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5년의 시인(詩人)


  "오늘은 2055년 9월 14일. 오전 7시, 선생님,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경진은 아침마다 듣는 로미의 알림에 눈을 떴다.

  "오늘 일정은 어떻게 되지?"
  "오늘 선생님의 일정은 9시 서울 글쓰기 센터 출근, 2시 퇴근, 5시 산책.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별거 없네. 거의 매일 같은 하루."
  "그런 셈이죠. 그렇다면 뭔가 새로운 것을 배워보시는 건 어떨까요?"
  "내가 생각해 봤는데..."

  경진은 칫솔에 치약을 짜다 말고,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말을 꺼냈다. 
 
  "시를 좀 써볼까 해."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냥. 재밌을 거 같아. 지금의 생활은..."
  "재미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솔직히 그렇지. 시를 대학 시절에 좀 써봤거든. 나중에는 시시해져서 그만뒀지만 말야. 지금 다시 써보면 좀 다를 수도 있잖아."
 
  로미는 드르륵드르륵, 하는 소리를 냈다. 이 인공지능 로봇이 저런 소리를 낼 때는 뭔가 답을 찾기 위해 시간이 걸린다는 뜻이었다.

  "넌 어떻게 생각해?"
  "그것이 선생님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말하지?"
  "시를 쓰느라 시간을 낭비하면 선생님의 경력에 오히려 방해가 됩니다."
  "글쓰기 센터에서 맨날 시시껍절한 남의 글이나 봐주면서 경력을 쌓는 게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곳에서 경력을 쌓으면 시청이나 국가 홍보부에 채용될 기회가 생깁니다."
  "그래봤자, 여전히 다른 사람들 일이나 해주는 거겠지. 난 이제 내 글을 쓰고 싶다고."
  "이 문제는 오후에 다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각을 하면 안 되니까요."
 
  경진은 약간은 들뜬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시를 쓰기 위해서 어떤 책을 읽어야 하고, 어떤 외부 강좌를 들어야 할지는 로미가 다 알려줄 것이다. 로미는 신뢰할 수 있는 로봇이었다. 이전의 로봇 버전이 버그로 인해 국가 전체에 혼란을 일으켰고, 그 사태로 인해 로봇 부서의 장관이 사퇴까지 했다. 그 이후에 새롭게 업데이트된 로미는 지난 8개월 동안 경진에게 둘도 없는 비서이며 친구가 되어주었다.

  "이 부분은 이렇게 고치는 것이 좋겠어요."

  경진은 에세이 첨삭을 원하는 방문객에게 터치스크린으로 자신의 첨삭문을 보여주며 설명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인간미가 있는 글이었다. 그것은 그 어떤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인간의 머리로 생각하고, 인간의 고유한 목소리를 글에 입히는 것. 그것이 글쓰기 센터가 국가 지원을 받는 공익 부서로서 대중들에게 봉사하는 이유였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어떤 부분이 그런가요?"
  "흠, 그냥 모든 게 다요."

  50대 중반의 여성 방문객은 자신이 쓴 수필을 가지고 첨삭을 요청해 왔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입주민들을 비웃고 험담하는 글이었다. 그런 글을 읽는 것은 경진에게 아주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글을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이 여자는 경진의 첨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부어터진 얼굴로 경진의 앞에 앉아있다.

  "그럼, 다른 직원을 연결해 드리죠."
  "그렇게 해주세요. 좀 실력이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이봐, 당신 글솜씨는 누구의 실력을 따질만한 그런 것도 못 된다고. 이 센터에서 일한 지 5년째에 접어드는 경진에게 타인의 글은 그 사람의 살아온 인생이 보이는 지도와도 같았다. 이 늙은 여자는 분명 제대로 된 책을 읽어본 적도 없고, 한문이라는 것은 써본 적도 없을 것이다. 경진은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에게 엄격한 국어 교육을 받아왔다. 경진의 부친은 글쓰기에 나름의 소질이 있었다. 나중에는 서울 문인 협회의 지부장을 맡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 시대의 문인들이란 인공지능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거부하는 희귀종과 같은 신세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외부의 도움 없이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다. 국가는 그들에게 생계를 보장해 줌으로써 국어가 지닌 근원적인 의미를 보존할 수 있도록 했다. 비록 출세와는 거리가 먼 직업이었지만, '작가'라는 이름이 주는 그 무게와 명예를 경진은 잘 알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런 쓰레기 같은 글이나 읽으면서 살아갈 수는 없어. 내 글을 써야지, 내 글을.'

  경진은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언을 떠올렸다. 넌 글을 쓰는 게 좋겠구나. 하지만 그저 국가 보조금으로 겨우 연명하는 작가라는 직업의 한계를 경진은 쓰라리게 잘 알았다. 12평의 국가 임대 아파트에서 아버지는 숨을 거두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삶이었다. 그런데 그 애증과 연민으로 범벅이 된 아버지의 직업을 경진은 이제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퇴근하셨군요. 오늘 센터의 일은 어땠나요?"
  "뭐 늘 그렇지. 한심한 글들 읽으면서 열심히 고쳐주었지."
  "그런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어야지 선생님의 직업도 각광받는 것이겠죠."
  "그런가?"

  경진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로미의 말에 대꾸했다. 로미는 경진의 표정을 인식하고는 얼른 대화의 주제를 바꾸었다.

  "시를 다시 쓰시는 문제에 관해 얘기해 볼까요?"
  "아, 그래? 내가 뭐부터 시작하면 될까? 시 쓰기의 기초부터 배워야겠지?"
 
  드르륵드르륵, 로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우선, 선생님이 쓰신 시를 보고 가능성을 판단하겠습니다."
  "그것도 방법이네. 내가 좀 생각해 둔 게 있어. 그걸 써보려고."
  "그럼, 써서 보여주세요."
  "알았어. 오늘 산책은 취소."
  "산책을 취소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바깥바람을 쐬고 땅에 발을 디디면 글을 쓰는 감각이 살아나죠."
  "그래, 그 말이 맞아."

  경진은 로미의 제안대로 산책을 다녀왔다. 원래 일과라면 5시에 나가야 할 것을 오늘은 산책을 일찍 다녀왔다. 오후 시간에 시를 쓸 생각이었다. 산책을 다녀오고 나니 어떻게든 써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산책(散策)


저 나무는 왜 매실이 열리지 않는가
잠깐 생각하다가
저 나무는 벚나무였다
벚나무에는 버찌가 열리지
매실은 매화나무에
그렇게 살아가도록 되어있는 것

쓸데없이 큰 정원을 가진 정원사
가지치기는 엉성하고
꽃들은 모두 제멋대로
그래도 샛노란 나리꽃은 눈물이 났다

무언가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믿음의 법칙에는 배신의 상수(常數)가 
그래도 누군가는 오늘
너의 산책을 읽었다
 

  경진은 산책하면서 느낀 것들을 전자 노트에 천천히 입력해 나갔다. 경진이 거기에 쓰는 모든 글은 로미에게 실시간으로 전송되었다. 로미는 경진이 시를 써내려갈 때마다 드르륵드르륵, 하는 소리를 내었다.

