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동네 소아청소년과에서 2023-2024 절기 코로나 백신을 맞고 왔다. 귀찮아서 그냥 안 맞을까 하다가 고령의 모친을 생각해서 주사를 맞았다. 오전의 병원은 한가했다. 대기실의 놀이기구에서 놀고 있는 작은 아이는 이제 서너 살 정도로 보였다. 그런데 외모가 특별하다는 인상을 준다. 아이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아이 엄마를 보니 동남아시아 사람이었다. 작은 체구의 여성은 조용히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료실에서는 초등학교 2학년 정도로 보이는 여자애와 보호자인 엄마가 나온다. 접수하는 간호사가 아이에게 비타민맛 사탕을 주었다. 아이는 집에 있는 오빠도 주고 싶다고 하나 더 달라고 한다. 간호사가 비타민 맛 사탕이 다 떨어졌다고 말한다. 초콜릿 맛 사탕이라도 줄까? 아이는 대답 대신 머리를 끄덕인다. 그럼, 초콜릿 맛 사탕 2개 줄게. 그러니까 우리 **는 사탕 2개 먹는 거야. **는 오빠를 잘 챙기는구나. 오빠는 병원 와서도 자기 사탕만 받아가던데.
오빠를 살뜰히 챙기는 여동생이 엄마와 함께 병원을 떠났다. 그 사이에 다문화 가정의 꼬마가 진료실에서 나왔다. 아이 엄마는 수납하고 나서 아이에게 간호사 누나들에게 인사하라고 시킨다. 조그만 아이가 배꼽이 땅에 닿도록 인사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이제 내 차례이다. 그런데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한 10분이나 지났을까? 간호사에게 내가 들어갈 차례가 아니냐고 물으니, 원장님이 진료 의뢰서를 쓰고 있단다. 뭐지? 기껏해야 환자는 나, 그리고 독감 백신 맞으러 온 영감님 둘인데 그냥 환자 먼저 보고 진료 의뢰서 쓰면 되는 거 아닌가? 나는 대기실에서 15분 정도를 기다렸다. 그러고 나서 진료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작년 겨울 이맘때쯤 여기서 코로나 백신을 맞고 나서 1년 만이다. 중년의 여의사 선생은 하나도 나이 먹지 않은 것 같았다. 의사는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건넨다. 다른 병원과는 달리 여기 의사 선생은 주사를 자기가 직접 놓는다. 환자 응대도 정말 잘한다. 뭐랄까, 의사 선생이 참 영업을 잘한다고나 할까? 주사 맞고 나서 넌지시 물어보았다. 진료실에 들어오라는 말이 없어서 좀 기다렸다고. 그랬더니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인다. 발달 지연 아동 환자가 있는데, 보호자가 대학병원 진료를 먼저 예약하고서 급하게 진료의뢰서를 부탁했다고. 그래서 그걸 작성하느라 시간이 걸린 거라고. 그 말을 듣고 나니 이해가 되었다. 저렇게 환자와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는 의사 선생은 참 괜찮다고 생각했다.
늦은 오후에 나는 일기를 쓰기 위해 컴퓨터를 켰다. 글을 쓰는 일은 매번 쉽지 않다. 그것이 매일 써 내려가는 하잘것없는 일기일지라도. 대개는 하릴없이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한 십여 분 지나고 나서야 일기를 쓴다. 오늘도 나는 쓸데없는 짓을 했다. 내 졸업 논문 제목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다. 몇 년 전에는 누가 내 논문의 전문을 pdf 파일로 전환해서 올려놓았었다. 이걸 누가 했을까 궁금하기는 했다. 나는 그 논문 파일이 검색 결과에 나올 줄 기대했다. 하지만 그 대신에 나는 희한한 결과물을 발견했다. 어떤 쓰레기 같은 인간이 자신의 리포트에 내 논문을 표절해서 리포트 판매 사이트에 올려놓았다. 미리보기로 본 리포트의 2쪽 분량은 그냥 내 글을 그대로 복사해서 붙여놓은 것이었다. 나는 머리가 띵해졌다. 이걸 어떻게 하지?
일단 그 사이트의 운영자에게 메일을 보내기로 했다. 해당 사용자의 리포트는 표절이니 사용자에게 리포트를 내리라는 요청을 해달라고 글을 썼다. 웃긴 게, 그걸 베낀 머저리는 내 논문과 내 선배의 논문을 정확히 반씩 베껴서 아수라 백작 같은 결과물을 내었다. 내 느낌에는 아마 모교의 후배 떨거지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누가 되었든 그 인간이 쓰레기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새삼 내 하드 디스크에 저장된 논문을 15년 만에야 다시 찾아서 보았다. 이걸 쓸 때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던지 그 당시 머리는 반백이 되었고 폐렴에 걸리기까지 했다. 지금 보면 좀 엉성하기도 하고 누가 인용할 것 같지도 않은 구닥다리 글이다. 그래도 이 논문에는 내가 영화 공부하면서 보낸 6년의 세월이 들어있다. 갑자기 나는 마음이 먹먹해졌다. 일단 RISS(학술 연구 정보 사이트)에 이 논문을 올려보기라도 하자. 그런데 여긴 석사와 박사 논문만 게재가 된다. 학사 학위 논문은 취급도 안 한다. 내가 영상원에서 취득한 예술사는 학사 학위에 해당한다.
고작해야 학사 학위를 따자고 그 세월을... 나는 내 논문을 표절한 등신이 선배 L의 논문도 표절한 것이 생각났다. 도대체 L은 뭘 하고 살고 있는 걸까? 그는 한동안 모교의 행정 조교로 일했었다. 원래 L의 꿈은 영화 감독이었다. 어째 L의 이름은 아무리 인터넷을 뒤적거려 봐도 나오지 않는다. 동명이인의 교수 이름만 주르륵 뜰 뿐이다. 생각난 김에 나는 M의 이름을 검색창에 넣어보았다. 나와 L, M은 1학년 단편 영화 제작 실습 때 같이 5분짜리 단편을 찍었었다. 구글은 M의 현재를 바로 알려주었다. M은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에 번역과 영화 기획 일을 하며 열심히 살고 있었다. 나는 H의 얼굴도 떠올렸다. 몇 년 전에 H는 장편 영화를 찍었다. 관객이 얼마나 들었는지도 모르는 망해버린 상업 영화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자기가 찍고 싶었던 영화를 찍었다는 게 어디냐.
다들 열심히들 산다 정말
나는 나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영화 '부당거래(2010)'에서 류승범이 했던 대사를 뇌까리는 내 입맛은 썼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표절 잡범에게 분노하면서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있을 뿐이었다. 15년이나 지난 내 논문을 RISS 사이트에 올린다 한들 이거 읽을 사람이나 있을까? 백신을 맞은 왼쪽 팔이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소모적인 자기연민은 그만. 그래도 오늘은 이걸로 글감 하나는 건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