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인생, 그 기묘한 이중주


  "두고 봐요. 난 위대한 여배우가 될 테니까."

  작은 도시에서 공장 여공으로 일하고 있는 파샤(인나 추리코바 분)의 일상은 단조롭기 짝이 없다. 여가 시간에는 마을 광장에서 사람들이 춤추는 것을 지켜본다. 파샤는 누군가와 간절히 춤을 추고 싶지만 평범한 외모의 파샤에게 눈길을 주는 남자는 없다. 착하고 자기 주장을 잘 하지 못하는 파샤에게 친구들은 이런저런 부탁을 하기에 바쁘다. 이혼한 친구는 자신이 데이트하러 나갈 동안 아이를 돌봐달라고 한다. 이웃 청년은 여자 친구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파샤에게 집을 비워달라고 요구한다. 파샤는 그런 부탁을 거절하지 않는다. 파샤의 유일한 취미 활동이라면 동네 극단에서 연기를 하는 것. 파샤는 Baba Yaga(러시아 민담의 마귀 할멈)역을 맡아 사람들 앞에서 공연한다. 다른 사람들이 춤추는 것을 부럽게 쳐다보던 어느 날, 파샤에게 한 남자가 춤 신청을 한다. 파샤는 첫눈에 이 남자 아르카디에게 반한다. 파샤는 아르카디에게 자신이 언젠가 유명한 여배우가 될 거라고 말한다. 그런 파샤를 아르카디는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과연 파샤의 꿈은 허황된 것일까?

  글렙 판필로프(Gleb Panfilov) 감독의 영화 '시작(Начало, The Beginning, 1970)'은 독특한 도입부를 가지고 있다. 오프닝 크레딧이 없는 이 영화는 잔 다르크의 심문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종교 재판관으로부터 혹독한 심문을 받는 잔 다르크는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내보인다. '잔 다르크'는 영화 '시작'에서 영화 속 영화인 셈이다. 짧은 머리를 한 여배우는 촬영이 끝나자 만족한 표정으로 촬영장을 떠난다. 화면 위로 그 여배우의 어린 시절, 소녀 때의 사진이 차례로 겹쳐진다. 그리고 나서 영화는 사진 속 주인공 파샤의 현실로 들어간다. 이렇게 영화 '시작'은 시골 여공 파샤와 여배우 파샤의 모습을 교차 편집으로 엮는다.

  잔 다르크의 생애를 영화로 만들고 싶었던 글렙 판필로프 감독은 당국에 여러 번 기획안을 써냈다. 하지만 당국은 판필로프의 기획안을 번번이 반려시켰다. 아마도 영화 당국의 입장에서는 러시아 정교의 성인도 아니고, 혁명 영웅도 아닌 프랑스 성녀에 별 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자 판필로프 감독은 계획을 수정했다. 자신이 찍고 싶었던 잔 다르크 영화를 영화 속 영화로 넣고, 바로 그 잔 다르크를 연기하는 여배우의 이야기를 풀어놓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시작'은 시대극와 로맨스, 코미디가 결합한 독창적인 영화가 되었다.

  자, 그럼 남들 눈에 띄지 않는 촌 아가씨 파샤는 어떻게 여배우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을까? 영화 '잔 다르크'의 여배우를 찾아다니던 감독은 우연히 시골 극단 공연에서 파샤를 발견한다. 마귀 할멈 바바 야가 역을 흥겹게 연기하는 파샤를 감독은 잔 다르크 역으로 점찍는다. 그야말로 길거리 캐스팅의 행운이었던 셈. 그 일 이후로 파샤의 내면과 일상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파샤는 아르카디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아르카디에게 직진한다. 매번 자신에게 골치 아픈 부탁을 떠넘기던 친구와 지인들에게도 단호해진다.

  "난 두려워요."

  잔 다르크는 도망을 치려다 붙잡힌 병사 둘을 처형시키라고 명령한 후, 자신의 참모에게 그렇게 고백한다. 영화 밖의 파샤의 삶도 순탄치가 않다. 유부남 아르카디와 살림을 차린 파샤. 아르카디의 본처는 남편 내놓으라고 난리를 치고, 주변 사람들은 불륜녀라고 모욕을 준다. 그토록 원했던 사랑을 찾았건만 이 남자는 가정이 있다. 포기하려니 가슴이 너무나도 아프다. 파샤의 내적 갈등은 수난과 고통을 겪는 잔 다르크의 연기로 표현된다. 주변에는 오직 남자들 뿐인 전장, 적들에게 생포된 후 마주한 냉혹한 종교 재판관들. 파샤가 연기하는 잔 다르크는 그들과 동떨어진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다.

