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입학식 시즌이다. 내가 자주 가는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어느 젊은 아빠가 쓴 아들의 유치원 입학식 이야기를 읽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발달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담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릿한 가슴저림이 느껴지는 글이었다. 글 속에서 유독 나의 눈에 밟히는 문장이 하나 있었다. 젊은 아빠는 아이가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 자신의 마음이 '바다 같았다'고 썼다. 평온하다가도 세찬 바람이 불어서 파도가 일렁이고, 다시 또 잦아들고 그런 일상의 반복이었다고 했다.

  다음달 4월에는 어머니의 신경 인지 검사가 예약되어 있다. 내 모친이 치매 진단을 받은지도 벌써 1년이 되었다. 1년 만에 다시 받는 신경 인지 검사인 셈이다. 주치의는 검사 결과에 따라 차후 치료 방향을 결정할 것이다. 지난 1년 동안 나 나름대로 어머니를 보살피느라 애를 썼다. 무엇보다 치매의 진행 속도를 늦추기 위해서 인지 학습에 시간을 많이 썼다. 동생은 무슨 수험서 사나르듯 어머니가 공부할 교재를 사서 나한테 보냈다. 그렇게 산 책들을 가지고 거의 매일 어머니와 함께 공부를 했다. 다행히 어머니는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분이라 열심히 잘 해주셨다.

  어머니의 인지 학습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나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걸 열심히 하면 어머니의 상태가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는 그런 기대가 헛된 것임을 깨달았다. 어머니를 가장 괴롭히는 단기 기억력의 문제는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어머니의 언어 구사력과 수리 계산과 같은 인지 능력은 온전하다. 지난 1년 동안 해온 어머니의 공부는 그것을 지켜내기 위한 치열한 여정이기도 했다.

  매일 어머니가 하는 인지 학습 가운데에는 조각 맞추기 퍼즐도 있다. 24개의 조각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그림을 맞추어 내는 것이다. 두 개의 그림을 가지고 몇 달째 맞추기를 하고 있지만 어머니에게는 매번 낯선 그림처럼 느껴지는 모양이다. 어머니가 맞추어 놓은 그림의 몇 조각은 제자리가 아닌 곳에 끼워져 있다. 어느 날은 틀린 곳 없이 퍼즐이 완성되는 날도 있다. 그러면 내 마음도 뿌듯해진다. 가끔은 어머니가 아주 쉬운 계산 문제를 틀리실 때가 있다. 엄마, 이렇게 쉬운 것도 못맞추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럴 땐 속상하고 답답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큰 목소리가 나온다.

  나는 문득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본다. 국민학교 시절, 그때는 학원이라고 해봐야 피아노와 태권도, 주산, 웅변 학원이 전부였다. 아이들의 성적은 부모의 닥달과 회초리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가 많았다. 나의 모친은 자식들의 공부에 있어서는 참으로 열렬하고 극성스러운 면이 있었다. 매일 숙제를 점검했고, 시험 준비로 철저히 공부를 시켰다. 나는 그렇게 혹독하게 공부를 시키는 어머니가 때로는 싫고 무섭기까지 했다. 4학년 때였던가, 시험 성적이 안좋게 나왔던 적이 있었다. 나는 어머니가 화를 낼까봐 걱정이 된 나머지 가출을 할 생각을 했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같은 반 아이들 몇몇이 동네 외곽의 버스 정류장에서 얼쩡거렸던 기억이 난다. 물론 나는 어두워지기 전에 집에 들어왔다.

  이제 나의 모친은 날이 갈수록 흐릿해지는 기억을 붙잡고 살아가신다. 어머니는 당신이 그토록 열심히 공부시켰던 자식으로부터 매일 알뜰히 지식을 나누어 받고 있다. 그렇게 보면 내 어머니는 참으로 복이 많으신 분이다. 이런 어머니와 지난 1년을 보내는 동안 나의 마음도 '바다'와 같았다. 그 바다의 파도는 잔잔해졌다가 요동치기를 반복했다. 어머니의 공부가 잘 되는 날에는 기쁘다가도, 그렇지 않은 날에는 걱정이 앞선다.

