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 생의 남은 시간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
김범석 지음 / 흐름출판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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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의 이야기가 가득한 책. 이 책의 내용을 내가 요약해 보면 그렇다. 종양의학과 의사는 자신이 18년 동안 보고 들은 환자들의 이야기를 줄줄이 사탕처럼 늘어놓는다. 저자가 진료실에서 만난 많은 환자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고통스럽게 서성이고 있다. 중간중간 희망을 주는 사례도 있지만, 대개는 힘든 투병 끝에 죽음을 맞이한다. 각양각색의 사연을 지닌 암 환자들의 이야기가 만화경처럼 펼쳐진다. 마치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는 단편 영화들을 이어서 보는 것 같다. 아마도 책 읽기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1시간 반 정도면 이 책을 완독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의 죽음에 대해 흥미진진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만큼 이 책이 지닌 흡인력은 상당하다.

  그런데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나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불편해졌다. 이 책에는 익명으로 등장하는 여러 암 환자들과 가족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과연 이 책의 저자는 그 환자들과 가족들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내도 된다는 동의를 받았을까? 물론 각각의 일화들만 보고서 독자는 그들이 누구인지 결코 특정할 수 없다. 종양의학과 의사로서, 또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으로서 저자에게 진료실의 환자들은 흥미로운 글감의 원천이 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저자는 대단한 행운을 지닌 셈이다.

  그렇다면 그런 환자와 가족의 이야기를 익명성의 테두리 안에서 이렇게 책으로 펴내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에 내가 이 책에 나오는 환자, 또는 그 환자의 가족이라면 나는 상당히 놀랍고 불쾌할 것이다. 그들은 주치의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출판할 수도 있고, 거기에 대해 충분히 인지한다는 사전 동의서를 작성했을까? 그랬다면 조금은 문제가 다를 수도 있다. 요즘 TV에 넘쳐나는 무수한 관찰 예능 프로그램은 제작 과정에서 초상권에 대한 엄격한 기준이 적용된다. 단 한 컷의 화면에 등장하는 일반인들에게도 출연에 대한 동의서를 받아야 한다. 나는 그것과 같은 맥락에서, 저자가 의사로서 환자들의 이야기를 '수필'이라는 문학적 틀에서 자유롭게 늘어놓을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차라리 저자가 자신이 진료실에서 만난 이들에 대해 소설적인 변형을 통해 글을 써냈다면 어땠을까? 소설이라고 해도 저자의 직업이 '의사'라는 점에서 환자의 개인 정보에 대한 보호 의무가 전적으로 면제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문제는 이런 것이다. 저자의 글, 그것이 수필이든 소설이든, 그것을 읽는 이들 가운데 단 한 사람이라도 그 글에서 자신이 아는 누군가를 정확히 떠올리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문득 나는 재일 교포 소설가 유미리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유미리는 자신이 쓴 소설로 소송에 휘말린 적이 있다. 유미리는 자신이 알고 지낸 지인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냈다. 그것을 알게 된 지인은 유미리의 소설을 읽는 이들이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에 대해 알게 될 수 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유미리는 강변했다. 작가는 주변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소설적인 가공을 통해 써내는 것이라고. 하지만 재판부는 유미리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소설 속에서 묘사된 인물의 외모가 실제 유미리 지인의 모습과 거의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유미리는 그 재판에서 패소했다.

  나는 나를 치료하는 주치의가 언젠가 자신이 쓰게 될 글에서 나의 질병과 내 개인적인 이야기를 글감으로 써먹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라면 그런 의사에게는 절대로 진료받고 싶지 않다. 이 책은 겉으로는 휴머니즘을 표방하고 있지만, 실상 그 속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이의 개인적인 편견과 냉소를 그럴듯하게 포장한 것에 가깝다. 내가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상당히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는 거기에 있다.

