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해외 언론사에 실린 사진 한 장을 보게 되었다. 그 사진은 칠레 아타카마 사막의 풍경이었다. 그런데 보통 우리의 눈에 익숙한 사막의 모습이 아니었다. 사막에는 이상한 덩어리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바로 옷의 산이었다. 선진국의 의류 쓰레기를 폐기물 처리업자가 남미 국가에 싼값에 떠넘긴 결과였다. 그 옷들 가운데에는 가격표도 떼지 않은 새옷들도 많다고 했다. 'Fast Fashion', 이는 중저가의 의류 생산 업체들이 엄청난 물량 공세로 최신 유행을 주도하는 것을 일컫는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에게 옷은 대충 입고 버리는 물건이 된 듯하다.

  내가 집에서 입는 티셔츠 소매가 헤진지 좀 되었다. 그 옷을 산지 4년 되었나, 그 정도면 나름대로 잘 입었다 싶기도 했다. 새걸로 하나 사야겠네 생각을 하기는 했다. 비록 옷이 늘어지고 소매 끝이 떨어졌어도 그 옷은 참 편했다. 그래서 쉽게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가 않았다. 누가 보면 이런 내 모습을 궁상맞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작 나는 그게 아무렇지도 않다. 사실 그런 마음가짐을 갖게 된 것은 어떤 다큐를 보고 나서이다.

  KBS에서 방영한 다큐 '세상 끝의 집(2019)'에는 카르투시오 봉쇄 수도원의 일상이 담겨있다. 그곳의 수사들은 세상과 단절되어 자신의 삶을 오직 기도와 노동만으로 채워간다. 다큐를 보고 있는데, 수사님이 신고 있는 구멍난 양말이 눈에 띄었다. 극도로 절제된 청빈의 삶, 수도자들의 표정과 말은 온화하고 평화로웠다. 아마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가지고 있는 물건들은 좀 더 오래 쓰려고 했고, 새 물건은 반드시 필요한 때만 샀다. 쓰던 물건을 버릴 때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는 습관이 생겼다.   

  궁상(窮狀)과 청빈(淸貧)의 차이는 결국은 마음가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낡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부끄럽고 한심하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궁상이 되겠지. 하지만 옷의 가치를 단정하고 깨끗한 것에 둔다면 그 사람에게 비싼 옷은 그리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구멍난 양말을 신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걸림이 없이 온전한 삶을 살아내는 수사의 모습이 그러했다.

  속세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물건의 소유와 그로 인한 집착에서 자유롭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좋고 아름다운 것은 비싸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상품들이 정신없이 쏟아져 나온다. 남들이 가진 것을 갖지 못하면 뒤떨어진 것만 같다. 때로는 다른 사람들보다 돋보이기 위해 명품 브랜드 제품 몇 개쯤은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나는 카르투시오 수사님의 그 구멍난 양말을 떠올려 본다. 



*사진 출처: Martin Bernetti 2021/ AF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