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당(慧火堂) 보살의 그날그날 


  "여긴, 예약을 안 하고 와도 볼 수 있나요?"
  "아이구, 그럼요. 어서 들어와요."

  혜화당 보살은 반갑게 손님을 맞이했다. 손님은 20대 후반의 여자였다. 어깨까지 찰랑거리는 생머리를 가볍게 쓸어 넘기면서, 손님이 신당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여기는 점집 골목 제일 끝자락인데,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요?"
  "대문 앞에 신선 같은 할아버지 그림이 붙어있더라고요. 그냥 그 할아버지가 친근해 보여서요."
  "아, 우리 도사 할아버지."
  "도사요?"
 
  혜화당은 눈을 동그랗게 뜬 아가씨의 반응이 재밌어서,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무슨 이상한 도인 그런거 아니야. 그림 속의 도사 할아버지는 무당한테 점괘 일러주는 신령님."
  "네, 그렇군요."
  "바깥 날씨가 좀 쌀쌀하지? 따뜻한 대추차나 한잔합시다. 대추차, 괜찮아요?"
  "주시면 고맙죠."

  혜화당은 엊그제 생강과 함께 썰어서 담근 대추차를 티스푼으로 덜어내었다. 알싸한 생강의 향이 풍겼다.

  "자, 대추차 대령이요."
  "아휴, 잘 마시겠습니다."

  혜화당은 대추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아가씨의 안색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결혼 운이 들어와 있군. 아마 남자 이야기를 하려고 왔을 거야.

  "아가씨가 오늘 내 첫손님이야."
  "아, 그런가요? 오후 4시인데, 아직 아무도 안 온 거예요?"
  "응. 그런 날도 있지. 그래도 나, 밥은 안 굶고 살아. 다 신령님들이 보살펴 주니까."
  "그렇군요."

  차를 마시는 동안 아가씨는 거실의 이곳저곳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거실은 뭐 그냥 여느 가정집 같지. 점사는 신당에서 보니까, 차 다 마시면 얘기해요. 여기 히터도 있으니까, 몸도 좀 녹이고."
  "네."

  혜화당은 거실 유리창으로 보이는 바깥을 가만히 응시했다. 잔뜩 흐린 하늘이 꾸물거리는 것이 뭐라도 내릴 기색이었다.

  "눈이 오려나, 비가 오려나... 그런데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프지?"

  혜화당은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두통의 기운에 가볍게 머리를 흔들어 보았다. 이건 진짜 머리가 아픈 두통이 아니라, 신이 오실 때 느껴지는 기운이었다.

  "아가씨 머리가 복잡한가 보네. 이야기나 좀 들어볼까?"
 
  아가씨 손님은 대답 대신에 말없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 날 따라 들어와요. 편하게 그냥 마음속 이야기를 하면 된다우."

  혜화당은 전안(殿內, 신령들을 모신 제단)에 공손히 손을 모으고 짧게 기도를 올렸다. 도사 할아버지, 오늘도 영명한 점괘 들려주시옵소서.

  "아가씨, 생년월일 말해봐요. 태어난 시각도 말해주면 좋지만, 잘 모르겠으면 할 수 없고."

  손님은 갈색 핸드백에서 작게 접은 메모지 한 장을 점사를 보는 찻상에 놓았다. 혜화당은 펼쳐진 만세력 책을 짚어가며, 아가씨의 사주를 종이에다 풀어나갔다.

  "그래, 뭐가 제일 궁금해요? 아가씨가 물어보면 내 대답을 해주지."
  "그게, 그러니까..."

  아가씨는 조그마한 입을 오물거리더니, 뭔가를 말하려다가 이내 침묵을 지켰다.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플까? 지금 내 머리가 막 지끈지끈 아파. 아가씨도 머리가 아프지, 응?"
  "네. 제가 만나는 사람이 두 사람 있는데요. 결혼하려면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해서..."
  "그래서, 내 머리가 이렇게 아프구나. 아휴, 아주 그냥 답답해 죽겠어."

  아가씨는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자그맣게 웃는 소리를 내었다.

