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트 죠운 현대영미드라마학회 영한대역 23
조지 버나드 쇼 지음, 김봉정 옮김 / 동인(이성모)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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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초등학교 5학년 때, 전학을 가는 나에게 잔 다르크와 그리스도의 전기를 선물해준 아이가 있었다. 초등학생이 보기엔 다소 작은 활자로 인쇄된 그 책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보니 사실 대단한 감동 보다는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로 읽혔던 것 같다. 특히 잔 다르크가 영국군에게 붙잡힌 후 높은 감옥에서 뛰어내려 탈출을 시도하는 장면에서는 기이한 경외감마저 느꼈다.

 

  나이가 들어서 만난 잔 다르크는 잉그리드 버그만이 주연한 영화의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최근 들어서는 EBS에서 해준 2부작 TV물을 보았으나 별로 눈길을 끌만한 점은 없었다. 그러다가 자끄 리베트 감독이 연출한 잔 다르크를 보고나니 그 인물이 이전과는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 것 같다.

 

  버나드 쇼가 그려낸 잔 다르크는 어떤 맥락에서는 리베트의 시각, 즉 성녀로서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면모, 그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예리한 시각으로 파악했다는 점에서 통한다는 생각도 든다. 쇼는 이 희곡에서 잔 다르크의 무용담이 아닌 혁신을 주장하는 새로운 인물에 대한 기득권층과 시대의 불협화음에 더 초점을 두었다. 그것은 예수가 유대 지도자들과 유대인들에게 배척당하는 것과 비슷해 보이며, 실제로 극의 구조는 그리스도의 수난극을 재현하고 있다는 느낌도 없지 않다.  

 

  쇼의 재능은 죽은 잔 다르크와 재판에 관련된 이들, 샤를 국왕의 대면이 꿈 속에서 이루어지는 마지막 장에서 빛난다. 이 장은 쇼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아무리 정의롭고 선한 가치를 지닌 인물이라 하더라도 법과 제도, 정치적인 판단에 의해 희생될 수 있다는 메시지는 읽는 이의 폐부를 날카롭게 찌른다.

 

  쉽게 읽을 수 있는 가벼운 부피의 책은 아니지만 쇼의 글솜씨에 빠지다보면 시간이 어찌가는 줄도 모른다. 깊이 있는 희곡 읽기를 희망하는 이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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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을 밟다
가와카미 히로미 지음, 서은혜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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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읽으면서 보르헤스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을 때가 문득 떠올랐다. 보르헤스는 나에게 놀라움과 충격 그 자체였다. 그의 글 속에 문학이 보여줄 수 있는 것, 꿈꾸는 모든 것이 들어있었다. 그때부터 보르헤스는 내 글쓰기와 문학의 이상이 되었다.

 

  이 책의 작가 가와카미가 주는 느낌은 물론 보르헤스만큼 엄청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내가 보르헤스를 떠올린 이유는 그의 글이 주는 낯섬과 기이함이 여타 다른 소설과는 확연히 구분되었기 때문이었다. 현실과 꿈의 경계 사이를 유려한 문체로 그려내고 있는 그의 글은 환상 문학이라던가 하는 범주에 쉽게 넣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닌 듯 하다. 분명히 날 것의 현실은 아니되, 그렇다고 환상성에 매몰되지 않는 작가의 문학 세계는 보르헤스의 글을 떠올리게 하는 지점이 있다.

 

  어느 날 무심코 밟은 뱀과 동거하게 된 여자가 뱀과 의식을 공유하게 되는 과정을 그린 “뱀을 밟다”의 섬세한 묘사와 흡인력 있는 문체도 좋지만, 이 책에 실린 세편의 글 가운데 나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은 “사라지다”였다. 작가의 상상력이 풀어내는 이 기이한 이야기 속에서 현실의 가족의 모습을 읽어내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가와카미는 이 책에 실린 글을 스스럼없이 “거짓말”이라고 칭한다. 그의 거짓말은 그 어떤 것보다 진실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이 되어준다는 점에서 매혹적이다. 그래서였을까? 오래전, 보르헤스를 읽으면서 심하게 흔들렸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책을 덮으면서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만약 보르헤스가 일본에서 태어났다면 이런 글을 쓰지 않았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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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다큐는 지난 5월, 우즈베키스탄에서 발생한 유혈 사태의 참상에 대한 신속하고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사태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통해 시청자들의 시사적 안목을 넓혔다는 점에서 정보성과 시의성이 돋보인다. 또한 이 유혈 참극에 있어서 미국의 역할을 규명하고, 석유자원을 둘러싼 강대국의 각축장이 되어버린 연방 독립국의 정치 경제적 현실을 조명한 부분 또한 논리성이 돋보였다.

