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엔 당신이 일 그만두고 아버지를 모셨으면 좋겠어."

  남자는 치매를 앓고 있는 아버지 간호를 위해 아내가 직장을 그만 두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 말에 순순히 '그래요, 여보'라고 말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손씨 부인(소방방 분)은 어림없는 소리라며 남편의 요구를 일축한다. 손 부인은 마흔 살 생일이 지난지 얼마 되지 않아 시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뜨고, 그 혼란스런 와중에 시아버지는 치매 진단을 받는다. 남편은 아버지 문제라면 손을 내젓는 자신의 동생들에게는 별 말을 하지도 못하면서, 아내에게 그 일을 미루고 싶어한다. 화장지 회사에서 잔뼈 굵은 실무자로, 집에서는 남편과 대학생 아들 뒤치다꺼리, 이제는 치매 시아버지 수발까지 해야한다. 손 부인은 그 일들을 잘 해낼 수 있을까? 홍콩 출신의 허안화 감독의 1995년작 '여인 사십(女人四十, Summer Snow)'은 갑작스럽게 주어진 커다란 삶의 과제와 씨름하는 중년 여성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오늘날에도 나이든 부모의 병수발이 자식들에게 어려운 문제라는 점은 26년전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요새는 대부분 요양원과 요양 병원을 1차적인 선택지로 생각하고, 비용 분담이 자식들 사이의 갈등 요소가 되는 정도가 차이라고나 할까. 물론 '여인 사십'의 손 부인에게도 그 선택지가 있었고, 치매 증상이 심해진 시아버지를 어쩔 수 없이 시설에 맡긴다. 영화는 그 선택을 하기까지 손 부인이 겪는 일상의 힘듦을 마치 세밀화처럼 보여준다. 아무 데나 소변을 보고, 한밤중에 고래고래 지르는 시아버지를 어르고 달래는 일은 손 부인만이 할 수 있다. 남편도 아들도 별 도움이 안된다. 시아버지 수발도 힘든데, 직장에서는 컴퓨터를 잘 다루는 신입 여직원에게 밀려서 찬밥 신세가 되어가는 중이다. 어쩔 수 없이 주간 보호 센터에 시아버지를 보냈는데, 맘대로 밖으로 나가 길을 잃어버리는 일을 겪는다. 결국 요양 병원에서 지내게 된 시아버지는 며느리에게 집에 가고 싶다며 울먹인다.

  손 부인은 직장을 때려친다. 그 선택은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것이 아니다. 함께 늙어가고 고통받는 한 인간으로서의 시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이 해야할 중요한 의무라고 자각했기 때문이다. 영화의 영어 제목 'Summer Snow'는 시아버지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꽃비를 시아버지가 눈이 내린다고 좋아한 장면에서 따온 것이다(히로스에 료코가 주연한 같은 제목의 일본 드라마가 하도 유명해서 이 제목으로는 영화 검색이 잘 안된다). 가족이 모두 모여서 주말 농장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데, 시아버지가 손 부인을 불러서 조용히 말한다.

  "인생이란 건 말이다, 기쁨으로 가득차 있는 거란다."

  그 부분의 영어 자막이 아마 'Life is full of joy'였을 것이다. 그 말을 하려고 감독 허안화는 손 부인의 고단한 사십을 그려냈단 말인가? 갑자기 말문이 턱하고 막히는 느낌이었다. '여인 사십'은 분명 가부장제 질서에 여성을 순응시키거나,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여성이 치루어야 하는 일방적인 희생을 옹호하는 영화는 아니다. 그럼에도 영화는 손씨 부인이 내리는 결정의 배경에 자신의 소망과 욕구 대신 '가족'과 '화합'이라는 전통적 가치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애써서 감추는 느낌을 준다. 맡은 일은 최선을 다해내는 책임감 있는 직장 여성, 좋은 아내와 엄마, 시아버지 병수발을 기꺼이 떠맡는 며느리, 이 모든 역할을 손 부인은 해낸다. 슈퍼우먼이 따로 없다. 손 부인만 그런 것이 아니다. 슬리퍼는 여자가 신겨주어야 한다고 믿는 제왕적이고 독선적인 시아버지를 가장 잘 알고 챙겼던 시어머니, 치매 걸린 성질 고약한 남편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한 여사,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묵묵히 성실하게 감당한다. 그렇다고 해서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위암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된 한 여사는 남편에게 그렇게 말한다.

  "저 세상에서 만나면 난 당신 아내 노릇 안해요. 남편 역을 내가 할게요."

