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성야(復活 聖夜)


야, 하고 부르는 소리에 눈이 떠진다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 남자의 얼굴
나는 큰소리로 주기도문을 외우고는
다시 눈을 감는다

귀신은 말하지 않아요
말을 하는 무언가라면 그게 더 무섭죠
젊은 무당은 그렇게 말한다

화장실 타일의 모서리가 툭, 깨진다
새끼손가락만 한 세월이 목에 콱, 박힌다
이 집에서 너무 오래 살았다
그래도 귀신을 본 적은 없었는데

남자의 얼굴은 어두웠고 넙데데했다
나쁜 놈이겠지, 분명
악은 순회하며 곳곳에 누렇게 뜬 자국을 남긴다

공동묘지 옆의 아파트에서 살았는데요
집에서 귀신을 자꾸 보다가
결국 못 살겠다 싶어서 이사를 갔어요

오래전, 귀신을 보았다는 어느 여자의 글을 읽고는
나는 도망가지 말아야지 하고는
귀신 퇴치법을 검색한다
가만있자, 오늘은 부활절이군
부활 계란을 삶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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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라일락이 밭은기침을 내뱉습니다
바람이 가쁘게 향기를 흩어버립니다
나는 라일락이 져버리는 날을 헤아립니다
하루,
이틀,
사흘,
라일락의 봄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소식을 참으로 늦게 들었습니다
당신의 눈은 오랫동안 멀어있었고
당신의 육신은 그저 고단했습니다
당신의 봄은 라일락과 함께 멀어집니다

일을 하다가
손가락이 잘려 나가고
발목이 으스러지며
허리가 바수어지는
내가 알지 못하는 당신

당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당신의 구겨진 낡은 옷깃 사이에
가만히 속살거리며
그래도 누군가는 들을 것입니다
이 봄이 지나가기 전에

나는 들었습니다
당신의 부서진 날개가 푸르게
펄럭이는 소리를
당신이 날아간 그곳
라일락의 향기가 문신처럼 새겨집니다




*대기업의 휴대폰 하청공장에서 일하다가 산업재해를 입은
노동자가 있습니다. 이진희 씨(1987-2025)는 그 사고로 시력을 잃었고,
뇌출혈로 오랫동안 투병하다 세상을 떴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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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


버스는 4분 후에 오기로 되어있다 정류장 건너편 스타벅스에는
항상 사람이 많다 지구가 망하기 전날까지도 스타벅스는 영업을
하고 있을 것 같다 나보다 늦게 온 젊은 여자가 냉큼 먼저 버스에
탄다 망할 년, 한 자리 남은 버스의 자리를 의기양양하게 나꿔챈다
나는 의자의 손잡이를 힘겹게 잡고 서 있다 그런데 예쁜 아가씨가
자리를 양보한다 나더러 앉으라는 것이다 처음으로 자리를 양보받았다
나는 폭삭 늙어버린 느낌이 든다 고마워요 진심으로 나는 아가씨가
복을 받기를 바란다 늙은 여자 하나가 들어가는 가게는 복권방이다
인생 대박의 꿈은 너무나도 멀다 나는 오래전 시 창작 수업을 떠올린다
심술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독설로 남을 깔아뭉개던 A는 이듬해 등단했고
몇 권이 팔렸는지 궁금하지도 않은 한심한 소설을 써재껴 나갔다
앞날이 촉망된다던 B도 재빨리 등단했다 그리고 지금은 책을 팔고 있다
나는 그 두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도, 눈꼽만치도 부럽지 않다 예술가의
호칭은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툭, 던져지는 것이다
예술가는 돈과 명예를 티끌처럼 여겨야 하거늘, 나는 명성을 바라는
은근한 속물근성을 준엄하게 꾸짖는다 치과에는 환자들이 차곡차곡
쌓인다 나는 잘 맞지 않는 치아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가 맞물리면서 찌그덕, 하는 소리가 들려요 좀 예민한 사람들이 있죠
친절하게 대답하는 의사의 앞머리에서 흰머리를 찾아내려고 하지만
흰머리는 보이지 않는다 내 눈이 나빠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안경이
부서져서 안경을 새로 맞추었지만, 새 안경을 찾아가지 않은지가
한 달이 되었다 안경 도수를 너무 올렸다 TV의 자막이 보이질 않으니
별 도리가 없다 나는 그 안경을 쓰기가 싫어서, 나의 흐려진 눈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나의 새 안경이 있는 안경원을 매일
지나쳐 간다 버스가 오거리를 지날 때, 안경원이 손짓한다 오늘도
안경을 찾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늙었어요 돌아갈 수 없어요 살짝 졸음이
쏟아진다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치고는 화들짝 놀란다 이 버스 기사의
운전은 고약스럽다 트렌치코트 자락이 엉키면서 까악까악 소리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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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창고