  영화 '시작'은 시골 아가씨 파샤를 통해 영화와 인생의 기묘한 이중주를 보여준다. 이 영화에는 관객이 궁금해할 법한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과연 배우들은 어떻게 자신의 역을 연기해내는 것일까? 배우의 실제 삶과 영화는 어떻게 유기적으로 결합하는가? 자신의 삶에 일어난 변화를 '연기'라는 도구로 풀어내는 파샤의 모습은 그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된다. 파샤는 아르카디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거침없이 표현한다. 하지만 이 사랑은 고통과 수치심을 수반한다. 잔 다르크가 느끼는 외로움, 두려움과 불안은 파샤가 느끼는 현실의 감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화형의 순간에 잔 다르크는 불길 속에서 외친다. "나는 너무나도 무섭다."

  마침내 파샤의 '잔 다르크' 영화 촬영이 끝난다. 다음 영화의 배역을 부여받지 못한 파샤는 그냥 고향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배우는 영화 산업의 현장 노동자에 가깝다. 이 장면은 국가가 영화 산업을 통제하는 구 소련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파샤의 고향 사람들은 귀환한 파샤를 열렬히 환영한다. 하지만 파샤는 그 모든 것이 낯설다. 시골 여공은 이제 막 영화 한 편을 찍었을 뿐이다. 연인 아르카디는 아내와 딸에게 돌아갔다. 동네 극단에서 바바 야가를 연기하는 삶으로 돌아갈 것인가? 영화의 마지막, 파샤는 시사회장를 가득 메운 관객들 앞에서 인사한다. 거리 건물의 외벽에는 파샤가 연기한 잔 다르크가 커다란 걸개그림으로 나부낀다. '시작'이라는 제목이 뜨면서 영화는 끝난다. 말 그대로 이 영화는 촌 아가씨 파샤가 배우로서 내딛는 작은 발걸음, 바로 그 짧은 여정을 기록한다.

  파샤를 연기한 인나 추리코바
(Inna Churikova)의 실제 삶도 '시작'과 닮아있다. 감독 글렙 판필로프는 엔지니어로 일하다 좀 늦은 나이에 영화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자신의 첫 영화 '불길 속에 길은 없다(В огне брода нет, No Path Through Fire, 1968)'의 여주인공을 찾다가 모스크바 청소년 극단에서 연기하던 추리코바를 발견했다. 그 영화에서 추리코바는 러시아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랑에 눈뜨는 간호사 타냐 역을 맡았다. 순수한 내면을 지닌 타냐를 잘 보여준 추리코바는 판필로프의 다음 작품인 '시작'도 함께 했다. 그리고 여배우와 감독은 평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시작'은 시골 아가씨 파샤의 새로운 인생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배우 인나 추리코바의 본격적인 출발을 알리는 작품으로 자리매김한다.   


*사진 출처: ru.kinorium.com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영화 '시작(The Beginning, 1970)'에서 잔 다르크로 분장한 인나 추리코바



영화 '불길 속에 길은 없다(В огне брода нет, No Path Through Fire, 1968)'의 인나 추리코바

 

**글렙 판필로프 감독의 영화 '테마(Тема, The Theme, 1979)'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theme-197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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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소설, 다른 관점의 두 영화

파계(破戒, Apostasy, 1948),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
파계(破戒, The Outcast, 1962), 이치카와 콘 감독


  국민학교 선생인 세가와에게는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이 있다. 그는 부라쿠(部落) 출신이다. 부라쿠민은 전근대 일본의 신분제에서 최하층을 일컫는 말이다.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신분제가 철폐된 이후에도 부라쿠민(部落民)에 대한 차별은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다. 일본의 자연주의 소설가 시마자키 도손(島崎藤村, 1872-1943)이 1905년에 발표한 소설 '파계(破戒)'는 바로 이 부라쿠민의 이야기를 다룬다. 소설은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1948년에 소설을 영화화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14년 후, 이치카와 콘은 자신만의 스타일로 '파계'를 만들어 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올해, 이 소설은 또 다시 영화로 만들어져서 일본의 관객들과 만났다. 이것은 소설 '파계'가 지닌 문제의식이 100년이란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일본 사회를 관통하고 있음을 입증한다.

