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정원사로 살아온 챈스(피터 셀라스 분)은 자신의 고용주가 죽자, 자산을 정리하는 변호사들로부터 퇴거 명령을 받는다. 이제까지 살아온 집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챈스는 오직 TV로만 세상을 배워왔다. 백치에 가까운 챈스는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는데, 길에서 차에 부딪히는 사고를 당한다. 차주인 대부호의 아내 이브(셜리 맥클레인 분)는 부상당한 챈스를 집에 데려오고, 챈스는 이브의 대저택에서 치료를 위해 머무르게 된다. 이브의 남편 벤(멜빈 더글라스 분)은 엄청난 재력가로 정계의 막후 실력자이기도 하다. 벤은 챈스의 과묵하고 절도있는 태도를 보며 은퇴한 사업가로 생각하며 호감을 갖는다. 벤의 집에 대통령이 정기적인 모임을 위해 찾아온 날, 챈스는 경제 상황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짤막하게 말하는데 그것은 벤과 대통령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 그로부터 챈스는 의문의 정계 실력자로 부상하며 TV 토크쇼까지 나가는 유명세를 탄다. 벤은 자신의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이브를 부탁하기까지 하는데, TV밖에 모르는 바보 챈스는 과연 이 갑작스러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할 애쉬비 감독의 1979년작 '챈스(Being There)'는 TV만 보고 살아온 백치 정원사 챈스의 모험담을 그린 코디미 영화다. 이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주인공 챈스 역을 맡은 피터 셀라스의 연기라고 할 수 있다. 언젠가 영문 자료를 읽다가 'deadpan humor'라는 단어를 본 적이 있는데 그것이 어떤 코미디 연기를 의미하는 것일까 궁금했었다. 챈스를 연기한 피터 셀라스의 연기를 보고나서야 그 무표정한 얼굴로 보여주는 웃음의 연기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 어떤 감정이나 생각도 드러내지 않는 챈스의 고요하면서도 침착한 얼굴은 그야말로 피터 셀라스만의 고유한, 세련된 연기 기교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 독보적인 연기를 보여준 피터 셀라스는 극단을 운영했던 배우 부모로부터 재능을 물려받았다. 그는 영화 '핑크 팬더(The Pink Panther, 1963)'의 클루소 탐정 역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영화 속 챈스의 말과 행동은 모두 TV에서 보고 들은 것에서 나온다. 그는 말하자면 '미디어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챈스가 세상살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임에도 불구하고 바깥 세상에서 이용당하고 버려지기는 커녕 유력 정재계 인사들이 두려워하는 인물로 부상하는 역설을 보여준다. 거기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은 TV를 비롯한 언론 매체이다. 바로 그 점이 이 영화가 트럼프 정권 시기에 새롭게 부각되게 만들었는데, 트럼프란 인물이야말로 TV 리얼리티 쇼를 통해 쌓은 이미지로 궁극에는 대통령 자리까지 꿰어찬 입지전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인물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배경 보다는 미디어가 만들어낸 허상의 이미지가 어떤 가공할 영향력을 가지는지를 트럼프 정권은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런 의미로 'Being There'은 정치인 트럼프의 출현을 예견하는 영화로 과거로부터 새롭게 끌어올려졌던 것이다. 