  특별한 아들의 유치원 입학을 축하하는 어느 아빠의 글에 많은 이들이 응원의 댓글을 달았다. 나는 그 젊은 아빠의 마음 속에 자리한 '바다'가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알 듯도 했다. 아마도 그는 앞으로도 오랜 시간 동안 그 바다 위를 항해할 터였다. 나는 어머니의 나이를 헤아려 본다. 내가 어머니와 함께 할 시간이 얼마나 될까? 아직은 남아있는 그 시간들은 지난 1년 보다 더 힘들고 괴로울지도 모른다. 나에게 그것은 내 마음 속 바다를 들여다 보아야 하는 여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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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1. 뇌미인 트레이닝 베이직 1권, 2권/ 펴낸곳 뇌미인

  삼성병원 신경과 의료진이 협업으로 만들어낸 책. 베이직 1권과 2권은 환자들이 처음 학습하기에는 괜찮은 난이도를 보여준다. 하지만 3권과 4권은 구성도 다소 복잡하고 어려운 부분이 있다. 각각의 챕터는 하루에 공부할 수 있는 분량만큼 잘 나누어져 있다. 중간 중간 그림 그리기 코너도 들어있다.

2. 시니어 인지활동북 1, 2, 3권/ 펴낸곳 넥스웍

  일러스트와 구성이 매우 깔끔하고 가독성이 높다. 교재의 난이도가 매우 쉬운 편이라 처음 접하는 인지 학습서로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3. 추억 색칠하기+ 인지 워크북/ 펴낸곳 한국 실버 교육협회

  치매 환자에게 그림 그리기는 여러 이점이 있다. 집중력을 길러주고, 손근육을 사용하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이 책은 노인 세대의 과거 회상 능력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도안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내기, 동네 구멍 가게, 버스 차장, 통행 금지, 엿장수 등과 같은 소재가 등장한다. 그림과 함께 떠올린 기억을 글로 쓸 수 있는 여백도 들어있다. 처음 시작하는 그림 그리기 책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4. 달 숲 정원사 컬러링 북/ 펴낸곳 우리 학교

  색칠 공부에 적합한 책. 귀여운 토끼와 곰의 우정이 아기자기하게 펼쳐지는 책이다. 다소 복잡한 일러스트로 구성된 페이지가 있기는 하다. 그림을 그리면서 따뜻한 감성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장점.


5. 오려도 오려도 끝판왕 진짜! 마트 오리기/ 펴낸곳 한빛에듀
6. 진짜 진짜 쉬운 첫 오리기 100/ 펴낸곳 길벗 스쿨   


  노인 인지 학습에서 손의 사용은 매우 중요하다. 색칠하기 학습과 함께 오리기 학습도 병행하는 것이 좋다.

  유아를 위한 오리기 책인데 노인들을 위한 오리기 학습에도 적합하다. 구성이 매우 단순해서 처음 오리기를 시작하는 노인 학습자들도 쉽게 할 수 있다.

7. 100가지 숨은 미로 찾기/ 펴낸곳 노란 우산

  초등학생을 위한 미로찾기 책. 미로 찾기는 추리력과 사고력을 향상시킨다. 보통 인지 학습 교재에 맛보기식으로 끼워져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은 난이도도 평이하고, 아동의 수준에 맞추어 재미있는 일러스트들이 배치되어 있다.  

8. 영국 아이들의 집중력 미로/ 펴낸곳 키즈히어로

  미로 찾기 책. 초급에서 중급에 이르는 난이도를 가지고 있다.

9. 숫자 따라 조각조각 스티커 모자이크/ 펴낸곳 기탄 출판

  이 책도 역시 아동을 위한 책으로 나왔다. 다양한 숫자가 그려진 일러스트에 해당 번호 스티커를 붙이게끔 구성되어 있다. 노인 환자들에게는 손근육을 쓰면서 집중력도 높일 수 있는 교재로 적합하다. 구성에 다소 난도가 있는 편이라서 학습을 도와주는 사람이 스티커를 떼어주면서 함께 하는 것을 추천한다.