  그나마 이 책에서 내가 진정성을 느꼈던 부분은 저자가 써 내려간 자신의 개인사에 있었다. 저자는 고등학생 때, 폐암으로 부친을 잃고 어렵게 의대에 입학했다. 부친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가는 대목에서는 저자에게 '종양의학'이 숙명이 될 수 밖에 없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런 단편적인 글에서 느끼는 아주 작은 진정성 말고는, 나는 이 책에서 어떤 대단한 미덕을 찾지 못한다. 구구절절한 사연을 지닌 암 환자들의 이야기가 상점 진열대의 상품처럼 놓여있을 뿐이다. 

  과연 이 책을 읽는 다른 이들은 이 책에서 무엇을 느끼게 될지 나는 그것이 궁금하기는 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삶과 죽음을 다루는 의사의 고뇌가 아니라, 저자가 의사로서 지닌 권위와 특권 의식이 미묘하게 내포되어 있음을 느꼈다. 그런 이유로 나에게 이런 책 읽기의 경험은 결코 감동적이지도, 유쾌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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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에 동네 소아청소년과에서 2023-2024 절기 코로나 백신을 맞고 왔다. 귀찮아서 그냥 안 맞을까 하다가 고령의 모친을 생각해서 주사를 맞았다. 오전의 병원은 한가했다. 대기실의 놀이기구에서 놀고 있는 작은 아이는 이제 서너 살 정도로 보였다. 그런데 외모가 특별하다는 인상을 준다. 아이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아이 엄마를 보니 동남아시아 사람이었다. 작은 체구의 여성은 조용히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료실에서는 초등학교 2학년 정도로 보이는 여자애와 보호자인 엄마가 나온다. 접수하는 간호사가 아이에게 비타민맛 사탕을 주었다. 아이는 집에 있는 오빠도 주고 싶다고 하나 더 달라고 한다. 간호사가 비타민 맛 사탕이 다 떨어졌다고 말한다. 초콜릿 맛 사탕이라도 줄까? 아이는 대답 대신 머리를 끄덕인다. 그럼, 초콜릿 맛 사탕 2개 줄게. 그러니까 우리 **는 사탕 2개 먹는 거야. **는 오빠를 잘 챙기는구나. 오빠는 병원 와서도 자기 사탕만 받아가던데.

  오빠를 살뜰히 챙기는 여동생이 엄마와 함께 병원을 떠났다. 그 사이에 다문화 가정의 꼬마가 진료실에서 나왔다. 아이 엄마는 수납하고 나서 아이에게 간호사 누나들에게 인사하라고 시킨다. 조그만 아이가 배꼽이 땅에 닿도록 인사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이제 내 차례이다. 그런데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한 10분이나 지났을까? 간호사에게 내가 들어갈 차례가 아니냐고 물으니, 원장님이 진료 의뢰서를 쓰고 있단다. 뭐지? 기껏해야 환자는 나, 그리고 독감 백신 맞으러 온 영감님 둘인데 그냥 환자 먼저 보고 진료 의뢰서 쓰면 되는 거 아닌가? 나는 대기실에서 15분 정도를 기다렸다. 그러고 나서 진료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작년 겨울 이맘때쯤 여기서 코로나 백신을 맞고 나서 1년 만이다. 중년의 여의사 선생은 하나도 나이 먹지 않은 것 같았다. 의사는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건넨다. 다른 병원과는 달리 여기 의사 선생은 주사를 자기가 직접 놓는다. 환자 응대도 정말 잘한다. 뭐랄까, 의사 선생이 참 영업을 잘한다고나 할까? 주사 맞고 나서 넌지시 물어보았다. 진료실에 들어오라는 말이 없어서 좀 기다렸다고. 그랬더니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인다. 발달 지연 아동 환자가 있는데, 보호자가 대학병원 진료를 먼저 예약하고서 급하게 진료의뢰서를 부탁했다고. 그래서 그걸 작성하느라 시간이 걸린 거라고. 그 말을 듣고 나니 이해가 되었다. 저렇게 환자와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는 의사 선생은 참 괜찮다고 생각했다.    

