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도입부, 시끄럽게 돌아가는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의 모습이 강렬한 비트의 음악과 함께 나온다. 오프닝 타이틀에 찍힌 'Directed by Paul Schrader'가 보인다. 내가 감독도 아닌데, 왜 그걸 보고 가슴이 뻐근해졌나 모르겠다. 아마도 영화 비평과 시나리오 작가로 글만 쓰다가 처음으로 자신의 작품을 찍게 된 폴 슈레이더의 심정에 뭔가 감정이입이 되었던 것이겠지. 1978년에 찍은 영화 '블루 칼라(Blue Collar)'는 폴 슈레이더의 영화 데뷔작이다. 각본은 그와 그의 형 레너드가 공동으로 썼다. 주연 배우로는 하비 카이텔, 리처드 프라이어, 야펫 코토가 나온다. 영화는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는 세 명의 친구들의 어긋난 우정과 파국을 그려낸다.

  지크(리처드 프라이어 분), 제리(하비 카이텔 분), 스모키(야펫 코토 분)는 자동차 회사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다. 서로 허물없이 지내며 삶의 고민을 나누는 그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돈'이다. 3명의 아이를 둔 지크는 소득 탈세로 국세청 직원이 찾아와서 체납 세금을 내라고 닥달을 받았다. 제리는 딸의 치아 교정기에 들어갈 돈을 마련하지 못해서 전전긍긍한다. 2번의 전과 경력이 있는 스모키의 관심사는 오로지 유흥이다. 여자와 마약으로 찾은 삶의 탈출구를 제리와 지크에게도 가끔씩 선사한다. 스모키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지크는 노조 사무실의 금고를 털자고 제안한다. 어설프게 결성된 3인조 강도는 사무실 금고를 탈취하는데 성공한다. 그런데 금고를 뜯어보니 돈이라고는 600달러뿐. 허탕을 쳤나 싶었는데, 지크는 노조의 비밀 장부를 발견한다. 장부에는 노조가 노조원들 몰래 기금으로 고리대금업을 하면서 이자를 빼돌리고 있다는 사실이 적혀있다. 돈 대신에 그걸로 노조에 협박 편지를 보낸 지크. 지크가 노조 임원으로부터 간부 자리를 약속 받은 반면, 제리와 스모키는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 과연 이들의 앞날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영화는 시종일관 거칠고 고단한 하층 노동자의 삶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이른바 영어의 욕설 'F word'가 이렇게 많이 나오는 영화는 나도 처음 봤다(영화 전체를 통털어 158번이라고 한다). 영화에서 가장 많은 대사와 배역 비중을 가진 지크 역의 리처드 프라이어가 욕설의 절반은 담당한 것 같다. 당시 스탠드 업 코미디언으로 인기를 끌었던 리처드 프라이어는 자신의 유명세를 바탕으로 영화로까지 활동 영역을 넓히는 중이었다. 그는 이 영화에 출연하기 전에 찍은 1인 3역의 코미디 'Which Way is Up?(1977)'에서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블루 칼라'의 배역에 더 의욕을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그 의욕이 너무 지나쳤다는 데에 있었다.


  그는 대본에도 없는 대사를 길게 만들어서 자기 비중을 높이려고 애를 썼다. 촬영 현장에서 그걸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영화 속에서 티격태격하는 캐릭터였던 세 명의 주연 배우들은 실제로도 사이가 좋지 못했다. 그냥 말로만 싸운 것이 아니라 치고 박는 육탄전까지 벌어졌다. 이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바로 감독 폴 슈레이더였다.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첫 영화를 찍게 되었는데, 그야말로 진상 배우 하나가 나대서 난리를 치니 그 심정이 어땠을까? 프라이어와 제일 많이 대립했던 하비 카이텔은 촬영 그만두고 중간에 가버리려고까지 했다. 골칫덩이 프라이어는 심지어 슈레이더에게 총을 들이대며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슈레이더의 정신적 고통이 극심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이 진상 배우 프라이어는 영화의 연출까지 지가 해보려고 했던 모양이다. 영화가 흑인의 정치적 영향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며 강한 목소리를 냈다. 카메라에다 재떨이 던지고 난리치는 폭력이 난무했던 촬영 현장에서 폴 슈레이더가 어떤 모습으로 있었을지 생각해 보면 참 마음이 짠해진다. 초짜 감독의 드높은 꿈과 이상은 쪼그라들다 못해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영화에는 세 명의 주인공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과 적대감이 여실히 드러난다. 스모키의 죽음 이후 서로 대립하는 제리와 지크.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 속에서 고조되는 하비 카이텔과 리처드 프라이어의 갈등은 매우 사실적이다. 지크와 갈라서기 전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는 제리의 얼굴 표정은 진짜 더러운 뭔가를 응시하는 것 같다. 오로지 자기 분량 늘리기, 배역 돋보이기에 집착하는 프라이어에 카이텔이라고 별 수 있었을까? 심지어 이 영화는 포스터 마저도 리처드 프라이어의 얼굴만이 양쪽으로 나온다. 다른 배우들이 그렇게 쩌리 취급되었던 것은 '흥행' 때문이었다. 제작사는 인기 있는 프라이어의 이름에 기대어 돈을 벌고 싶었을 것이다.

  '진상 배우를 상대하는 법'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할까? 감독 폴 슈레이더는 그저 참고 견디는 수 밖에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슈레이더가 오죽이나 고생을 했으면, 이 영화를 개봉 이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보살 감독 슈레이더는 어쨌든 자기 몫을 해냈다. 촬영장에서는 지지고 볶고 난리를 쳤어도, 영화 속 이야기에는 모든 것이 온전하고 충실하게 담겨있다. 그야말로 인간 승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는 노조와 노조원 사이의 갈등, 권력을 가진 이들이 획책하는 노동 계층 내의 분열, 노동 현장의 문제, 이런 묵직한 주제들을 개연성 있는 서사로 풀어낸다. 진상 배우에게 그토록 시달리면서도 그런 완성도를 보여준 슈레이더는 분명 대단한 감독임에 틀림없다. 나에게 이 영화의 오프닝 타이틀에 올라간 그의 이름이 유독 크게 다가오는 이유는 아마도 그런 데에 있었을 것이다. '괜찮아요, 폴, 당신의 이 영화는 정말 좋은 작품이에요!'라고 이 글을 끝맺고 싶다.       



*사진 출처: artforum.com 가운데가 리처드 프라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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