  "한 사람은 외모는 뭐 그냥저냥 그렇고, 경제적으로는 무척 안정되어 있어요. 근데 좀 말이 안 통한다고 해야 하나? 그런 게 있고요. 또 다른 한 사람은 외모는 멀끔하고 좋은데, 가진 것은 별로 없고 그래요. 그런데 그 사람하고 있으면 말을 많이 하게 되더라구요. 그러니까 마음이 맞는 거죠. 다만, 좀 그 사람의 환경 자체가 앞이 안 보이는 그런 게 있어서..."
  "그렇구나. 한 사람이 아가씨가 원하는 대로 다 가졌으면 좋을 텐데, 그게 아니라서. 그래서, 머리가 좀 많이 아픈 거지."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누굴 선택하면 좋을지, 저도 마음이 오락가락해서요."

  혜화당은 쌀을 상에 가볍게 뿌려놓고, 이리저리 헤아려 보았다. 쌀점은 혜화당이 가장 익숙하게 하는 점이었다. 

  "근데 뭐 내가 할 말은 별로 없을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말씀인지..."
  "이미 아가씨 마음에 결정이 내려졌다는 거야."
  "그럴 리가요."
  "아니, 솔직하게 좀 자신을 들여다봐요."

  약간은 얼굴이 붉어진 아가씨는 무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더니 이내 말을 이어갔다.

  "네, 어쩌면 마음이 기울어진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그 도사 할아버지가 뭐라 말씀하시는지 듣고 싶어요."
  "할아버지도 그냥 웃기만 하시는데. 내가 암만 무당이어도, 신령님이 말씀을 안 하시는데 어쩌겠어? 그런데 내가 둘 중에 누굴 택하라고 하면 할 거야? 그것도 아닌 것 같아서."

  혜화당은 아가씨의 당혹스러운 모습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돈은 많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남자. 그리고 돈은 없지만 말이 통하는 남자. 과연 자신이라면 둘 중 누굴 택할 것인가? 돈이 인생의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걸 무시할 수도 없다. 서로 이야기가 좀 통한다고, 사글셋방에서 신혼살림 차리는 것을 저 아가씨가 기꺼이 택할까? 두 남자 가운데 누가 더 나은가? 혜화당 머릿속의 도사 할아버지는 부채를 뱅글뱅글 돌리면서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아휴, 우리 할아버지도 참. 손님 앞에서 내 얼굴이나 좀 세워주지. 그래도 오늘 첫손님인데, 내가 할 말이 없어가지고. 할아버지, 말씀 좀 하세요.'

  혜화당은 삐긋이 웃고 있는 도사 할아버지의 부채를 탁, 낚아채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럴 때 수완이 좋은 무당은 대충 둘러대기라도 할 텐데, 난 그런 걸 못 해."
  "아니에요. 사실, 여기 오기 전에 제 마음이 이미 정해진 것도 같고..."
  "무당이 신령님 말씀을 전하기는 하지만, 모든 걸 다 알지는 못한다우. 손님이 앞일을 물어보면 열 개 가운데 한두 개 맞을까 말까 하지. 그런데 지나간 일은 거진 다 맞추지."
  "보살님은 참 솔직하시네요."
  "응, 내가 그런 편이지. 이 나이 되고 보니, 뭘 억지로 꾸며내서 말하고 그런 건 못 하겠어. 아무래도 신령님들이 제일 무섭지, 뭐. 똑바로 그분들 말씀 전해야 하니까."
  "도사 할아버지 말씀을 듣고 싶었는데, 못 듣고 가니 아쉽기는 하네요."

  아가씨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그러게. 내가 복채를 안 받을 수는 없고. 바로 갈 건 아니지? 커피 시켜줄 테니까, 커피 마시고 가."
  "커피요?"
  "응, 그 있잖아. 다방 커피. 난 하루 점사 다 보고 나면, 근처 다방에서 커피 시켜서 먹거든."
  "아, 네..."

  아쉬워하던 아가씨의 얼굴이 '다방 커피'라는 말을 듣더니, 조금은 펴진 것처럼 보였다. 혜화당은 휴대폰으로 루비 다방에 전화를 걸었다.

  "응, 늘 시키는 거. 오늘은 손님이 있으니까, 한 잔 더 가져오고."