  늦은 오후에 나는 일기를 쓰기 위해 컴퓨터를 켰다. 글을 쓰는 일은 매번 쉽지 않다. 그것이 매일 써 내려가는 하잘것없는 일기일지라도. 대개는 하릴없이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한 십여 분 지나고 나서야 일기를 쓴다. 오늘도 나는 쓸데없는 짓을 했다. 내 졸업 논문 제목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다. 몇 년 전에는 누가 내 논문의 전문을 pdf 파일로 전환해서 올려놓았었다. 이걸 누가 했을까 궁금하기는 했다. 나는 그 논문 파일이 검색 결과에 나올 줄 기대했다. 하지만 그 대신에 나는 희한한 결과물을 발견했다. 어떤 쓰레기 같은 인간이 자신의 리포트에 내 논문을 표절해서 리포트 판매 사이트에 올려놓았다. 미리보기로 본 리포트의 2쪽 분량은 그냥 내 글을 그대로 복사해서 붙여놓은 것이었다. 나는 머리가 띵해졌다. 이걸 어떻게 하지?

  일단 그 사이트의 운영자에게 메일을 보내기로 했다. 해당 사용자의 리포트는 표절이니 사용자에게 리포트를 내리라는 요청을 해달라고 글을 썼다. 웃긴 게, 그걸 베낀 머저리는 내 논문과 내 선배의 논문을 정확히 반씩 베껴서 아수라 백작 같은 결과물을 내었다. 내 느낌에는 아마 모교의 후배 떨거지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누가 되었든 그 인간이 쓰레기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새삼 내 하드 디스크에 저장된 논문을 15년 만에야 다시 찾아서 보았다. 이걸 쓸 때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던지 그 당시 머리는 반백이 되었고 폐렴에 걸리기까지 했다. 지금 보면 좀 엉성하기도 하고 누가 인용할 것 같지도 않은 구닥다리 글이다. 그래도 이 논문에는 내가 영화 공부하면서 보낸 6년의 세월이 들어있다. 갑자기 나는 마음이 먹먹해졌다. 일단 RISS(학술 연구 정보 사이트)에 이 논문을 올려보기라도 하자. 그런데 여긴 석사와 박사 논문만 게재가 된다. 학사 학위 논문은 취급도 안 한다. 내가 영상원에서 취득한 예술사는 학사 학위에 해당한다.

  고작해야 학사 학위를 따자고 그 세월을... 나는 내 논문을 표절한 등신이 선배 L의 논문도 표절한 것이 생각났다. 도대체 L은 뭘 하고 살고 있는 걸까? 그는 한동안 모교의 행정 조교로 일했었다. 원래 L의 꿈은 영화 감독이었다. 어째 L의 이름은 아무리 인터넷을 뒤적거려 봐도 나오지 않는다. 동명이인의 교수 이름만 주르륵 뜰 뿐이다. 생각난 김에 나는 M의 이름을 검색창에 넣어보았다. 나와 L, M은 1학년 단편 영화 제작 실습 때 같이 5분짜리 단편을 찍었었다. 구글은 M의 현재를 바로 알려주었다. M은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에 번역과 영화 기획 일을 하며 열심히 살고 있었다. 나는 H의 얼굴도 떠올렸다. 몇 년 전에 H는 장편 영화를 찍었다. 관객이 얼마나 들었는지도 모르는 망해버린 상업 영화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자기가 찍고 싶었던 영화를 찍었다는 게 어디냐.

  다들 열심히들 산다 정말

  나는 나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영화 '부당거래(2010)'에서 류승범이 했던 대사를 뇌까리는 내 입맛은 썼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표절 잡범에게 분노하면서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있을 뿐이었다. 15년이나 지난 내 논문을 RISS 사이트에 올린다 한들 이거 읽을 사람이나 있을까? 백신을 맞은 왼쪽 팔이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소모적인 자기연민은 그만. 그래도 오늘은 이걸로 글감 하나는 건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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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불쌍한 우리 할머니. 할머니가 보고 싶다."
 