 

  무엇보다 이 다큐에서 주목할만한 부분은 인터뷰의 효과적인 사용에 관한 것이다. 다큐의 전체적인 얼개는 인터뷰가 내레이션에서 제기한 문제와 의문들에 대해 효과적인 답을 주고, 인터뷰에서 제기된 문제는 내레이션으로 설명해주는 반복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방식은 시청자가 주제에 흥미를 잃지 않고 계속적으로 집중할 수 있게 만드는 장점이 있다. 물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인터뷰 대상자의 선정인데 전문가와 전직 관료, 사태 피해자들의 인터뷰는 나름대로 적절했다는 판단이다. 또한 시사 다큐의 특성을 살려서 사태와 관련하여 보도된 TV 자료를 배치한 것도 다큐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 데에 기여했다고 본다.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 다큐에는 몇몇 허점들이 보인다. 그것은 사태의 원인을 파악하는 데에 있어서 보다 다양하고 균형 잡힌 관점을 제시해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석유와 미국, 연방국의 민주주의 혁명과의 관련성이 지나치게 부각되어서 다른 측면을 살펴보는 데는 소홀했다는 인상을 준다.

 

  5월 23일자 한국일보에 실린 강병태 칼럼은 이 다큐가 간과한 부분을 다루고 있다. 그것은 미국이 러시아, 중국과의 영향력 경쟁과 관련, 이미 카리모프 정권과 노골적으로 갈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지역의 미국 세력 확장에 맞서서 중국과 러시아가 조직한 상하이 협력기구 정상회의(SCO)가 지난해 6월 우즈베키스탄에서 열렸다. 여기서 러시아는 우즈벡과 전략적 동반관계를 맺었고 이를 통해 우즈벡의 석유 공급을 장악하려는 미국의 의도에 타격을 입힌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다음달, 미국과 유럽은 우즈벡의 인권상황을 이유로 경제 원조를 동결했고, 이를 통해 미국은 카리모프 정권의 붕괴를 통해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한다는 관측이 나왔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다큐에서는 미국이 카리모프 정권에 대해 지지를 보내고 있다는 점만을 부각시켰고, 우즈벡 정치 상황에 영향을 미치는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분석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끝부분에서야 중국에 관한 부분이 다루어지긴 했지만 사실 그 부분은 다큐에서 계륵과도 같은 느낌이 든다. 생뚱맞다는 인상인 것이다. 그러한 인상을 주게 된 것은 우즈벡과 주변국 사이의 유기적 연관관계에 대한 파악 없이 슬쩍 끼워 넣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디잔 지역의 소요 사태에 정체불명의 무장세력이 끼어들어 교도소와 정부 공격으로 이어졌다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사실임에도, 다큐는 수감된 사업가 아버지와의 인터뷰에서 나온 테러조직과 무관하다는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인터뷰는 어디까지나 사실 확인의 단서가 될 수 있을 뿐이지 그 자체가 사실이 아니라는 점에서 제작진의 철저한 자료 조사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었다.

 

  시사 다큐가 시의성과 신속함을 필요로 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시청자들의 정확한 이해와 판단을 위해 면밀하고 정확한 자료 분석이 선행되어야만 하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현장 보고> 우즈벡 유혈 사태, 그 진상은?”은 다소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 있다. 세계를 향해 열려있는 자세와 안목으로 이러한 다큐를 제작, 편성한 방송사의 노력이 보다 치열하고 정교해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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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만시아.사기꾼 페드로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13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김선욱 옮김 / 책세상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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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곡을 읽다보면 희곡의 번역에는 정확성 이외의 다른 요소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실히 든다. 바로 연극성에 대한 이해이다. 희곡의 언어는 상연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읽는 맛이랄까, 그것을 말로 표현했을 때의 생동감과 운율이 살아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책에는 그러한 요소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특히 “사기꾼 페드로”를 직접 소리를 내어서 읽었을 때는 얼마나 즐거웠는지. 그것은 세르반테스의 뛰어난 문학성에 기대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역자의 연극적 체험을 바탕으로 한 번역이 한몫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누만시아”는 “사기꾼 페드로”가 주는 즐거움과는 달리 비장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스페인의 실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 이 비극은 전쟁의 광기,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 고통과 폭력에 대해 돌아보게 만든다.  