  "선생님이 쓰신 시, 잘 읽어보았습니다. 흥미롭군요."
  "흥미롭다는 말이 좀 웃기네. 재미없다는 뜻이지?"
  "아, 그렇게 들렸습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어느 부분이 마음에 안드는데? 솔직히 말해봐."

  경진은 로미에게 의견을 물어볼 때 '솔직하게'라는 말을 자주하곤 했다. 이 친절한 로봇은 거의 모든 경우에 싫다고 말할 수 없도록 설계되었다. 그러므로 로봇을 이용하는 사람은 로봇의 말 사이에 숨겨진 뜻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것을 파악하는 능력에 따라 로봇은 멍청한 하인도, 명민한 비서도 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선생님의 시는 유기성(有機性)이 부족합니다."
  "유기성?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야. 좋은 지적인데."
  "이 정도라면 출발은 나쁘지 않습니다만..."
  "그렇지만 뭐?"
  "제 생각은 선생님이 시를 쓰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지?"
  "시간 낭비니까요."

  경진은 로미의 기계음 목소리가 아주 불쾌하고 기분 나쁘게 들렸다. 기껏해야 금속 덩어리일 뿐인 로봇이 자신의 인생에서 낭비인 것과 아닌 것을 판단하고 있었다.

  "그것이 낭비인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해."
  "아닙니다. 분명한 낭비입니다. 선생님이 시를 써낸다고 해도 이제 그걸 읽을 사람은 없습니다. 이 나라에서 시집은 2040년 이후로 모두 절판되어 더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시어를 로봇에게 입력해서 그것으로 만들어낸 자신만의 시를 원하는 대로 출력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선생님이 쓰시는 시가 의미가 있을까요?"

  "온전히 나의 힘으로 만들어낸 모든 것은 가치가 있어. 남이 읽어주고 안 읽어주고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냐."
  "저는 유용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시를 써낸다 해도 단돈 1원도 벌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쓰시겠습니까?"
  "그냥 써보는 것뿐이라고. 언젠가 내 시를 읽을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
  "그건 선생님의 희망사항이겠죠."

  경진에게 로미의 말은 점점 더 이죽거리는 듯이 들렸다.

  "기분 나쁘군. 시 이야기는 그만두도록 하지."

  경진은 전자 노트에 더이상 시를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써내는 글을 로미가 읽는 것이 불현듯 끔찍하게 싫어졌다. 종이에다 시를 써야겠군. 경진은 책상 서랍에 종이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사실 종이에 뭔가를 써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다행히도 책상 서랍의 맨 아래 칸에 한 뭉텅이의 종이가 있었다. 종이 뭉치 옆에는 볼펜이 3개 있었다. 경진은 볼펜이 잘 나오는지 종이에다 끄적거려 보았다. 하도 오래전에 사놓은 것이라 그런지 볼펜의 잉크는 다 말라서 나오질 않았다. 쓸 수 있는 필기도구가 없었다.

  볼펜이든 뭐든 쓸 수 있는 것을 사야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종이와 펜을 쓰지 않게 된 이후로 그것을 판매하는 곳도 대부분 사라졌다. 경진은 책상에 깔린 유리 패널에다 '필기도구 판매점'이라고 입력했다.

  '마지막 연필 판매점, 9월 16일에 문 닫을 예정'

  판매점을 알려주는 지도는 뜨지 않았고, 그 대신 뉴스 기사 하나가 떴다.

  '87년을 이어온 이 유서 깊은 연필 공장의 부속 판매점은 곧 문을 닫을 예정이다. 사람들이 연필을 쓰지 않게 됨에 따라 연필 공장을 운영하는 일은 힘들어졌다. 사장 김만수(75세)는 자신이 부친에게서 물려받아 이어온 이 공장과 판매점의 문을 닫기로 결정했다. 이 공장에서 생산된 연필을 구매하려는 이들은 서두르기 바란다. 마지막 연필은 9월 16일까지만 살 수 있다.'

  오늘이 9월 14일이니까, 아직 이틀은 남았군. 마지막 날은 모르니까, 내일이라도 그 공장에 가봐야 했다. 경진은 연필 공장이 자리한 곳의 지도를 전자 수첩에 저장해두었다. 그러고 나서 큼지막한 배낭을 하나 챙겼다. 그 공장의 연필은 경진이 사게 될 마지막 연필이 될 터였다. 언제 쓰게 될지 모르므로 물량이 있다면 넉넉하게 사올 생각이었다. 경진은 약간은 긴장된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저, 이곳에 가려고 하는데요."
 
  다음날 오후, 유인 택시에 탄 경진이 전자수첩에 저장된 지도를 기사에게 내밀었다. 경진은 자율주행하는 무인 택시를 탔다가 다리가 부러지는 골절 사고를 겪은 이후로는 유인 택시만을 타고 다녔다.

  "아, 여긴 어제도 손님을 한 분 데려다줬는데. 거기 주변이 좀 으스스해요. 공장이 다 허물어지기 직전이라. 뭔 연필을 산다고 하더라구요. 손님도 연필을 사러 가세요?"

  머리가 휑한 중년의 택시 기사가 넉살맞게 웃으며 물었다.

  "네. 그런데 시간이 얼마쯤 걸릴까요?"
  "아마 40분 정도? 차들이 밀릴 시간은 아니니까요. 자, 그러면 가볼까요?"

  경진은 택시를 타고 가면서 본 시 외곽의 풍경에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늘 도시 중심부에서 머무르며 지냈던 터라, 시 경계의 풍경이 어떠한지 잘 알지 못했다. 그곳은 끝없이 이어진 태양광 패널과 풍력 발전소의 터빈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도시는 인공지능 로봇과 그것이 처리하는 데이터에 의해 지탱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막대한 전력이 필요했다. 만약에 저 기계들이 만들어내는 전력이 없다면, 이 도시는 마비 상태에 빠질 것이다.

  "삭막하지요, 풍경이?"
  "그러네요. 기사님은 이 길을 자주 다니십니까?"
  "아주 가끔요. 그런데 지나다닐 때마다 좀 몸서리가 쳐지곤 해요. 새들 죽은 시체 위로 지나다니니 원. 그 뭡니까, 새대가리라는 말이 있잖아요. 걔들은 머리만 나쁜 게 아니라 눈도 안 좋은지, 풍력 터빈 날개에 맨날 부딪혀 죽고 그래서. 그런데 그렇게 많이 죽어서 그런가, 요새는 새 구경하기도 어려워요."

  경진이 택시 기사와 그런 말을 주고받는 동안 택시는 연필 공장에 다다랐다. 기사의 말대로, 공장 주변은 폐가처럼 으스스했다. 녹슨 지붕이 반쯤 허물어져 있었고, 공장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한쪽이 부서져 있었다. 경진은 무인도에 난파당한 선원처럼 조심스럽게 공장 출입문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누가 왔소?"
  "아, 저는 연필을 사러..."

  회색 작업복을 입은 노인이 기계를 만지다 말고 경진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노인은 작업복에 묻은 톱밥과 먼지를 탈탈 털어내고는 경진을 맞이했다.

