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5년의 시인(詩人)
"오늘은 2055년 9월 14일. 오전 7시, 선생님,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경진은 아침마다 듣는 로미의 알림에 눈을 떴다.
"오늘 일정은 어떻게 되지?"
"오늘 선생님의 일정은 9시 서울 글쓰기 센터 출근, 2시 퇴근, 5시 산책.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별거 없네. 거의 매일 같은 하루."
"그런 셈이죠. 그렇다면 뭔가 새로운 것을 배워보시는 건 어떨까요?"
"내가 생각해 봤는데..."
경진은 칫솔에 치약을 짜다 말고,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말을 꺼냈다.
"시를 좀 써볼까 해."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냥. 재밌을 거 같아. 지금의 생활은..."
"재미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솔직히 그렇지. 시를 대학 시절에 좀 써봤거든. 나중에는 시시해져서 그만뒀지만 말야. 지금 다시 써보면 좀 다를 수도 있잖아."
로미는 드르륵드르륵, 하는 소리를 냈다. 이 인공지능 로봇이 저런 소리를 낼 때는 뭔가 답을 찾기 위해 시간이 걸린다는 뜻이었다.
"넌 어떻게 생각해?"
"그것이 선생님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말하지?"
"시를 쓰느라 시간을 낭비하면 선생님의 경력에 오히려 방해가 됩니다."
"글쓰기 센터에서 맨날 시시껍절한 남의 글이나 봐주면서 경력을 쌓는 게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곳에서 경력을 쌓으면 시청이나 국가 홍보부에 채용될 기회가 생깁니다."
"그래봤자, 여전히 다른 사람들 일이나 해주는 거겠지. 난 이제 내 글을 쓰고 싶다고."
"이 문제는 오후에 다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각을 하면 안 되니까요."
경진은 약간은 들뜬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시를 쓰기 위해서 어떤 책을 읽어야 하고, 어떤 외부 강좌를 들어야 할지는 로미가 다 알려줄 것이다. 로미는 신뢰할 수 있는 로봇이었다. 이전의 로봇 버전이 버그로 인해 국가 전체에 혼란을 일으켰고, 그 사태로 인해 로봇 부서의 장관이 사퇴까지 했다. 그 이후에 새롭게 업데이트된 로미는 지난 8개월 동안 경진에게 둘도 없는 비서이며 친구가 되어주었다.
"이 부분은 이렇게 고치는 것이 좋겠어요."
경진은 에세이 첨삭을 원하는 방문객에게 터치스크린으로 자신의 첨삭문을 보여주며 설명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인간미가 있는 글이었다. 그것은 그 어떤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인간의 머리로 생각하고, 인간의 고유한 목소리를 글에 입히는 것. 그것이 글쓰기 센터가 국가 지원을 받는 공익 부서로서 대중들에게 봉사하는 이유였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어떤 부분이 그런가요?"
"흠, 그냥 모든 게 다요."
50대 중반의 여성 방문객은 자신이 쓴 수필을 가지고 첨삭을 요청해 왔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입주민들을 비웃고 험담하는 글이었다. 그런 글을 읽는 것은 경진에게 아주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글을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이 여자는 경진의 첨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부어터진 얼굴로 경진의 앞에 앉아있다.
"그럼, 다른 직원을 연결해 드리죠."
"그렇게 해주세요. 좀 실력이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이봐, 당신 글솜씨는 누구의 실력을 따질만한 그런 것도 못 된다고. 이 센터에서 일한 지 5년째에 접어드는 경진에게 타인의 글은 그 사람의 살아온 인생이 보이는 지도와도 같았다. 이 늙은 여자는 분명 제대로 된 책을 읽어본 적도 없고, 한문이라는 것은 써본 적도 없을 것이다. 경진은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에게 엄격한 국어 교육을 받아왔다. 경진의 부친은 글쓰기에 나름의 소질이 있었다. 나중에는 서울 문인 협회의 지부장을 맡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 시대의 문인들이란 인공지능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거부하는 희귀종과 같은 신세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외부의 도움 없이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다. 국가는 그들에게 생계를 보장해 줌으로써 국어가 지닌 근원적인 의미를 보존할 수 있도록 했다. 비록 출세와는 거리가 먼 직업이었지만, '작가'라는 이름이 주는 그 무게와 명예를 경진은 잘 알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런 쓰레기 같은 글이나 읽으면서 살아갈 수는 없어. 내 글을 써야지, 내 글을.'