  학교에서 숙직을 서던 세가와(이치카와 라이조 분)는 밤하늘 너머 울리는 부친의 목소리를 듣는다. 무언가 안좋은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한 그는 비밀리에 고향땅을 밟는다. 그의 아버지는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부친은 집 나간 황소를 찾아다니다 황소의 뿔에 받혀 절명하고 말았다. 숙부는 조카의 신분이 드러날까 염려하며 얼른 돌아가기를 재촉한다. 평생 부라쿠 출신임을 철저히 숨기고 살 것. 아들만은 차별과 억압의 굴레에서 벗어나 사람답게 살기를 바랬던 아버지의 간절한 염원은 그러했다.

  세가와는 부라쿠민 출신의 사회운동가 이노코 렌타로의 책을 읽으며 위안을 받는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이 부라쿠민임을 드러내는 단서가 될까봐 세가와는 책조차 숨겨가면서 읽는다. 마을을 찾은 이노코 렌타로를 만난 자리에서도 세가와는 마음속 비밀을 털어놓지 못한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부여한 거대한 계명을 깨뜨릴 수는 없다. 그렇게 조심했건만 어느새 마을과 학교에는 세가와가 부라쿠민이라는 소문이 퍼진다.      

  같은 소설을 영화화했지만 키노시타 케이스케와 이치카와 콘이 지향하는 바는 미묘하게 차이가 있다. 일본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키노시타 케이스케는 인물의 내적 갈등을 계급주의적 관점에서 파악한다. 1948년작 영화에서 세가와는 사무라이 가문의 퇴직 교사 카자마의 멸시를 받는다. 부라쿠민과 사무라이, 메이지 시대에 그들은 모두 평민이 되었지만 뼛속 깊이 남아있는 계급의식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카자마는 퇴직 연금 수령에 필요한 근무 기한 5개월을 앞두고 해고 통보를 받는다. 그는 세가와를 찾아가 교장을 설득해달라고 부탁한다. 세가와는 교장을 찾아가 선처를 호소하지만 교장은 거절한다. 연금이 절실히 필요함에도 카자마는 탄원을 쉽게 포기해 버린다. 몰락하기는 했어도 사무라이 가문의 자부심을 지닌 카자마는 농사꾼 출신의 교장에게 구차하게 매달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카자마가 자신이 부라쿠민임을 대중 앞에 고백한 세가와를 용납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더군다나 그의 딸 시호는 세가와와 사랑에 빠져 평생을 함께 하려고 한다. 카자마의 분노와 멸시는 부라쿠민 세가와가 직면한 견고한 차별의 일부분일 뿐이다. 세가와는 동료 교사들에게 배척당하고, 더이상 학생들을 가르칠 수도 없다. 결국 세가와는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다. 키노시타 케이스케는 세가와를 신분제의 악습에 갇힌 희생자로 그려낸다. 세가와는 불시의 테러로 목숨을 잃은 이노코 렌타로의 뜻을 잇기로 결심한다.

  마침내 세가와와 그의 연인 시호, 이노코 렌타로의 미망인을 실은 배가 마을을 떠나간다. 그들 앞에 놓인 삶은 분명 순탄치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마지막 장면에서는 희망이 엿보인다. 제국주의 일본은 패망했다. 연합군 총사령부(GHQ)는 일본을 민주주의 국가로 바꾸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키노시타 케이스케의 '파계'에서 부라쿠민 교사 세가와의 수난은 새로운 시대를 위한 마중물과도 같다.

  이치카와 콘의 '파계'는 세가와의 내적인 갈등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보다 섬세하게 그려낸다. 감독의 아내인 와다 나토가 각색을 맡았는데, 이 뛰어난 시나리오 작가의 필력은 영화의 인물들에 생생한 숨결을 불어넣는다. 세가와의 괴로움은 팔에 칼을 그어 피의 색깔을 확인하는 장면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는 부라쿠민인 자신의 피가 푸른색이 아닌 빨간색임에도 왜 차별을 받는가 반문한다. 이 영화에서 삶이 괴로운 사람은 세가와 말고도 더 있다. 몰락한 사무라이 가문 출신의 교사 카자마는 알콜 중독자로 살아가고 있다. 변화된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낙오자로서 그는 자신은 물론 가족마저 건사하지 못한다. 후처와 그의 아이들은 가난을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갔고 사별한 처의 딸 시호는 절에서 기거하고 있다. 탐욕스러운 주지는 틈만 나면 시호를 추행하려고 든다. 세가와와 시호, 카자마, 그들은 각자 자신의 고통을 끌어안고 있다.