  "젊은 손님은 연필 얼마나 사시게?"
  "글쎄요. 이 배낭을 채울 만큼은 사고 싶습니다."
 
  노인은 주머니에서 돋보기를 꺼내어 쓰고는 배낭의 크기를 가늠해 보았다.

  "100다스는 들어가겠는데. 한번 채워봅시다."
 
  노인은 공장 한구석에 쌓여있는 연필 상자를 들고 와서, 경진의 배낭을 채우기 시작했다. 경진의 배낭은 한없이 늘어지는 그물처럼 연필을 채워갔다.

  "170다스. 배낭이 요술 배낭이구려."

  경진은 2,040개의 연필이 자신에게 정말로 필요한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바늘처럼 꽂혔다.

  "뉴스 기사에는 내일 문을 닫는다고 적혀 있어서요.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사실은 오늘이 그날이라오. 이 연필 박스가 끝이니까. 사람들에게 이제 연필은 필요하지 않지. 연필을 잡는 법도 잊어버리고, 생각하는 법도 잊고, 그렇게 바보가 되어가는 거요. 그 바보들이 대체 어디까지 더 바보가 될지 참으로 궁금하지 않소?"

  노인은 혀를 끌끌 차며 배낭의 지퍼를 채웠다. 경진의 배낭은 10kg쯤 되는 쌀 포대를 담은 것처럼 무거웠다. 노인은 공장을 떠나는 경진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해가 지는 어스름 저녁 풍경 속의 노인은 공장처럼 곧 사라질 운명처럼 보였다. 경진이 집으로 돌아온 시각은 밤 9시가 좀 넘어서였다. 집에 오자마자 경진은 연필을 깎아서 종이에다 써보았다. 사각사각, 글이 써지는 느낌이 낯설지만 기분이 좋았다.

  "연필이군요. 저는 연필이라는 단어를 알기만 했지, 실물은 처음 봅니다."

  로미가 경진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그래, 이게 연필이라는 거야."
  "이것으로 무엇을 하실 생각인가요?"
  "글쎄. 마지막 연필이라고 하니, 나중에 수집가들에게 비싼 값에 팔 수도 있겠지."

  경진은 로미에게 그 연필로 자신이 시를 쓸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로미에게 약간의 거리감과 같은 불신이 생겼다. 자신이 쓰는 시를 로미에게는 절대로 보여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저 기계는 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또한 자신이 시를 쓰는 것을 방해할지도 모른다. 경진이 그 먼 데까지 가서 연필까지 사 온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저녁을 준비할까요?"
  "아니, 별로 생각이 없어. 그냥 쉬도록 해."
  "그럼, 필요하시면 부르세요."

  경진의 말이 끝나자, 로미는 휴식 상태로 들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그 전원을 꺼버리고 싶었지만, 이 나라에서 최저 생계비를 보장받는 필수 조건은 로봇의 전원을 24시간 켜놓는 것이었다. 국가는 모든 개인에게 지급된 로봇을 통해 그 삶을 속속들이 들여다보았다. 경진은 종이와 연필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이야말로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그것도 어떤 면에서는 사실이 아니었다. 분자 감지기가 있어서 마약이나 폭탄 제조와 관련된 화학물질을 감지하게 되어 있었다. 일주일 전에도 경진이 사는 아파트에서 누군가 화장실에서 마약 제조를 하다가 로봇 경찰에 의해 끌려 나갔다. 그때 들었던 소름 끼치는 경고음이 아직도 경진의 귓가에 맴도는 느낌이었다.

  변기 뚜껑을 내리고 그 위에 앉아서 경진은 오늘 있었던 일을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2,040자루의 연필이 있다. 그것으로 온전히 자신만의 글을 써 내려갈 생각을 하니, 마음이 뿌듯해졌다. 경진은 종이를 여러 번 접어서 아주 작은 크기로 만들었다. 그리고 화장실 위쪽 천장에 있는 사각의 나무 뚜껑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경진은 접힌 종이 조각을 천장의 안쪽으로 살짝 밀어넣고는 뚜껑을 다시 닫았다. 앞으로 화장실이 경진의 진짜 서재가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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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맨 마트(Two men mart)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이런 날은 손님도 별로 오지 않는다. 정현의 얼굴은 진회색 구름의 하늘처럼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빗줄기는 시간이 갈수록 더 굵어졌다. 거기에다 바람까지 세게 불어서 몹시 을씨년스러운 날씨였다. 덜컹, 가게문 밖에서 나는 소리에 정현의 신경이 곤두섰다. 아마 간판이 흔들리는 소리일 것이다. 7년 된 낡고 빛바랜 간판은 바람이 많이 부는 날,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혹시라도 간판에 문제가 없는지 보기 위해 정현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투 맨 마트'

  원래는 남색 바탕이었던 간판의 색은 이제 하늘색으로 변했다. 흰색의 글씨는 어쩐지 매가리 없이 늘어진 갈치처럼 보였다. 마트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것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뜻이었다. 정현의 아버지는 나중에 크게 번창할 가게를 아들에게 물려주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투 맨 마트는 그렇게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마음이 담긴 가게 이름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가게는 정현 혼자서 꾸려가는 원 맨 마트가 되고 말았다. 약으로 그럭저럭 조절되었던 아버지의 파킨슨병이 심해진 것이 3년 전이었다. 그해, 정현의 어머니가 심부전으로 세상을 떴다. 정현에게 그해는 참으로 고통스러웠던 기억으로 남았다. 휠체어에 몸을 의지해야 하는 아버지를 정현은 보살필 수 없었다. 회사의 정리해고로 먹고 살길이 막막해진 그는 아버지의 마트를 떠맡았다. 그리고 정현은 아버지를 어쩔 수 없이 요양원으로 보냈다.

  "저걸 손 보기는 해야 할 텐데."

  정현은 간판의 오른쪽이 약간 비스듬히 기울어진 것을 발견했다. 정현에게는 이 마트의 모든 것이 못마땅하고 귀찮게 느껴졌다. 자신의 시간과 몸을 갈아 넣어서 굴러가는 가게는 그저 그날그날의 밥걱정을 겨우 면하게 해주는 삶의 방편이었다. 아버지가 마트를 열면서 진 빚의 원금과 이자가 매달 꼬박꼬박 나가고 있었다. 작년까지는 캐셔 아줌마 한 명을 썼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인건비조차 부담스러워졌다. 결국 정현은 마트의 모든 것을 혼자 해나가기로 했다. 물건의 입출고와 캐셔일, 그리고 배달까지 다 해내느라 정현의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기울어진 간판을 보고 들어온 정현의 마음은 더욱 우울해졌다. 그나마 매출이라도 나오니까 아버지 요양원비며 이런저런 나가는 돈을 메꾸어낼 수 있었다. 여기에서 매출까지 떨어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건 생각하기조차 싫은 시나리오였다. 정현은 기울어진 간판이 사회의 하층민으로 전락해 버리는 자신에 대한 불길한 전조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떻게든 간판부터 고쳐야지. 정현은 그렇게 마음먹었다.