  섬김과 보살핌의 대상으로서의 '남성'. 이 전통적 가치관은 손 부인의 윗세대가 충실히 따른 것이다. 손 부인은 현대 여성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정신적으로는 가부장제의 영향력 하에 놓인 인물이다. 그러므로 손 부인에게 사십 인생의 위기 상황에서 무엇이 최선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가족의 안정'이다. 직장을 그만 둠으로써 남편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인생 살이에 미숙한 아들에게는 조언자로, 시아버지에게는 좋은 간병인이 되고자 한다. 이 선택은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고 불편해 보인다. 그럼에도 손 부인의 결정은 시아버지의 유언과도 같은 마지막 말에 의해 보상받는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하는 삶이야말로 기쁨 그 자체라는 말로 들린다.

  이 영화를 2021년에 다시 만든다면 손 부인은 어떤 선택을 할까? 동일한 선택을 한다면 이 영화를 보던 여성 관객들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릴지도 모르겠다. 지금 시대의 손씨 부인은 자신의 직장을 그만 둘 일도 없으며, 치매 병증이 심한 시아버지는 가족과 상의하여 선택한 요양원에 보내며, 비용은 형제들 간에 공정히 분담하도록 할 것이다. 오래전 영화를 보는 일은 이렇게 시대와 가치관의 간극을 느끼게 만든다. '여인 사십'의 손씨 부인은 스스로 고달파짐으로써 가족의 문제를 떠안는 '해결사'의 면모를 보였지만, 2021년을 살아가는 어떤 손씨 부인에게는 삶의 '균형'과 책임의 '분담'이 중요한 가치이다. 허안화의 '여인 사십'은 그런 면에서 본다면, 가족주의로 그럴듯하게 포장된 구시대적이며 진부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사진 출처: hkmd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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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당신이 날 속이지 않기를 바랬어. 난 늙었다구. 만약 내가 17살 때 이런 사기를 당했다면, 까짓거 돈은 다시 벌면 그만이야.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 당신은 날 죽인 거나 마찬가지야. 내가 모은 돈을 모두 털어간 거라구."

  여자는 자신을 등처먹은 사기꾼 놈팽이에게 그렇게 말한다. 허안화 감독의 2007년작 '이모의 포스트모던 라이프(姨媽的後現代生活, The Postmodern Life of My Aunt)'의 주인공은 중년 여성이다. 영화는 상하이에 살고 있는 이모 예루탕(사금고와 분)을 찾아가는 어린 조카 콴콴의 시점에서부터 시작된다. 콴콴이 바라본 이모는 지독한 구두쇠로 꽤 괜찮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음에도 온갖 궁상에 찌든 삶을 살아가고 있다. 비록 사는 모습은 구질구질해 보여도, 이모는 자신이 사는 아파트에서 대학을 나온 사람은 유일하게 자신 뿐이라며 돈푼깨나 있는 이웃들을 경멸한다. 그런 이모에게 답답함을 느끼며 가출해서 자작 납치소동을 벌이는 콴콴. 골칫덩이 조카 보내고 나서 좀 조용하게 사나 싶었는데, 계속해서 이상한 사람들만 꼬인다. 아픈 딸이 있다는 여자를 불쌍해서 집에 데려왔더니, 여자는 딸 병원비 마련한다고 자해공갈일을 벌인다. 공원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 친해진 판지창(주윤발 분)은 알고 보니 사기꾼이다. 예루탕은 평생 모은 돈을 다 털린다. 정신적인 공황 상태에서 발을 헛디뎌 큰 부상까지 입은 예루탕에게 화려한 도시의 포스트모던 라이프는 이어질 수 있을까...

  나에게 홍콩 출신의 허안화 감독의 작품은 이 영화가 처음이다. 감독의 다른 작품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 영화 세계를 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면, 허안화 감독의 영화적 뿌리가 리얼리즘과 휴머니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모의 포스트모던 라이프'의 시작은 매우 코믹하다. 돈을 아끼려고 한여름에도 냉장고를 쓰지 않고, 온집안의 전기 코드를 빼놓고 사는 이모. 그뿐인가? 준법 정신은 얼마나 투철한지, 동네 가게에서 길바닥에 생선 찌꺼기 버리는 것을 보고 공안에 즉각 신고한다. 그런 이모의 도시 생활은 꽤나 팍팍하다. 이웃의 소개로 얻은 부잣집 아이의 영어 과외 자리는 시대에 뒤떨어진 영국식 억양이라며 잘린다. 구두쇠이기는 해도 따뜻한 품성을 가진 이모를 그 도시의 사람들은 이용해 먹으려 든다. 이모의 삶은 전혀 '포스트모던'스럽지 않다. 가치관은 시대에 뒤떨어져 있고, 삶은 구질구질하기 짝이 없으며, 사기꾼이 등처먹기 쉬운 어수룩한 중년의 여자일 뿐이다. 빛처럼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도시, 나아가지 못하고 과거에 멈춰있는 나이든 여자, 이 영화의 외피는 코미디이지만 그것을 한꺼풀 벗기면 관객은 곧바로 엄혹한 현실로 진입한다.