  이치카와 콘은 세가와를 부조리한 사회에서 고통을 받는 인간으로 바라본다. 세가와는 어린 학생들 앞에서 자신이 부라쿠민임을 고백한다. 세가와의 괴로움은 아이들에게 그대로 전해지며 눈물을 흘리는 아이들의 얼굴이 연속적인 쇼트로 이어진다. 동료 교사 츠치야는 부라쿠민에 대한 자신의 편견을 반성한다. 세가와를 사랑하는 시호는 기꺼이 부라쿠민의 아내로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들의 지지 덕분에 세가와는 이노코 렌타로가 걸었던 길을 따라 가려고 한다. 그가 살아갈 세상은 여전히 불의하며, 사람들은 그를 냉대할 것이다. '파계'는 그런 사회가 약자에 대한 공감과 연민, 연대(solidarity)를 통해서 변화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파계(破戒, The Outcast, 1962)'에서 이노코 렌타로를 연기한 배우 미쿠니 렌타로(三國連太郎)는 실제로 부라쿠 출신이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ameblo.jp  



***이치카와 콘 감독의 영화 리뷰


불꽃(炎上, Conflagration, 1958)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9/conflagration-1958.html

도련님(ぼんち, Bonchi, 1960)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9/bonchi-1960.html

마키오카 자매들(The Makioka Sisters, 1983)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9/makioka-sisters-198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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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 'Rain People'의 결말 부분이 들어있습니다.


  "그 여자, 임신했어요(She is pregnant)."

  여자는 수화기 너머의 남편에게 이렇게 말한다. 남편은 누구 이야기를 하는 거냐고 묻는다. 공중전화 부스에서 여자는 남편에게 그렇게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린다. 여자의 이름은 나탈리. 아내로서, 아이 엄마로서 살아갈 자신이 없다고 느낀 여자는 무작정 차를 몰고 길을 나섰다. 영화 'Rain People(1969)'프랜시스 포드 코폴라(Francis Ford Coppola)의 범상치 않은 초기작이다. 이 영화가 나온 해에 'Easy Rider(1969)'가 나왔다. 'Rain People'은 'Easy Rider'와 기이한 영화적 댓구를 이룬다. 길 잃은 청춘들의 일탈적 로드 무비와 집을 뛰쳐나온 가정 주부의 뒤틀린 여행기가 같은 해에 나온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어쩌면 그 시대의 미국인들은 어디론가 간절히 떠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비오는 날 아침, 나탈리는 식탁에 쪽지 한 장을 남기고 집을 떠난다. 목적지도, 누구를 만나야겠다는 계획도 없다. 나탈리는 차를 몰고 가다가 히치 하이킹을 하려는 젊은 남자를 발견한다. 남자는 자신을 'Killer'로 부르라며 해맑게 웃는다. 대학을 그만 둔 전직 미식 축구 선수와 집 나온 가정 주부는 그렇게 동행이 된다. '킬러'의 과거는 단편적인 몽타주로 제시된다. 그는 경기에서 뇌를 다쳤다. 대학 당국은 그에게 보상금을 쥐어주며 방출해 버렸다.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내던져진 킬러에게 나탈리는 연민을 느낀다.

  하지만 나탈리에게 누군가를 보살피는 일은 점차 부담으로 다가온다. 나탈리는 어떻게든 킬러를 자신의 여정에서 밀쳐내려고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킬러에게 알맞은 일자리를 찾아주는 것이다. 양계장의 막일꾼 정도면 킬러에게도 괜찮지 않을까? 뱃속 시커먼 양계장 주인에게 킬러는 좋은 먹잇감이다. 킬러는 양계장 주인에게 자신이 여기에 있어도 좋은지 나탈리에게 물어보라고 말한다. "저 여자가 네 엄마야?" 나탈리는 그가 킬러의 돈과 노동력을 착취할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돌아선다.