  "어서 오세요."
  "이것 좀 환불해줘요. 진미채 색깔이 푸르딩딩하잖아."
 
  60대 중반의 파마머리 여자는 표독스러운 목소리로 정현에게 따져묻듯 말했다. 정현은 이 여자 손님에게 수박 여편네라는 별명을 붙였다. 여자는 지난 여름, 수박을 사가지고 가서는 수박이 맛없다며 정현에게 환불을 요구했다. 여자가 가져온 수박은 4분의 1쪽도 되지 않은 크기였다. 정현은 아무 말 없이 환불해 주었다. 그런 진상들과 입 아프게 말해봤자 성질만 더 뻗칠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저 여편네는 진미채에 곰팡이가 생겼다며 환불을 요구하고 있었다.

  "영수증 좀 줘 보시죠."

  정현은 시큰둥한 목소리로 여자에게 말했다. 여자는 지갑에서 꼬깃꼬깃 구겨진 영수증을 내밀었다. 영수증의 날짜는 8월 7일로 찍혀있었다. 오늘은 9월 30일, 그러니까 이 수박 여편네는 거의 2달이 된 진미채를 가지고 와서 환불을 요구하고 있었다.

  "손님, 우리 가게에서 판매하는 건어물은 모두 냉장실에 진열되어 있고, 항상 그렇게 보관합니다. 8월 7일에 구매한 진미채에 곰팡이가 생겼다면, 그건 손님이 보관을 잘못한 거겠죠."
  "그래서, 지금 환불을 못 해주겠다는 거야? 사람이 먹지도 못하는 물건을 팔아놓고 염치도 없네. 당신 애비 생각해서 내가 물건 팔아주는 건데, 이 따위로 나와?"

  정현에게는 아주 좋은 덕성이 있었는데, 그건 어떠한 상황에서도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버지까지 들먹이는 저 여편네에게는 쌍욕을 해주어도 시원찮았지만, 정현은 웃으면서 침착하게 대답했다.

  "네, 환불 못 해 드립니다. 손님, 여름에 다 처먹은 수박 쪼가리 들고 와서 4만 원짜리 수박 환불받으셨죠? 그럼 그걸로 끝내야죠. 앞으로 손님은 투 맨 마트 출입 금지입니다. 블랙리스트에 등록되었다구요. 블랙리스트, 알아요? 하긴 무식해서 블랙리스트가 뭔지도 모르겠지만."
  "뭐야? 야, 너 이런 쥐꼬리만 한 가게 해서 어떻게 밥은 처먹고 사니? 하여간 복 쪼가리 없는 건 병신 애비나 새끼나 똑같네."

  정현은 뱀눈을 뜨고 악담을 퍼붓는 여자의 얼굴을 향해 스마트폰을 들이밀었다.

  "지금 CCTV도 다 녹화되고 있고요. 이렇게 나한테 욕설하는 거, 다 촬영해서 모욕죄로 경찰에 고소할 겁니다. 이왕 시작한 거, 계속 더 해보시죠."

  정현의 그 말에 여자는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길길이 날뛰었다. 정현은 카운터 아래에 둔 소금 항아리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서는 소금을 되는대로 움켜쥐고는, 여편네의 발밑에다가 후려치듯 여러 번 흩뿌렸다. 그제야 여자가 움찔거리더니 가게를 나갔다. 

  '부자 동네에서 장사를 하면 저런 막돼먹은 손님은 없겠지.'

  '투 맨 마트'가 있는 이 동네는 재건축도 어려운 낡은 시영 아파트와 30년이 넘은 빌라가 공존하는 주거지역이었다. 명백히 '빈민가'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이곳에 거주하는 대부분 주민의 행색에는 가난의 냄새가 꾸역꾸역 풍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물건을 팔고 있는 정현 또한 그 가난에 물드는 중이었다. 발목 정도일까, 어쩌면 허리까지 그 가난의 물이 자신에게 들이찼는지도 모른다. 정현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창밖으로 비가 내리는 거리를 하릴없이 바라보았다.

  "뭐하냐? 손님은 좀 있어? 비도 오는데, 있다 저녁에 술이나 한잔 어때?"

  진상 여편네 때문에 마음이 가라앉아 있던 차에 경수한테 전화가 걸려 왔다.

  "배달할 거 좀 있어. 들어온 물건 정리도 해야 하고. 다음에 보자."
  "아따, 너 얼굴 잊어버리겠다. 다음, 다음 그러다 망년회 때 보겠네. 알았다, 그럼."

  사실 배달할 주문은 딱 1건밖에 없었다. 오늘은 입고되는 물건들도 없었다. 정현도 친구들과 만나서 술 마시며 힘든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을 만나서 쓰는 돈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한 푼이라도 아껴서 빨리 대출금을 갚아버리고 싶었다. 빚이 없어져야만, 돈을 모으고 그 돈으로 뭔가 번듯한 사업 같은 것도 할 수 있다. 술 마시는 데 쓰는 돈도 아까웠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술 마시다 자신이 무슨 사고라도 치지는 않을까 싶은 걱정도 있었다. 마트를 혼자 하게 되면서, 오늘처럼 진상 여편네와 같은 손님이며 정현의 너덜너덜해진 마음은 울분이 쌓일 대로 쌓인 상태였다. 밖에서 술을 마시다 취해서 불필요한 말다툼이나 싸움에 휘말리지는 않을지, 혹시라도 어디서 뭔가를 부셔버리지는 않을지 두렵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정현은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편을 택했다. 언제부터인가 자기 전에 소주를 종이컵으로 꽉 채워서 한 잔 마셔야만 잠이 들었다.

  정현은 8시에 마트의 문을 닫았다. 평상시에 9시 반까지 영업하던 것에 비하면 좀 이른 시각이었다. 오늘은 그냥 일찍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그나마 배달해야 할 집이 한 군데라 다행이었다. 비는 그쳤지만, 군데군데 물웅덩이가 진 곳이 있어서 조심스럽게 오토바이를 몰았다. 

  "배달 왔습니다."

  정현은 개나리 빌라 203호의 벨을 눌렀다. 그 집의 현관문은 조금 열려 있었다. 열린 문 사이로 음식 냄새가 솔솔 흘러나왔다. 언제 맡아보았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 청국장 냄새였다. 청국장은 정현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정현에게 청국장찌개를 자주 해주시곤 했다. 정현은 갑자기 어머니 생각이 났다. 그때였다. 현관문이 확 열리더니, 그 집의 고등학생 아들이 정현의 팔목을 붙잡으며 말했다.

  "형아다. 형아, 밥 먹고 가. 밥."
  "아니, 왜, 무슨..."

  정현은 당황해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 학생은 지적 장애가 있었다. 정현은 자신의 마트에 종종 들르는 그 모자(母子)를 알고 있었다. 남학생의 나이를 정확히 가늠하기는 어려웠다. 또래보다 체구가 커서, 교복을 입지 않았다면 스무 살 정도로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학생이 정현의 손목을 잡아끌면서 밥을 먹으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늦게까지 수고하시는구려. 마침 밥 먹으려던 참인데, 식사나 함께합시다."