  낙상 사고로 병원에 입원한 예루탕에게 딸이 찾아온다. 너절한 놈을 남자 친구라고 데려온 딸은 엄마 간호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자신과 아빠를 버린 비정한 여자라면서 맹비난을 퍼붓는다. 예루탕의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딸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어보니, 예루탕은 10년 전에 시골에 어린 딸과 남편을 내버리고 상하이로 와서 자신의 삶을 꾸려갔다. 영화 속에서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대학을 나온 예루탕이 일자무식의 노동자 남편과 결혼한 건 아마도 문혁 시기의 하방(下放)운동으로 인생이 어긋나서였을 것이다. 무지렁이 남편과 그 사이에서 낳은 딸을 인생에서 지우고 새출발을 하기 위해서 온 도시 상하이. 그나마 이어가던 도시의 삶은 사기꾼에게 돈을 털리고 나자 산산조각이 난다. 딸과 함께 시골로 돌아가는 예루탕이 차 안에서 바라보는 상하이의 밤은 화려한 불빛으로 어지럽다. 도시의 눈부신 밤과 늙은 여자는 더이상 함께 할 수 없다.

  이 영화에 흐르는 정서를 젊은 관객이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영화는 중년의 여인에게 닥친 위기를 통해 늙어감과 그 비애를 담고 있다. 감독 허안화는 급변하는 도시와 그 삶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구세대가 겪는 혼란과 어려움을 상하이라는 고도로 상업화된 도시와 대비해서 보여준다. 영화 초반에는 그렇게 나이들어 보이지 않던 이모는 사기를 당하고, 온몸이 부서지는 부상을 겪으면서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리며 확 늙은 모습으로 변한다. 젊음과 영악함, 냉정함을 갖추지 못한 이모는 애초부터 거대한 도시의 삶에 맞는 이가 아니었다. 도시에 처음 왔을 때 품었던 꿈들은 사라졌으며, 몸은 늙어버렸고, 어렵게 모은 돈은 사라졌다. 어떻게 할 것인가? 여자는 자신이 버렸던 그 시궁창과 같은 과거의 삶으로 다시 돌아간다. 나이든 관객들에게 이모의 포스트모던 라이프의 몰락은 공포 영화처럼 보일 법도 하다. 그들에게 이 영화는 늙어감에 대한 고통스러운 성찰을 선사한다.

  이모 역을 연기한 사금고와의 연기가 매우 좋다. 젊음과 미모가 없이도 화면을 장악하는 꽉 찬 감정의 연기가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사기꾼 역으로 나온 주윤발의 연기는 뻔한 듯 하면서도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유들유들하고 뻔뻔한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저 사람은 배우가 되지 않았다면 천하의 사기꾼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싶기도 하다. 마지막에 떠나는 장면에서 트렌치 코트 휘날리는 뒷모습까지 매력이 흘러넘친다. 배우들의 충실한 연기와 함께 히사이시 조가 담당한 영화의 음악도 흘려버릴 수 없다.    



*사진 출처: itpworldword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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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동안 시사 주간 잡지를 구독한 적이 있었다. 그 잡지들을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영화는 중간부터 보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잡지는 그것이 가능하다. 이런 미니시리즈도 뭔가 처음부터 보는 것이 답답해서 전번에 3, 4편을 먼저 봤다. 그리고 이번에 1편과 2편, 5편과 6편을 몰아서 봤다. 각각의 제목은 이렇다. 1편 'Gumbo(To 1917)', 2편 The Gift(1917-1924) , 5편 Swing: Pure Pleasure(1935-1937), 6편 Swing: The Velocity of Celebration(1937-1939). 1편과 2편은 재즈의 기원과 초창기의 이야기, 5편과 6편은 스윙의 시대를 다루고 있다.