  나탈리의 여정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남편과의 전화 통화에서 나탈리는 자신이 모질고 책임감 없는 사람이라고 토로한다. 아내의 옷도 맞지 않고, 엄마로서 살아갈 준비는 더더욱 되어 있지 않다. 여자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집을 떠난 나탈리가 막연하게 꿈꾼 자유에는 성적인 일탈도 포함하고 있다. 킬러를 차에 태운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킬러는 '남자'가 아니라 머리를 다친 '아이'였다. 배 속의 아기조차 버거워서 버리려고 하는 이 여자에게 킬러는 이미 태어난 아이와도 같다. 혈혈단신, 자신을 보살펴주던 어머니마저 잃은 킬러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다. 킬러는 나탈리를 엄마처럼 따른다. 그런데 이 낯선, 새로운 엄마는 킬러의 곁에 머물 생각이 없다.

  하지만 모질지 못한 엄마 나탈리는 킬러를 양계장에서 빼내온다. 버릴 수 없는 어른 아이 킬러를 데리고 다니는 나탈리의 불안한 여정은 고든과의 만남으로 급변한다. 과속을 하던 나탈리는 고속도로 순찰대원인 고든에게 적발된다. 순전한 호의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이 남자는 자신의 집으로 나탈리를 초대한다. 낡은 트레일러에서 어린 딸과 살고 있는 고든. 코폴라는 킬러의 과거처럼 고든의 과거도 몽타주 쇼트로 보여준다. 4년 전의 화재는 그에게서 임신 중인 아내와 집을 앗아갔다. 킬러와 나탈리, 그리고 고든까지 이렇듯 'Rain People'의 인물들은 모두 인생에서 길을 잃었다.

  결국 킬러는 나탈리를 겁탈하려는 고든을 막으려다가 죽는다. 나탈리는 킬러의 시신을 안고 흐느낀다. 죽음으로써 킬러는 나탈리의 진짜 아들이 된다. 나탈리는 자신과 남편이 함께 킬러를 보살피고 사랑해 주겠다고 말한다.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나탈리의 약속을 뒤로 하고 영화는 끝난다. '빗속의 사람들', 그들의 불안하고 슬픈 여정은 시대의 우울과 맞닿아 있다. 자유를 만끽했던 히피의 시대는 저물고 있었으며, 민권 운동의 격렬한 열기도 사그라들 무렵이었다. 이제 미국인들은 대의명분과 집단의 가치에서 벗어나 개인의 내면으로 침잠해들어가기 시작했다. 'Easy Rider'의 폭주족들이 시작한 길 위의 방랑은 1970년대 자동차 영화의 전성기로 이어졌다. 그것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미국인들의 지난한 여정이었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영화 'Rain People'로 그 서막을 장식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1970년대 미국의 로드 무비(Road Movie)

바바라 로든의 Wanda(1970)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6/wanda1970-happy-old-year2019.html


좌절된 욕망과 모험의 질주, 1970년대 미국의 자동차 영화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1/1970.html
    
히피 시대의 종언, Electra Glide in Blue(1973)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2/hippie-movement-electra-glide-in.html

폭력과 고독의 서사, Walter Hill 감독의 영화 세계 1부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walter-hill-1.html

폭력과 고독의 서사, Walter Hill 감독의 영화 세계 2부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walter-hill-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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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쟁의 심연 속에서 탈주를 꿈꾸다, 다리들 아래로(Unter den Brücken, Under the Bridges, 1946)

  나치 치하에서는 어떤 영화를 만들었을까? 영화가 가진 선전 선동의 힘을 잘 알았던 나치는 Ufa를 설립해서 영화 산업을 국가적으로 통제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시기의 영화들이 모두 프로파간다(Propaganda)였던 것은 아니다. 물론 나치는 영화 제작에 집요한 간섭과 검열을 강제했지만, 그에 맞서는 창작자들도 여럿 있었다. 헬무트 코이트너(Helmut Käutner)도 그런 감독들 가운데 하나였다. 코이트너가 1944년에 만든 '다리들 아래로(Unter den Brücken, Under the Bridges, 1946)'는 매우 서정적인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

