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에 'Misty'라는 곡만 전화로 신청하는 여자가 있다. 작은 도시의 라디오 방송 DJ 데이브 가버(클린트 이스트우드 분)는 자신이 늘 가던 술집에서 여자와 우연히 만나게 된다. 여자의 이름은 이블린(제시카 월터 분). 데이브는 별 생각없이 여자와 하룻밤을 보낸다. 그런데 이 여자, 갑자기 애인이라도 된 것처럼 부담스럽게 다가온다. 밥을 해주겠다며 장 봐서 집으로 들이닥치는가 하면, 자기 혼자 약속 정해놓고 왜 안오냐며 난리를 친다. 큰 방송국 담당자와 식사를 하는 자리에 나타나서는 늙은 여자와 왜 만나냐며 온갖 욕설을 퍼붓는다. 어떻게든 관계를 정리하려고 하지만 여자는 막무가내, 급기야 자해 소동까지 벌인다. 예전의 여자 친구와 다시 잘해보려고 하는 마당에 저 정신 나간 여자를 대체 어떻게 해야할까? 바람둥이 DJ 데이브는 그렇게 예기치 않은 난관에 부딪힌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1971년작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Play Misty for Me)'는 그의 첫 감독 데뷔작이다. 심리 스릴러물에 스며든 재즈 음악이 무엇보다 관객의 귀를 사로잡는다. 에롤 가너가 작곡한 1955년의 재즈 스탠다드 곡 'Misty'가 주요한 테마 음악으로 흘러나온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신이 좋아하는 재즈 음악을 영화 속에 여유롭게 펼쳐 놓는다. 이 영화에서 음악이 가지는 부분은 꽤나 크다. 관객은 스릴러물이 주는 심리적 압박을 중간 중간 나오는 음악으로 인해 약간씩 풀어놓을 수 있다. 주인공 데이브가 여자 친구 토비(도나 밀스 분)와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서는 로버타 플랙(Roberta Flack)의 '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가 나온다. 그뿐만이 아니다. Monterey Jazz Festival의 연주 실황이 나오기도 한다. 이쯤 되면 영화의 장르가 스릴러가 아니라 음악 영화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유명인에게 광적으로 집착하는 팬의 이야기. 아마도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영화의 이미지는 '미저리(Misery, 1990)'의 캐시 베이츠일 것이다. 이 영화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DJ 데이브에게 광적으로 집착하는 이블린 역은 제시카 월터가 맡았다. 평범한 얼굴 속에 감추어진 광기를 순간적으로 폭발시키는 제시카 월터의 연기가 매우 뛰어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제작사인 유니버셜에서 내정한 배우 대신, 자신이 직접 제시카 월터를 캐스팅했다. 시드니 루멧의 영화 'The Group(1966)'에 나온 월터의 연기를 눈여겨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눈은 정확했다. 제시카 월터는 이 영화의 연기로 극찬을 받았다. 비록 제인 폰다에 밀려서 골든 글로브 연기상은 놓쳤지만, 이 영화는 제시카 월터의 '인생 영화'라고 할 만하다.


  질투심에 미쳐버린 이블린을 두려워하는 데이브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골수 마초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낯선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그 때문에 역시 이스트우드와 같은 과 마초 스티브 맥퀸은 이 역을 거절했다. '자신을 넘어서는 여자 캐릭터가 있는 영화는 출연하기 싫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어서 직접 주연과 감독을 맡는다. 감독을 하게 해주는 댓가로 출연료를 적게 받았지만, 그에게는 감독으로서의 영화 경력을 시작하려는 대단한 의욕이 있었다.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는 꽤나 순조로운 감독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좋은 흥행 성적을 거뒀고,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는 영화적 역량에 자신감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캐스팅부터 촬영 장소 선정(캘리포니아의 Camel-by-the-sea, 그는 후에 이 도시의 시장을 맡기도 했다)에 이르기까지 이스트우드는 전권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다. 또한 정해진 촬영 스케줄을 예상보다 일찍 끝내서 제작비를 아끼는 절약 정신도 보여줌으로써 제작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영화 내적으로는 느슨하고 엉성한 서사가 눈에 띈다. 여자 친구 토비와의 애정신은 거의 준 포르노급으로 관객의 눈요기용으로 끼워넣은 것이나 다름없다. 거기에다 데이브가 토비와 함께 Monterey Jazz Festival을 돌아다니는 장면에서 나오는 공연 실황은 좀 뜬금없다. 영화 찍은 필름을 어디다 잃어버려서 대신 끼워넣은 것이냐는 비아냥이 나올 법도 하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감독으로서 첫발을 내딛는 이스트우드의 야망과 도전 정신을 보여 준다. 그가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으며, 또한 흥행에 민감한 감각도 가지고 있음을 입증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감독으로서의 좋은 시작을 보여준 이 영화는 실패한 앨범들로 낙담해 있던 로버타 플랙에게는 재기의 발판이 되어주기도 했다. 제시카 월터는 호평받은 연기에도 불구하고 영화 쪽에서 인상적인 경력은 남기지 못했다. 대신에 TV 시리즈물 쪽으로 방향을 선회해서 인기를 얻었다. 아마도 이 영화의 가장 큰 수혜자는 여주인공 이블린의 유일한 신청곡 'Misty'를 작곡한 이가 아닐까 싶다. 재즈 팬들에게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는 에롤 가너와 'Misty'를 결코 잊지 못하게 만드는 영화로 남았다.   



*사진 출처: bluray.highdefdigest.com



**다음 글은 화요일에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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