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류(逆流)


  "어, 이게 뭐지?"

  소변을 보고 화장실 변기의 물을 내리던 기영은 졸린 눈이 번쩍 뜨였다. 그것은 사람의 손가락이었다. 불어터진 살덩어리에 붙어있는 것은 분명 손톱이었다. 혹시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닌가 싶어서 기영은 눈을 비벼보았다. 변기의 물이 거의 채워지면서 그 이상한 덩어리도 천천히 움직였다.

  "기중아, 좀 일어나봐. 일어나 보라고. 변기에 사람 손가락이 있어!"
  "아, 무슨 일이야? 왜 자는 사람을 깨우고 그래? 뭔 손가락이야?"

  기중은 기영이 자신을 흔들어 깨우자,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대답했다. 짜증이 잔뜩 배어 있는 목소리였다.

  "좀 일어나 보래도. 저거 진짜 사람 손가락이라고."

  기중은 기영의 다그치는 목소리에 마지못해 일어났다. 마루 벽에 걸려있는 시계는 새벽 5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휴, 더 잘 수도 있은 걸 깨워서. 대체 뭔 일이야, 응?"
  "야, 이거 봐라. 이게 사람 손가락이잖아."

  기영은 동생의 손목을 잡아끌고는 화장실 변기 안쪽을 가리켰다.

  "아니, 저게 뭔 손가락이야? 저거 옛날 사루비아 과자 같네. 막대 과자 불어터진 거잖아. 나 원 참."
  "아니라고, 손톱이 달려있다고. 과자 아냐."
  "형, 안경 좀 쓰고 잘 봐봐. 형 안경 안 쓰면 나도 못 알아보잖아. 안경 좀 써보라고."
 
  기중의 말에 기영은 책상 위의 안경을 찾아서 썼다. 그러고 나서 변기 안을 보았다. 둥둥 떠다니는 덩어리는 조금씩 형체가 풀어지고 있었다. 기영이 보았던 손톱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 아파트가 하도 오래되었잖아. 40년 된 아파트 아냐. 그러니까 변기 물 내려가는 것도 시원찮고, 뭐 어디서 역류하니까 그러는 거겠지. 난 또 무슨 일인가 했네."

  하품을 늘어지게 하면서 기중은 다시 자신의 침대로 돌아갔다. 기영은 자신이 잘못 보았다는 사실에 조금은 멋쩍어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까 또렷하게 본 손톱의 잔상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정말로 헛것을 본 것인가? 차라리 헛것을 본 것이 다행인지도 몰랐다. 자신이 본 것이 진짜 사람의 손가락이라면, 그건 더 끔찍한 일이 아닌가? 후우, 기영은 새삼스럽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새벽의 기이한 일 때문이었는지, 그날 오후에 있었던 졸업시험에서 기영은 좀처럼 집중할 수 없었다. 어쨌든 졸업시험은 통과해야만 했다. 취업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국문과를 택한 자신의 스무 살이 그저 어리석게만 느껴졌다. 그 누구도 자신에게 국문과를 가라고 말하지 않았다. 시골의 부모님은 어디서 들었는지 경영학과를 가야 취직이 잘된다고 말했을 뿐이다. 하지만 기영은 국문과를 선택했다. 시와 소설, 그것을 읽으면서 느꼈던 마음의 울림이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은 좋다는 느낌만으로 직진하기에는 너무나 거칠었다.

  농사를 짓던 아버지는 기영이 대학을 들어가던 해에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다. 남편을 잃은 충격에다, 원래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던 어머니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이듬해, 요양병원에서 지내던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기영과 기중 형제는 그야말로 천애고아가 되고 말았다. 시골의 얼마 되지 않은 땅뙈기와 낡은 집을 팔아서, 지금의 16평 아파트에 들어온 것이 작년의 일이었다.


