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나무


새벽에 꿈을 꾸었다
죽을 사(死)자가 아주 커다랗게
허공에 쓰여있었다
정말로 죽을 꿈인가
마음이 서늘해진다

지난 1년은
몸이 너무도 아파서
죽어버리고 싶었다
어차피 버릴 시를 쓰느라
죽어버리고 싶었다

가끔은 그 모든 게
내 사주(四柱)에 단 하나뿐인
나무 목(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무는 살아있는 기운인데
나무가 말라비틀어지고
나무가 바람을 가두지 못하고
나무가 고양이 울음에 놀라고
나무가 풀벌레와 함께 울고
나무가 사람을 진저리나게 싫어하고
나무가 나무가 나무가

죽어버린 나무에 물을 주면
백 년, 어쩌면 그 후에도
꽃을 피울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전설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므로 오늘도
마침표 없는 글에다
물을 따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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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하늘이 눅눅하다
비가 올 것 같다
현관에 촛불을 켜둔다
국군의 날, 억울하게 죽은 군인들 생각이 나서
그리고 10월에는 아버지 기일(忌日)이 있으니까
촛불은 차분하게 타오른다

어느 무당의 말을 들으니
촛불이 타는 모양새에도
뜻이 있다고 하더군
흔들리는 촛불은 불길하다지
벌써 지 몸뚱이의 절반을 태운
싸구려 양초는 상자곽에 쓰여 있는
제사용 고급 양초의 명성을 배반한다

고급의 인생은 어떤 것인지
잠깐 생각을 해본다
좋은 차, 좋은 집, 잘 먹고 잘사는
모든 것이 돈으로 귀결되는 결국은
고급의 그 어떤 중심의 삶

촛불이 잠시 흔들린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어린 시절, 나의 피아노 가방에는
기도하는 소녀가 그려져 있었는데
소녀는 한쪽 눈을 살짝 찡그렸다
아마도 촛불의 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만히 고요하게 타는 촛불
불쌍한 영혼들, 이 세상 어디에서
헤매지 말고 잘들 가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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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抒情詩)


명랑(明朗)을 말하면서
시시덕거리면
명랑해지냐
너의 명랑은 오로지
너만의 것이지

생이 우울하다고
줄줄 처울지 좀 말아
그건 너의 삶이지

어그러진 연애담
너한테나 절절할 뿐이야
사랑이 끝났다고
세상이 끝나지는 않아

나를 구겨 넣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나는 안 들어가
잠깐 들여다볼 뿐

사람들이 지나가
시간은 흘러가
상처는 낫는 법이지

너의 지옥
서정의 감옥
탈출하는 게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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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운동회


아침 7시 반, 운동장은 고요해
흙바닥에 선명한 흰색 분필 가루를
짓이기며 천천히 걸었어
달리기에서 1등을 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
참 잘했어요, 애새끼와 계집아이가
사이좋게 웃고 있는 보라색 도장이
팔뚝에 찍히면 상품을 받았는데
공책와 연필 따위, 그게 그렇게 부럽더군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 인생이란 게 더럽게
불공평하다는 걸 어쩔 수 없이 깨달아

청군 백군 따위 병정 놀음
그딴 걸 왜 애들한테 시켰는지
줄다리기에서 지고 나면 슬퍼져
엄마가 싸준 김밥은 약간 신맛이 났어
차라리 비가 왔으면 좋았을 텐데
야만의 시대를 지나는 것
불청객의 기억으로 가을 운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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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드라마(Docudrama)


이 영화는 자막이 없습니다
호주에서 만든 3시간 짜리 다큐드라마(docudrama)
다큐(docu), 라는 말이 들어갔으니까 진짜일 것 같지만
드라마(drama), 라는 말이 따라붙었잖아요 그러니까
어느 정도는 가짜, 사람들이 인생의 3분의 1은
거짓말을 하고 사는 것과 같아요

영국식 영어는 정말이지 알아먹기 힘들어요
좀 듣다 보면 적응은 되는데, 무슨 말인지 한참
있다가 알게 되죠 제일 좋은 건 말이죠, 미국식
영어에요 그게 진짜 영어죠 말에 기름이 줄줄
흐르거든요 듣기가 좋아요 그게 전부에요
아무튼, 대학 시절에 어학연수를 갔다 왔더라면
어땠을까, 그런 후회가 들죠 그때 어학 연수
광풍이 불어서, 다들 빚을 내서 미국과 캐나다로
떠났어요 친구 J는 강남에 살았는데, 캐나다로 떠났죠
밴쿠버에서 나한테 엽서를 보냈어요 그 엽서가
오래된 책 상자 어딘가에 있기는 있을 건데,
J가 밴쿠버의 추위에 진절머리를 내는 동안
난 그저 도서관에서 책을 열심히 빌려다 읽었고
졸업할 무렵에는 2천 권의 대출 권수를 기록했죠

두 남자는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는데, 역시나
알아듣는 건 힘들군요 이게 다 어학연수를 가지
못해서 그래요 언제나 돈이 문제에요 아무튼
알아들으려고 계속 노력은 해보죠 중년의 남자는
골칫덩이 딸 때문에 괴로운데, 마누라와도 헤어진 것
같아요 그 옆의 젊은 남자는 어긋나버린 과거의 연애와
복잡한 가족사를 이야기하죠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거짓말인지는 나도 몰라요 감독만이 알겠죠 그가 각본을
썼으니까 그러니까 여러분도 이 글의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잘 살펴봐야 해요 모두가 거짓말을 한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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