. 나 원 참."
  "아니라고, 손톱이 달려있다고. 과자 아냐."
  "형, 안경 좀 쓰고 잘 봐봐. 형 안경 안 쓰면 나도 못 알아보잖아. 안경 좀 써보라고."
 
  기중의 말에 기영은 책상 위의 안경을 찾아서 썼다. 그러고 나서 변기 안을 보았다. 둥둥 떠다니는 덩어리는 조금씩 형체가 풀어지고 있었다. 기영이 보았던 손톱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 아파트가 하도 오래되었잖아. 40년 된 아파트 아냐. 그러니까 변기 물 내려가는 것도 시원찮고, 뭐 어디서 역류하니까 그러는 거겠지. 난 또 무슨 일인가 했네."

  하품을 늘어지게 하면서 기중은 다시 자신의 침대로 돌아갔다. 기영은 자신이 잘못 보았다는 사실에 조금은 멋쩍어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까 또렷하게 본 손톱의 잔상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정말로 헛것을 본 것인가? 차라리 헛것을 본 것이 다행인지도 몰랐다. 자신이 본 것이 진짜 사람의 손가락이라면, 그건 더 끔찍한 일이 아닌가? 후우, 기영은 새삼스럽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새벽의 기이한 일 때문이었는지, 그날 오후에 있었던 졸업시험에서 기영은 좀처럼 집중할 수 없었다. 어쨌든 졸업시험은 통과해야만 했다. 취업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국문과를 택한 자신의 스무 살이 그저 어리석게만 느껴졌다. 그 누구도 자신에게 국문과를 가라고 말하지 않았다. 시골의 부모님은 어디서 들었는지 경영학과를 가야 취직이 잘된다고 말했을 뿐이다. 하지만 기영은 국문과를 선택했다. 시와 소설, 그것을 읽으면서 느꼈던 마음의 울림이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은 좋다는 느낌만으로 직진하기에는 너무나 거칠었다.

  농사를 짓던 아버지는 기영이 대학을 들어가던 해에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다. 남편을 잃은 충격에다, 원래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던 어머니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이듬해, 요양병원에서 지내던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기영과 기중 형제는 그야말로 천애고아가 되고 말았다. 시골의 얼마 되지 않은 땅뙈기와 낡은 집을 팔아서, 지금의 16평 아파트에 들어온 것이 작년의 일이었다.


  서울시 변두리의 이 오래된 아파트 단지에서도 기영이 사는 복도식 아파트는 더 낡고 열악하게 보였다. 적은 평수에다, 월세가 그나마 싸서 이 아파트에는 하층민과 외국인 노동자 이주민들이 꽤 들어와서 살고 있었다. 그들의 국적도 다양했다. 중국, 몽골, 베트남, 필리핀, 캄보디아... 기영이 처음에 그들의 얼굴을 볼 때는 다 비슷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그들과 자주 마주칠수록 분명히 구분되는 특징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30대 중반의 몽골 남자는 기골이 장대했는데, 팔뚝에 과녁과 화살 문신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한국 남자와 결혼한 것으로 보이는 20대 초반의 필리핀 여자는 무척 뚱뚱했다. 여자는 늘 휴대전화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때로는 영어로, 때로는 본토의 언어로 시끄럽게 전화했다. 기영의 이웃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아니, 무슨 졸업시험을 사법고시 출제하듯이 내냐. 난 음운학 문제는 하나도 못 풀겠더라. 기영이 넌 어때? 잘 본 거야?"
  "나도 그렇지 뭐. 그래도 떨어지기야 하겠어? 그래도 1차 시험은 쉬웠으니까, 그거하고 이번 거하고 합산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긴, 교수들이 졸업생 인생 망칠 일 있냐. 졸업은 하게 해주겠지."

  동기인 민철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강의실 복도를 터덜터덜 걸어갔다.

  "이력서 낸 건 소식이 있어? 난 이번 주에 출판사 면접이 있는데, 모르겠다. 붙으면 정말 좋을 텐데."
  "온라인 서점에 내봤는데, 아직 소식이 없네. 또 부지런히 써서 뿌려봐야지."

  국문학을 전공해서 책 장사라도 하면 다행일 것 같다. 그런 마음으로 온라인 서점에 이력서를 내보았다. 하지만, 기영이 낸 세 군데 모두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책을 파는 것도 장사니까, 경영학 전공자가 더 낫겠지. 기영은 국문학보다 문예창작과가 자신에게 더 맞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국문과나 문창과나 굶어 죽기는 마찬가지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예의 그 씁쓸한 웃음을 짓게 되고 마는 것이었다.