  이 영화는 폴란드 출신의 미국 작가 저지 콜신스키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콜신스키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의 작업에 직접 참여했다. 그는 국제 펜클럽(PEN International)의 미국 지부 회장을 2번이나 맡을 정도로 유명인사였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온갖 거짓말과 사기, 표절 혐의로 얼룩져 있었다. 자신의 유명세를 바탕으로 재벌가의 미망인과 결혼하기도 했던 그는 생의 마지막에 자신의 둘러싼 거짓들이 밝혀지면서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선택을 하고 말았다. 그가 1970년에 발표한 'Being There'은 어떤 면에서는 그의 미국 생존기처럼 보인다. 대단한 입담과 거짓말로 미국에서 유명인사로 살아남은 그가 쓴 자전적 고백인 셈이다. 나는 적어도 이 작품만큼은 표절이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Being There'의 감독 할 애쉬비는 1970년대 미국 영화의 사회 비판적이고 독립 영화적인 경향을 보여주는 '뉴 아메리칸 시네마(New American Cinema)'의 인물로 분류된다. 그러나 그의 영화는 그런 사조로 정의할 수 없는 뭔가 기이하고 삐딱하게 치고 나가는 지점을 가지고 있다. 이 영화야말로 그런 할 애쉬비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덧붙여진 피터 셀라스의 대사 엔지 장면이 그렇다. 감독의 고유한 발언으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음에도 이 마지막 부분은 영화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흠집으로 남았다. 주연 배우 셀라스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면서 애쉬비에게 제발 그 장면을 빼달라고 여러 번 요구했으나 애쉬비는 거절했다. 이 성깔 대단한 감독은 영화 경력의 부침을 겪으면서 약물 문제로 고생하기도 했다. 나에게는 잭 니콜슨이 주연한 그의 영화 '마지막 지령(The Last Detail, 1973)'이 꽤 인상깊었던 기억이 난다.

  어떤 영화 한 편을 본다는 것은 그 영화의 감독과 배우들을 둘러싼 이야기와 인생을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원작자와 감독, 배우의 굴곡진 인생사에서 어쩌면 가장 정점은 이 영화에 드러나지 않는 한 명의 여자 배우일 것이다. 바로 피터 셀라스의 4번째 부인 린 프레데릭이다. 고혹적인 외모로 모델과 배우로 활동했던 린이 52세의 셀라스와 결혼할 때의 나이는 스물 셋이었다. 셀라스는 평소 심혈관 질환을 가지고 있었고, 거기에다 우울증으로 고생하기도 했다. 셀라스는 아내 린이 그런 자신의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주길 바랬다. 영화 'Being There'을 찍을 때 린은 셀라스의 촬영 현장을 늘 함께 해야만 했는데, 그것은 린 자신의 뜻이라기 보다는 남편의 요구 때문이었다. 린은 셀라스의 뜻에 따르느라 배우로서의 경력도 이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듬해인 1980년에 셀라스가 사망하자, 린은 셀라스의 유산 대부분을 상속 받는다. 그 액수는 오늘날로 환산하면 무려 300억원에 가까운 돈이었다. 문제는 셀라스에게는 전처 소생의 자녀 세 명이 있었는데 그들에게는 겨우 500만원씩의 재산만이 상속되었다는 데에 있었다. 보다 못한 셀라스의 지인들이 나서서 자녀들에게 유산을 좀 나누어 주라고 부탁했지만, 이 젊은 미망인은 단호히 거절했다. 단지 3년을 함께 한 남편의 재산 대부분을 가져가면서 유자녀에게는 한 푼도 내어주지 않은 린을 향해 언론과 사람들이 보내는 멸시와 조롱, 비난은 당연한 것이었다.

  결국 린은 조국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가는데, 아마 할리우드에서 자신의 영화 경력을 이어가겠다는 바램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라고 해서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할리우드에서 린은 출연 불가 배우였다. 린은 자신의 직업적 경력을 더이상 이어갈 수 없었고, 이후로도 2번의 결혼과 이혼을 이어가다 서른 아홉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떴다. 사인은 명백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알콜 중독과 연관이 있다는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린은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러 번의 재활 치료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돈과 인생을 맞바꾼 셈이었다.

  영화 'Being There'의 마지막 장면은 참으로 기이하다. 벤의 장례식에 참석한 챈스는 중간에 자리를 떠서 근처의 호수를 거닌다. 그가 호수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데, 그는 물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 위를 '걷는다'. 이 수수께끼 같은 마지막 장면은 챈스라는 인물의 인생 자체가 꿈과 같은 허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나에게는 그 장면이 챈스를 연기한 피터 셀라스의 마지막 여자 린 프레데릭의 인생과도 묘하게 겹쳐 보인다. 주체할 수도 없는 엄청난 돈에 집착했고, 결국에는 그것에 질식해서 서서히 죽어갔던 삶. 더이상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허공 속으로 사라진 삶. 'Being There'은 그렇게 영화에 나오지 않은 한 여자의 비극적 인생의 한 장면을 감추어 둔 것처럼 보인다.          