  헨드릭과 빌리는 자신들의 바지선으로 운하와 강을 오가며 화물을 운송한다. 절친한 친구 사이인 그들은 우연히 만난 아름다운 아가씨 안나와 동시에 사랑에 빠진다. 두 친구는 안나의 마음을 얻는 사람이 바지선을 포기하고 떠나기로 서로 약속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육지에 정착하고 싶다는 소망과 오래도록 이어온 우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헨드릭과 빌리. 영화는 삼각 관계라는 진부한 틀의 사랑 이야기를 아름다운 풍광 속에 잔잔하게 풀어놓는다. 나치가 패망하기 직전인 1944년 여름에 촬영된 이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정말 저 영화를 찍은 곳이 독일이 맞나 싶은 생각마저 든다. 헨드릭과 빌리의 바지선은 운하 근처의 대도시를 마치 다큐멘터리 필름처럼 담아낸다. 거리의 사람들은 활기가 넘치고, 끊임없이 배들이 오가는 강의 풍경은 평화롭기만 하다. 폭격으로 일부 손상된 건물의 모습이 보이기는 해도, 이 영화에서 전쟁의 그림자를 발견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런 종류의 로맨스 영화는 나치 치하의 독일 관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전시 상황에서 독일 국민들에게는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해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나치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독일의 상업 영화들은 로맨스와 코미디 장르를 중심으로 제작되었다. 헬무트 코이트너의 '다리들 아래로'도 그런 영화들 가운데 하나였다. 온나라가 총력전을 치루고 있는 상황에서 나치는 이런 종류의 영화들에 쉽게 상영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배급과 상영이 보류되었다가 나치 패망 이후에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온 영화들이 다수 존재했다. 그 영화들은 이른바 '변절자 영화(Überläufer Film)'라고 불렸다.

  영화 '다리들 아래로'를 관통하는 주요한 정서는 닫힌 현실로부터 탈주하려는 열망이다. 두 친구가 운행하는 바지선은 흐르는 강물을 따라 이곳저곳을 떠돈다. 바지선 선원인 헨드릭과 빌리, 음식점 종업원인 안나. 이 하층 계급 노동자들이 주인공인 영화에는 도무지 눈요깃감이 될만한 번지르르함이 없다. 그럼에도 코이트너가 보여주는 이 사랑 이야기에는 순수함과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빌리는 안나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헨드릭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기꺼이 뒤로 물러난다. 약속대로라면 헨드릭은 배를 포기하고 떠나야 하지만, 빌리는 헨드릭과 안나를 바지선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 영화의 마지막에 빌리와 헨드릭, 안나는 바지선 위에서 행복하게 미소를 짓고 있다. 그 세 명의 주인공들은 육지가 아닌 물 위의 삶을 택했다. 그들은 배를 타고 원하는 곳으로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 전쟁은 막바지에 달했고, 필시 그것은 독일의 패배로 끝날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만들어진 이 로맨스 영화에는 삶에 대한 의지, 자유에의 갈망이 느껴진다. 


2. 폐허 위에서 돌아보는 나치의 폭정, 우리들의 시대에(In jenen Tagen, In Those Days, 1947)

  이제 전쟁은 끝났다. 독일은 패전국이 되었고, 연합군에 의해 나라는 둘로 나뉘었다. 동독에 주둔한 소련, 서독에 주둔한 미국. 이 두 나라가 영화 산업을 대하는 태도는 판이하게 달랐다. 일찍부터 영화를 체제 선전의 효과적 도구로 파악한 소련은 동베를린에 남아있던 Ufa 스튜디오를 바탕으로 DEFA(Deutsche Film-Aktiengesellschaft)를 설립했다. 소련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독일인들을 재교육시키고 역사적 책임을 각인시키기를 원했다. 검열의 압력이 있었음에도 동독 지역에서 영화 제작은 꾸준히 이어질 수 있었다. 그와는 달리, 미국은 서독을 자국의 헐리우드 영화를 배급, 상영하는 시장으로 파악했다. 그 결과 서독 지역에서의 독일 영화 제작은 매우 어려웠다. 그런 열악한 상황에서 헬무트 코이트너는 '우리들의 시대에(In jenen Tagen, In Those Days, 1947)'를 내놓았다. '잔해 영화(Trümmerfilm, Rubble Films, 1946-1949)'로 불리는 이 시기 일련의 영화들에는 패전 이후 독일이 직면한 여러 사회 문제가 여실히 드러난다.

  영화 '우리들의 시대에'는 주인공이 자동차이다. 의인화된 차는 남성 내레이터의 목소리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폐차 직전의 낡은 자동차에는 이전의 주인들이 남기고 간 소지품들과 흔적이 남아있다. 7개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이 독특한 차의 내력은 나치 독일의 흥망성쇠와 절묘하게 겹친다. 공장에서 멋지게 제작된 새 차가 만난 첫 번째 주인은 시빌이라는 이름의 젊은 여성이다. 시빌은 연인 스테판이 멕시코로 떠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상심한다. 스테판과 헤어지고 오는 길, 시빌의 차는 길을 가득 메운 군중에 의해 나아가질 못한다. 때는 1933년 1월 30일, 그 날은 히틀러가 독일 수상으로 취임한 날이었다. 시빌은 스테판이 멀리 떠나는 이유가 나치 때문임을 알게 되고, 차를 돌려 그와 함께 하기로 마음먹는다.

