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내과 예약이 있어서 병원에 다녀왔다. 작년 12월에 받은 건강 검진 결과가 별로 좋지 않았다. 그래서 재검사를 받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종합병원은 언제나 사람들로 미어터진다. 진료실에 들어가서 의사와는 5분 정도 이야기한 것 같다. 의사는 다시 확인해야 할 검사와 추가로 필요한 검사에 대해 말했다.
원무과에서 수납하고 채혈실로 갔다. 병리과의 젊은 여자 직원이 피를 뽑았는데, 생각보다 아프다. 지혈하느라 채혈한 곳을 누르고 있었는데, 피가 좀 많이 나온다. 피 뽑은 자국도 작은 피멍이 아니라, 이상하게 작은 직선 모양으로 줄이 그어진 것처럼 자국이 났다. 피 뽑는 것도 기술인데, 저 직원은 실력이 참 별로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이제 피 뽑을 때 바늘 들어가는 느낌에서 이 사람 피 잘 뽑는구나, 아니다를 구분할 지경이 되었다.
채혈 결과를 기다리는 데 1시간이 걸렸다. 병원에서 기다릴 때는 달리 뭘 할 게 없다. 책을 읽다가 집중이 안 되어서 그만두었다. 이럴 때는 묵주기도를 하는 편이 낫다. 묵주기도는 같은 기도문을 반복해서 하는 염경기도(念經祈禱)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묵주알을 굴렸다. 그렇게 5단 기도를 2번 했다. 중간중간에 대기실의 사람들 소리가 들렸다. 아주 늙은 할머니 환자는 남편이 보호자로 옆에 있었다. 그 할머니 남편도 거진 80이 다 되어 보였다. 거동이 약간 불편한 할머니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다. 할아버지는 아내를 살뜰히 챙겼다. 저 나이에도 서로를 챙기고 의지하는 것이 쉽지 않을 텐데... 나는 '부부'라는 인연에 대해 잠시 짧게나마 생각했다.
내과 접수를 보는 간호사는 정신없이 바쁘다. 내 앞에서 간호사와 이야기하는 사람은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이다. 남자는 약국에서 받아온 약봉투를 들고 있었다. 다음 진료 예약을 하는데, 자신이 연차 휴가를 낼 수 있는 날짜를 말한다. 남자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남자의 모친이 그 옆으로 온다. 남자는 보호자로 병원에 왔다. 연차라도 빼서 어머니의 진료를 챙기는 아들이 있으니, 저 아주머니는 노부부보다는 형편이 낫다.
바로 옆의 간호사는 젊은 여자에게 인슐린 주사 놓는 법에 대해 설명을 한다. 환자는 여자의 모친이다. 이제 처음으로 인슐린 주사를 맞게 된 모양이다. 주사의 용량을 얼마나 할 것인지, 언제 맞아야 하는지, 소모성 재료대 요양 급여 신청은 어떻게 하는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기는 딸이 늙은 엄마를 챙긴다. 저 아주머니 환자도 복받은 사람이네. 병원에 오면 저렇게 부모 챙기는 자식들 모습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온다.
대기실 건너편에는 신장내과가 있다. 노부부가 진료실에서 나온다. 간호사가 할아버지에게 투석실에 가야 한다고 말한다. 신장이 많이 안 좋은 환자인가 보다. 여긴 할머니가 남편을 챙기고 있다. 느린 걸음으로 노부부는 대기실을 떠난다. 신장내과 옆에는 혈액종양내과가 있다. 대기실 의자 뒤편에는 정장 차림의 젊은 남자들이 두어 명 앉아있다. 내 생각엔 제약회사 영업부 직원 같았다. 오전 진료 끝나기를 기다려 남자들은 진료실을 조심스럽게 노크한다. 문 앞에서부터 아주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남자가 손에 든 쇼핑백은 의사에게 줄 선물 같아 보이기도 한다. 병원에 오면 의사라는 직업이 가진 권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냥 알게 된다.
채혈한 지 1시간이 지나서 검사 결과가 나왔다. 진료실에 들어가는데, 몸이 약간 휘청하는 느낌을 받는다. 결과가 안 좋으면 어쩌지. 중년의 여자 의사는 내가 앉고 나서, 잠깐 모니터를 보고는 차분하게 말을 시작한다. 나는 안 좋은 말을 들을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검사 결과가 정상 수치로 나왔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나는 죽은 줄 알고 염라대왕 앞에 불려 나갔다가, 한 10년 더 살아도 된다는 말을 들은 사람 같았다. 내 나이 또래의 여자 의사는 병원 홈페이지에 나온 얼굴과는 달리 인물이 별로였다. 하지만 나에게 검사 결과를 알려주는 그 순간만큼은 진짜 선녀처럼 보였다.
살았다.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진료실을 나왔다. 밀린 환자 때문에 점심도 못 먹고 일하고 있는 접수 간호사에게도 따뜻한 인사를 건넸다. 병원문을 나서자마자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프기 시작했다. 집에 와서 타이레놀을 2알이나 먹어야 했다. 어쨌든 살았다. 커다란 마음의 짐을 덜어낸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