*사진 출처: cinemacloc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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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그렇게 날 키워달라고 했어? 그 지긋지긋한 소리 좀 집어쳐."

  그런 말을 하는 막내 동생 크리스(로버트 와그너 분)를 나이든 형 재커리(스펜서 트레이시 분)는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 자식처럼 키워왔다. 그러나 크리스는 그런 형에게 주먹 날리는 일도 서슴지 않는 막돼먹은 동생이다. 크리스는 산골 마을 호텔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며 사는 자신의 삶을 견딜 수 없다.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서 그곳을 뜨는 것이 소원인 크리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앞에 자리한 몽블랑 정상에 인도 여객기 한 대가 추락한다. 급파된 구조대는 승객들을 구하러 산에 갔다가 눈과 험한 산세에 그냥 내려오고 만다. 크리스는 불시착한 비행기에 금괴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형에게 같이 산에 가자고 한다. 오랫동안 산에 올랐고, 산을 사랑하는 재커리는 10년 전 마지막 등반에서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더이상 산을 오르지 않는다. 형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크리스는 혼자 가겠다고 나서고 그런 동생을 보다 못한 재커리는 함께 등반에 나선다. 천신만고 끝에 산 정상에 오른 형제. 죽은 자들의 값나가는 유류품을 쓸어담는 크리스를 보며 재커리는 탄식한다. 비행기 안을 살펴보다 여자 승객 한 명이 살아있음을 발견한 크리스. 그냥 죽게 내버려 두고 떠나자고 하지만, 재커리는 그럴 수 없다. 이 형제의 하산길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에드워드 드미트릭 감독의 1956년작 '산(The Mountain)'은 산과 두 형제의 운명적 갈등을 담아낸다. 프랑스 작가 앙리 트로야의 '눈의 탄식'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산악 영화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처럼 컴퓨터 그래픽이나 효과적인 촬영 도구가 없었을 때에 찍은 영화임에도 나름대로 박진감이 넘친다. 등반의 중요한 장면들은 당연히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것과 배경을 합성한 것이다. 지금의 영화 기술이라면 더 좋은 장면으로 만들 수 있었겠지만, 영화는 그런 볼거리 보다는 두 형제의 이야기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돈에 눈이 멀어 죽은 이들의 유류품을 마구 훔치는 동생 크리스. 유일하게 살아남은 여성 승객을 형이 구조해서 데려가려고 하자, 자신의 범죄 행위가 드러난다며 여자를 죽이려고까지 한다. 그런 사악한 동생과는 달리, 우직하고 성실하며 착한 심성을 가진 늙은 형 재커리는 어떻게든 여자를 살리려고 애를 쓴다. 선과 악처럼 명확하게 구분되는 이 형제. 어떻게 한 부모에게서 저렇게 대비되는 자식들이 태어났을까? 원작자 앙리 트로야는 악인이란 천성적으로 타고난 것이며, 결코 고치거나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하는듯 하다.