  서울시 변두리의 이 오래된 아파트 단지에서도 기영이 사는 복도식 아파트는 더 낡고 열악하게 보였다. 적은 평수에다, 월세가 그나마 싸서 이 아파트에는 하층민과 외국인 노동자 이주민들이 꽤 들어와서 살고 있었다. 그들의 국적도 다양했다. 중국, 몽골, 베트남, 필리핀, 캄보디아... 기영이 처음에 그들의 얼굴을 볼 때는 다 비슷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그들과 자주 마주칠수록 분명히 구분되는 특징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30대 중반의 몽골 남자는 기골이 장대했는데, 팔뚝에 과녁과 화살 문신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한국 남자와 결혼한 것으로 보이는 20대 초반의 필리핀 여자는 무척 뚱뚱했다. 여자는 늘 휴대전화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때로는 영어로, 때로는 본토의 언어로 시끄럽게 전화했다. 기영의 이웃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아니, 무슨 졸업시험을 사법고시 출제하듯이 내냐. 난 음운학 문제는 하나도 못 풀겠더라. 기영이 넌 어때? 잘 본 거야?"
  "나도 그렇지 뭐. 그래도 떨어지기야 하겠어? 그래도 1차 시험은 쉬웠으니까, 그거하고 이번 거하고 합산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긴, 교수들이 졸업생 인생 망칠 일 있냐. 졸업은 하게 해주겠지."

  동기인 민철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강의실 복도를 터덜터덜 걸어갔다.

  "이력서 낸 건 소식이 있어? 난 이번 주에 출판사 면접이 있는데, 모르겠다. 붙으면 정말 좋을 텐데."
  "온라인 서점에 내봤는데, 아직 소식이 없네. 또 부지런히 써서 뿌려봐야지."

  국문학을 전공해서 책 장사라도 하면 다행일 것 같다. 그런 마음으로 온라인 서점에 이력서를 내보았다. 하지만, 기영이 낸 세 군데 모두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책을 파는 것도 장사니까, 경영학 전공자가 더 낫겠지. 기영은 국문학보다 문예창작과가 자신에게 더 맞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국문과나 문창과나 굶어 죽기는 마찬가지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예의 그 씁쓸한 웃음을 짓게 되고 마는 것이었다.

  졸업시험을 치느라 진이 빠져서 그런지, 집으로 돌아오는 기영의 다리는 조금 후들거렸다.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아파트까지 걸어오는 그 10분 거리가 30분처럼 느껴졌다. 쓰러지지 않으려고 천천히 걷는 사람처럼, 기영은 걸음걸이에 정신을 집중했다. 집에 가서 좀 쉬면 낫겠지. 마침내 아파트 출입구에 도착했을 때, 몽골 남자가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았다. 남자는 늘 줄담배를 피워댔다. 담배꽁초는 아무데나 내던졌고, 가래침도 연신 내뱉었다. 기영은 그런 남자가 꼴 보기 싫어서, 좀 더 걸어서 다른 출입구로 들어가기로 했다. 엘리베이터는 15층에서 좀처럼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젠장, 엘리베이터 붙잡고 애새끼들이 장난이라도 치나. 기영은 자신의 집이 4층에 있다는 것에 그나마 안도했다. 다시 한번, 있는 힘을 쥐어짜 내어 계단을 올라갔다. 번호 키를 누르고 집에 들어오자, 그제야 조금은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쏴아쏴아..."

  기영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앞 베란다에서 물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원래 다용도실에 세탁기를 두고 쓰게 되어있지만, 일부 입주민은 자기들 편한대로 우수관이 있는 앞 베란다에다 세탁기를 두고 썼다. 역겨운 세제 냄새와 오수 때문에 관리사무소에서 세탁기 사용을 금지한다고 공고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세탁기 물 내려가는 소리인가 보네. 저 물소리를 수시로 듣는 것도 고역이었다. 어쨌든 좀 참으면 되겠지. 기영은 피곤을 느끼며 삐걱거리는 소파에 드러누워 버렸다.