 

  조용한 독서가 지루하다고 생각될 때 희곡집을 펼쳐서 소리내어서 읽어보라. 그 안에 살아서 펄떡이는 언어가 있음을 알고는 놀라게 될 것이다. 이 책은 그 언어의 발견을 위한  좋은 안내자가 되어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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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 명의 내래이터, 하나의 이야기

  다큐는 두개의 이야기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축은 김윤아가 내래이터로 등장하는 1948년 제주 4.3 항쟁을 전후한 역사적 사실 관계에 관한 기술이며, 두 번째 축은 일반 성우가 내래이터로 나와서 간첩 사건의 피해자인 강희철에 관한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다. 이 두개의 축은 전혀 다른 개별적 이야기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종국에 있어서는 만나게 되는데, 그러한 점에서 본다면 두 명의 내래이터가 말하는 것은 본래는 하나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제작진은 두개의 이야기 축을 설정하고 서로 다른 내래이터로 하여금 다르게 보이는 듯한 이야기를 하게 만든 것일까?

  그것은 이 다큐의 중심 이야기가 되는 강희철이라는 개인이 1986년에 체포되어 16년간 복역해야했던 참혹했던 고통의 뿌리가 1948년 4월 3일에 제주도에서 시작된 일에 있었기 때문이다. 무려 사십년 전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 한 개인의 인생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만큼의 위력을 가졌다면 그 사건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 하나의 이야기 축은 4.3 항쟁의 시작에서, 또 다른 이야기 축은 강희철의 현재의 삶에 두고 그 두 이야기를 교차 편집을 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1948년의 4.3 항쟁과 2005년을 살고 있는 강희철이라는 개인의 역사가 만나게 된다.

  김윤아가 내래이터로 나오는 첫 번째 이야기 축은 4.3 항쟁을 전후한 제주도의 상황을 역사적 사료에 근거해서 차근차근 짚어나간다. 여기에 주로 사용된 기법은 재연인데, 주목할만한 점은 대사와 행동의 변화가 정적이라는 점이다. 마치 정지된 사진 이미지처럼, 칼라를 의도적으로 배제한 화면 구성은 그 자체로 당시의 자료 화면을 연상케 만든다. 특히 54년 북촌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묵념 사건에 대한 기술에 있어서는 연출된 여러 장의 사진 이미지들을 조합해서 보여줌으로써 그 사건의 실재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이미지를 중시하는 특징은 핏빛이 주조를 이루는 애니메이션 장면의 삽입에 있어서 더욱 두드러진다. “빨갱이”로 몰려서 억울한 죽음을 당해야했던 민간인들을 상징하는 색이자, 희생과 분노의 의미를 담고 있는 붉은 색은 매우 강렬한 시각적 각성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에다 김윤아가 직접 부르는 노래들은 시청자들에게 정서적으로 강하게 호소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첫 번째 이야기 축은 비극적 역사에 대한 시청자들의 감정 이입과 동화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반면 일반 성우가 내래이터로 나오는 두 번째 이야기 축은 차분하고 건조하게 진행된다. 강희철 자신이 말하는 개인사와 간첩 사건과 관련된 진실은 주변 인물들의 증언에 의해 뒷받침 되고 있다. 또한 강희철 이전에도 조작된 간첩단 사건인 65년 혁명당 조작 사건과 77년의 강우규 간첩 사건의 피해자들을 조명하면서 4.3 항쟁의 고통스러운 그림자가 얼마나 오랫동안 깊이 드리워졌는가를 또렷이 응시하게 만든다.

  이 두 번째 이야기 축에서도 재연이 사용되기는 하지만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인물들의 인터뷰 그 자체만으로도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데에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보도된 신문 자료와 인물들의 현재의 삶을 담아낸 화면은 이 이야기 축에 사실성과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두개의 축을 따라가던 각각의 이야기들은 마침내 2005년 현재에서 만나게 된다. 김윤아의 내래이션은 1948년에서 4.3 특별법과 턱수건 할머니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알려진 오늘날로 사뿐히 날아온다. 또 다른 이야기 축이었던 강희철은 2005년인 지금, 보안관찰을 연장한다는 통보를 제주지검에서 받는다. 합쳐진 하나의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직도 4.3은 끝나지 않은, 여전히 피 흘리고 있는 현재의 역사라는 것이다.          


2. 왜 김윤아의 제주도인가

  앞서서 이 다큐는 두개의 이야기 축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기술하였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그 이야기들을 구분짓는 편집상의 특징은 무엇일까? 바로 노래이다. 김윤아가 부르는 노래는 하나의 이야기 축에서 다른 이야기 축으로 이동할 때 나오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노래들의 사용은 내용의 전체적인 통일성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을까? 