  사실 이 영화는 서사 자체가 그다지 극적이거나 대단한 흥미를 유발하지 않는다. 산을 대하는 두 형제의 대비되는 모습, 탐욕에 눈 먼 크리스와 따뜻한 인간성을 지닌 재커리 이 두 형제를 카메라는 묵묵히 따라간다. 평이한 내러티브,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결말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긴장감을 잃지 않는다. 에드워드 드미트릭 감독의 충실한 연출과 스펜서 트레이시의 무게감 있는 연기 덕분이다. 크리스 역의 로버트 와그너는 망종(亡種)같은 동생 역을 아주 잘 해내는데, 이 조각같은 외모의 배우는 어쩌면 자신의 내면을 드러낸 연기를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헐리우드에서 바람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던 그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배우 나탈리 우드의 남편이기도 했다. 아내의 사망 당시 요트에서 같이 있었던 와그너는 아내의 익사에 연관이 있다는 의혹을 평생 동안 떨치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이 영화 속 그의 빛나는 외모에서 어떤 서늘한 비정함과 냉혹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에드워드 드미트릭 감독은 험프리 보가트 주연의 '케인호의 반란(The Caine Mutiny, 1954)'으로 잘 알려진 감독이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보내고 영화사의 말단 직원에서부터 경력을 시작한 그는 영화의 모든 것을 밑바닥에서부터 구르면서 배워나갔다. 그런 그가 자신의 첫 영화를 찍은 것이 스물 일곱. 그저 그런 B급 작품들이라도 열심히 찍었던 그에게 영화는 삶의 구원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마침내 194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그는 메이저 영화사에서 비중있는 감독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그의 영화 경력은 시대의 광풍을 만나서 좌절되고 만다. 당시에 미국을 휩쓸던 매카시즘의 마수가 영화계에까지 미친 것이다.


  공산주의자로 찍혀서 이른바 할리우드 블랙리스트에 오른 그는 동료들을 밀고하라는 요구를 거부한다. 실형을 선고 받고 영국으로 도망쳐서 그곳에서 영화 경력을 이어가려고 했으니 여의칠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다시 돌아온 드리트릭은 4개월 남짓 수감 생활을 한 후에 영화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는 동료들에 대한 모든 정보를 넘겨주고 할리우드로 복귀한다. 그의 동료들은 거의 대부분 영화계로 돌아오지 못했지만, 드미트릭은 다시 날개를 달고 자신의 영화 경력을 이어갈 수 있었다. 누군가의 시각에서는 배반이었겠지만, 이 감독에게 있어 영화와 함께 할 수 없는 삶은 죽음과 같았다. 미친 시대를 견디려면, 의리와 고귀함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영화의 결말부, 무사히 승객을 구조한 재커리는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게 되지만, 그는 결국 자신이 아끼던 동생을 잃는다. 그건 어떤 면에서 드미트릭 자신의 이야기와도 겹친다. 자신의 경력을 위해 한때 함께 했던 동료들을 버려야 했던 비운의 감독. 영화 '산'을 보면서, 시대의 격랑을 헤쳐나간 한 감독의 기구한 인생도 들여다 보게 된다.

 

 

*사진 출처: dvdbeaver.com




*다음 글은 목요일에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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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1-03-24 04:44   좋아요 0 | URL
정말 어렸을때 TV 명화극장을 통해 본 영화네요.
그날 아버지께서 좋은 영화니까 보고 자라고 해서 꼼짝않고 끝까지 다 보고 잤어요.

푸른별 2021-03-25 16:13   좋아요 0 | URL
그런 추억이 있군요. 오래전 영화들은 그런 추억들과 함께 기억되는 것 같습니다.
 

 

  스토니(제이다 핀켓 분)는 경찰의 오인 사격으로 착한 남동생을 잃었다. 은행원 프랭키(비비카 폭스 분)는 은행 강도가 같은 동네 사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해고당했다. 청소일을 하며 홀로 아기를 키우는 티션(킴벌리 엘리스 분)은 보모 구할 돈이 없어서 아이 양육권을 아동보호국에 빼앗긴다. 클레오(퀸 라티파 분)는 청소일로 겨우 먹고 사는 가난에 찌든 삶이 지긋지긋하다. 같은 동네에서 20년 넘게 알고 자란 4명의 흑인 친구들은 출구 없는 인생에서 크게 한탕할 꿈을 꾼다. 은행을 털어 그 돈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기로 마음 먹은 것. 처음엔 어설프게 시작한 은행털이가 갈수록 대담해지고 훔친 액수도 커진다. 경찰의 추격이 시작되고, 4명의 친구들은 막다른 길에 다다른다. F. 게리 그레이의 1996년작 'Set It Off'는 당시로서는 좀 드문, 흑인 하층 여성 4명을 주인공으로 한 범죄 액션물이다.