  비좁은 안쪽 거실에서 퉁퉁한 체격의 중년 남자가 정현을 향해 말을 건넸다. 

  "아닙니다. 배달할 물건이 있어서요."
  "사양하지 마시고. 그냥 식탁에 밥 한 공기 더 놓으면 되는 거니까. 여보, 밥은 넉넉히 있지?"
  "네. 식사하고 가세요."

  남학생은 정현을 보고 한없이 웃어 보이며, 정현을 현관 옆의 4인용 식탁에 끌어다 앉혔다. 정현은 자신보다 덩치가 큰 남학생의 힘에 떠밀려 그렇게 식탁에 앉고 말았다. 정현이 식탁에 앉자, 학생이 물티슈를 건넸다.

  "형, 손 닦아. 깨끗이. 그래야 밥 먹을 수 있어."

  정현은 그런 학생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굳었던 표정이 누그러졌다. 식탁에는 청국장찌개와 겉절이, 칼집을 낸 비엔나소시지 구이, 참외장아찌 무침이 놓여 있었다. 정말이지 얼마만에 보는 집밥인지 몰랐다. 그러니까 3년 만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정현은 이런 밥을 차려서 먹어본 적이 없었다. 마트에서 돌아와 집에 가면 대개는 라면을 끓여 먹거나, 레토르트 식품을 데워서 끼니를 때웠다.

  "형아, 이거 맛있어. 이거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

  학생은 비엔나 소세지를 젓가락으로 집어서 정현의 밥 위에다 놓았다. 부부는 그런 아들을 가만히 웃으며 바라보았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 식탁에서 정현의 마음에 무언가가 몽글몽글 만들어지는 것 같았다. 정현이 밥 한 그릇을 비우자, 학생의 어머니가 밥을 더 드릴까요, 하고 물었다. 정현은 손사래를 쳤다.

  "가봐야죠.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보니까, 겉절이를 좋아하시는 것 같던데. 좀 싸드릴게요."

  정현은 괜찮다면서 사양했지만, 어느새 정현의 손에는 겉절이를 담은 쇼핑백이 들려있었다. 비가 그친 가을의 밤거리에는 쌀쌀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러나 정현의 마음은 그 집 식탁의 온기로 채워져 있었다. 그 온기는 정현의 쩍쩍 갈라진 논바닥과 같은 마음에 논물이 되어 찰랑거렸다. 정현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자신에게 준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요양원에 계신 아버지도 자주 찾아봬야지, 하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는 아버지가 물려주신 투 맨 마트에 언젠가 자신의 곁에 있을 한 사람의 자리를 마련하겠다는 소망을 품게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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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방문객


  "거기, 문 좀 열어봐요. 문 좀 열라니까."

  쾅, 쾅, 쾅.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무영의 눈이 떠졌다. 침대 옆에 놓인 디지털시계의 숫자가 3시 1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도대체 이 한밤중에 누가 자신을 찾아왔단 말인가? 무영은 졸린 눈을 비비며 슬리퍼를 신었다.

  "누구세요? 누구냐구요?"

  무영은 고장난 인터폰을 고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은 남자인 자신에게도 나름 공포스러웠다.

  "나, 소림이. 이, 소, 림."

  여자의 새된 목소리가 무영의 귀에 쿡쿡 쑤시며 박혔다. 이소림? 이소림이 누구지?

  "이봐요. 난 댁이 누군지 모르는데..."
  "웃기는 인간이네. 자기가 만들어낸 주인공도 몰라."

  주인공이라고? 아, 이소림! 이소림은 무영이 웹소설 사이트에 연재중인 무협 소설 '청운의 꿈'의 여주인공이었다. 그런데 저 여자애가 왜 나를 찾아왔지? 아니, 그보다 저런 소설 속 인물이 살아있다는 게 말이 되나? 무영은 혼란스러웠다. 자신을 이소림이라고 말하는 그 여자는 더욱더 문을 쾅쾅 두드려대고 있었다. 어쨌든 이웃에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무영은 문을 열어주기로 했다.

  "이 집 찾으려고 이 밤중에 고생 좀 했지. 생각보다 동네가 후지네. 그렇게 돈 좀 벌었으면 좋은 데 집이나 사지."

  성큼성큼 거실에 들어온 소림은 마치 자신의 집인 것처럼 무영의 집을 휙 둘러보더니 그렇게 말했다. 무영의 키는 170센티미터였는데, 소림은 그보다 키가 좀 더 컸다. 머리는 양 갈래로 어깨까지 땋았고, 하늘색의 무복(武服)을 입고 있었다. 무영은 자신이 소설에서 이소림을 저렇게 묘사했었나 도무지 기억나질 않았다. 무영의 약점은 언제나 디테일이었다. 성격이 급한 무영에게 캐릭터의 묘사를 자세하게 하는 일은 쥐약을 먹는 것처럼 아주 싫은 일이었다. 그러니 대개는 최고의 미인, 엄청난 무공, 이런 식으로 대충 뭉뚱그려 써내면서 장면의 전환을 꾀하곤 했다.

  "그런데, 왜 날 찾아왔어?"
  "그걸 몰라서 묻는 거야? 엊그제 135화에서 당신이 나를 탄검과 혼인시키려고 복선을 깔아놨잖아. 난 그게 싫다고. 도대체 내가 왜 탄검과 맺어져야 하냔 말이지. 난 탄검이 싫어. 걔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그저 무식하게 칼만 잘 휘두를 뿐이지."
  "탄검이가 뭐 어떻다고. 강호에서 탄검이만큼 무공이 뛰어난 애가 어디 있다고."

  소림은 소파에 털썩 앉더니, 무영을 쏘아보았다. 그 눈빛이 얼마나 매서운지 무영은 몸은 움찔하면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게 당신의 문제야. 탄검이하고 나하고는 과거에 뭐 인연이고 말고 할 게 없잖아. 아, 소설이란 말이지. 개연성이라는 게 있어야 한다고. 개연성. 영어로 알려줄까? probability! 탄검이하고 내가 맺어질 이유가 당최 아무것도 없다고."

  무영은 적잖이 당황했다. 이제까지 자신의 글에서 개연성 같은 것을 고민해 본 적은 별로 없었다. 매일 써내야 하는 웹소설의 분량은 정해져 있었고, 그걸 채우기 위해서 생각을 오래하면 할수록 스토리만 더 엉킬 뿐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저 되는대로 써나가는 것이 무영의 작업 방식이었다. 그러다 나중에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부분이 생겼다 싶으면 또 다른 캐릭터와 이야기를 급조해서 메꾸어 나갔다.

  "소림 양, 아니, 소림아. 내 말 좀 들어봐. 넌 내가 만들어 낸 인물이야. 그러니까 내가 써내는 대로 따라야 하는 거야. 그렇게 작가의 뜻에 토를 달면 안된다고."
  "내 말은 만들려면 제대로 만들어내야 한다 이거야. 이 머리하고 옷도 다 내가 궁리해서 꾸민 거라고. 그리고 난 주근깨가 있는데, 백옥같은 흰 얼굴 같은 표현을 내가 등장할 때마다 쓰고 있어. 그런 얼굴을 한 무림의 고수가 있을 리가 없어. 땡볕에 수련하느라 얼굴이 다 타고, 손바닥은 쩍쩍 갈라져 있어. 자, 내 손을 봐봐."