  뉴올리언스(New Orleans), 재즈의 시작과 그 전설적인 도시를 떼어서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1870년대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흑인 노예들이 향유하던 음악이 있었다. 이른바 '슬레이브 뮤직(Slave Music)'. 그 음악은 재즈의 기원을 이루는 하나의 물줄기이다. 거기에 여러 다른 물줄기들이 합쳐진다. 캐리비안 출신의 크리올(Creole)들의 음악, 흑인 영가, 노동요가 섞인다. 1편의 제목 'Gumbo'는 미국 남부 지방에서 먹는 온갖 종류의 식재료를 넣은 잡탕 수프를 의미한다. 그것처럼 재즈는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섞인 곳에서 시작되었다. 재즈 초창기에 크리올 음악가들의 역할은 매우 컸다. 크리올은 흑백 혼혈로 옅은 피부색을 가지고 있었고, 꽤 높은 생활 수준에 좋은 교육을 받았다. 흑인들 보다는 우월하다고 느꼈던 그들의 정체성은 남북 전쟁(Civil War)을 거치면서 변화가 생긴다. 백인들에게 크리올들은 흑인과 같은 열등한 이들이었다. 그렇게 크리올 음악가들이 재즈 음악계에 편입되면서 재즈는 원시적이고 단순한 가락에서 음악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재즈는 시간이 갈수록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며, 다양한 재즈 밴드들이 쏟아져 나온다. 마치 재즈 밴드의 춘추전국시대처럼 다양한 밴드들이 활동하게 되는데, 그것은 재즈가 하나의 거대한 음악 산업으로써 자리잡았음을 의미한다. 밴드들은 레코드 녹음을 비롯해 미국 전역을 순회 공연하며 돈을 끌어모았다. 물론 밴드를 운영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거기에는 사업적인 감각이 필요했는데, 그걸 제대로 해내는 음악가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백인 재즈 악단을 이끌었던 클라리넷티스트 베니 굿맨(Benny Goodman)과 뛰어난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의 밴드는 양대 산맥처럼 자리했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시대의 재즈 언어, 스윙을 만들고 이끌어 간다.

  인종(Race) 문제는 재즈의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커다란 주제를 형성한다. 재건 시대를 거치면서 흑인들에게 주어졌던 자유와 권리는 서서히 박탈되고, 1896년에는 흑백 분리가 법제화되었다. KKK단의 창설을 시작으로 흑인에 대한 린치가 공공연하게 자행된다. 그 시기를 거치면서 재즈 뮤지션들은 흑백 차별이 심한 남부에서 벗어나 시카고와 뉴욕으로 진출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이 부분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빌리 할러데이(Billie Holiday)가 부른 'Strange Fruit'이다. 린치로 죽은 흑인의 시체를 나무에 달려있는 '이상한 열매'로 비유한 이 노래는 재즈로 외친 강한 정치적 목소리였다. 그 시절, 흑인 뮤지션들은 백인 뮤지션들과 같이 공연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베니 굿맨은 뛰어난 흑인 뮤지션들과 같이 공연하기도 했지만, 그런 그의 의지는 외부의 시선과 압력에 의해 좌절되었다. 대중은 흑인과 백인이 같은 무대에서 공연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흑인 뮤지션들이 백인들 보다 적은 출연료와 차별적인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한 시대였다.

  그런 시대의 어려움 속에서 재즈는 위대한 천재 뮤지션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을 영접한다. 2편 'Gift'는 이 순전한 재능의 대스타를 다룬다. 1901년에 태어난 암스트롱의 어린 시절은 가난과 불행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온갖 더럽고 위험하고 힘든 세계를 보고 듣고 자랐던 거친 꼬마는 자신의 생애 전체를 재즈의 언어를 만들어 나가는 데에 바친다. 그의 삶이 재즈의 역사 그 자체가 되었다. 젊은 시절, 마피아 매니저에 혹사당하기도 했던 암스트롱은 유능한 새 매니저 조 글레이저를 맞이하며 연주와 음반 제작을 순조롭게 이어간다. 다큐에서 트럼펫 연주자 윈튼 마살리스의 인터뷰가 무척 돋보이는데, 그는 암스트롱에 온갖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마살리스는 입담도 좋을 뿐 아니라, 트럼펫으로 연주도 직접 보여줌으로써 다큐를 보는 재미를 더한다.

  강렬한 비트와 춤에 적합한 재즈 음악, 스윙 시대를 이끌었던 대표적 밴드 리더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는 스윙의 심장처럼 자리하고 있다. 부드럽고 편안하며 듣기 좋은 재즈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카운트 베이시는 완벽하게 구현해낸다. 내가 재즈를 처음 접하게 된 것도 카운트 베이시 악단의 연주였다. 일반인들이 재즈 음악에 바라는 모든 것을 담아낸 그는 스윙 재즈의 중심에 자리한다. 그리고 이 시대의 빛나는 여성 가수 엘라 피츠제럴드(Ella Fitzgerald)를 빼놓을 수 없다. 불행한 어린 시절을 딛고 재즈 가수가 된 엘라 피츠제럴드는 유명한 칙 웹(Chick Webb)의 악단에서 자신의 음악 경력을 쌓아간다. 밴드 리더 칙 웹은 피츠제럴드의 재능을 무척 아꼈는데, 그는 안타깝게도 34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엘라를 잘 보살펴 달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엘라는 보살핌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칙 웹 밴드는 곧 엘라 피츠제럴드 밴드가 되었고, 그 인기는 갈수록 커져갔다.