  그렇게 얼마를 잤을까? 기영이 눈을 뜬 시간은 오후 6시였다. 3시에 집에 왔으니, 3시간을 잔 모양이었다. 그런데 앞 베란다의 물소리는 여전히 계속 들렸다. 무슨 빨래를 저렇게나 할까? 오늘은 다들 빨래하는 날인가 보네. 기영은 혀를 끌끌 차면서 일어났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생은 자정이 다 되어서야 들어올 것이다. 그러고 보니, 동생과 지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기중은 한 달 뒤면 군대에 들어간다. 기영은 서로 의지하며 지냈던 동생이 없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벌써 마음이 허전해졌다.  

  이른 저녁을 대충 챙겨 먹고, 기영은 컴퓨터 앞에서 자기소개서 작성에 매달렸다. 사실 자기소개서에 쓸만한 인생의 그 무언가도 없었다. 대학에 들어갔고, 군 복무를 무사히 마쳤다. 부모님은 불운하게 일찍 돌아가셨다. 그나마 남겨주신 재산으로 서울이라는 도시에 작은 아파트 한 칸이나마 남겨주신 것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이 도시에서 집이 있다는 것은 생존의 동아줄을 얻은 셈이나 마찬가지다. 기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쏴아쏴아..."

  밤 11시가 넘어서도 앞 베란다의 물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좀 이상한 일이었다. 물소리는 끊이지 않고 계속 들렸다. 무슨 집중호우 때 내려가는 빗물 소리 같았다.

  "아, 오늘도 피곤하네. 형, 별일 없지?"
  "왔냐? 근데, 앞 베란다에서 계속 물소리가 들린다. 가만있자, 내가 3시에 집에 왔거든. 그러니까 8시간째야. 도대체 뭔 일일까?"
  "뭐 한 집이 아니라 여러 집에서 쓸 수도 있지. 정 신경 쓰이면, 내일 관리사무소에 전화라도 해봐."
  "그래야겠네."

  기중은 화장실에 들어가서 씻고는, 곧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기중이 조그맣게 코 고는 소리를 내는 것을 보고, 기영은 그런 동생이 안쓰러워졌다. 얼마나 피곤하면, 저렇게 세찬 물소리가 들려도 잠에 곯아떨어질까 싶어서였다. 그런 기중과는 달리 기영은 물소리 때문에 좀처럼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았다. 낮잠을 자서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들여다보는 것도 진력이 났다. 담배라도 한 대 피우고 와야지. 기영은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서 현관문을 나섰다.

  기영은 아파트 분리수거대를 지나, 등나무 퍼걸러(pergola)로 향했다. 거기 벤치는 이 아파트 흡연자들의 안식처였다. 기영 또래의 젊은 남자 하나가 스마트폰으로 포커 게임을 하고 있었다. 기영은 자신이 포커 게임은 물론 고스톱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저런 것에 정신을 빼앗기는 일은 그저 인생의 낭비일 뿐이다. 기영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건, 수익률이 별로잖아."

  기영이 담배를 다 피웠을 무렵, 또 다른 20대 초반의 남자가 담배를 피워물고는 벤치에 털썩 앉았다. 저 친구는 택배 일을 한다. 언젠가 택배기사 옷을 입고 자신의 집에 택배를 놔두는 남자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의 체구는 작았다. 그럼에도 이런저런 무거운 짐들이 쌓여있는 카트를 능숙하게 끌고 다녔다. 기영은 먹고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의 피곤함에 절은 뒷모습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저 친구도 뭔 증권 투자나 코인이나 그런 것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래, 차라리 죽여라, 죽여!"

  기영이 담배를 피우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어디선가 어눌한 한국말 소리가 들렸다. 여자의 말소리 뒤로 둔탁한 소리도 났다. 뭔가를 내던지는 소리 같았다. 2층의 필리핀 여자일 것이다. 여자는 50대의 늙은 남편과 살고 있었는데, 그렇게 자주 싸웠다. 그 누구도 경찰에 신고하거나, 그 사람들에게 불평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이 동네에서 살아가는 모습일 뿐이었다.

  "쏴아쏴아..."