  졸업시험을 치느라 진이 빠져서 그런지, 집으로 돌아오는 기영의 다리는 조금 후들거렸다.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아파트까지 걸어오는 그 10분 거리가 30분처럼 느껴졌다. 쓰러지지 않으려고 천천히 걷는 사람처럼, 기영은 걸음걸이에 정신을 집중했다. 집에 가서 좀 쉬면 낫겠지. 마침내 아파트 출입구에 도착했을 때, 몽골 남자가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았다. 남자는 늘 줄담배를 피워댔다. 담배꽁초는 아무데나 내던졌고, 가래침도 연신 내뱉었다. 기영은 그런 남자가 꼴 보기 싫어서, 좀 더 걸어서 다른 출입구로 들어가기로 했다. 엘리베이터는 15층에서 좀처럼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젠장, 엘리베이터 붙잡고 애새끼들이 장난이라도 치나. 기영은 자신의 집이 4층에 있다는 것에 그나마 안도했다. 다시 한번, 있는 힘을 쥐어짜 내어 계단을 올라갔다. 번호 키를 누르고 집에 들어오자, 그제야 조금은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쏴아쏴아..."

  기영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앞 베란다에서 물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원래 다용도실에 세탁기를 두고 쓰게 되어있지만, 일부 입주민은 자기들 편한대로 우수관이 있는 앞 베란다에다 세탁기를 두고 썼다. 역겨운 세제 냄새와 오수 때문에 관리사무소에서 세탁기 사용을 금지한다고 공고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세탁기 물 내려가는 소리인가 보네. 저 물소리를 수시로 듣는 것도 고역이었다. 어쨌든 좀 참으면 되겠지. 기영은 피곤을 느끼며 삐걱거리는 소파에 드러누워 버렸다.

  그렇게 얼마를 잤을까? 기영이 눈을 뜬 시간은 오후 6시였다. 3시에 집에 왔으니, 3시간을 잔 모양이었다. 그런데 앞 베란다의 물소리는 여전히 계속 들렸다. 무슨 빨래를 저렇게나 할까? 오늘은 다들 빨래하는 날인가 보네. 기영은 혀를 끌끌 차면서 일어났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생은 자정이 다 되어서야 들어올 것이다. 그러고 보니, 동생과 지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기중은 한 달 뒤면 군대에 들어간다. 기영은 서로 의지하며 지냈던 동생이 없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벌써 마음이 허전해졌다.  

  이른 저녁을 대충 챙겨 먹고, 기영은 컴퓨터 앞에서 자기소개서 작성에 매달렸다. 사실 자기소개서에 쓸만한 인생의 그 무언가도 없었다. 대학에 들어갔고, 군 복무를 무사히 마쳤다. 부모님은 불운하게 일찍 돌아가셨다. 그나마 남겨주신 재산으로 서울이라는 도시에 작은 아파트 한 칸이나마 남겨주신 것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이 도시에서 집이 있다는 것은 생존의 동아줄을 얻은 셈이나 마찬가지다. 기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쏴아쏴아..."

  밤 11시가 넘어서도 앞 베란다의 물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좀 이상한 일이었다. 물소리는 끊이지 않고 계속 들렸다. 무슨 집중호우 때 내려가는 빗물 소리 같았다.

  "아, 오늘도 피곤하네. 형, 별일 없지?"
  "왔냐? 근데, 앞 베란다에서 계속 물소리가 들린다. 가만있자, 내가 3시에 집에 왔거든. 그러니까 8시간째야. 도대체 뭔 일일까?"
  "뭐 한 집이 아니라 여러 집에서 쓸 수도 있지. 정 신경 쓰이면, 내일 관리사무소에 전화라도 해봐."
  "그래야겠네."

  기중은 화장실에 들어가서 씻고는, 곧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기중이 조그맣게 코 고는 소리를 내는 것을 보고, 기영은 그런 동생이 안쓰러워졌다. 얼마나 피곤하면, 저렇게 세찬 물소리가 들려도 잠에 곯아떨어질까 싶어서였다. 그런 기중과는 달리 기영은 물소리 때문에 좀처럼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았다. 낮잠을 자서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들여다보는 것도 진력이 났다. 담배라도 한 대 피우고 와야지. 기영은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서 현관문을 나섰다.