  영화 속 각각의 인물들이 가난하지만 착실한 삶을 살아가던 이들에서 은행 강도로 돌변하는 그 과정이 그다지 매끄럽지는 않다. 영화는 막막한 삶의 출구가 범죄로 이어지는 이유를 불평등하고 부당한 사회의 탓으로 손쉽게 돌려 버린다. 삶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은행을 털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Set It Off'의 주인공들은 그런 생각을 곧 실행에 옮긴다. 그들이 감행한 2번의 습격은 성공했지만, 마지막 시도는 비극으로 끝난다. 4명의 흑인 여성 강도단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다. 이야기가 군데군데 비어있는 이 엉성한 범죄 액션물은 비교적 저예산인 9백만 달러의 제작비가 들었는데, 흥행 수익은 대박을 쳤다. 제작비의 4배가 넘는 돈을 벌어들였고, 영화의 OST 음반은 불티나게 팔렸다. 감독 F. 게리 그레이는 흑인 래퍼 아이스큐브(Ice Cube)의 뮤직비디오를 찍으며 경력을 쌓아가다가, 제작사 뉴라인 시네마의 눈에 들어서 이 영화를 찍게 되었다. 당시에 그의 나이는 고작 26살이었다. 뮤직비디오 감독답게 감각적인 영상이 돋보이기는 하지만, 뜬금없이 들어간 러브신과 영화 '대부(1972)'의 일부를 차용해서 넣은 장면들은 실소를 나오게 만든다. 비평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상당히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내가 궁금하게 생각했던 것은 도대체 이 영화가 어떻게 흥행에 성공했느냐는 점이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델마와 루이스(1991)'에서 영감을 받았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 영화를 인상적으로 본 뉴라인 시네마의 제작 담당자가 시나리오 작가 Takashi Bufford에게 그런 비슷한 이야기를 써보라고 한 것이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뷰포드는 시나리오를 써서 냈지만, 3번이나 거절당했다고 15년이 지난 후 인터뷰에서 말했다(출처 Blackfilm.com). 제작사에서는 흑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범죄 액션 영화가 도저히 흥행이 될 것 같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달랐다. 'Set It Off'는 뉴라인 시네마에 꽤 두둑한 돈을 안겨주었고, 이 영화의 성공으로 감독  F. 게리 그레이는 성공적으로 영화계에 안착할 수 있었다. 비평가의 시각으로는 한심한 작품이었지만, 대중의 반응은 그와는 반대였던 것이다.

  어째서 영화적 완성도가 떨어지고, 서사의 완결성도 갖지 못하는 어떤 영화들은 흥행에 성공하는가? 내 기억 속에 떠오르는 2편의 한국 영화가 있다. '미녀는 괴로워(2006)', '7번방의 선물(2013)'이 그것이다. 그 영화들이 개봉되었을 때, 흥행에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 영화들은 크게 흥행에 성공했고, 혹평을 퍼붓은 많은 비평가들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두 영화가 과연 잘 만든 영화인가? 당시 이 영화를 두고 내 주변의 반응들은 그랬다. '어떤 영화가 흥행이 될 것인지를 점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들이 나왔다. 영화에 대한 대중의 취향을 안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2021년 한국의 방구석에서, 먼 바다 건너 미국이란 나라, 1996년의 영화 관객들의 성향을 헤아려 보는 것은 난감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나는 2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그다지 시덥지 않은 영화 보기에 낭비했다는 사실 보다도, 'Set It Off'라는 영화가 당시의 관객들에게 어떤 소구력(訴求力)을 가졌는지 알아낼 수 없다는 점이 답답할 뿐이다. 대충 추측해 보기로는 그렇다. 1991년에 있었던 로드니 킹 사건의 여파가 흑인 사회에 지속되고 있었고, 그에 대한 흑인들의 불만이 제대로 된 출구를 찾지 못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는 영화 속에서 억눌리고 차별받는 4명의 흑인 여성들의 거침없는 범죄 행각과 폭주가 대리만족을 주었을 것이다. 또한 영화에서 음악이 가진 비중이 눈길을 끈다. 클레오 역을 맡은 퀸 라티파가 은행을 털러 갈 때마다 차에서 틀었던 노래들은 거칠고 폭력적인 가사의 랩 음악들이었다. 실제로 때려 부술 수 없는 부당한 현실은 영화 속의 음악과 주인공들을 통해서 일격을 당하고 균열을 일으킨다. 'Set It Off'는 기존의 블랙 필름(Black Film)이 보여준 남성 주인공들의 액션, 코미디의 장르에서 탈피해 여성 주인공들의 과감한 범죄 액션물을 표방한다. 흑인 관객들 사이에서도 여성 흑인 관객들을 겨냥한 '틈새 시장'을 개척한 영화인 셈이다.