  분명히 음악이 나오는 부분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는 점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가 발생한다. 그 음악이 가사가 있는 노래라면 시청자들의 주의력은 화면뿐만 아니라 노래의 가사를 파악하는 것에 분산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반복, 삽입된 노래들은 이야기의 중심에 쉽게 들어가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문제는 김윤아가 내래이터로 나오는 이야기 축에서 중심이 되어야하는 것이 4.3 항쟁의 역사적 궤적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김윤아의 노래들과 그 독특한 음성이 더 지배적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 “김윤아의 제주도”인가? “김윤아”라는 이름이 대표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가수라는 직업적 정체성 외에 제주 4.3 항쟁을 잘 알지 못하는 젊은 세대를 대표한다는 뜻일까? 확실히 김윤아는 여느 인기 가수들과는 차별되는 코드를 지니고 있다. “자우림”이라는 인디에서 출발해 이제는 메이저가 된 밴드의 보컬로 활동하면서 자신만의 독자적 음악세계를 구축해왔을 뿐만 아니라 음악 외적인 면에서도 여성 문제라던가, 다른 사회 문제에 있어서 나름의 목소리를 내왔던 것이다.

  이 프로그램이 4.3항쟁을 다룬 기존의 다큐들과 확연히 다른 지점을 구축하기 위해 “김윤아”라는 카드를 쓴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다. 다큐 중간 중간 삽입되는 노래들을 직접 부른 김윤아의 모습이나, 감각적인 비주얼이 들어간 애니메이션, 재연 부분에 들어간 사진적 이미지의 구성은 이 프로가 젊은 세대들을 주 시청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들이 프로그램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어느 정도의 유기적인 연관성을 지녔는가에 관해서는 의문이 든다. 뮤직 비디오를 찍는 것도 아닌데 노래를 부르는 김윤아의 클로즈업된 얼굴을 여러 번 보는 것은 김윤아의 팬이 아닌 다음에야 매우 곤혹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깊게 논의되어야할 점은 김윤아가 하는 내래이션에 관한 것이다. 

  그의 내래이션은 과연 자신의 내적 체험과 통찰에서 나온 것일까? 단지 대본 작가가 써준 것을 그대로 읊어 내려가는 것이었다면 내래이션의 화자가 “나(김윤아)”로 나오는 부분은 솔직하지 못한 것이며 사실이 아니다. 내래이터를 유명인으로 쓰는 문제에 있어서 신중해야할 부분은 바로 그런 점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본다면 제작진은 “김윤아”라는 카드를 씀에 있어서 형식적이고 외적인 부분에 치우친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3. 진실의 힘

  이 다큐를 보면서 나는 새삼 방송을 만드는 이들의 사명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방송 프로그램은 때론 즐거움을 주기 위해 제작되기도 하지만 그보다 본질적으로 중요한 목적은 가난하고, 소외받고 있으며, 고통받는 이들의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쉽게 잊혀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이유로 침묵 속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공평하다는 것은 그러한 사회적 약자들에게 발언의 기회를 주고, 그들이 우리들과 함께 살고 있는 이웃임을 일깨우는 일일 터이다. 방송은 그 중요한 역할을 놓쳐서는 안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윤아의 제주도”는 그런 점에서 본다면 그 기획 의도를 나름대로 높이 사줄만 하다. 제주 4.3 항쟁이 오늘날까지 드리운 치유되지 않는 상처와 고통의 그림자를 응시하게 만들고, 그 그림자 속에서 침묵을 강요받았던 한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잊혀진 목소리를 불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다큐를 통해 들을 수 있었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거기에 서린 깊은 슬픔은 나의 마음 깊은 곳에 와닿았다. 이것은 오직 그 목소리에 실린 진실의 힘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진실의 힘, 그것 외에 다른 것들은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진실이 아무리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것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마음은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을 구태여 보기 쉽고, 듣기 좋게 포장해야할 필요가 있다면, 그만큼 오늘날에는 진실마저도 미디어와 자본의 논리에 좌우되고 있고, 이러한 상황에 우리들이 무감각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다큐에 나온 가수 김윤아나, 그의 노래나, 눈길을 끄는 애니메이션 등과 같은 시도는 결국 포장일 뿐이다. 그것은 이 다큐가 가진 창조성과는 상관이 없고, 그 보다는 대중성을 고려한 결과이다. 방송 다큐가 시청률과 광고주의 요구를 고려하여 갈수록 연성화되어가는 경향은 참으로 우려할만하다.

  보다 많은 이들에게 진실을 얼굴을 마주보게 만드는 다양하고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김윤아의 제주도”에 그러한 방법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이 없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지적하고 싶은 것은 쉽고 편하게 가려고 했다는 점이다. 이 다큐를 보고난 다음에 김윤아의 노래와 그 얼굴이 더 오래 남는다면 이것은 분명 실패한 다큐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내게는 제작진이 진실이 가진 힘을 보다 신뢰하고 기대었어야한다는 아쉬움이 남는 다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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