  클래식 음악팬들에게 잘 알려진 조지 거슈인도 잠깐 등장한다. 그의 '랩소디 인 블루(Rhapsody in Blue)'는 재즈와 클래식의 절묘한 조화로 여겨진다. 이렇게 다양한 뮤지션들이 재즈의 언어를 계속해서 변용해가는 가운데 재즈의 역사는 더욱 풍성해지며 그 영역을 확장해 간다. 물론 재즈 음악의 진화는 시대와 맞물려 있었다. 이제 어두운 시절이 다가온다. 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려는 시점이었다. 풍요와 번영의 시기를 함께 했던 스윙의 열풍은 사그라든다. 충격과 혼돈의 시대를 재즈는 어떻게 지나갈 것인가? 다큐는 아직도 4편이나 더 남아있다.     



*사진 출처: pbs.org 가수 빌리 할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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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디오에 'Misty'라는 곡만 전화로 신청하는 여자가 있다. 작은 도시의 라디오 방송 DJ 데이브 가버(클린트 이스트우드 분)는 자신이 늘 가던 술집에서 여자와 우연히 만나게 된다. 여자의 이름은 이블린(제시카 월터 분). 데이브는 별 생각없이 여자와 하룻밤을 보낸다. 그런데 이 여자, 갑자기 애인이라도 된 것처럼 부담스럽게 다가온다. 밥을 해주겠다며 장 봐서 집으로 들이닥치는가 하면, 자기 혼자 약속 정해놓고 왜 안오냐며 난리를 친다. 큰 방송국 담당자와 식사를 하는 자리에 나타나서는 늙은 여자와 왜 만나냐며 온갖 욕설을 퍼붓는다. 어떻게든 관계를 정리하려고 하지만 여자는 막무가내, 급기야 자해 소동까지 벌인다. 예전의 여자 친구와 다시 잘해보려고 하는 마당에 저 정신 나간 여자를 대체 어떻게 해야할까? 바람둥이 DJ 데이브는 그렇게 예기치 않은 난관에 부딪힌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1971년작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Play Misty for Me)'는 그의 첫 감독 데뷔작이다. 심리 스릴러물에 스며든 재즈 음악이 무엇보다 관객의 귀를 사로잡는다. 에롤 가너가 작곡한 1955년의 재즈 스탠다드 곡 'Misty'가 주요한 테마 음악으로 흘러나온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신이 좋아하는 재즈 음악을 영화 속에 여유롭게 펼쳐 놓는다. 이 영화에서 음악이 가지는 부분은 꽤나 크다. 관객은 스릴러물이 주는 심리적 압박을 중간 중간 나오는 음악으로 인해 약간씩 풀어놓을 수 있다. 주인공 데이브가 여자 친구 토비(도나 밀스 분)와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서는 로버타 플랙(Roberta Flack)의 '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가 나온다. 그뿐만이 아니다. Monterey Jazz Festival의 연주 실황이 나오기도 한다. 이쯤 되면 영화의 장르가 스릴러가 아니라 음악 영화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유명인에게 광적으로 집착하는 팬의 이야기. 아마도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영화의 이미지는 '미저리(Misery, 1990)'의 캐시 베이츠일 것이다. 이 영화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DJ 데이브에게 광적으로 집착하는 이블린 역은 제시카 월터가 맡았다. 평범한 얼굴 속에 감추어진 광기를 순간적으로 폭발시키는 제시카 월터의 연기가 매우 뛰어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제작사인 유니버셜에서 내정한 배우 대신, 자신이 직접 제시카 월터를 캐스팅했다. 시드니 루멧의 영화 'The Group(1966)'에 나온 월터의 연기를 눈여겨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눈은 정확했다. 제시카 월터는 이 영화의 연기로 극찬을 받았다. 비록 제인 폰다에 밀려서 골든 글로브 연기상은 놓쳤지만, 이 영화는 제시카 월터의 '인생 영화'라고 할 만하다.