  특정 시대의 '관객성'에 대한 연구나 논문을 쓰는 것은 꽤나 어렵고 까다로운 일로 여겨진다. 우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볼 수도 없고, 다양한 관객의 취향을 하나로 뭉뚱그려서 요약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그런 것을 헤아려 보고 알아내려는 노력이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영화는 분명히 '시대의 호흡'으로 대중의 기호와 공명한다. 영화 비평이 단지 텍스트 하나만을 조각조각 내어서 해체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단편적인 시각일 뿐이다. 영화가 만들어진 시대와 그 시간을 살았던 이들에 대한 고찰은 중요하고 의미있는 작업이다. 다소 시시하고 너절한 이 영화 'Set It Off'를 보면서 1996년의 미국, 흑인 관객들, 특히 하층민의 여성 관객들이 이 영화를 통해 얻고자 했던 대리만족과 그 어떤 꿈들을 잠깐 동안이나마 생각했다.    



*사진 출처: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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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도입부, 시끄럽게 돌아가는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의 모습이 강렬한 비트의 음악과 함께 나온다. 오프닝 타이틀에 찍힌 'Directed by Paul Schrader'가 보인다. 내가 감독도 아닌데, 왜 그걸 보고 가슴이 뻐근해졌나 모르겠다. 아마도 영화 비평과 시나리오 작가로 글만 쓰다가 처음으로 자신의 작품을 찍게 된 폴 슈레이더의 심정에 뭔가 감정이입이 되었던 것이겠지. 1978년에 찍은 영화 '블루 칼라(Blue Collar)'는 폴 슈레이더의 영화 데뷔작이다. 각본은 그와 그의 형 레너드가 공동으로 썼다. 주연 배우로는 하비 카이텔, 리처드 프라이어, 야펫 코토가 나온다. 영화는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는 세 명의 친구들의 어긋난 우정과 파국을 그려낸다.

  지크(리처드 프라이어 분), 제리(하비 카이텔 분), 스모키(야펫 코토 분)는 자동차 회사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다. 서로 허물없이 지내며 삶의 고민을 나누는 그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돈'이다. 3명의 아이를 둔 지크는 소득 탈세로 국세청 직원이 찾아와서 체납 세금을 내라고 닥달을 받았다. 제리는 딸의 치아 교정기에 들어갈 돈을 마련하지 못해서 전전긍긍한다. 2번의 전과 경력이 있는 스모키의 관심사는 오로지 유흥이다. 여자와 마약으로 찾은 삶의 탈출구를 제리와 지크에게도 가끔씩 선사한다. 스모키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지크는 노조 사무실의 금고를 털자고 제안한다. 어설프게 결성된 3인조 강도는 사무실 금고를 탈취하는데 성공한다. 그런데 금고를 뜯어보니 돈이라고는 600달러뿐. 허탕을 쳤나 싶었는데, 지크는 노조의 비밀 장부를 발견한다. 장부에는 노조가 노조원들 몰래 기금으로 고리대금업을 하면서 이자를 빼돌리고 있다는 사실이 적혀있다. 돈 대신에 그걸로 노조에 협박 편지를 보낸 지크. 지크가 노조 임원으로부터 간부 자리를 약속 받은 반면, 제리와 스모키는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 과연 이들의 앞날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영화는 시종일관 거칠고 고단한 하층 노동자의 삶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이른바 영어의 욕설 'F word'가 이렇게 많이 나오는 영화는 나도 처음 봤다(영화 전체를 통털어 158번이라고 한다). 영화에서 가장 많은 대사와 배역 비중을 가진 지크 역의 리처드 프라이어가 욕설의 절반은 담당한 것 같다. 당시 스탠드 업 코미디언으로 인기를 끌었던 리처드 프라이어는 자신의 유명세를 바탕으로 영화로까지 활동 영역을 넓히는 중이었다. 그는 이 영화에 출연하기 전에 찍은 1인 3역의 코미디 'Which Way is Up?(1977)'에서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블루 칼라'의 배역에 더 의욕을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그 의욕이 너무 지나쳤다는 데에 있었다.