  차의 두 번째 주인은 작곡가이다. 그의 음악은 나치에 의해 퇴폐 음악으로 찍혔다. 정치적 탄압을 받는 예술가의 좌절에 이어지는 세 번째 이야기는 매우 비극적이다. 오랫동안 액자 공방을 운영해온 노부부는 어디론가 떠나고 있다. 빌헬름의 아내 샐리는 유태인이다. 아내는 자신이 더이상 가게를 운영할 수 없으니 이혼을 하고 남편이 모든 것을 맡아달라고 부탁한다. 1938년 11월 9일, '수정의 밤(Kristallnacht)' 사건이 일어난다. 유태인들이 운영하는 상점과 회당은 무차별적인 테러와 파괴의 대상이 되었다. 이 사건은 나치 치하 유태인 탄압의 신호탄이었다. 절망한 부부는 결국 집에 불을 지르고 삶을 마감한다.

  네 번째 이야기에서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국외로 탈출하려는 연인들이, 그 다음으로는 소련 지역으로 부임하는 독일군 장교가 파르티잔에게 공격받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차의 여섯 번째 주인은 젊은 여자 수리공 에르나이다. 에르나는 연로한 남작 부인을 기차역에 데려다 주려고 한다. 그런데 이 남작 부인의 아들은 히틀러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남작 부인을 구하려는 에르나의 선의는 경찰에 의해 저지된다. 마지막 이야기의 주인공은 미혼모 마리와 군인 요제프이다. 요제프는 우연히 만난 미혼모 마리와 아기를 목적지에 데려다 준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요제프는 탈영병으로 몰리고, 사살될 위험에 처한다. 다행히 선량한 군인이 요제프를 살려준다.

  이 영화에서 단연코 눈에 띄는 부분은 나치의 피해자로서 '선한 독일인'에 대한 묘사이다. 나치의 악행은 독일 국민들을 가해자의 위치에 세웠다. '우리들의 시대에'는 조심스럽지만 명확한 어조로 모든 독일인들이 나치의 동조자는 아니었다고 말한다. 어떤 면에서 영화의 이러한 어조는 교묘한 책임 회피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나치 치하에서 박해를 받았던 헬무트 코이트너의 진정성은 그러한 의구심을 떨쳐버리게 만든다. 이 영화에는 강력한 휴머니즘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들의 시대에'는 전후 폐허의 잔재에서 나치의 폭정을 되새기며, 그 시기에 스러진 죄없는 독일인들을 기념한다.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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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로운 홋카이도의 어느 농촌 마을. 밭일을 하던 농부들은 두런 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마을 어귀에서는 바퀴가 빠진 트럭을 보고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도우러 나섰다. 그런데 이렇게 인정과 활기가 넘치는 이 마을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다. 화면 위로 흐르는 남성 내레이터의 목소리는 마을의 과거로 떠나는 신호탄이 된다. 키노시타 케이스케(木下惠介) 감독'사투의 전설(死闘の伝説, A Legend or Was It?, 1963)'은 종전 직전에 벌어진 농촌 마을의 비극을 보여준다. 가톨릭의 미사 전례곡 첫 부분인 '주여, 우리를 불쌍하게 여기소서(慈悲頌, Kyrie)'가 비감하게 흐르는 도입부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이 영화는 음악을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영화 전편에 걸쳐 불길하고 음울하게 들리는 배경 음악은 '무쿠리(ムックリ, Mukkuri, 아이누족의 전통 악기)'가 쓰였다. 그 음악과 함께 영화는 컬러 화면의 현재에서 흑백의 과거로 곧바로 진입한다.