  엄마는 그렇게 말하고는 눈물을 흘렸다. 이제 팔순이 가까운 노모가 우는 것을 보기란 쉽지 않다. 엄마는 육이오 전쟁통에 조실부모(早失父母)하고 친조부모 밑에서 성장했다. 외적인 상황만 보자면 뭔가 외롭고 슬펐을 것 같지만, 3명의 고모와 삼촌이 있었다. 엄마의 집안은 꽤 크게 농사를 지은 부농 축에 속했다. 집은 늘 친척들의 왕래로 붐볐다. 어린애라고는 엄마 혼자여서 엄마는 언제나 가장 대접받았다. 당시에 여자들은 따로 식사했는데, 엄마는 유일하게 할아버지와 겸상했다. 엄마는 그 누구보다도 할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할머니는 아들 셋이 전쟁통에 모두 소식이 끊기는 변고를 당했다. 그러니 부모 잃고 혼자 남은 어린 손녀가 유독 눈에 밟혔을 것이다.

  엄마는 결혼하고 나서 친정에 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나의 할머니는 꽤나 혹독하게 시집살이를 시켰다. 남편, 그러니까 나의 부친은 그런 면에서 좀 무심할 때가 많았다. 애 셋을 키우면서 시집살이에 엄마가 몸도 마음도 참 힘들었겠구나 싶다. 그러던 중에 엄마의 할머니가 세상을 뜨셨다. 내가 어렸을 적의 일이다. 내 증조모께서는 아흔이 넘게 사셨으니 나름 장수하신 셈이다. 그렇다 해도 엄마는 할머니를 자주 찾아 뵙지 못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프셨을 것이다. 그때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애도의 감정이 이제 노인이 된 엄마의 마음에 흘러넘친다.

  "아이고, 엄마 울지 좀 말어. 오늘 기분이 좀 안 좋은 거야?"

  나는 엄마한테 크리넥스 티슈를 두어 장 뽑아서 준다. 그러고 나서 유튜브로 엄마가 들을 만한 노래가 뭐가 있나 찾아본다. 그래, 배호 노래나 듣자. '누가 울어'가 이상하게도 이 상황에 잘 맞는 노래 같았다. 배호(1942-1971)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비운의 가수이다. 이 가수의 노래는 듣다 보면 슬픔과 이별, 고통의 정서가 진하게 베어져 있음을 느끼게 된다. 지병을 가지고 있던 데다가 가수로서 한창 잘 나갈 때에 무리한 탓에 배호는 서른도 되기 전에 삶을 마감했다. 나는 아빠의 차에 있었던 배호의 골든 히트송 테이프를 기억한다. 그 테이프 겉면의 사진 속 배호는 전혀 이십 대처럼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병색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배호가 사십 대의 중년 가수라고 생각했다.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같은 이슬비
  누가 울어 이 한밤 잊었던 추억인가...'

  엄마는 울면서도 배호의 노래를 한 소절씩 따라 불렀다. 나는 우는 엄마를 보면서 생각했다. 나도 노년의 어느 날에 우리 엄마를 보고 싶다고 울까? 영화 'The Father(2020)'에서 치매 노인 앤서니(앤서니 홉킨스 분)는 요양원에서 엄마가 보고 싶다면서 눈물을 흘린다. 앤서니의 곁에는 요양원의 직원이 있을 뿐이다. 엄마는 걸핏하면 이런 말을 중얼거린다.

  "내가 알던 사람들, 하나 둘 다 갔어. 이젠 내 차례야."

  엄마의 인지능력은 요즘 들어 더 빠르게 손상되고 있다. 상업 고등학교를 나와서 그 누구보다도 셈에 빨랐던 엄마는 11 빼기 4가 얼마인지 한참을 생각하다가 답을 모르겠다고 고개를 내젓는다. 나는 손가락을 세어서 엄마에게 답을 알려준다. 매일, 나는 최선을 다해서 엄마의 인지학습을 함께 한다. 그림 그리기, 오리기, 퍼즐 맞추기, 숫자 계산 등등. 나는 나중에 내가 치매 환자들을 위한 학습서라도 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볼 때가 있다.