  질투심에 미쳐버린 이블린을 두려워하는 데이브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골수 마초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낯선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그 때문에 역시 이스트우드와 같은 과 마초 스티브 맥퀸은 이 역을 거절했다. '자신을 넘어서는 여자 캐릭터가 있는 영화는 출연하기 싫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어서 직접 주연과 감독을 맡는다. 감독을 하게 해주는 댓가로 출연료를 적게 받았지만, 그에게는 감독으로서의 영화 경력을 시작하려는 대단한 의욕이 있었다.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는 꽤나 순조로운 감독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좋은 흥행 성적을 거뒀고,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는 영화적 역량에 자신감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캐스팅부터 촬영 장소 선정(캘리포니아의 Camel-by-the-sea, 그는 후에 이 도시의 시장을 맡기도 했다)에 이르기까지 이스트우드는 전권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다. 또한 정해진 촬영 스케줄을 예상보다 일찍 끝내서 제작비를 아끼는 절약 정신도 보여줌으로써 제작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영화 내적으로는 느슨하고 엉성한 서사가 눈에 띈다. 여자 친구 토비와의 애정신은 거의 준 포르노급으로 관객의 눈요기용으로 끼워넣은 것이나 다름없다. 거기에다 데이브가 토비와 함께 Monterey Jazz Festival을 돌아다니는 장면에서 나오는 공연 실황은 좀 뜬금없다. 영화 찍은 필름을 어디다 잃어버려서 대신 끼워넣은 것이냐는 비아냥이 나올 법도 하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감독으로서 첫발을 내딛는 이스트우드의 야망과 도전 정신을 보여 준다. 그가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으며, 또한 흥행에 민감한 감각도 가지고 있음을 입증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감독으로서의 좋은 시작을 보여준 이 영화는 실패한 앨범들로 낙담해 있던 로버타 플랙에게는 재기의 발판이 되어주기도 했다. 제시카 월터는 호평받은 연기에도 불구하고 영화 쪽에서 인상적인 경력은 남기지 못했다. 대신에 TV 시리즈물 쪽으로 방향을 선회해서 인기를 얻었다. 아마도 이 영화의 가장 큰 수혜자는 여주인공 이블린의 유일한 신청곡 'Misty'를 작곡한 이가 아닐까 싶다. 재즈 팬들에게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는 에롤 가너와 'Misty'를 결코 잊지 못하게 만드는 영화로 남았다.   



*사진 출처: bluray.highdefdigest.com



**다음 글은 화요일에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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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력적이고 재능있는 젊은 여성이 있다. 스타가 되겠다는 열망을 가진 그 여자는 우연히 유명 배우를 알게 된다. 숨겨진 재능을 한눈에 간파한 그는 여자가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돕는다. 그가 가진 인맥과 도움으로 여자는 자신이 가진 스타성을 입증해 보이고, 그렇게 대배우의 길로 들어선다. 자신의 은인이기도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진 여자는 결혼을 함으로써 일과 사랑, 그 두 가지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자가 점점 더 유명해지고 잘 나가는 동안, 남자는 오랫동안 그를 괴롭히던 술 문제 때문에 경력의 내리막길을 걷는다. 여자는 어떻게든 사랑으로 그 모든 것을 안고 가려고 하지만, 남자는 갈수록 더 망가질 뿐이다. 여자는 남자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최전성기에 은퇴를 생각한다. 남자는 그런 아내에게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아서 비극적인 선택을 하고 마는데...

  윌리엄 웰먼 감독의 1937년작 '스타 탄생'의 줄거리는 그렇다. 어떻게 보면 뻔한, 그저 그런 이 이야기는 이후로 3번이나 리메이크되었다. 오리지널이라고 할 수 있는 1937년작에서는 주인공 비키 레스터 역을 재닛 게이너가 맡았다. 재닛 게이너는 당시에 아주 잘 나가는 여배우 가운데 하나였고, 이 영화의 제작자인 데이비드 셀즈닉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다. 이 고전적인 미인 배우는 솔직히 이 역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 영화가 개봉 당시 흥행에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은 당시 대중들이 이 여배우를 선호했음을 보여주기는 한다. 그러나 정적이고, 별다른 스타성을 보여 주지도 않는 재닛 게이너의 연기는 평이하며, 그리 큰 감동을 이끌어내지는 못한다. 무성 영화의 연기 스타일에 익숙한 것처럼 보이는 이 배우는 영화 속의 '스타'라기 보다는 비련에 빠진 여성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더 적합해 보인다.