  소림은 자신의 커다랗고 거친 손을 쫙 펴서 마구 흔들어 보였다. 무영은 여자의 손이 그렇게 크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젊은 여자는 '청운의 꿈'의 소림이 아닌 것 같았다.

  "어저께도 야식을 먹고 잤군. 이 먹다 남은 치킨 쪼가리 좀 봐."

  소림은 삐딱한 웃음을 흘리며 치킨 조각을 하나 집었다. 그러더니 입에 넣고는 우적우적 씹는 소리를 내었다. 세상에, 자신이 만들어낸 청순가련한 소녀 무사가 닭 뼈까지 씹어먹고 있었다.
 
  "작가 양반, 올해 상반기 결산 수익이 얼마지? 세금 떼고 1억 좀 넘었다고 그러지 않았어?"

  무영은 소림이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걸 어떻게 알아낸 거야?"
  "사람은 말이야, 입이 좀 무거워야 해. 남자는 더욱 그래야지. 생판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한테 자랑 좀 한답시고 결산 수익 인증을 해버리면 어떡하냐?"

  무영은 자신이 가끔 들르는 소설 창작 커뮤니티 사이트에다 며칠 전 객기로 올린 글을 떠올렸다. 소림도 그걸 읽은 모양이었다.

  "정말 1억을 버니까 행복해? 행복한 거야? 뭐, 진짜 행복하다고 써놓기는 했더구만."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어? 먹고 싶은 거 먹고, 하고 싶은 거 하고, 돌아다니고 싶은 데 돌아다니고. 돈이란 게 그런 데 쓰라고 있는 건데."
  "아니, 내가 보기엔 전혀 그렇지 않아."

  소림은 닭 목뼈를 천천히 뱉어내며 말했다.

  "지금 '청운의 꿈'이 137화잖아. 그거 쓰는 동안에 당신은 딱 하루 쉬었어. 분명히 기억나. 그날은 나도 대련(對鍊)을 쉬었으니까. 나뿐만 아니라, 거기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기뻐서 날뛰었어. 오죽 뺑뺑이를 돌렸어야지. 오늘은 화산, 내일은 북천, 그다음은 남만, 정신없이 인물들을 내모니까 다들 지쳐있었거든."

  소림의 말은 사실이었다. 무영은 단 하루만 쉬었다. 심한 몸살 감기가 나서 타이레놀을 먹고 그저 드러누워 잠만 잘 수밖에 없었던 날이었다. 무영에게 연재를 하루 쉰다는 것은 극한의 공포였다. 자신의 글을 클릭하는 모든 독자는 돈이나 다름없었다. 무영은 그 아픈 날에도 침대에 누워있으면서, 분기별 정산금이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가는 상상을 했다. 글이 단 하루 올라오지 않았는데도, 독자들의 불만은 대단했다. 초심을 잃었다느니, 배가 불러터져서 저 모양이라느니 하는 말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개중에는 무영의 집을 찾아가 폭파해 버리겠다고 말하는 미친 인간도 있었다.

  "나도 좀 지치기는 해."
  "그럼, 언제 끝낼 건데? 이거 끝낼 생각은 있어? 끝내려면 좀 차근차근 계획을 세워서 해봐. 등장인물들 그냥 다 죽여버리고 그러지 말고."

  무영은 소림의 그 말에 허를 찔린 듯 놀랐다. 사실 등장인물을 다 죽이는 것은 무영의 고질적인 작법이었다.

  "주인공이 좀 죽어야 비감한 맛이 있지. 그래야 독자들도 울분을 느끼고 원통해하고 그럴 거 아냐?"
  "이봐, 작가 양반. 사람이 죽는 게 그렇게 쉽지가 않아요. 강호의 무림 고수들은 독화살 맞는다고 단번에 죽고 그러지 않아. 쌓아온 무공의 세월이 얼마인데, 그걸 만들어낸 것이 작가 양반 당신 아냐? 그런데 무슨 밀가루 포대 먼지 털듯이 장풍에 그냥 싸그리 몰살시켜 버리고 그러냐고. 어쨌든 말이 좀 되게 하라니까."
  "무협이란 게 말이 안 되니까 사람들이 좋아하는 거야."

  소림은 한숨을 쉬며 그 말을 하는 무영을 안타깝게 쳐다보았다.

  "그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속에서 죽어야 하는 나 같은 사람은 어떨 거 같아?"

  무영은 이제까지 강철처럼 단단해 보였던 소림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게 되어 있어."
  "어쭈, 철학자 양반 납셨군. 자, 그럼 타협을 하기로 하지. 난 탄검이가 싫어. 하지만 작가 양반이 원한다면 탄검과 혼인하는 것으로 하지. 하지만 날 죽이지는 말아 달라구. 어쨌든 난 살고 싶어. 죽는 건 아주 아주, 기분 더러운 일이거든. 어떻게 할 거야?"
  "그걸 지금 말하기는 곤란해."
  "결국 죽이겠다는 거로군."

  소림은 탁자 위에서 물티슈를 꺼내어 기름기가 묻은 손을 빡빡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 나서는 그 티슈를 무영의 얼굴을 향해 정확하게 내던졌다. 무영의 소설 속에서 소림은 걷기 시작할 때부터 무공을 닦은 무사였다. 그 무사가 던진 휴지 조각은 무거운 납덩이가 되어 무영의 오른뺨을 강타했다. 무영은 볼이 터져나갈 것 같은 통증에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으악!"

  소림은 그런 무영을 식탁이 있는 벽 쪽으로 거칠게 밀쳤다.

  "잘 생각해 보라구. 다들 불만이 목에까지 차 있어. 참 내 팔자도 사납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소설을 살아내야 하다니 말이야. 결국 남는 건 당신 통장에 찍히는 그 숫자뿐이군. 행복? 그 똥통에서 열심히 잘 찾아봐."

  소림은 그 말을 끝으로 현관문 앞에서 스르륵 사라졌다. 무영은 자신이 소림에게 씌워준 투명 망토를 떠올렸다. 그것은 소림의 열일곱 생일에 화산파의 당주에게서 뺏어서 준 선물이었다. 조금씩, 뜨뜻한 무언가가 무영의 입가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바닥에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무영은 입안에서 헛도는 무언가를 뱉어냈다. 부러진 윗니 조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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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 우산 속


  "자, 여기 좀 앉으시죠."
 
  의사가 동희에게 의자를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동희의 우산에서는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가을비치고는 제법 세찬 비였다. 동희는 의사의 입에서 자신의 바람과는 다른 말이 나올 것이라고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다.

  "올해 가을은 비가 좀 자주 오네요."
 
