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불쌍한 우리 할머니. 할머니가 보고 싶다."
엄마는 그렇게 말하고는 눈물을 흘렸다. 이제 팔순이 가까운 노모가 우는 것을 보기란 쉽지 않다. 엄마는 육이오 전쟁통에 조실부모(早失父母)하고 친조부모 밑에서 성장했다. 외적인 상황만 보자면 뭔가 외롭고 슬펐을 것 같지만, 3명의 고모와 삼촌이 있었다. 엄마의 집안은 꽤 크게 농사를 지은 부농 축에 속했다. 집은 늘 친척들의 왕래로 붐볐다. 어린애라고는 엄마 혼자여서 엄마는 언제나 가장 대접받았다. 당시에 여자들은 따로 식사했는데, 엄마는 유일하게 할아버지와 겸상했다. 엄마는 그 누구보다도 할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할머니는 아들 셋이 전쟁통에 모두 소식이 끊기는 변고를 당했다. 그러니 부모 잃고 혼자 남은 어린 손녀가 유독 눈에 밟혔을 것이다.
엄마는 결혼하고 나서 친정에 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나의 할머니는 꽤나 혹독하게 시집살이를 시켰다. 남편, 그러니까 나의 부친은 그런 면에서 좀 무심할 때가 많았다. 애 셋을 키우면서 시집살이에 엄마가 몸도 마음도 참 힘들었겠구나 싶다. 그러던 중에 엄마의 할머니가 세상을 뜨셨다. 내가 어렸을 적의 일이다. 내 증조모께서는 아흔이 넘게 사셨으니 나름 장수하신 셈이다. 그렇다 해도 엄마는 할머니를 자주 찾아 뵙지 못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프셨을 것이다. 그때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애도의 감정이 이제 노인이 된 엄마의 마음에 흘러넘친다.
"아이고, 엄마 울지 좀 말어. 오늘 기분이 좀 안 좋은 거야?"
나는 엄마한테 크리넥스 티슈를 두어 장 뽑아서 준다. 그러고 나서 유튜브로 엄마가 들을 만한 노래가 뭐가 있나 찾아본다. 그래, 배호 노래나 듣자. '누가 울어'가 이상하게도 이 상황에 잘 맞는 노래 같았다. 배호(1942-1971)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비운의 가수이다. 이 가수의 노래는 듣다 보면 슬픔과 이별, 고통의 정서가 진하게 베어져 있음을 느끼게 된다. 지병을 가지고 있던 데다가 가수로서 한창 잘 나갈 때에 무리한 탓에 배호는 서른도 되기 전에 삶을 마감했다. 나는 아빠의 차에 있었던 배호의 골든 히트송 테이프를 기억한다. 그 테이프 겉면의 사진 속 배호는 전혀 이십 대처럼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병색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배호가 사십 대의 중년 가수라고 생각했다.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같은 이슬비
누가 울어 이 한밤 잊었던 추억인가...'
엄마는 울면서도 배호의 노래를 한 소절씩 따라 불렀다. 나는 우는 엄마를 보면서 생각했다. 나도 노년의 어느 날에 우리 엄마를 보고 싶다고 울까? 영화 'The Father(2020)'에서 치매 노인 앤서니(앤서니 홉킨스 분)는 요양원에서 엄마가 보고 싶다면서 눈물을 흘린다. 앤서니의 곁에는 요양원의 직원이 있을 뿐이다. 엄마는 걸핏하면 이런 말을 중얼거린다.
"내가 알던 사람들, 하나 둘 다 갔어. 이젠 내 차례야."
엄마의 인지능력은 요즘 들어 더 빠르게 손상되고 있다. 상업 고등학교를 나와서 그 누구보다도 셈에 빨랐던 엄마는 11 빼기 4가 얼마인지 한참을 생각하다가 답을 모르겠다고 고개를 내젓는다. 나는 손가락을 세어서 엄마에게 답을 알려준다. 매일, 나는 최선을 다해서 엄마의 인지학습을 함께 한다. 그림 그리기, 오리기, 퍼즐 맞추기, 숫자 계산 등등. 나는 나중에 내가 치매 환자들을 위한 학습서라도 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볼 때가 있다.
엄마의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아서 공부는 더 오래 하지 않았다. 엄마는 공부가 끝났다는 말에 기운을 되찾은 것 같았다. 휴지에다 코를 탱, 하고 풀더니 배가 고프다고 하신다. 나는 간식을 좀 챙겨드렸다.
"엄마, 인제 그만 울기다. 할머니 보고 싶다고 또 울지 말아."
내가 그렇게 말하자 엄마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울었어? 왜 울었지? 난 기억도 안 나는데? 참 이상하네."
나는 속으로 엄마의 광속 같은 망각 능력에 새삼 감탄했다. 때로 어떤 상처나 괴로움을 저렇게 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어쩌면 엄마의 머릿속에는 노년에 곱씹을 회한과 고통의 기억이 그다지 남아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눈물을 짓게 만드는 누군가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엄마가 생의 마지막까지 지니고 사셨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