  그는 대본에도 없는 대사를 길게 만들어서 자기 비중을 높이려고 애를 썼다. 촬영 현장에서 그걸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영화 속에서 티격태격하는 캐릭터였던 세 명의 주연 배우들은 실제로도 사이가 좋지 못했다. 그냥 말로만 싸운 것이 아니라 치고 박는 육탄전까지 벌어졌다. 이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바로 감독 폴 슈레이더였다.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첫 영화를 찍게 되었는데, 그야말로 진상 배우 하나가 나대서 난리를 치니 그 심정이 어땠을까? 프라이어와 제일 많이 대립했던 하비 카이텔은 촬영 그만두고 중간에 가버리려고까지 했다. 골칫덩이 프라이어는 심지어 슈레이더에게 총을 들이대며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슈레이더의 정신적 고통이 극심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이 진상 배우 프라이어는 영화의 연출까지 지가 해보려고 했던 모양이다. 영화가 흑인의 정치적 영향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며 강한 목소리를 냈다. 카메라에다 재떨이 던지고 난리치는 폭력이 난무했던 촬영 현장에서 폴 슈레이더가 어떤 모습으로 있었을지 생각해 보면 참 마음이 짠해진다. 초짜 감독의 드높은 꿈과 이상은 쪼그라들다 못해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영화에는 세 명의 주인공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과 적대감이 여실히 드러난다. 스모키의 죽음 이후 서로 대립하는 제리와 지크.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 속에서 고조되는 하비 카이텔과 리처드 프라이어의 갈등은 매우 사실적이다. 지크와 갈라서기 전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는 제리의 얼굴 표정은 진짜 더러운 뭔가를 응시하는 것 같다. 오로지 자기 분량 늘리기, 배역 돋보이기에 집착하는 프라이어에 카이텔이라고 별 수 있었을까? 심지어 이 영화는 포스터 마저도 리처드 프라이어의 얼굴만이 양쪽으로 나온다. 다른 배우들이 그렇게 쩌리 취급되었던 것은 '흥행' 때문이었다. 제작사는 인기 있는 프라이어의 이름에 기대어 돈을 벌고 싶었을 것이다.

  '진상 배우를 상대하는 법'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할까? 감독 폴 슈레이더는 그저 참고 견디는 수 밖에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슈레이더가 오죽이나 고생을 했으면, 이 영화를 개봉 이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보살 감독 슈레이더는 어쨌든 자기 몫을 해냈다. 촬영장에서는 지지고 볶고 난리를 쳤어도, 영화 속 이야기에는 모든 것이 온전하고 충실하게 담겨있다. 그야말로 인간 승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는 노조와 노조원 사이의 갈등, 권력을 가진 이들이 획책하는 노동 계층 내의 분열, 노동 현장의 문제, 이런 묵직한 주제들을 개연성 있는 서사로 풀어낸다. 진상 배우에게 그토록 시달리면서도 그런 완성도를 보여준 슈레이더는 분명 대단한 감독임에 틀림없다. 나에게 이 영화의 오프닝 타이틀에 올라간 그의 이름이 유독 크게 다가오는 이유는 아마도 그런 데에 있었을 것이다. '괜찮아요, 폴, 당신의 이 영화는 정말 좋은 작품이에요!'라고 이 글을 끝맺고 싶다.       