  시계는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물소리는 거침이 없이 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일은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해봐야겠네. 기영은 감기지도 않은 눈을 억지로 꼭 감고는 잠을 청했다.

  "아, 수고하십니다. 205동 입주민인데요. 좀 불편한 것이 있어서요. 앞 베란다에서 어제부터 계속 물소리가 들리거든요. 여기가 몇 라인이냐 하면..."
  "선생님, 거기 6라인이죠?"
  "네, 그렇습니다만 어떻게 그걸?"
  "어제부터 민원 전화가 계속 와서요."

  그렇구나. 이 물소리에 자신만 신경쓰는 건 아니었구나. 기영은 조금은 안심하는 마음이 되었다. 신경을 쓰는 주민이 여럿이라면 관리사무소에서도 어떻게든 해결해 주려 할 것이다.

  "그게요, 12층 입주민한테도 전화가 왔어요. 그럼, 13, 14, 15층, 이렇게 3집이 남잖아요. 가서 초인종을 눌러봤는데, 13층과 15층은 아닌 것으로 확인이 되었고요. 남은 집은 14층인데 문을 안 열어줍디다. 인기척은 들리는데."
  "참 이상한 일이네요. 대체 뭔 물을 그렇게나 써대는지."
  "아무튼 저희도 문제를 알고 있고, 해결하려고 하니까요. 좀만 기다려 주시지요."

  젊은 남자 기사의 대답을 듣고, 기영은 찜찜한 기분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 14층이란 집구석은 대체 뭘 하는 집구석인가? 앞 베란다의 물소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 들리고 있었다. 기영은 학교에 가려고 가방을 챙겼다. 나가기 전에 화장실에 들렀다. 변기의 물을 내리는데, 희멀건 뭔가가 다시 또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어제 새벽에 본 그 덩어리였다. 분명히 그것은 사람의 손가락이었다. 손톱의 색깔은 붉었다.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톱. 저것은 결코 사루비아 과자가 아니다. 기영은 그 손가락을 찍어놔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황급히 전화기를 찾으러 나갔다. 가방에 놔둔 전화기가 책 때문에 잘 빠지지 않아서, 힘을 주어서 억지로 빼냈다. 그리고 화장실로 다시 갔을 때, 그 손가락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이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기중에게 이 이야기를 다시 했다가는, 형이 피곤해서 헛것을 보았다고 말할 것이다. 

  오후 강의 내내, 기영의 마음은 불안과 공포로 옥죄어드는 것만 같았다. 어제부터 들리는 물소리와 사람의 손가락. 자신은 미치지 않았다. 물소리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주민도 들었다. 그렇다면 그 손가락은 무엇인가? 자신의 감각에 문제가 없는 것은 확실하다. 언젠가 신문 기사에서 읽은 살인사건 이야기가 떠올랐다. 살인자가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 사흘 밤낮 물을 썼다던가. 강의가 끝났는데도, 기영은 오금이 저려서 책상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었다.

  앞 베란다의 물소리는 다음날에도 이어졌다. 그러던 것이 사흘째 되던 날, 오후 4시가 좀 넘어서야 들리지 않았다. 기영은 그나마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물소리 때문에 정말이지 돌아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고 물어보니, 관리사무소에서 왔다고 했다.

  "아이고, 물소리 때문에 고생 많으셨죠?"
  "아, 이제는 안 들리더라고요. 사흘 동안 이게 뭔 일인지, 원."
  "오늘 14층에 다시 가봤더니, 거기 주인이 문을 열어주더구만요. 남자가 어디 목수 일을 다니나 본데, 먼 데 갔다가 와서 보니까 세탁기 물이 틀어져 있더랍니다. 그래서 그랬다고 하네요."
  "아무튼 해결되어서 다행입니다. 기사님도 수고하셨어요."
  "또 불편한 일 있으면 연락을 주시고요."