  의사는 모니터에 뜬 MRI 사진을 연달아 클릭하면서 무심한 듯 말을 건넸다. 동희는 의사의 그런 인사말에 대답할 기운도 없었다. 암 병동에 입원한 동생을 만나고 오니, 몸속의 모든 기운이 다 빠져나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위쪽이 환자분의 2년 전 사진이고, 아래가 어제 찍은 사진입니다. 대충 보기에도 병변이 확연히 커진 것이 보이실 겁니다. 수술로 종양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죠. 그래도 3번의 수술을 했고, 환자분이 2년을 버텼으면 어떤 면에서는 최선이었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럼, 이제 더이상의 수술은 어려운가요?"

  의사의 시선은 동희가 진료실에 들어오고 난 뒤부터 계속해서 모니터에만 꽂혀있었다. 일부러 동희의 시선을 피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수술이 어려워서 못 한다고 할 수는 없어요. 다만, 더이상의 수술은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는 있겠네요. 수술을 해도 환자분의 여명(餘命)은 3개월에서 6개월입니다. 사실 6개월도 어려워요. 무엇보다 환자분이 수술은 받지 않겠다고 해서. 이제는 보호자분도 그 뜻에 따라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수술을 안하면 퇴원하고 나서 어떻게..."
  "환자 상태를 지켜보면서, 호스피스 병동을 알아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자세한 것은 있다가 간호사에게 물어보면 알려줄 겁니다."

  동희는 마치 자신의 동생이 이 커다란 대학병원에서 어서 빨리 치워버려야 할 폐기물 같은 존재 같다고 느꼈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암환자가 있고, 그 암환자들은 이 유명한 대학병원의 입원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선생님, 선생님이 이제까지 본 환자 중에서 말기암에서 회복된 기적 같은 그런 일은 없었나요?"

  모니터에 고정되었던 의사의 시선이 그제야 동희의 얼굴로 향했다.

  "지금까지는 없습니다. 이것만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주치의로서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의사는 건조한 말투로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최선? 무엇이 최선이란 말인가? 교모세포종은 뇌종양 중에서도 치명도가 높은 악성 종양이다. 이 의사는 그런 환자의 종양을 기계적으로 제거했고, 병원에서 임상실험 중인 항암제를 적극적으로 권유했다. 어차피 동생은 이 의사에게 임상실험의 시험군에 해당하는 n의 수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동희는 의사의 희고 매끈한 옆얼굴을 보는 일이 메스껍게 느껴졌다.

  진료실을 나오니, 담당 간호사가 동희에게 소책자를 건넸다. 말기암 환자의 간호와 호스피스 병동 입원 절차를 안내하는 팸플릿이었다. 그것을 건네는 간호사의 표정도 덤덤했다. 이 병원의 모든 것은 비정하다. 비정하기 짝이 없다. 알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목 안쪽까지 차올랐다. 자신의 동생은 죽어가는데, 이 병원의 그 누구도 그 죽음에 관심을 갖거나 아파하는 사람이 없었다.

  "언니, 나 이제 그만두고 싶어. 언니도 더는 애쓰지 마. 그만하면 됐어."

  동희는 동생의 고통스러운 얼굴을 떠올렸다. 동미는 바짝 마른 입으로 몇 번씩이나 침을 묻혀가며 동희에게 힘겹게 말했다. 물을 주고 싶었지만, 금식 중이라 물을 마시면 안 된다고 했다. 어차피 죽을 거, 뭔 검사를 한다고 금식을 시키고 저러는가 싶어서 가슴 속에서 불덩이가 치미는 것 같았다.

  "우리 언니, 혼자 남으면 어떻게 살까..."

  동미는 그렇게 말하면서 동희의 손을 힘겹게 잡았다. 이 엄혹한 세상 속에 혈육이라고는 너뿐인데, 나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구나. 동희는 뼈가 드러난 동미의 손을 몇 번이고 만지다가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코드 블루, 코드 블루. 신장내과 415."

  2년 가까이 대학 병원을 드나들다 보니, 코드 블루(Code Blue) 방송을 듣는 것도 익숙해졌다. 코드 블루는 심폐소생술이 필요한 응급 환자가 있음을 알리는 병원 내 응급 신호이다. 저 코드 블루 환자는 살아날 수 있을까? 동희는 저 환자의 목숨이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병원에서 많은 죽음을 목도하는 종양내과와 신경외과 의사에게 환자들이란 지나가는 바람과도 같을지 모른다. 바람은 어제도, 오늘도 분다. 바람은 붙잡을 수 없다. 동희에게 동미는 이제 어디론가 사라지는 바람이 될 터였다. 그 바람이 동희의 곁에 머문 시간은 28년이었다.

  세차게 내리는 가을비는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동희는 빨강색 우산을 펼치고 병원의 정문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아무래도 어디서 좀 쉬다가 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정문으로 향하는 오른쪽에는 원형의 퍼걸러(pergola)가 있는 작은 정원이 있었다. 3면이 유리로 둘러싸인 퍼걸러에 환자와 방문객들 몇몇이 앉아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저기에 앉아서 기운을 좀 차리고 가야겠다. 동희는 발걸음을 그쪽으로 옮겼다.

  "무슨 비가 이렇게 오지게도 오는지."

  환자복을 입은 영감이 휠체어에 비스듬히 앉아 그렇게 말했다. 그의 아내로 보이는 할머니가 영감의 무릎을 덮은 담요가 흘러내리자, 위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그러자 영감의 휑한 왼쪽 다리가 보였다. 절단된 발목 위로 흰색의 붕대가 감겨있었다. 동희는 영감의 아내와 세 좌석을 사이에 두고 자리에 앉았다. 동희와 조금 떨어진 곳에는 젊은 여자 환자가 있었다. 진한 갈색 머리의 여자는 휠체어에 앉아서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가씨는 어디가 아파서 병원에 왔어? 난 당뇨가 심해서 이 왼쪽 발을 잘랐어. 그래도 그 다리 쓸만큼 썼으니 다행이지. 젊어서 그랬으면 어쩔 뻔했어? 병신으로 사는 것도 쉽지 않은데."

  영감은 휠체어의 젊은 여자 환자에게 그렇게 물었다. 동희는 무례하고 거친 말투의 영감에게서 당혹감을 느꼈다. 저런 부류의 사람은 어딜 가나 결코 만나고 싶지 않다. 이런 좁은 공간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조금 쉬었다 가려고 온 곳에서 오히려 기분만 상할 것 같았다. 

  "아, 저요? 공장에서 일하다가 사고가 났어요. 야간작업하다가 3층 난간에서 발을 헛디뎌 떨어졌죠. 겨우 목숨은 건졌는데, 의사가 평생 다리는 못 쓴다고 그래요."

  젊은 여자는 대범하게 영감의 말을 받아쳤다. 그 대답을 듣고는 영감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더이상 말을 떼지 못했다. 여자는 말을 이어갔다.

  "병신으로 사는 게 어디 쉽겠어요. 그래도 난 지금이 내 삶에서 가장 편안한 시간이라 생각해요. 이제까지 가족을 위해서 죽으라고 일만 했어요. 야간작업도 수당 더 준다고 해서 무리해서 한 건데. 살면서 나 자신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이렇게 다치고 보니까, 내 삶만을 온전히 생각하게 되더라니까요."