경진은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언을 떠올렸다. 넌 글을 쓰는 게 좋겠구나. 하지만 그저 국가 보조금으로 겨우 연명하는 작가라는 직업의 한계를 경진은 쓰라리게 잘 알았다. 12평의 국가 임대 아파트에서 아버지는 숨을 거두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삶이었다. 그런데 그 애증과 연민으로 범벅이 된 아버지의 직업을 경진은 이제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퇴근하셨군요. 오늘 센터의 일은 어땠나요?"
"뭐 늘 그렇지. 한심한 글들 읽으면서 열심히 고쳐주었지."
"그런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어야지 선생님의 직업도 각광받는 것이겠죠."
"그런가?"
경진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로미의 말에 대꾸했다. 로미는 경진의 표정을 인식하고는 얼른 대화의 주제를 바꾸었다.
"시를 다시 쓰시는 문제에 관해 얘기해 볼까요?"
"아, 그래? 내가 뭐부터 시작하면 될까? 시 쓰기의 기초부터 배워야겠지?"
드르륵드르륵, 로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우선, 선생님이 쓰신 시를 보고 가능성을 판단하겠습니다."
"그것도 방법이네. 내가 좀 생각해 둔 게 있어. 그걸 써보려고."
"그럼, 써서 보여주세요."
"알았어. 오늘 산책은 취소."
"산책을 취소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바깥바람을 쐬고 땅에 발을 디디면 글을 쓰는 감각이 살아나죠."
"그래, 그 말이 맞아."
경진은 로미의 제안대로 산책을 다녀왔다. 원래 일과라면 5시에 나가야 할 것을 오늘은 산책을 일찍 다녀왔다. 오후 시간에 시를 쓸 생각이었다. 산책을 다녀오고 나니 어떻게든 써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산책(散策)
저 나무는 왜 매실이 열리지 않는가
잠깐 생각하다가
저 나무는 벚나무였다
벚나무에는 버찌가 열리지
매실은 매화나무에
그렇게 살아가도록 되어있는 것
쓸데없이 큰 정원을 가진 정원사
가지치기는 엉성하고
꽃들은 모두 제멋대로
그래도 샛노란 나리꽃은 눈물이 났다
무언가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믿음의 법칙에는 배신의 상수(常數)가
그래도 누군가는 오늘
너의 산책을 읽었다
경진은 산책하면서 느낀 것들을 전자 노트에 천천히 입력해 나갔다. 경진이 거기에 쓰는 모든 글은 로미에게 실시간으로 전송되었다. 로미는 경진이 시를 써내려갈 때마다 드르륵드르륵, 하는 소리를 내었다.
"선생님이 쓰신 시, 잘 읽어보았습니다. 흥미롭군요."
"흥미롭다는 말이 좀 웃기네. 재미없다는 뜻이지?"
"아, 그렇게 들렸습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어느 부분이 마음에 안드는데? 솔직히 말해봐."
경진은 로미에게 의견을 물어볼 때 '솔직하게'라는 말을 자주하곤 했다. 이 친절한 로봇은 거의 모든 경우에 싫다고 말할 수 없도록 설계되었다. 그러므로 로봇을 이용하는 사람은 로봇의 말 사이에 숨겨진 뜻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것을 파악하는 능력에 따라 로봇은 멍청한 하인도, 명민한 비서도 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선생님의 시는 유기성(有機性)이 부족합니다."
"유기성?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야. 좋은 지적인데."
"이 정도라면 출발은 나쁘지 않습니다만..."
"그렇지만 뭐?"
"제 생각은 선생님이 시를 쓰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지?"
"시간 낭비니까요."
경진은 로미의 기계음 목소리가 아주 불쾌하고 기분 나쁘게 들렸다. 기껏해야 금속 덩어리일 뿐인 로봇이 자신의 인생에서 낭비인 것과 아닌 것을 판단하고 있었다.
"그것이 낭비인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해."
"아닙니다. 분명한 낭비입니다. 선생님이 시를 써낸다고 해도 이제 그걸 읽을 사람은 없습니다. 이 나라에서 시집은 2040년 이후로 모두 절판되어 더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시어를 로봇에게 입력해서 그것으로 만들어낸 자신만의 시를 원하는 대로 출력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선생님이 쓰시는 시가 의미가 있을까요?"
"온전히 나의 힘으로 만들어낸 모든 것은 가치가 있어. 남이 읽어주고 안 읽어주고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냐."
"저는 유용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시를 써낸다 해도 단돈 1원도 벌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쓰시겠습니까?"
"그냥 써보는 것뿐이라고. 언젠가 내 시를 읽을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
"그건 선생님의 희망사항이겠죠."