  혜화당은 그렇게 전화를 끊고는, 아가씨에게 거실로 나가자고 했다. 어느새 날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이렇게 낮이 짧아진 것을 보니, 동지가 얼마 남지 않았구나. 혜화당은 동지 기도를 어디로 가서 할 것인지 잠시 생각했다. 작년에 갔던 강화도 산으로 기도를 갈까? 거기 산은 무척 가팔랐지. 이제는 나이도 먹고 체력도 달려서, 그 가파른 산을 다시 오른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힘에 부칠 것 같았다.

  "보살님, 저 왔어요."
  "아이구, 총알 배송이네. 어찌 이리 빨리 와?"
  "오늘 장사가 영 별로여서. 그래서 보살님 전화 기다렸죠."

  루비 다방의 마담이 생글거리며 거실로 들어왔다. 그러더니 능숙하게 보라색 꽃무늬 보자기를 풀고, 붉은 보온병의 뚜껑을 열었다. 달달한 커피 향이 솔솔 풍겼다.

  "아가씨, 다방 커피가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 그래도 어쨌든 한번 마셔봐. 여기 마담이 커피 잘 타거든."
  "네. 고맙습니다."

  마담은 아가씨 쪽으로 커피잔을 천천히 밀어놓았다.

  "보살님, 오늘은 좀 어땠어요?"
  "오늘? 여기 아가씨 손님 하나야."
  "아이구, 세상에. 보살님도 오늘 영업이 파이구먼요. 호호호..."
  "그래, 파이다, 파이여. 그래도 어제가 좀 괜찮았으니까. 자, 오늘 입금할 돈 35만 원."
 
  혜화당은 마담에게 돈과 은행 카드를 건넸다. 그걸 보더니, 아가씨가 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저기, 은행에 입금하는 일을 시키세요?"
  "응. 돈 입금도 시키고, 또 빼 올 때도 시키고."
  "네? 아니, 그걸 직접 안 하시고 왜..."
  "아, 귀찮아서. 여기 마담이 심부름 잘해주거든. 난 신령님 심부름해야 하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혜화당은 허허롭게 웃었다.

  "근데, 이분이 보살님 돈 가지고 어디 먼데 가버리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래요?"

  아가씨는 이제는 좀 친해진 느낌이 들었는지, 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 다방, 전에 있던 마담 애가 그렇게 내 돈 천만 원 가지고 날랐지."
  "네? 그런 일이 있었어요?"
  "응, 그렇대두. 하하..."

  혜화당의 웃음소리에 아가씨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 마담 언니는 믿으세요?"
  "믿으니까, 돈을 맡기는 거지. 얘 얼굴 좀 봐봐. 어디 돈 가지고 튈 애처럼 보이나."
  "우리 보살님이 그렇게 날 믿으신다니까요. 호호호..."

  아가씨는 약간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혜화당과 마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무당이라고 다 자기 앞일을 알지는 못해. 신령님이 하나하나 다 알려주시는 것도 아니고. 내가 이렇게 말하면, 우리 아가씨가 좀 속았다, 이렇게 생각하려나?"
  "아니요. 그냥 재밌는데요. 보살님이 솔직하신 것도 좋구요."
  "아가씨, 돈 많은 그 남자하고 결혼할 거지?"
  "네, 아마 그렇게 될 거 같아요."
  "내가 그래서 말을 안 했어."
  "알고 계셨군요."

  아가씨가 이제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보살님 이름이 왜 혜화당이에요? 혹시 서울 혜화동과 무슨 인연이라도..."
  "인연은 무슨? 난 인천에서 나고 자란 여기 토박이인걸. 내 이름 혜화는 지혜의 불을 밝힌다는 법명(法名)에서 따왔지. 나한테 오는 손님들, 마음의 짐이나 좀 덜어주고 싶은 마음에서."

  아가씨는 혜화당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 그 사람하고 잘 살아갈 수 있을까요?"
  "살아보고, 힘들면 또 와서 물어보면 되지. 다들 그렇게 해."
  "네. 그렇게 해야겠네요."

  혜화당은 도사 할아버지의 부채가 부드럽게 팔랑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어느새 밖에는 초겨울 저녁의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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