10. 가로세로 낱말 퀴즈/ 펴낸곳 루비 박스

  어휘력 학습에 도움이 되는 교재. 난이도는 초급에서 중급을 아우른다. 매일 한 두 페이지 정도 부담없이 학습하기에 좋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Play 스토어 검색)

1. Oya

  다양한 그림 퍼즐의 짝을 찾아내는 게임이다. 이 앱은 '알츠하이머 게임'으로 아예 이름이 붙여져 있다. 구성도 매우 단순하고 쉽다. 그리고 이 앱의 가장 큰 장점은 그 어떤 광고도 없다. 개발자가 순수한 공익의 목적을 가지고 만든 게임인듯 하다. 늘 하면서 개발자의 행운을 바라게 되는 게임.

2. Brainilis

  인지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여러 게임들로 구성되어 있다. 각 게임에는 시간 제한이 있는데, 젠모드를 선택하면 그런 부담을 갖지 않고 편안하게 게임을 할 수 있다. 중간 중간 광고가 들어가는데, 그리 신경에 거슬릴 정도는 아니다.

3. Spot the hidden difference

  틀린 그림 찾기 앱. 2개의 그림을 비교해가면서 다른 부분을 찾아내는 게임이다. 집중력을 키우는 데에 좋다. 이런 종류의 애플리케이션이 많으므로, 여러 가지를 써보고 학습자가 좋아할만한 앱으로 설치하면 된다. 이런 앱의 단점은 매 게임마다 집요하게 광고가 붙는다는 점이다.

4. 가로세로 상식달인2

  십자말 풀이 앱. 시사 상식, 일반 상식, 고사성어에 이르는 다채로운 어휘들을 학습할 수 있다. 


유튜브 동영상

1. 노원구 치매 안심센터에서 만든 여러 동영상들

  치매 예방을 위한 손가락 운동과 체조 동영상은 노인 학습자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만들어졌다.

2. 치매 똑똑

  신경과 의사가 치매에 대해 설명해주는 유튜브 채널. 치매 환자를 대하는 법, 치매에 관한 여러 의학적 지식을 쉽게 풀이해서 들려준다.

3. 오래전 가요 히트곡들 부르기

  노래 부르기는 지난 시절을 회상해보고, 편안한 감정을 갖는 데에 도움이 된다. 따라부르기 쉽게 큰 가사 자막이 있는 동영상을 택한다. 선곡은 노래를 부르는 이의 의견을 최대한으로 존중한다. 되도록이면 슬픈 곡은 피한다. 밝고 행복한 노래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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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해외 언론사에 실린 사진 한 장을 보게 되었다. 그 사진은 칠레 아타카마 사막의 풍경이었다. 그런데 보통 우리의 눈에 익숙한 사막의 모습이 아니었다. 사막에는 이상한 덩어리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바로 옷의 산이었다. 선진국의 의류 쓰레기를 폐기물 처리업자가 남미 국가에 싼값에 떠넘긴 결과였다. 그 옷들 가운데에는 가격표도 떼지 않은 새옷들도 많다고 했다. 'Fast Fashion', 이는 중저가의 의류 생산 업체들이 엄청난 물량 공세로 최신 유행을 주도하는 것을 일컫는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에게 옷은 대충 입고 버리는 물건이 된 듯하다.

  내가 집에서 입는 티셔츠 소매가 헤진지 좀 되었다. 그 옷을 산지 4년 되었나, 그 정도면 나름대로 잘 입었다 싶기도 했다. 새걸로 하나 사야겠네 생각을 하기는 했다. 비록 옷이 늘어지고 소매 끝이 떨어졌어도 그 옷은 참 편했다. 그래서 쉽게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가 않았다. 누가 보면 이런 내 모습을 궁상맞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작 나는 그게 아무렇지도 않다. 사실 그런 마음가짐을 갖게 된 것은 어떤 다큐를 보고 나서이다.