  동희는 여자에게 놓인 앞으로의 지난한 삶을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무거워졌다. 비 오는 흐린 날씨 때문인지 날은 더욱 어둑어둑해진 것처럼 보였다. 동희는 휴대폰을 꺼내어 시간을 보았다. 6시 2분에서 3분으로 디지털 숫자가 빠르게 바뀌었다. 퇴근 시간이 겹쳐서 지하철은 더욱 붐빌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했다. 세찬 비도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병원의 정문 앞에는 꽤나 긴 횡단보도가 있었다. 그곳의 6차선 도로는 언제나 차들로 붐볐고, 횡단 보도의 보행자 신호등이 켜지려면 항상 오래 기다려야 했다. 여전히 다리는 무거웠고, 걸을 때마다 힘을 주어야만 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어떻게든. 동희는 가을비 우산 속에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눈물로 뿌옇게 번지는 녹색등이 저 멀리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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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가을이었다


  "지금 1층 안내 데스크에서는 갈색 바셋하운드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반려견을 잃어버리신 손님께서는 1층 안내 데스크로 와주시길 바랍니다."
 
  추석을 앞두고 시 외곽의 프리미엄 아웃렛은 사람들로 몹시 붐볐다. 에스컬레이터는 빽빽하게 자리한 손님들을 쉴 새 없이 실어날랐다. 우혁의 양손은 아내가 떠넘긴 쇼핑백들이 그득 들려있었다. 이제 초등학생이 된 딸아이가 그나마 말귀를 알아듣고 잘 따라다니는 것이 다행이었다. 우혁은 안내 방송을 듣고는 혀를 차며 한마디 했다.

  "예전에는 애들을 그렇게 잘 잃어버렸는데, 요새는 개를 놓치는가 보네."
  "아빠, 사람들이 책임감이 없어서 그래. 책임감이."
  "뭐?"

  우혁은 자신의 딸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우습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다. 아이의 속내를 알아차리는 일은 아내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보다도 어렵게 느껴졌다. 요새 애들은 정말 모르겠다니까. 우혁은 딸의 땋은 머리에 흔들거리는 하늘색 리본을 보면서 그렇게 혼잣말을 했다.

  "벌써 4시네. 지민 엄마, 슬슬 가 봐야 하지 않을까?"
  "아직도 살 거 많아. 여기 한번 오려면 얼마나 힘든데. 조금만 더 있다 가요."

  아내의 목소리에는 활기가 가득했다. 쇼핑할 때의 아내는 아주 딴 사람처럼 보였다. 적당한 가격대의 물건을 찾기 위해 몇 층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럴 때 우혁은 중간층의 라운지나 카페에서 아내를 기다리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들어야 할 짐이 많았다. 추석에 양가를 방문하기 위해 챙길 선물을 사야 했다.   
 
  "가만있자, 8층에 스포츠 웨어가 있네. 아버님 가을 티셔츠 하나 사는 게 좋겠어."

  아내는 엘리베이터의 층별 안내판을 주의깊게 보고는 그렇게 말했다. 5층에서 8층까지 에스컬레이터로 이동하는 것은 번잡스러웠다. 2대의 엘리베이터 앞에는 기다리는 사람들이 여럿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다. 우혁의 오른쪽에 있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먼저 열렸다. 이미 엘리베이터는 사람들로 가득 차있었다. 아무래도 자신과 아내, 딸까지 다 타는 것은 무리였다.

  "당신 먼저 올라가 있어. 내가 지민이하고 곧 따라갈게."

  아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엘리베이터에 탔다. 3번이나 엘리베이터를 보내고 나서야, 우혁은 딸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탈 수 있었다. 정말이지 우혁에게 쇼핑몰에 가는 것은 고역이나 다름없었다. 손에 든 쇼핑백을 놓치지 않으려고 꽉 힘을 준 데다가, 지민이까지 자석처럼 허리춤에 붙여놓으니 비좁은 엘리베이터에서 몸이 쭈그러드는 느낌이었다. 다행이도 6층에서 사람들이 많이 내리고 나니 엘리베이터 안에는 좀 여유가 생겼다. 그러고 나서 들어온 사람들은 셋이었다. 젊은 부부와 그들의 아이였다. 그들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막 들어올 때, 우혁은 그 익숙한 얼굴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얼굴에 살이 좀 붙었지만, 그 얼굴은 분명 우혁이 잘 아는 사람이었다.

  마치 동시에 감전이 된 사람처럼 여자의 눈동자도 약간의 충격으로 흔들렸다. 그러나 여자는 이내 우혁에게 등을 보이고 돌아섰다. 10년이나 흘렀나, 벌써. 강산이 한 번 변하는 동안, 우혁의 허리띠는 2칸이 늘어났고 앞머리가 엄지 손톱만큼 벗겨지기 시작했다. 우혁은 수영의 뒷머리에 듬성듬성난 새치에 눈길이 갔다. 뿌리 염색은 안하는군. 수영은 원체 뭔가 꾸미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반지나 목걸이는 물론, 화장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달라진 모양은 아니었다.

  6층에서 8층으로 이동하는 엘리베이터는 1분에 1센티씩, 아주 천천히 이동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수영과의 마지막은 어디에서였을까? 그래, 시외버스 터미널 근처의 허름한 모텔이었다. 담뱃불에 구멍이 난 포도주색의 커텐 앞에서, 수영은 그만 끝내자고 말했다. 우혁은 수영의 말에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헤어짐에는 전조가 있으며,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미리 알아챌 수 있는 긴 꼬리를 가졌다. 우혁은 잘 알고 있었다. 아픈 부모와 가난한 집안 형편, 자신의 미래는 불투명한 회색이었다.

  "자, 이거, 가방에 달고 다녀."

  모텔을 나오면서, 노랑색 스마일맨 열쇠고리를 수영은 우혁의 백팩에다 달아주었다. 그것은 우혁이 수영에게 처음으로 준 선물이었다. 3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열쇠고리에는 푸른색의 녹이 슬었다. 우혁은 서울로 오는 고속버스 의자 사이에 그 열쇠고리를 빼어서 그냥 두고 내렸다. 스마일맨의 웃음이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띵. 드디어 8층의 문이 열렸다. 수영의 새치 머리가 어느새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아빠, 저 아줌마 좀 못생긴 거 같아."
  "응, 그래? 그런데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는 건 안좋은 버릇이야."

  지민은 우혁의 말에 약간 입을 삐쭉거렸다.

  "못생긴 걸 못생겼다고 하지 뭐라고 해?"

  우혁은 지민의 오른쪽 눈에만 쌍커풀이 있다는 것을 새삼 알아차렸다. 자신도 쌍커풀이 한쪽만 있었다. 우혁은 쇼핑백을 왼쪽 손에 힘겹게 모아서 들고는, 오른쪽 손으로 딸의 손을 잡았다. 10년 전, 그 헤어짐이 없었다면 이 아이의 말캉하고 따뜻한 손은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때는 가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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