  기영은 아파트 분리수거대를 지나, 등나무 퍼걸러(pergola)로 향했다. 거기 벤치는 이 아파트 흡연자들의 안식처였다. 기영 또래의 젊은 남자 하나가 스마트폰으로 포커 게임을 하고 있었다. 기영은 자신이 포커 게임은 물론 고스톱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저런 것에 정신을 빼앗기는 일은 그저 인생의 낭비일 뿐이다. 기영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건, 수익률이 별로잖아."

  기영이 담배를 다 피웠을 무렵, 또 다른 20대 초반의 남자가 담배를 피워물고는 벤치에 털썩 앉았다. 저 친구는 택배 일을 한다. 언젠가 택배기사 옷을 입고 자신의 집에 택배를 놔두는 남자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의 체구는 작았다. 그럼에도 이런저런 무거운 짐들이 쌓여있는 카트를 능숙하게 끌고 다녔다. 기영은 먹고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의 피곤함에 절은 뒷모습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저 친구도 뭔 증권 투자나 코인이나 그런 것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래, 차라리 죽여라, 죽여!"

  기영이 담배를 피우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어디선가 어눌한 한국말 소리가 들렸다. 여자의 말소리 뒤로 둔탁한 소리도 났다. 뭔가를 내던지는 소리 같았다. 2층의 필리핀 여자일 것이다. 여자는 50대의 늙은 남편과 살고 있었는데, 그렇게 자주 싸웠다. 그 누구도 경찰에 신고하거나, 그 사람들에게 불평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이 동네에서 살아가는 모습일 뿐이었다.

  "쏴아쏴아..."

  시계는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물소리는 거침이 없이 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일은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해봐야겠네. 기영은 감기지도 않은 눈을 억지로 꼭 감고는 잠을 청했다.

  "아, 수고하십니다. 205동 입주민인데요. 좀 불편한 것이 있어서요. 앞 베란다에서 어제부터 계속 물소리가 들리거든요. 여기가 몇 라인이냐 하면..."
  "선생님, 거기 6라인이죠?"
  "네, 그렇습니다만 어떻게 그걸?"
  "어제부터 민원 전화가 계속 와서요."

  그렇구나. 이 물소리에 자신만 신경쓰는 건 아니었구나. 기영은 조금은 안심하는 마음이 되었다. 신경을 쓰는 주민이 여럿이라면 관리사무소에서도 어떻게든 해결해 주려 할 것이다.

  "그게요, 12층 입주민한테도 전화가 왔어요. 그럼, 13, 14, 15층, 이렇게 3집이 남잖아요. 가서 초인종을 눌러봤는데, 13층과 15층은 아닌 것으로 확인이 되었고요. 남은 집은 14층인데 문을 안 열어줍디다. 인기척은 들리는데."
  "참 이상한 일이네요. 대체 뭔 물을 그렇게나 써대는지."
  "아무튼 저희도 문제를 알고 있고, 해결하려고 하니까요. 좀만 기다려 주시지요."

  젊은 남자 기사의 대답을 듣고, 기영은 찜찜한 기분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 14층이란 집구석은 대체 뭘 하는 집구석인가? 앞 베란다의 물소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 들리고 있었다. 기영은 학교에 가려고 가방을 챙겼다. 나가기 전에 화장실에 들렀다. 변기의 물을 내리는데, 희멀건 뭔가가 다시 또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어제 새벽에 본 그 덩어리였다. 분명히 그것은 사람의 손가락이었다. 손톱의 색깔은 붉었다.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톱. 저것은 결코 사루비아 과자가 아니다. 기영은 그 손가락을 찍어놔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황급히 전화기를 찾으러 나갔다. 가방에 놔둔 전화기가 책 때문에 잘 빠지지 않아서, 힘을 주어서 억지로 빼냈다. 그리고 화장실로 다시 갔을 때, 그 손가락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이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기중에게 이 이야기를 다시 했다가는, 형이 피곤해서 헛것을 보았다고 말할 것이다. 

  오후 강의 내내, 기영의 마음은 불안과 공포로 옥죄어드는 것만 같았다. 어제부터 들리는 물소리와 사람의 손가락. 자신은 미치지 않았다. 물소리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주민도 들었다. 그렇다면 그 손가락은 무엇인가? 자신의 감각에 문제가 없는 것은 확실하다. 언젠가 신문 기사에서 읽은 살인사건 이야기가 떠올랐다. 살인자가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 사흘 밤낮 물을 썼다던가. 강의가 끝났는데도, 기영은 오금이 저려서 책상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었다.