  엄마의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아서 공부는 더 오래 하지 않았다. 엄마는 공부가 끝났다는 말에 기운을 되찾은 것 같았다. 휴지에다 코를 탱, 하고 풀더니 배가 고프다고 하신다. 나는 간식을 좀 챙겨드렸다.

  "엄마, 인제 그만 울기다. 할머니 보고 싶다고 또 울지 말아."
 
  내가 그렇게 말하자 엄마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울었어? 왜 울었지? 난 기억도 안 나는데? 참 이상하네."

  나는 속으로 엄마의 광속 같은 망각 능력에 새삼 감탄했다. 때로 어떤 상처나 괴로움을 저렇게 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어쩌면 엄마의 머릿속에는 노년에 곱씹을 회한과 고통의 기억이 그다지 남아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눈물을 짓게 만드는 누군가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엄마가 생의 마지막까지 지니고 사셨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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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2년마다 1번씩 받는 국가 건강 검진을 받고 왔다. 정말이지 건강검진은 생각만 해도 싫고 미루고 싶은 마음만 든다. 이번에 검사받고 무슨 안 좋은 소리가 나올까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힘든 위내시경 검사 받을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도 나처럼 건강검진을 연말로 미루는 모양이다. 공단에서는 나한테 벌써 여러번 문자를 보내서 검진받으라고 독촉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이미 나는 한 달 전에 검진을 예약해 두었다.

  내가 예약한 병원은 대학 병원 부설의 건강검진 센터이다. 2년 전에도 그곳에서 받았다. 신축 건물이라 깨끗하고 넓었다. 그 당시에 검사도 순탄하게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별로 걱정은 하지 않았는데, 올해는 좀 달랐다. 정말이지 다음엔 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최악이었다.

  채혈실의 진단의학과 직원은 무뚝뚝하기가 이를 데 없다. 별다른 인사말도 없이 팔부터 내놓으라고 말한다. 무슨 대단한 친절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피를 뽑는다'는 상황 자체가 좀 무서운데, 인사도 없이 무턱대고 팔 부터 내놓으라니. 피 뽑은 자리에 알코올 솜 대놓고 테이프로 팔 한바퀴 돌려서 감아준다. 이제까지 채혈하면서 이렇게 후처치를 하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해놓은 꼬락서니가 한심하다.

  위내시경 검사는 최악이었다. 보조하는 간호사가 어찌나 거친지, 내 머리를 붙잡고 마구 힘을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내시경이 목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제일 괴로운데, 그런 상황에서 내시경이 잘 들어가질 않았다. 의사는 아무 말도 없이 내시경을 뺐다. 첫 번째 시도가 실패하고 두 번째에서야 겨우 내시경이 들어갔다. 진짜 내가 이해가 안 가고 짜증스러웠던 것은 간호사보다도 의사였다. 지금 위의 어디 부분을 본다든지, 이제 검사가 거의 끝나간다든지, 이런 말은 하지도 않는다. 무슨 말 못 하는 병이 있나? 아무런 설명도 없이 내시경으로 들쑤시고만 있었다. 환자와 소통하지 않는 이런 의사는 정말 최악이다. 검사 끝나고서 겨우 한마디 할 뿐이다.

  "정상입니다."

  위내시경 학회에서는 내시경 의사들 보수교육(補修敎育)때 환자들과의 소통 기술이나 좀 가르쳤으면 좋겠다. 비수면으로 하는 위내시경 검사는 나름대로 고통스럽다. 의사는 그 과정에서 환자의 불안과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 내 위내시경 검사를 한 의사는 그런 점에서 수준 미달이다. 환자를 자신의 내시경 검사 케이스 쌓는 도구로 생각하는 사람 같다. 최악의 의사에 마구잡이로 보조하는 간호사까지. 오늘의 내시경 검사는 아주 진저리 쳐지는 경험이었다.