얼마 전부터 식탁에 반창고를 놔두었습니다 무슨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찾기가 편해서입니다 계속 다치는 일이
일어나더군요 상처에 바르는 연고는 TV 옆에 있습니다 TV 옆으로
가서 연고를 꾹, 짜고는 식탁으로 갑니다 그리고 반창고를 뜯어서
상처에 돌돌, 감아줍니다 이상한 치유의 동선(動線), 좀 우스운가요?
네, 살아보니 그렇더군요 인생이 제멋대로 흘러가는데 그걸 바로잡을
방법이, 정확하고 마땅한 방법이 없단 말이지요 어제는 식탁에 잘라놓은
작은 반창고 조각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요?
나는 식탁 위를 손바닥으로 훑어봅니다 식탁 아래도 찬찬히 살펴봅니다
눈이 너무나도 나빠졌음을 느낍니다 늙음은 참으로 저주스러운 것입니다
어디에도 반창고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늘 오후, 청소기를 돌리다가
청소기의 먼지 통을 들여다봅니다 작은 네모 조각이 보이는군요 그래요,
먼지를 좀 뒤집어쓰기는 했죠 그건 잃어버린 반창고였어요 나는 먼지 통에서
반창고를 끄집어내었습니다 너무 반가웠죠 손톱만 한 살구색의 반창고,
먼지를 털어주었습니다 물론 이걸 쓸 수는 없어요 나는 반창고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달력의 가장자리에다 붙여놓았습니다 잘 어울리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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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4월, 시금치는 단맛을 잃어버렸지 추운 겨울을 견디려
단맛을 만들어내는 패기 따위, 이 봄날에는 필요 없어
꼬막도 이제 끝물이야 쪼그라든 꼬막살을 발라내면서
다시, 내년 겨울을 기약하는 거야 추울 때, 살을 불리고
악다구니를 쓰면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데 손등은
쩍쩍 갈라지면서 가는 피가 흘러 왜 봄에도 부드러움이
스며들지 못할까, 내 손은 오랫동안 그랬어 발도 시려워
조그만 아이가 정신없이 뛰어다녀 흩날리는 벚꽃잎을
잡으려고 얼빠진 애비는 벚꽃 나무 옆의 소나무를 흔들어
너에게 꽃잎을, 이 봄을 주겠노라 나무의 비명 따위는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남자의 치열한 이기심에 구역질이
날 것 같아 애새끼는 마구 소리를 지르는데 벚꽃잎은
수직으로 솟구쳐 멀리, 멀리, 멀리, 문득, 내 핏속에
흐르는 아버지의 유언, 너는 글을 쓰는 게 좋겠구나
아빠, 내가 언젠가는 유고 시집(遺稿詩集)을 낼 수 있을지도
너무 늦지 않았으면, 하지만 죽음은 항상 빨리 도착하지
엄마, 오래전 수술 자국이 아프지 않아? 아프지 않은데, 오늘은
그렇구나 방금, 내 왼쪽 귀가 따끔, 그렇게 신호를 보냈거든
내일은 비가 올 거야 8년 전에 다친 신경이 눈을 찡긋거리면서
아파트 출입구에서 4시간째 죽을힘을 다해 손 세차를 하던
남자는 만족한 표정으로 차를 타고 떠나는군 저 인간은 내일
비가 온다는 걸 몰라 흐리고 어리석은 미래가 뒤엉킨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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