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니(제이다 핀켓 분)는 경찰의 오인 사격으로 착한 남동생을 잃었다. 은행원 프랭키(비비카 폭스 분)는 은행 강도가 같은 동네 사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해고당했다. 청소일을 하며 홀로 아기를 키우는 티션(킴벌리 엘리스 분)은 보모 구할 돈이 없어서 아이 양육권을 아동보호국에 빼앗긴다. 클레오(퀸 라티파 분)는 청소일로 겨우 먹고 사는 가난에 찌든 삶이 지긋지긋하다. 같은 동네에서 20년 넘게 알고 자란 4명의 흑인 친구들은 출구 없는 인생에서 크게 한탕할 꿈을 꾼다. 은행을 털어 그 돈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기로 마음 먹은 것. 처음엔 어설프게 시작한 은행털이가 갈수록 대담해지고 훔친 액수도 커진다. 경찰의 추격이 시작되고, 4명의 친구들은 막다른 길에 다다른다. F. 게리 그레이의 1996년작 'Set It Off'는 당시로서는 좀 드문, 흑인 하층 여성 4명을 주인공으로 한 범죄 액션물이다.

  영화 속 각각의 인물들이 가난하지만 착실한 삶을 살아가던 이들에서 은행 강도로 돌변하는 그 과정이 그다지 매끄럽지는 않다. 영화는 막막한 삶의 출구가 범죄로 이어지는 이유를 불평등하고 부당한 사회의 탓으로 손쉽게 돌려 버린다. 삶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은행을 털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Set It Off'의 주인공들은 그런 생각을 곧 실행에 옮긴다. 그들이 감행한 2번의 습격은 성공했지만, 마지막 시도는 비극으로 끝난다. 4명의 흑인 여성 강도단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다. 이야기가 군데군데 비어있는 이 엉성한 범죄 액션물은 비교적 저예산인 9백만 달러의 제작비가 들었는데, 흥행 수익은 대박을 쳤다. 제작비의 4배가 넘는 돈을 벌어들였고, 영화의 OST 음반은 불티나게 팔렸다. 감독 F. 게리 그레이는 흑인 래퍼 아이스큐브(Ice Cube)의 뮤직비디오를 찍으며 경력을 쌓아가다가, 제작사 뉴라인 시네마의 눈에 들어서 이 영화를 찍게 되었다. 당시에 그의 나이는 고작 26살이었다. 뮤직비디오 감독답게 감각적인 영상이 돋보이기는 하지만, 뜬금없이 들어간 러브신과 영화 '대부(1972)'의 일부를 차용해서 넣은 장면들은 실소를 나오게 만든다. 비평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상당히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내가 궁금하게 생각했던 것은 도대체 이 영화가 어떻게 흥행에 성공했느냐는 점이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델마와 루이스(1991)'에서 영감을 받았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 영화를 인상적으로 본 뉴라인 시네마의 제작 담당자가 시나리오 작가 Takashi Bufford에게 그런 비슷한 이야기를 써보라고 한 것이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뷰포드는 시나리오를 써서 냈지만, 3번이나 거절당했다고 15년이 지난 후 인터뷰에서 말했다(출처 Blackfilm.com). 제작사에서는 흑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범죄 액션 영화가 도저히 흥행이 될 것 같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달랐다. 'Set It Off'는 뉴라인 시네마에 꽤 두둑한 돈을 안겨주었고, 이 영화의 성공으로 감독  F. 게리 그레이는 성공적으로 영화계에 안착할 수 있었다. 비평가의 시각으로는 한심한 작품이었지만, 대중의 반응은 그와는 반대였던 것이다.

  어째서 영화적 완성도가 떨어지고, 서사의 완결성도 갖지 못하는 어떤 영화들은 흥행에 성공하는가? 내 기억 속에 떠오르는 2편의 한국 영화가 있다. '미녀는 괴로워(2006)', '7번방의 선물(2013)'이 그것이다. 그 영화들이 개봉되었을 때, 흥행에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 영화들은 크게 흥행에 성공했고, 혹평을 퍼붓은 많은 비평가들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두 영화가 과연 잘 만든 영화인가? 당시 이 영화를 두고 내 주변의 반응들은 그랬다. '어떤 영화가 흥행이 될 것인지를 점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들이 나왔다. 영화에 대한 대중의 취향을 안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2021년 한국의 방구석에서, 먼 바다 건너 미국이란 나라, 1996년의 영화 관객들의 성향을 헤아려 보는 것은 난감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나는 2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그다지 시덥지 않은 영화 보기에 낭비했다는 사실 보다도, 'Set It Off'라는 영화가 당시의 관객들에게 어떤 소구력(訴求力)을 가졌는지 알아낼 수 없다는 점이 답답할 뿐이다. 대충 추측해 보기로는 그렇다. 1991년에 있었던 로드니 킹 사건의 여파가 흑인 사회에 지속되고 있었고, 그에 대한 흑인들의 불만이 제대로 된 출구를 찾지 못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는 영화 속에서 억눌리고 차별받는 4명의 흑인 여성들의 거침없는 범죄 행각과 폭주가 대리만족을 주었을 것이다. 또한 영화에서 음악이 가진 비중이 눈길을 끈다. 클레오 역을 맡은 퀸 라티파가 은행을 털러 갈 때마다 차에서 틀었던 노래들은 거칠고 폭력적인 가사의 랩 음악들이었다. 실제로 때려 부술 수 없는 부당한 현실은 영화 속의 음악과 주인공들을 통해서 일격을 당하고 균열을 일으킨다. 'Set It Off'는 기존의 블랙 필름(Black Film)이 보여준 남성 주인공들의 액션, 코미디의 장르에서 탈피해 여성 주인공들의 과감한 범죄 액션물을 표방한다. 흑인 관객들 사이에서도 여성 흑인 관객들을 겨냥한 '틈새 시장'을 개척한 영화인 셈이다.


  특정 시대의 '관객성'에 대한 연구나 논문을 쓰는 것은 꽤나 어렵고 까다로운 일로 여겨진다. 우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볼 수도 없고, 다양한 관객의 취향을 하나로 뭉뚱그려서 요약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그런 것을 헤아려 보고 알아내려는 노력이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영화는 분명히 '시대의 호흡'으로 대중의 기호와 공명한다. 영화 비평이 단지 텍스트 하나만을 조각조각 내어서 해체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단편적인 시각일 뿐이다. 영화가 만들어진 시대와 그 시간을 살았던 이들에 대한 고찰은 중요하고 의미있는 작업이다. 다소 시시하고 너절한 이 영화 'Set It Off'를 보면서 1996년의 미국, 흑인 관객들, 특히 하층민의 여성 관객들이 이 영화를 통해 얻고자 했던 대리만족과 그 어떤 꿈들을 잠깐 동안이나마 생각했다.    



*사진 출처: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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