  앞 베란다의 물소리는 다음날에도 이어졌다. 그러던 것이 사흘째 되던 날, 오후 4시가 좀 넘어서야 들리지 않았다. 기영은 그나마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물소리 때문에 정말이지 돌아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고 물어보니, 관리사무소에서 왔다고 했다.

  "아이고, 물소리 때문에 고생 많으셨죠?"
  "아, 이제는 안 들리더라고요. 사흘 동안 이게 뭔 일인지, 원."
  "오늘 14층에 다시 가봤더니, 거기 주인이 문을 열어주더구만요. 남자가 어디 목수 일을 다니나 본데, 먼 데 갔다가 와서 보니까 세탁기 물이 틀어져 있더랍니다. 그래서 그랬다고 하네요."
  "아무튼 해결되어서 다행입니다. 기사님도 수고하셨어요."
  "또 불편한 일 있으면 연락을 주시고요."

  어쨌든 물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것은 다행이다. 하지만 기영의 마음속 불안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화장실 변기의 괴이한 손가락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자신이 헛것을 보았다고 생각하면 나을 것 같았다. 기영은 두 눈을 가볍게 비벼보았다. 앞 베란다 앞으로 보이는 초등학교 운동장에서는 조그만 애들이 악다구니를 쓰면서 놀고 있었다. 잘 보이고, 잘 들린다. 이상한 것은 그 손가락이다.

  어쩌면 살인마가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곳. 자신과 동생은 그런 곳에 살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기영은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아파트가 갑자기 싫고 무서운 곳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하층민이 사는 이 변두리 외곽의 복도식 아파트에서는 살인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낡은 나무 창틀 사이로 초겨울의 바람이 미어지듯 들어왔다. 만약 집수리할 돈이 있다면 새시부터 했을 것이다. 실리콘이 경화된 낡은 알루미늄 새시는 추위와 더위를 막는 데에는 무용지물이었다. 겨울바람이 새시 틈새로 들어왔고, 그 바람이 나무 창틀을 흔드는 소리를 내었다.

  "방풍 비닐을 붙여야 할 때가 왔군."

  마치 번데기가 누에고치를 짓듯, 겨울에는 베란다 쪽의 문만 놔두고 모두 덕지덕지 방풍 비닐을 붙였다. 방풍 비닐로 바람은 막을 수 있겠지만, 아파트 곳곳에서 풍겨나오는 가난과 몰상식의 냄새는 막을 수 없었다. 일부 주민들은 베란다로 담배꽁초와 음식물 쓰레기를 내던졌다. 관리사무소에서 아무리 안내 방송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런 것을 참아내는 것도 고역인데, 이제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음습한 범죄가 일어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빨간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의 여자는, 아니 남자일 수도 있겠지, 아무튼 그 사람은 손가락을 잃은 채 어디에 있는 것일까? 살았을까, 죽었을까? 어쩌면 삶과 죽음 그 사이에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기영의 생각은 곰팡이의 포자처럼 끝 간 데 없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 아파트는 서울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준, 생명의 동아줄 같은 보금자리였다. 그러나 변기에서 보았던 그 손가락이 기영의 마음을 불안과 공포로 뒤흔들었다. 어쩌면 자신은 이 보잘것없는 아파트에서 살다가 생을 마감할지도 몰랐다. 다른 곳으로 이사한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장소의 이동일 뿐이지 계층의 이동은 될 수 없을 터였다. 별 볼 일 없는 대학의 국문과 졸업생으로 취업은 애당초 막혀있고, 무슨 일을 해서 먹고 살지도 막막했다. 민철이 이력서를 냈다는 출판사에 사실은 기영도 이력서를 진작에 냈었다. 하지만 기영에게는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취업 준비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답답한데, 잘린 손가락까지 보게 되니 기영의 스트레스는 더 심해지고 있었다.

  "어, 이제 물소리 안 나는데."

  밤늦게 들어온 기중이 앞 베란다를 쓱 들여다보더니, 그렇게 말했다.

  "그래. 낮에 관리사무소에서 다녀갔었다. 14층에서 외출하면서 모르고 세탁기 물을 틀어놨었대. 참 한심한 인간이야. 어떻게 물을 틀어놓고 모를 수가 있어?"
  "글쎄. 세상에는 별별 사람들이 다 있으니까. 형의 기준에서는 이상한 사람이겠지만, 그 사람은 그렇게 둔하게 사는 사람이겠지."