  KBS에서 방영한 다큐 '세상 끝의 집(2019)'에는 카르투시오 봉쇄 수도원의 일상이 담겨있다. 그곳의 수사들은 세상과 단절되어 자신의 삶을 오직 기도와 노동만으로 채워간다. 다큐를 보고 있는데, 수사님이 신고 있는 구멍난 양말이 눈에 띄었다. 극도로 절제된 청빈의 삶, 수도자들의 표정과 말은 온화하고 평화로웠다. 아마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가지고 있는 물건들은 좀 더 오래 쓰려고 했고, 새 물건은 반드시 필요한 때만 샀다. 쓰던 물건을 버릴 때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는 습관이 생겼다.   

  궁상(窮狀)과 청빈(淸貧)의 차이는 결국은 마음가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낡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부끄럽고 한심하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궁상이 되겠지. 하지만 옷의 가치를 단정하고 깨끗한 것에 둔다면 그 사람에게 비싼 옷은 그리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구멍난 양말을 신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걸림이 없이 온전한 삶을 살아내는 수사의 모습이 그러했다.

  속세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물건의 소유와 그로 인한 집착에서 자유롭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좋고 아름다운 것은 비싸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상품들이 정신없이 쏟아져 나온다. 남들이 가진 것을 갖지 못하면 뒤떨어진 것만 같다. 때로는 다른 사람들보다 돋보이기 위해 명품 브랜드 제품 몇 개쯤은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나는 카르투시오 수사님의 그 구멍난 양말을 떠올려 본다. 



*사진 출처: Martin Bernetti 2021/ A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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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새 나는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노래 부르기'를 새롭게 추가했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부르고 싶은 노래를 알려주셨다. 그런데 그렇게 부르다 보니 나중에는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으신듯 했다. 그래서 내가 그냥 유튜브를 방랑하면서 이런 저런 노래를 추천하는 식이 되어버렸다. 어제는 문득 아주 옛날 노래가 떠올랐다. 현인 선생이 부른 '굳세어라 금순아(1953)'였다. 어머니에게 그 노래는 어떠냐고 했더니 괜찮다고 하셨다. 큰글씨의 가사가 나오는 동영상을 찾아서 재생을 시켰다. 하도 오래전 노래라 나는 따라 부르지 않고 그 노래를 건성으로 듣고 있었다.

  한 2절쯤 되었을까? 노래를 부르시던 어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무슨 일인가 했다.

  "노래가 정말 슬퍼서 그런다."
 
  '굳세어라 금순아'의 가사는 피난민으로 부산에 온 남자가 전쟁통에 헤어진 연인 금순이를 그리워한다는 내용이다.

  "에이, 뭐가 그렇게 슬퍼요? 엄마는 실향민도 아닌데."

  어머니는 뭔가 감정이 북받치는지 눈물까지 흘리셨다.

  "얼마나 보고 싶으면 저렇게 노래를 하겠냐. 보고 싶은데 만나지도 못하고."

  나는 갑작스런 어머니의 반응에 당황했다. 노래는 이제 3절로 접어들고 있었다. 가사의 화자(話者)는 금순이에게 북진통일이 되면 다시 만나자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북진통일(北進統一)'이라니, 내게는 너무나 생경하고 현실성 없는 단어였다. 정말로 그 시대 사람들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일까? 아마도 그 가사는 이산(離散)의 뼈저린 슬픔을 잊고 싶은 마음에서 나왔을 것이다.

  "엄마, 나중에 방송국에서 이산가족 찾기 했잖아. 그 사람도 거기서 금순이 찾아서 만났을 거야."

  나는 서둘러 유튜브 창을 닫으면서 어머니에게 그렇게 말했다.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에 담긴 정서를 공감할 수 있는 세대는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어머니처럼 생의 황혼기에 서있다. 나에게 이 노래는 그 시대를 알 수 있는 대중 문화의 텍스트로 생각될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굳세어라 금순아'는 이제 계속해서 불려지는 노래라기 보다는 화석화되고 박제된 구시대의 오랜 기억이 되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 어머니와 함께 부른 윤수일의 '아파트(1982)'도 '굳세어라 금순아'와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학창 시절에 이 노래는 학교 운동회 때 응원가 목록에 빠지지 않고 꼭 들어 있었다. 지금 시대의 아파트는 사방팔방에 들어선 흔하디 흔한 건물일 뿐이다. 하지만 1980년대에 아파트는 그리 흔한 주거 형태가 아니였다. 청약에 당첨되는 것은 복권 당첨과 같은 행운처럼 여겨졌었다.