  어쨌든 물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것은 다행이다. 하지만 기영의 마음속 불안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화장실 변기의 괴이한 손가락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자신이 헛것을 보았다고 생각하면 나을 것 같았다. 기영은 두 눈을 가볍게 비벼보았다. 앞 베란다 앞으로 보이는 초등학교 운동장에서는 조그만 애들이 악다구니를 쓰면서 놀고 있었다. 잘 보이고, 잘 들린다. 이상한 것은 그 손가락이다.

  어쩌면 살인마가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곳. 자신과 동생은 그런 곳에 살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기영은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아파트가 갑자기 싫고 무서운 곳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하층민이 사는 이 변두리 외곽의 복도식 아파트에서는 살인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낡은 나무 창틀 사이로 초겨울의 바람이 미어지듯 들어왔다. 만약 집수리할 돈이 있다면 새시부터 했을 것이다. 실리콘이 경화된 낡은 알루미늄 새시는 추위와 더위를 막는 데에는 무용지물이었다. 겨울바람이 새시 틈새로 들어왔고, 그 바람이 나무 창틀을 흔드는 소리를 내었다.

  "방풍 비닐을 붙여야 할 때가 왔군."

  마치 번데기가 누에고치를 짓듯, 겨울에는 베란다 쪽의 문만 놔두고 모두 덕지덕지 방풍 비닐을 붙였다. 방풍 비닐로 바람은 막을 수 있겠지만, 아파트 곳곳에서 풍겨나오는 가난과 몰상식의 냄새는 막을 수 없었다. 일부 주민들은 베란다로 담배꽁초와 음식물 쓰레기를 내던졌다. 관리사무소에서 아무리 안내 방송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런 것을 참아내는 것도 고역인데, 이제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음습한 범죄가 일어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빨간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의 여자는, 아니 남자일 수도 있겠지, 아무튼 그 사람은 손가락을 잃은 채 어디에 있는 것일까? 살았을까, 죽었을까? 어쩌면 삶과 죽음 그 사이에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기영의 생각은 곰팡이의 포자처럼 끝 간 데 없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 아파트는 서울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준, 생명의 동아줄 같은 보금자리였다. 그러나 변기에서 보았던 그 손가락이 기영의 마음을 불안과 공포로 뒤흔들었다. 어쩌면 자신은 이 보잘것없는 아파트에서 살다가 생을 마감할지도 몰랐다. 다른 곳으로 이사한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장소의 이동일 뿐이지 계층의 이동은 될 수 없을 터였다. 별 볼 일 없는 대학의 국문과 졸업생으로 취업은 애당초 막혀있고, 무슨 일을 해서 먹고 살지도 막막했다. 민철이 이력서를 냈다는 출판사에 사실은 기영도 이력서를 진작에 냈었다. 하지만 기영에게는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취업 준비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답답한데, 잘린 손가락까지 보게 되니 기영의 스트레스는 더 심해지고 있었다.

  "어, 이제 물소리 안 나는데."

  밤늦게 들어온 기중이 앞 베란다를 쓱 들여다보더니, 그렇게 말했다.

  "그래. 낮에 관리사무소에서 다녀갔었다. 14층에서 외출하면서 모르고 세탁기 물을 틀어놨었대. 참 한심한 인간이야. 어떻게 물을 틀어놓고 모를 수가 있어?"
  "글쎄. 세상에는 별별 사람들이 다 있으니까. 형의 기준에서는 이상한 사람이겠지만, 그 사람은 그렇게 둔하게 사는 사람이겠지."

  기중은 식탁 위에 편의점에서 가져온 것들을 펼쳐놓았다. 망고 요구르트, 티라미수 케이크, 딸기 우유, 캔 커피. 모두 소비기한이 지나서 폐기해야 하는 식품들이었다.

  "오늘은 좀 괜찮은 것들이 나왔어. 형 배고플 때 먹어. 난 별로 생각 없어."