  왜 사람들은 건강 검진을 연말로 미루는 것일까? 오늘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자기 몸이 어떤 도구로 취급되는 느낌은 낯설고 두렵기까지 하다. 피를 뽑고, 내시경 같은 기구가 몸에 들어오는 고통을 참아야 한다. 의사와 의료 기사가 지시하는 대로 잘 따라야 한다. 그 과정에서 수진자가 느끼는 감정에 대한 배려는 보기 어렵다. 개인 검진이 아닌 국가 건강 검진의 경우는 뭔가 더 형식적이고 무성의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영양과 운동 처방 같은 것은 도대체 왜 하는지 모르겠다. 아무 의미가 없다. 구강 검진은 그야말로 몇 초 안에 끝난다. 그러니 돈 더 들여서 비급여 검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병원에서 집에 돌아오니 진이 다 빠지는 느낌이었다. 이제 검진 결과서가 오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건강 검진은 지난 2년 동안 내가 살아온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나름의 평가서 같다. 음식을 제대로 잘 챙겨 먹지도 않았고, 근력 운동도 안 했다. 올해는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때도 많았다. 결국 질병이란 자신의 유전적 소인과 생활 습관의 결합이다. 이렇게 병원을 다녀오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자신의 근원과 현재 삶의 방식에 대해 돌이켜 보게 된다. 이번에는 어떤 결과지를 받게 될까? 결과 통보서가 우편함에 꽂히는 날을 생각하니 심장이 두근두근, 쫄깃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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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루즈 핏

  계절이 바뀔 때, 옷장을 열면 항상 드는 생각이 있다. 입을 게 없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냥 있는 옷이나 다 입자, 하고서는 새 옷을 사지 않았다. 그러다 올해는 안 되겠다 싶어서 옷을 좀 샀다. 그런데 옷을 고를 때마다 나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점이 있다. 요새의 패션 흐름이 루즈 핏(loose fit)이라 도무지 사이즈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상품 페이지에 기재된 실측 사이즈를 참고해서 옷을 주문해도 받아보면 황당하기까지 하다. 셔츠는 제일 작은 사이즈를 골라도 어깨선이 내 어깨에서 손가락 크기만큼 내려와 있다. 옷이란 딱 맞게 입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는 도대체 이런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하나 싶다. '그냥 입자'와 '반품하자'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귀찮아서 놔둔다. 올해 들어서 산 옷들이 거의 이렇다.  

  바지도 사는 것이 어렵기는 마찬가지. 내 기준에는 넓어도 너무 넓은 통의 바지는 도저히 소화해 낼 자신이 없다. 저런 바지를 입고 다니다가는 거리의 먼지를 다 쓸고 다닐 것만 같다. 너무 몸에 붙지 않는 레귤러 핏의 바지는 찾기가 너무 어렵다. 그렇다고 스키니 핏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거리에서 이젠 스키니 핏 바지를 넘어서 레깅스를 입고 다니는 이들도 본다. 아, 솔직히 내게는 문화 충격으로 다가온다.

  지난여름에 산책할 때 입을 바지 하나를 샀는데, 이것도 좀 통이 넓은 편이었다. 상품 소개 페이지에서 봤을 때는 좀 통이 넓겠네, 하고 짐작은 했었다. 받아보니 통이 넓기는 했다. 그래도 입어보니 편하고 좋았다. 이런 편안함 때문에 사람들이 통바지를 입는구나. 새삼 루즈 핏 옷의 유행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누군가 그 바지의 상품평 댓글에 '스님 핏'이라고 적어놓아서 웃었다. 통 넓은 한복 바지가 주는 여유로움이 거추장스럽지 않게 느껴지는 시대. 어쩌면 사람들은 이 팍팍한 불경기에 옷에서라도 넉넉함을 느끼고 싶어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2. 택배 기사에 대한 단상