  노래 '아파트'는 헤어진 연인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 이 노래를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거기에 담긴 정서가 그 시대 사람들의 내면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연인이 살았던 아파트는 채워지지 않는 갈망과 선망의 대상으로 인식된다. 그렇게 노래 '아파트'에는 1980년이라는 시대와 사랑 이야기가 공명하고 있다. 요즘 그렇게 나는 어머니와 함께 노래를 부르며 지나간 시대의 사회사를 탐색해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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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겨울의 초입에 작은 석영관 히터를 하나 샀다. 그 제품의 가격은 2만원대였다. 석영관 히터의 장점은 저렴한 가격말고도 또 있다. 비교적 작은 크기에 이동이 간편하다. 그리고 작은 공간의 냉기를 없애는 데에 좋다. 그런 장점만 들으면 석영관 히터가 나름 괜찮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히터에는 어마무시한 단점이 있다. 그것은 엄청난 전력 소모량이다. 석영관 히터는 전기를 먹어치우는 조그만 괴물과도 같다. 나는 그 사실을 지난달 관리비 고지서를 받고서야 알았다. 

  보통 2단으로 구성되어 있는 석영관 히터의 소비 전력은 800W이다. 그러니까 석영관 히터 1단이 400W의 전력을 소모하는 셈이다. 지난달 전기 요금이 그 이전달과 비교해서 무려 3만원이나 더 나왔다. 나는 그제서야 히터의 전력 소모량을 대략 계산해보았다. 히터를 1단만 작동시키고, 하루에 4시간 정도만 사용해도 전기 사용량이 꽤 되었다. 거기에다 누진제가 적용되니 전기 요금이 많이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전기 요금만 오른 것이 아니었다. 난방비까지 껑충 뛰어버린 고지서를 받고 보니 전열 기구를 쓸 때마다 잠깐 생각해 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렇게 히터를 조심스럽게 쓰던 며칠 전, 히터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처음에는 지지직, 작은 소음이 들렸다. 나는 히터에 무슨 먼지라도 들어갔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더니 그 소리에 이어 뭐가 타다닥, 타는 소리가 이어졌다. 석영관의 중간 부분이 시꺼멓게 변해있었다. 순간 놀라서 얼른 히터의 전기 코드를 빼버렸다. 그렇게 히터의 1단 석영관이 나가버렸다.

  그나마 상단의 석영관은 그동안 쓰지 않아서 멀쩡했다. 봄이 올 때까지 어떻게든 히터를 쓰고, 나중에 서비스 센터에 가서 고치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마음먹고 있었는데, 엊그제 또 히터에서 좀 큰 소음이 들렸다. 그렇게 석영관 히터는 완전히 고장나버렸다. 히터를 쓴지 2달만에 생긴 일이었다. 아무리 저렴한 중국산 소형 가전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이다지 조잡할 수 있을까?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석영관 히터는 고장나면 수리비가 더 많이 드니까 그냥 버려야 합니다."

  누군가 인터넷에 그렇게 써놓은 글을 읽었다. 고쳐쓰느니 그냥 막 쓰고 버려야하는 제품, 거기에다 전기까지 엄청나게 먹는다. 내가 산 히터는 아직은 무상 서비스 기간이 남아있으니 수리비 걱정은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석영관 히터를 고쳐서라도 계속 쓰는 것이 나은 걸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정도의 형편없는 내구성이라면 얼마 쓰지 않아 또 고장이 날 수도 있다.  


  싼 게 비지떡. 나는 얼마나 많은 석영관 히터가 한철만 쓰고 버려지는지 새삼 헤아려 보게 되었다. 물건을 만들어 파는 이들이 그 쓰임새와 내구성을 진지하게 고려한다면 저런 제품을 만들어 팔 수는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윤리적인 생산과 소비는 불가능한 일일까? 타들어가서 시커먼 줄이 선명한 석영관 히터를 보면서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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