  그런 것과 비교하면 조지 큐커의 1954년작 '스타 탄생'의 주디 갈란드는 온몸으로 자신의 스타성을 입증해 보인다. 정말이지 이 영화에서 주디 갈란드가 보여주는 춤과 노래, 연기는 재능의 정점에 있는 배우가 가진 모든 것 그 자체이다. 한마디로 주디 갈란드가 누구인지를 영화로 보여준다. 너무 길고 많은 뮤지컬 곡들은 때론 과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 영화의 프로덕션은 당시 주디 갈란드의 남편이었던 시드니 루프트가 맡았다. 그는 오랜만에 영화로 복귀하는 자신의 아내를 '띄워주기' 위해서 제작비를 그야말로 물쓰듯이 썼다. 이 영화의 제작비는 5백만 달러를 넘겼는데, 이것은 그때까지 헐리우드 영화 사상 최고의 제작비였다. 이전 최고 제작비 영화의 기록이 250만 달러였던 것에 비하면 워너사로서는 엄청난 투자였다.


  문제는 그것이 수익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다. 영화는 수익 분기점을 겨우 어렵게 넘겨서 6백만 달러를 얻었다. 물론 최고의 흥행 수익이기는 했다. 그러나 프로덕션 제작비에 나간 돈을 빼고 나니 워너사에는 남는 돈이 별로 없었다. 주디 갈란드는 제작 기간 내내 이런저런 병치레를 내세웠고, 그 때문에 촬영이 9개월이나 미뤄진 것도 이유였다. 워너 경영자들, 해리 워너와 잭 워너가 분노한 것은 당연했다. 시드니 루프트를 상대로 소송까지 제기했을뿐만 아니라, 추가로 제작하기로 한 작품 계약을 파기했다. 그 여파는 갈란드에게도 미쳤다. 부부 사이는 소원해졌고, 결국 갈란드는 남편의 폭력을 이유로 이혼에 이른다.

  1954년작에서 주디 갈란드의 상대역으로 나온 제임스 메이슨이 맡은 노먼 메인은 알콜 중독에 시달리는 유명 배우 역할이었다. 당시에 내로라하는 배우들에게 캐스팅 제의가 갔지만, 술에 찌들어 결국 비극적 선택을 하는 남자 주인공 역을 기꺼이 맡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조지 큐커는 말론 브랜도의 촬영장까지 찾아가서 제의를 했었는데, 브랜도의 대답은 이랬다.

  "지금이 내 인생에서 최고로 잘 나가는 때란 말입니다. 그런데 술에 찌든 머저리 역할을 하라고요? 지금 감독님 건너편에 있는 사람이 적당해 보이는데 어때요?"

  그때 건너편에 앉아있었던 배우, 말론 브랜도와 같이 '줄리우스 시저(Julius Caesar, 1953)' 영화를 찍고 있었던 바로 그 사람이 제임스 메이슨이었다. 그는 그렇게 노먼 메인이 되었고, 현실의 루프트 부인이었던 주디 갈란드를 잘 뒷받침해주는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술 때문에 인생을 망치는 것과는 달리, 제임스 메이슨은 노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배우 경력을 성실하게 이어갔다. 그러나 주디 갈란드는 아역 배우 시절부터 시작된 약물 남용 문제로 평생 골머리를 썩였고 그것 때문에 죽음에 이른다. 영화 '스타 탄생'이 보여주는 이 아이러니는 단지 한 여성 배우의 비극적 인생만을 부각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영화는 어떤 면에서 거대 영화 스튜디오의 냉혹한 일면을 보여준다. 관객은 상품성이 떨어진 배우가 어떻게 제작사에 의해 버려지고 잊혀지는지, 그리고 인기 절정의 배우에게서 최대의 이익을 끄집어 내려고 온갖 애를 쓰는지 보게 된다. '스타'는 대중들이 볼 때의 이미지이지, 제작사가 보기에는 자신들에게 돈을 벌어다줄 복잡한 기계의 작은 톱니바퀴같은 부품일 뿐이다. 그 부품은 잘 관리되어야 하며,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때에만 유용하다.


  특히 여배우들은 그렇게 소모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여배우들은 결혼과 임신도 전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지 못했다. 주디 갈란드는 돈에 미친 엄마와 제작사의 요구로 2번이나 중절 수술을 받았다. 경력 단절을 막기 위해서였다. 캐서린 햅번은 스튜디오의 그 횡포에 맞서 아예 결혼을 포기했다. 햅번은 자신의 경력에 가정과 아이 따위는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했다. 직업적인 성공이 우선이었던 이 배우가 내연 관계였던 스펜서 트레이시의 병간호를 위해 5년간 영화를 찍지 않은 것은 그야말로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1937년 '스타 탄생'의 주연 배우였던 재닛 게이너는 30대 중반에 은퇴의 길을 택했는데, 그 이유는 아이를 갖기 위해서였다. 그 시절의 여배우들에게 일과 가정을 병행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과업이나 다름없었다.