경진에게 로미의 말은 점점 더 이죽거리는 듯이 들렸다.
"기분 나쁘군. 시 이야기는 그만두도록 하지."
경진은 전자 노트에 더이상 시를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써내는 글을 로미가 읽는 것이 불현듯 끔찍하게 싫어졌다. 종이에다 시를 써야겠군. 경진은 책상 서랍에 종이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사실 종이에 뭔가를 써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다행히도 책상 서랍의 맨 아래 칸에 한 뭉텅이의 종이가 있었다. 종이 뭉치 옆에는 볼펜이 3개 있었다. 경진은 볼펜이 잘 나오는지 종이에다 끄적거려 보았다. 하도 오래전에 사놓은 것이라 그런지 볼펜의 잉크는 다 말라서 나오질 않았다. 쓸 수 있는 필기도구가 없었다.
볼펜이든 뭐든 쓸 수 있는 것을 사야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종이와 펜을 쓰지 않게 된 이후로 그것을 판매하는 곳도 대부분 사라졌다. 경진은 책상에 깔린 유리 패널에다 '필기도구 판매점'이라고 입력했다.
'마지막 연필 판매점, 9월 16일에 문 닫을 예정'
판매점을 알려주는 지도는 뜨지 않았고, 그 대신 뉴스 기사 하나가 떴다.
'87년을 이어온 이 유서 깊은 연필 공장의 부속 판매점은 곧 문을 닫을 예정이다. 사람들이 연필을 쓰지 않게 됨에 따라 연필 공장을 운영하는 일은 힘들어졌다. 사장 김만수(75세)는 자신이 부친에게서 물려받아 이어온 이 공장과 판매점의 문을 닫기로 결정했다. 이 공장에서 생산된 연필을 구매하려는 이들은 서두르기 바란다. 마지막 연필은 9월 16일까지만 살 수 있다.'
오늘이 9월 14일이니까, 아직 이틀은 남았군. 마지막 날은 모르니까, 내일이라도 그 공장에 가봐야 했다. 경진은 연필 공장이 자리한 곳의 지도를 전자 수첩에 저장해두었다. 그러고 나서 큼지막한 배낭을 하나 챙겼다. 그 공장의 연필은 경진이 사게 될 마지막 연필이 될 터였다. 언제 쓰게 될지 모르므로 물량이 있다면 넉넉하게 사올 생각이었다. 경진은 약간은 긴장된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저, 이곳에 가려고 하는데요."
다음날 오후, 유인 택시에 탄 경진이 전자수첩에 저장된 지도를 기사에게 내밀었다. 경진은 자율주행하는 무인 택시를 탔다가 다리가 부러지는 골절 사고를 겪은 이후로는 유인 택시만을 타고 다녔다.
"아, 여긴 어제도 손님을 한 분 데려다줬는데. 거기 주변이 좀 으스스해요. 공장이 다 허물어지기 직전이라. 뭔 연필을 산다고 하더라구요. 손님도 연필을 사러 가세요?"
머리가 휑한 중년의 택시 기사가 넉살맞게 웃으며 물었다.
"네. 그런데 시간이 얼마쯤 걸릴까요?"
"아마 40분 정도? 차들이 밀릴 시간은 아니니까요. 자, 그러면 가볼까요?"
경진은 택시를 타고 가면서 본 시 외곽의 풍경에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늘 도시 중심부에서 머무르며 지냈던 터라, 시 경계의 풍경이 어떠한지 잘 알지 못했다. 그곳은 끝없이 이어진 태양광 패널과 풍력 발전소의 터빈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도시는 인공지능 로봇과 그것이 처리하는 데이터에 의해 지탱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막대한 전력이 필요했다. 만약에 저 기계들이 만들어내는 전력이 없다면, 이 도시는 마비 상태에 빠질 것이다.
"삭막하지요, 풍경이?"
"그러네요. 기사님은 이 길을 자주 다니십니까?"
"아주 가끔요. 그런데 지나다닐 때마다 좀 몸서리가 쳐지곤 해요. 새들 죽은 시체 위로 지나다니니 원. 그 뭡니까, 새대가리라는 말이 있잖아요. 걔들은 머리만 나쁜 게 아니라 눈도 안 좋은지, 풍력 터빈 날개에 맨날 부딪혀 죽고 그래서. 그런데 그렇게 많이 죽어서 그런가, 요새는 새 구경하기도 어려워요."