*사진 출처: artforum.com 가운데가 리처드 프라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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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
알랭 드 보통.존 암스트롱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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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렝 드 보통은 꽤나 잘 나가는 작가인 모양이다. 이 사람 책이 많이 번역된 것은 잘 팔린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난 그가 쓴 책을 읽고 나서 좋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깊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가볍고 현학적인 문체로 포장을 잘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여행의 기술'의 그 경박스러움과 너절함,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의 자의식 과잉에 그냥 질려버렸다. 아, 이 사람 책은 그냥 걸러야겠네, 라고 생각한 것이 오래전이다. 이 사람의 가장 큰 문제는 소설도 잘 쓰지 못하면서, 오만가지 잡학 지식을 가지고 철학자 노릇까지 하려든다는 점이다. 이 책은 그가 미술사학을 전공한 이와 토론하고 쓴 미술사 책이다. 당연히 무슨 대단한 전문적 지식은 찾아볼 수 없다.

  겉만 번지르르한 수사와 깊이있게 보이려는 온갖 철학적 문구들을 갖다 붙였지만 그 얄팍스러움이 어디 갈까? 미술사학 전공자만이 미술 책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 평론 쓰는 사람들이 죄다 영화 전공한 것이 아닌 것처럼. 적어도 해당 분야에 대해 글을 쓰고 책을 내려면 좀 공부라도 제대로 하고, 자기 성찰이나 잘 한 다음에 쓰던가. 이 책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점은 알렝 드 보통이 자기가 미술사에 정통한 것처럼 군다는 사실이다. 뭐 얼마나 미술사 책을 들여다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현학적이고 장황하게 늘어지는 문장들 속에서 뭔가 건질만한 지식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다지 좋지 않은 투박한 번역도 가독성을 떨어뜨린다. 화려한 빈 껍데기. 이 책을 덮고나서 나에게 떠오른 이미지는 그랬다.

  이 책에서 그나마 건질만한 것은 괜찮은 도판들 보는 재미 정도나 될까? 책의 초반부에 나온 어떤 그림이 무척 반가웠다. '사이 톰블리(Cy Twombly)'의 그림으로, 화가 이름을 안보고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여기에서 반갑다는 것은 좋아한다는 뜻이 아니라, 과거의 추억을 되새겨주게 만들었다는 뜻이다. 벌써 20년도 훨씬 더 전의 일인데, 사이 톰블리의 그림 몇 점이 어느 갤러리에서 전시된 적이 있었다. 그걸 찾아가서 보았을 때의 그 당혹스러움과 난감함이란... '나는 누구, 여긴 어디'를 느끼게 만들었다고나 할까. 커다란 캔버스에 아무리 봐도 애들 낙서 같은 작은 글씨와 알 수 없는 문양들이 군데 군데 흩어져 있는 그림들이었다. 그런데 그가 현대 회화의 거장이란다. 내가 이해하기 힘든 현대 미술의 그 도저함에 발걸음을 돌리며 갤러리를 나왔던 기억이 난다. 사이 톰블리가 그렇게 뜬 데에는 잘 나가는 화상(畫商) 레오 카스텔리, 톰블리의 후예들인 바스키아와 낙서 미술가들이 한 몫을 했겠지만.

  책에 나온 현대 회화 도판들, 사진들, 설치 미술 작품들을 보다 보면 지금의 예술계가 돈과 상업성에 얼마나 깊숙히 발을 담그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어떤 개념을 선점하고 그것을 얼마나 잘 포장하느냐가 잘 나가는 미술 작가가 되는 지름길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도무지 깊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이 책처럼, 예술이 지나치게 자본과 결탁하고 거기에 자신의 영혼을 팔아버릴 때, 어느 정도까지 추락할 수 있는가를 찬찬히 생각하게 된다. 그런 저런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는 점만이 이 책의 유일한 장점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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