  일단 스타가 되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꽃길이고 인생은 순탄하게 잘 풀려나갈 것 같지만, 인생이란 것은 그렇게 쉽게만 흘러가지 않는다. '스타 탄생'은 은막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들려준다. 부와 명성, 엄청난 인기에 가려진 유명 배우의 삶 속에 깃든 슬픔과 외로움, 한순간에 그 모든 것이 끝날 수 있다는 불안함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고통을 관객들은 보게 된다. 너무나 높은 곳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별들도 언젠가는 추락할 수 있다. 그러므로 1937년작에서 주인공 에스터 블로젯(배우가 된 이후로는 비키 레스터란 이름을 쓴다)의 할머니는 꿈을 안고 헐리우드로 떠나는 손녀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네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언가를 희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하려므나."

  에스터는 자신이 원하는 스타가 되었지만, 한 남자의 행복한 아내는 될 수 없었다. 남자가 가진 내면의 유약함은 거칠고 냉혹한 거대 연예 사업에 맞지 않았고, 그것을 이기려고 선택한 술이 그를 파멸에 이르게 만든다. 한편으로 그 세계의 다른 이들은 도박, 마약, 여자 문제 그 밖의 문제들로 노먼과 같은 길을 걸었다. 스타가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재능이었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강한 정신력도 필요했다. 그것이 결여된 이들은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렇게 '스타 탄생'이 보여주는 은막의 앞과 숨겨진 뒤의 삶은 영화의 주연배우 주디 갈란드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보여주는 거울과도 같은 작품처럼 보인다.

  1954년작 '스타 탄생'은 최초 개봉 당시 러닝 타임이 3시간을 좀 넘겼는데, 그것은 수입을 위해 영화관의 상영 횟수를 늘리고 싶어하는 극장주들에게는 못마땅한 조건이었다. 워너사는 그 때문에 조지 큐커와 시드니 루프트의 반대를 무릅쓰고 30분을 잘라내 버린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영화는 3시간에 가깝게 복원이 되기는 했지만, 중간 중간 스틸컷으로 대체된 불완전한 복원이었다. 워너사에게는 돈만 많이 먹은 골칫덩어리 영화처럼 생각되었을 것이다. 잘려진 필름들은 창고에 처박힌채 잊혀졌고, 결국 이 영화는 헝겊을 덧대서 기운 옷처럼 온전한 모습을 찾지는 못했다. 주디 갈란드의 '순전한 재능'이 보석처럼 박혀있는 이 영화가 그런 모양새를 갖게 된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1937년작은 오리지널로서 드라마에 충실한 면모를 보여준다면, 1954년작은 주디 갈란드의 열연과 인물들 내면의 세밀한 심리 묘사가 돋보인다. 오리지널의 대사들은 거의 대부분 동일하게 재현되었다. 이 영화에서 노먼 메인이 자존감에 상처를 입게 되는 두 장면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는데, 비키에게 온 소포를 받는 장면과 노먼이 만취 상태로 즉결 심판에 넘겨진 장면이다. 비키에게 온 소포를 노먼이 받는데, 우편 배달부가 노먼에게 어떤 관계냐고 묻는다. 노먼이 남편이라고 하자, 우편 배달부는 '그럼 사인해주시죠, 레스터 씨.'라고 말한다. 소포를 받고 돌아서는 그의 얼굴 표정은 매우 어둡다. 이제 그는 비키 레스터의 남편 레스터 씨로 살아가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또 다른 장면, 즉결 심판에서 판사는 노먼에게 구류를 선고한다. 그러자 비키는 남편을 자신이 잘 돌보겠다면서 판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I will be responsible for him."

  이제 노먼은 배우 노먼 메인이 아닌, 아내 비키 레스터의 영향력 하에 놓이는 사람이 되었음을 관객은 알게 된다. 배우로서의 정체성도 잃었으며,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위치도 지키지 못한 그가 삶을 지탱하기란 어려워 보인다. 그렇게 그는 소멸의 길을 걷는다. 결국 홀로 남겨진 비키 레스터는 노먼의 장례식이 끝난 후 대중 앞에 다시 선 자리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저는 노먼 메인의 아내입니다."

  그렇게 비키 레스터, 아니 노먼에게는 에스터 블로젯이었던 여자는 자신을 빛나는 스타의 길로 이끈 남자를 기념한다. 그 선언은 슬프면서도 고결하다. 스타를 만들어낸 시스템 안에서 망가지고 부서져 버린 남편을 잊지않을 것이며, 자신은 그 시스템의 어떤 압력과 시련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다짐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 '스타 탄생'은 그렇게 은막 뒤에 감추어진 비정하고도 냉혹한 현실을 담아낸다. 



*사진 출처: warnerbr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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