  기중은 식탁 위에 편의점에서 가져온 것들을 펼쳐놓았다. 망고 요구르트, 티라미수 케이크, 딸기 우유, 캔 커피. 모두 소비기한이 지나서 폐기해야 하는 식품들이었다.

  "오늘은 좀 괜찮은 것들이 나왔어. 형 배고플 때 먹어. 난 별로 생각 없어."

  착한 녀석. 기영은 씻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가는 기중의 마른 어깨를 보니 마음이 짠해졌다. 과연 자신이 형으로서 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아니, 어쩌면 동생에게 기대지 않고서 살아가는 것도 버거울지 모르는 일이다. 어떻게든 내 앞가림을 해야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앞으로의 생계에 대한 막막함이 기영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통장에는 부모님의 마지막 농지를 처분하면서 받은 돈 500만 원이 있을 뿐이었다. 취업이 늦어지고, 그 통장의 잔고가 마이너스로 전환된다면 과연 자신 앞에는 어떤 삶이 펼쳐질 것인가? 그런 생각에 이르자, 기영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언제나 그러하듯, 기영은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

  "담배도 끊어야지. 이것도 돈 드는 습관이니까."

  기영이 벤치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화살 문신의 몽골 남자가 어슬렁거리며 나왔다. 아, 또 저 인간이네. 기영은 기분 나쁜 껄끄러움을 느끼며 담배를 비벼서 껐다. 기영은 아파트 출입구 쪽으로 걸으면서, 집집마다 외부로 나와 있는 보일러 연통을 바라보았다. 과연 150 세대 가운데 이 초겨울 밤에 난방하는 집은 몇 집이나 될까? 난방을 틀게 되면, 보일러 연통으로 연기가 나오게 되어있다. 기영은 주의깊게 흰 연기가 나오는 연통을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그것이 끝이었다. 어쩌면 이른 저녁에 난방을 틀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기영이 가끔 생각날 때마다 그렇게 세어보아도 이 아파트 사람들은 난방을 거의 틀지 않았다. 기영의 집 보일러의 난방 설정 온도도 17도에 맞춰져 있었다. 기영은 하층민에게 절약이란 학습된 것이 아니라, 내재된 본능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집으로 들어왔다.

  동생은 이미 코를 골면서 자고 있었다. 기영은 식탁에 동생이 펼쳐놓은 간식들을 냉장고에 조심스럽게 넣어두었다. 생명의 양식이네. 그렇게 혼잣말하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그 생명의 양식도 동생이 군에 입대하게 되면 끝이었다. 화수분 같은 간식도, 저렇게 코 고는 소리도 없는 이 집은 얼마나 쓸쓸할 것인가? 기영은 새삼스럽게 부모님을 떠올리면서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쏴아쏴아..."

  기영이 물소리에 잠이 깬 것은 새벽 3시가 좀 넘어서였다. 아, 또 저 물소리야? 기영은 앞 베란다 문을 확 열어제꼈다. 물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젠장, 저 14층 놈은 분명 범죄자야. 살인을 저지른 게 틀림없어. 변기에서 내가 본 그 손가락도 저놈이 죽인 여자일 거야. 기영은 분노와 공포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쩌면 또 화장실의 변기에 그 손가락이 둥둥 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기영은 화장실의 불을 켰다. 다행히도 변기에는 물 이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기영이 화장실의 불을 끄고 돌아서려는데, 어디선가 비릿한 냄새가 났다. 언젠가 요리하다가 손을 크게 베였을 때 맡았던 피 비린내였다. 기영은 다시 화장실의 불을 켰다.

  "아니, 저건..."

  변기의 물이 붉은색으로 변하면서 손가락 하나가 천천히 맴돌았다. 기영은 곤하게 자고 있는 동생을 차마 깨울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저 변기의 레버를 눌러 물을 내렸다. 손가락이 사라졌고, 물도 맑아졌다. 기영은 화장실 문을 닫고는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컴퓨터를 켰다. 그래,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을 하자. 기영은 자신의 첫 단편을 쓸 생각이었다. 글쓰기가 자신의 꽉 막힌 인생의 탈출구가 될 것만 같았다.

  '역류(逆流)'

  깜박거리는 커서가 기영이 아직 가지 않은 길을 안내하는 화살표처럼 움직였다. 저 손가락에 대한 이야기를 써야지. 앞 베란다의 물소리는 계속해서 세차게 들렸다. 타닥타닥, 기영이 두들기는 자판의 소리가 차가운 집안의 공기 속에서 음표처럼 떠다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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