  가끔 지나가면서 택배 기사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면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일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기사들은 산더미처럼 쌓인 택배 박스를 이리저리 나르면서 바쁘게 다녔다. 택배 배송이 워낙 고된 일이라 나는 택배가 좀 늦어지거나 해도 이해했다. 배송과 관련해서 내가 기사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물어보거나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최근에, 집에 택배 배송을 해주는 기사들이 좀 바뀌었다. 이전 기사들의 배송은 꽤 무난한 편이었다. 분실되거나 택배 물건을 거칠게 던져놓는 일이 없었다는 뜻이다. D 택배사의 기사는 항상 물건을 현관문 옆에다 얌전하게 두고 갔다. 마치 자로 잰 것처럼 똑바로 두었다. 길쭉한 상자의 택배는 잡기 쉽게 세로로 세워놓았다. 매번 택배 상자를 집에 들여다 놓을 때마다 참으로 고맙다고 생각을 했다. 배달해야 할 물건은 많은데, 하나의 물건에 그렇게 마음을 쓰기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 택배 기사가 그만두었다. 그 기사가 뭔가 새롭게 일을 시작하면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E 택배사의 기사는 나이가 좀 있는 분이다. 내 기억으로는 10년 넘게 그 일을 하고 있는듯하다. 이분은 배송하고 나서 늘 확인 메시지를 보낸다. 물건은 잘 받았는지, 분실되거나 그러지는 않았는지 꼭 알려달라는 문자였다. 적어도 나는 그 기사님이 배송하는 내 택배 물건에 대해서는 안심하게 된다. 10여 년을 넘게 그 고된 택배 일을 하면서 기사님이 보여준 성실함이 내게는 참 인상적이었다. 

  F 택배사의 기사는 새로 일을 시작한 지 2주 정도 되었다. 지나가면서 보니 이 기사는 매우 젊었다. 나이가 20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그런데 나는 우연히 이 기사가 다른 집에 물건을 배송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 택배 상자를 바닥에 내던지고 가는 것이었다. 복도 중간에 내팽개쳐진 상자가 참으로 볼썽사납게 보였다.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러다 지난주, 쌀과 생수를 시킬 일이 있었다. 그 택배를 담당한 이가 바로 F 택배사의 기사였다. 택배가 완료되었다는 문자 메시지가 와서 현관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이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있는 대로 힘을 주어 문을 열고 보니 기가 막혔다. 기사가 엘리베이터에서 물건을 현관문 앞에다 밀어놓고는 가버린 것이었다. 쌀 10kg과 생수가 문 앞에 있으니, 현관문이 밀어 지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그다음 날, 나는 택배사의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택배사 고객센터의 상담사와 전화가 연결되기란 진짜 하늘의 별 따기 같다. 10분을 기다린 끝에 겨우 상담사와 연결이 되었다. 나는 담당 택배기사가 물건을 현관문 '앞'이 아니라 '옆'에 두길 바란다고 이야길 했다. 그리고 오늘, F 택배사 기사가 배송한 물건을 받았다. 두유 상자는 이번에는 문 앞이 아니라 문 옆에, 좀 멀찍이 떨어진 곳에 놓여있었다. 그런데 상자를 집에 들여놓는데 상자 밑바닥이 젖어 있다. 느낌이 안 좋았다. 현관에서 택배 상자를 뜯어보니 두유 하나가 터져 있었다. 이 두유가 배송 과정의 어느 시점에서부터 터져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어쨌든 나는 이제 F 택배사가 배송사인 상품은 당분간 주문하지 않기로 했다. 아주 기분이 나빴다.

  왜 저 기사는 자기 일을 저따위로밖에 하지 못할까? 저렇게 할 거면 왜 저 일을 할까? 나로서는 이해가 가질 않는다. 이렇게 세상에는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과 일이 있다. F 택배사 기사가 이런 식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일을 할지 나는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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