  착한 녀석. 기영은 씻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가는 기중의 마른 어깨를 보니 마음이 짠해졌다. 과연 자신이 형으로서 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아니, 어쩌면 동생에게 기대지 않고서 살아가는 것도 버거울지 모르는 일이다. 어떻게든 내 앞가림을 해야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앞으로의 생계에 대한 막막함이 기영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통장에는 부모님의 마지막 농지를 처분하면서 받은 돈 500만 원이 있을 뿐이었다. 취업이 늦어지고, 그 통장의 잔고가 마이너스로 전환된다면 과연 자신 앞에는 어떤 삶이 펼쳐질 것인가? 그런 생각에 이르자, 기영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언제나 그러하듯, 기영은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

  "담배도 끊어야지. 이것도 돈 드는 습관이니까."

  기영이 벤치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화살 문신의 몽골 남자가 어슬렁거리며 나왔다. 아, 또 저 인간이네. 기영은 기분 나쁜 껄끄러움을 느끼며 담배를 비벼서 껐다. 기영은 아파트 출입구 쪽으로 걸으면서, 집집마다 외부로 나와 있는 보일러 연통을 바라보았다. 과연 150 세대 가운데 이 초겨울 밤에 난방하는 집은 몇 집이나 될까? 난방을 틀게 되면, 보일러 연통으로 연기가 나오게 되어있다. 기영은 주의깊게 흰 연기가 나오는 연통을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그것이 끝이었다. 어쩌면 이른 저녁에 난방을 틀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기영이 가끔 생각날 때마다 그렇게 세어보아도 이 아파트 사람들은 난방을 거의 틀지 않았다. 기영의 집 보일러의 난방 설정 온도도 17도에 맞춰져 있었다. 기영은 하층민에게 절약이란 학습된 것이 아니라, 내재된 본능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집으로 들어왔다.

  동생은 이미 코를 골면서 자고 있었다. 기영은 식탁에 동생이 펼쳐놓은 간식들을 냉장고에 조심스럽게 넣어두었다. 생명의 양식이네. 그렇게 혼잣말하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그 생명의 양식도 동생이 군에 입대하게 되면 끝이었다. 화수분 같은 간식도, 저렇게 코 고는 소리도 없는 이 집은 얼마나 쓸쓸할 것인가? 기영은 새삼스럽게 부모님을 떠올리면서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쏴아쏴아..."

  기영이 물소리에 잠이 깬 것은 새벽 3시가 좀 넘어서였다. 아, 또 저 물소리야? 기영은 앞 베란다 문을 확 열어제꼈다. 물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젠장, 저 14층 놈은 분명 범죄자야. 살인을 저지른 게 틀림없어. 변기에서 내가 본 그 손가락도 저놈이 죽인 여자일 거야. 기영은 분노와 공포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쩌면 또 화장실의 변기에 그 손가락이 둥둥 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기영은 화장실의 불을 켰다. 다행히도 변기에는 물 이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기영이 화장실의 불을 끄고 돌아서려는데, 어디선가 비릿한 냄새가 났다. 언젠가 요리하다가 손을 크게 베였을 때 맡았던 피 비린내였다. 기영은 다시 화장실의 불을 켰다.

  "아니, 저건..."

  변기의 물이 붉은색으로 변하면서 손가락 하나가 천천히 맴돌았다. 기영은 곤하게 자고 있는 동생을 차마 깨울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저 변기의 레버를 눌러 물을 내렸다. 손가락이 사라졌고, 물도 맑아졌다. 기영은 화장실 문을 닫고는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컴퓨터를 켰다. 그래,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을 하자. 기영은 자신의 첫 단편을 쓸 생각이었다. 글쓰기가 자신의 꽉 막힌 인생의 탈출구가 될 것만 같았다.

  '역류(逆流)'

  깜박거리는 커서가 기영이 아직 가지 않은 길을 안내하는 화살표처럼 움직였다. 저 손가락에 대한 이야기를 써야지. 앞 베란다의 물소리는 계속해서 세차게 들렸다. 타닥타닥, 기영이 두들기는 자판의 소리가 차가운 집안의 공기 속에서 음표처럼 떠다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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