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시 창작 수업을 들었을 때의 일이다. 권혁웅 시인의 수업이었다. 극작과에서 개설한 수업이었는데, 다른원 학생도 수강 신청이 가능해서 나도 들을 수 있었다. 수강생은 한 열 명 남짓 되었나. 서사창작과와 극작과 학생에다 연극학과 학생도 있었다. 영상원 학생은 나하고 같은 과 동기, 이렇게 2명이었다. 수강생들은 수업시간마다 시를 한 편씩 써내야 했다. 그리고 각자 써온 시를 낭독한 후에, 무지막지한 합평이 이어졌다. 지금 생각해 봐도 좀 긴장되고, 기분 잡치고, 그렇지만 재미도 있던 그런 수업이었다.

  나는 남의 시에다 대놓고 싫은 소리를 하지는 못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좀 독특하네요, 그 정도로 말하고 그만두었다. 하지만, 그쪽 애들은 달랐다. 내가 생각하기엔 좀 심하다 싶은 비난도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곤 했다. 내 동기는 아마도 시를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그 수업을 들었던 것 같다. 그 친구는 '합평'을 가장한 인신공격(특히 김사과가 그랬다)에 마음의 상처를 받기도 했다. 나의 경우는 지나친 서정성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확실히 그건 내가 쓴 시의 약점이기도 했다. 나는 사실 시를 써내는 것 보다, 거기에 있는 수강생들을 관찰하는 일이 나름 재미있었다.

  극작과의 유희경은 자신이 써내는 시에 대한 도저한 자부심을 내보였다. 그 시들은 내가 보기에 별로였지만, 권혁웅 선생의 평가는 달랐다. 선생은 유희경이 1, 2년 이내에 등단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열심히 써내라고 당부했다. 유희경에 대한 선생의 호평과는 달리 그 반대 지점에 서 있던 학생은 서사창작과의 김사과였다. 김사과의 경우는 출석부에는 '방실'이라고 쓰여 있어서, 출석을 부를 때 그렇게 불렀다. 그런데 시를 써낼 때의 이름은 김사과였다. 아무튼 김사과가 써내는 시들은 진짜 이해 불가에다 기괴하고 음울하기 짝이 없었다. 주로 죽음의 이미지가 많았다. 권혁웅 선생은 웬만해서는 수강생의 시에 혹평하지는 않았는데, 학기의 중간쯤 가니 김사과의 시에 대한 인내심이 바닥난 모양이었다.

  "이런 시를 뭐라고 하냐면, 요설(妖說)이라고 해. 요설. 별 의미도 없고, 해악이나 끼칠 뿐이지."

나는 선생이 그 말을 할 때의 냉랭한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사과는 자신의 시 창작 스타일을 그대로 밀고 나갔다.

  모두들 자신이 써낸 시를 낭독하는데, 극작과 학생 가운데 한 명은 읽을 수 없다고 하고는 한 학기 내내 자신의 시를 읽지 않았다. 목소리가 이상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쉬는 시간에 유희경과 신나게 잡담하는 것을 나는 보았기 때문이다. 그 학생의 시도 참 특이하기는 했다. 아직도 기억나는 시어가 있기는 하다. 에콰도르의 초석. 무슨 행성에 대한 시였던 것 같다. 나는 그 시가 참 재미있어서 그날은 좋은 평가를 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유희경은 권혁웅 선생의 예언대로 2년 뒤에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김사과의 경우는 좀 의외였다. 나는 김사과가 소설로 등단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요설이라며 내팽개쳐짐을 당하던 그 언어들이 소설 속에서는 어떻게 형상화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그 책들은 읽어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읽을 일이 없을 것이다. 아무리 내가 싫어하는 글이라고 해도, 시대나 사람들의 요구가 있으면 그렇게 작가가 된다.

  올해 들어서 나는 다시 시를 쓰고 있다. 무슨 시를 써서 등단할 것도 아니다. 그냥 다시 시를 써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시를 써내면서, 이게 생각보다 아주 재미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 작업이 힘들고 피폐해진 마음을 치유하는 면도 있다. 실제로 심리학의 예술 치료에는 문학 치료도 있다. 이렇게 긴 글로 써내는 것보다, 내면의 심상을 짧게 압축해서 시로 만들어내고 나면 뭔가 마음이 편안해진다. 새삼 그 시 창작 수업을 떠올려 본다.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지 못해도 상관없다. 시를 즐겁게 써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인생에서 이미 시인이다. 문학이 가진 치유의 힘을, 나는 이 늦은 나이에 발견했다는 것만으로도 놀랍고 기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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