경진이 택시 기사와 그런 말을 주고받는 동안 택시는 연필 공장에 다다랐다. 기사의 말대로, 공장 주변은 폐가처럼 으스스했다. 녹슨 지붕이 반쯤 허물어져 있었고, 공장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한쪽이 부서져 있었다. 경진은 무인도에 난파당한 선원처럼 조심스럽게 공장 출입문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누가 왔소?"
"아, 저는 연필을 사러..."
회색 작업복을 입은 노인이 기계를 만지다 말고 경진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노인은 작업복에 묻은 톱밥과 먼지를 탈탈 털어내고는 경진을 맞이했다.
"젊은 손님은 연필 얼마나 사시게?"
"글쎄요. 이 배낭을 채울 만큼은 사고 싶습니다."
노인은 주머니에서 돋보기를 꺼내어 쓰고는 배낭의 크기를 가늠해 보았다.
"100다스는 들어가겠는데. 한번 채워봅시다."
노인은 공장 한구석에 쌓여있는 연필 상자를 들고 와서, 경진의 배낭을 채우기 시작했다. 경진의 배낭은 한없이 늘어지는 그물처럼 연필을 채워갔다.
"170다스. 배낭이 요술 배낭이구려."
경진은 2,040개의 연필이 자신에게 정말로 필요한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바늘처럼 꽂혔다.
"뉴스 기사에는 내일 문을 닫는다고 적혀 있어서요.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사실은 오늘이 그날이라오. 이 연필 박스가 끝이니까. 사람들에게 이제 연필은 필요하지 않지. 연필을 잡는 법도 잊어버리고, 생각하는 법도 잊고, 그렇게 바보가 되어가는 거요. 그 바보들이 대체 어디까지 더 바보가 될지 참으로 궁금하지 않소?"
노인은 혀를 끌끌 차며 배낭의 지퍼를 채웠다. 경진의 배낭은 10kg쯤 되는 쌀 포대를 담은 것처럼 무거웠다. 노인은 공장을 떠나는 경진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해가 지는 어스름 저녁 풍경 속의 노인은 공장처럼 곧 사라질 운명처럼 보였다. 경진이 집으로 돌아온 시각은 밤 9시가 좀 넘어서였다. 집에 오자마자 경진은 연필을 깎아서 종이에다 써보았다. 사각사각, 글이 써지는 느낌이 낯설지만 기분이 좋았다.
"연필이군요. 저는 연필이라는 단어를 알기만 했지, 실물은 처음 봅니다."
로미가 경진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그래, 이게 연필이라는 거야."
"이것으로 무엇을 하실 생각인가요?"
"글쎄. 마지막 연필이라고 하니, 나중에 수집가들에게 비싼 값에 팔 수도 있겠지."
경진은 로미에게 그 연필로 자신이 시를 쓸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로미에게 약간의 거리감과 같은 불신이 생겼다. 자신이 쓰는 시를 로미에게는 절대로 보여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저 기계는 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또한 자신이 시를 쓰는 것을 방해할지도 모른다. 경진이 그 먼 데까지 가서 연필까지 사 온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저녁을 준비할까요?"
"아니, 별로 생각이 없어. 그냥 쉬도록 해."
"그럼, 필요하시면 부르세요."
경진의 말이 끝나자, 로미는 휴식 상태로 들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그 전원을 꺼버리고 싶었지만, 이 나라에서 최저 생계비를 보장받는 필수 조건은 로봇의 전원을 24시간 켜놓는 것이었다. 국가는 모든 개인에게 지급된 로봇을 통해 그 삶을 속속들이 들여다보았다. 경진은 종이와 연필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이야말로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그것도 어떤 면에서는 사실이 아니었다. 분자 감지기가 있어서 마약이나 폭탄 제조와 관련된 화학물질을 감지하게 되어 있었다. 일주일 전에도 경진이 사는 아파트에서 누군가 화장실에서 마약 제조를 하다가 로봇 경찰에 의해 끌려 나갔다. 그때 들었던 소름 끼치는 경고음이 아직도 경진의 귓가에 맴도는 느낌이었다.
변기 뚜껑을 내리고 그 위에 앉아서 경진은 오늘 있었던 일을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2,040자루의 연필이 있다. 그것으로 온전히 자신만의 글을 써 내려갈 생각을 하니, 마음이 뿌듯해졌다. 경진은 종이를 여러 번 접어서 아주 작은 크기로 만들었다. 그리고 화장실 위쪽 천장에 있는 사각의 나무 뚜껑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경진은 접힌 종이 조각을 천장의 안쪽으로 살짝 밀어넣고는 뚜껑을 다시 닫았다. 앞으로 화장실이 경진의 진짜 서재가 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