  일본의 침략 전쟁이 막바지에 달했을 무렵, 홋카이도의 산골 마을에 젊은 군인이 귀향한다. 4년만에 전장에서 돌아오는 군인의 이름은 히데유키. 그는 소노베 집안의 장남이다. 히데유키는 마을 입구에서 말을 탄 상이군인과 마주친다. 전쟁에서 왼손을 잃은 그 남자 코이치는 히데유키의 여동생 키에코에게 청혼을 한 터였다. 히데유키는 코이치를 한눈에 알아본다. 코이치는 중국에서 복무했던 히데유키의 부대 상관이었다. 히데유키는 코이치가 아녀자를 강간하고 살해했던 만행을 떠올린다. 그런 잔학한 남자와 여동생을 결혼시킬 수는 없다. 코이치가 싫은 것은 키에코도 마찬가지. 하지만 소노베 가족에게 그 청혼의 거절은 생존과도 직결된다. 도쿄의 공습을 피해 홋카이도로 온 소노베 일가는 이장 타카모리의 도움을 받았다. 코이치는 바로 그 타카모리의 아들이다. 이제 자존감에 상처받은 코이치는 비열한 복수극을 시작한다.

  동시대의 오즈 야스지로가 서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현대극으로, 나루세 미키오가 여성과 가족의 일상을 세밀하게 파고들 때 키노시타 케이스케는 비판적 사회극을 꾸준히 만들었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스물 네 개의 눈동자(二十四の瞳, Twenty-Four Eyes, 1954)'는 소학교의 여선생과 제자들에게 닥친 전쟁의 여파를 통렬하게 그려낸다. '사투의 전설(死闘の伝説, 1963)'은 어떤 면에서 그 영화의 연장선상에 있다. 종전을 앞둔 홋카이도의 산골 마을에 폭력과 광기의 그림자가 스멀스멀 스며든다. 말을 타고 마을 곳곳을 순찰하듯 돌아다니는 코이치는 군국주의의 화신이나 다름없다. 그는 소노베 일가가 마을의 농작물을 훔치고 다른 농부들의 밭을 망치는 원흉이라고 소문을 퍼뜨리며 마을 사람들을 선동한다. 그렇게 서서히 끓어오르기 시작한 갈등은 패색이 짙어가는 일본의 전황과 겹치며 예기치 못한 파국을 불러온다.

  키에코를 덮치려는 코이치가 우발적으로 죽게 되면서 이 마을의 끔찍한 핏빛 전설의 실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아들의 죽음에 광분한 이장은 마을 주민들에게 소노베 일가의 막내 아들을 죽이도록 명령한다. 마을 주민들이 보여주는 분노와 살기는 기실 제국주의 일본에게 향해야하는 것이 맞다. 내레이터는 그 마을에서 11명의 남자가 전장에서 죽었다고 일러준다. 자식의 전사 소식을 듣고 실성한 주민은 총을 들고 폭도의 무리에 합류한다. 그들의 절망과 고통은 무지와 뒤엉키며 '소노베 일가'라는 희생양을 만들어 낸다. 가난하고 힘없는 외지인 소노베 일가는 이제 공공의 적으로 척살의 대상이 된다.

  "죽일 테면 죽이라지. 나는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겠다. "

  어머니는 자신과 딸을 죽이겠다고 몰려오는 광란의 무리를 응시한다.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산골의 비좁은 길은 살육의 현장으로 변모한다. 키노시타 케이스케가 펼쳐보이는 이 지옥도는 전쟁의 광기로 마비된 일본인들의 내적 폐허에 대한 은유이다. 마을 사람들이 저지른 학살은 침묵의 대상이 되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패배한 전쟁은 일본인들에게 입에 올리는 것이 수치스러운 금기였다.

  흑백 화면 속의 끔찍했던 마을의 과거는 이제 컬러로 바뀐다. 힘을 합쳐 바퀴 빠진 트럭을 끌어낸 마을 사람들은 웃으며 헤어진다. 그들은 광란의 기억에서 필사적으로 도주했고, 망각이라는 선물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키노시타 케이스케는 일본의 진정한 패배가 반성없는 망각에 있음을 지적한다. 무고한 피가 스며든 홋카이도의 산천은 핏빛 전설을 품고 있다. 그 전설을 잊지 않고 들려주는 일. 영화의 사회적 책무란 그런 것이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아이누 원주민의 전통 악기 무쿠리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의 영화 리뷰
먼 구름(遠い雲, The Tattered Wings, 1955)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tattered-wings-1955.html

위험은 가까이에(風前の灯, Danger Stalks Near, 1957)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8/danger-stalks-near-1957.html

봄날이여 안녕(惜春鳥, Farewell to Spring, 1959)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0/farewell-to-spring-1959.html

오늘 또 오늘(今日もまたかくてありなん, 1959)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thus-another-day-195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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