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했던 건 이게 아니야."


  모니카(한예리 분)는 남편 제이콥(스티븐 연 분)에게 그렇게 불만을 표현한다. 사방이 드넓은 풀밭인 외딴 곳에 덩그라니 있는 이동식 주택은 모니카의 기대를 무너뜨린다. 그곳은 그렇게 이 부부의 새로운 출발지가 된다. 부부에게는 두 자녀, 첫째 앤(노엘 케이트 조 분)과 둘째 데이비드(앨런 킴 분)가 있다. 남편의 직업은 '병아리 감별사'. 아내도 같이 작업장에서 일한다. 갓 부화한 병아리의 항문의 모양새를 보고 수평아리를 감별해 내는 직업이다. 그 직업군에서 한국인들은 뛰어난 감식안으로 전세계로 진출했다. 제이콥도 그렇게 1970년대에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왔다.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Minari, 2020)'은 한국인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제목부터가 눈길을 끈다. 영어의 미나리에 해당하는 'dropwort' 대신에 'minari'라고 썼다. 아마도 감독에게 '미나리'란 식물은 결코 다른 언어로 대체될 수 없는 '그 무엇'임을 짐작케 한다. 그렇다. 이 영화는 감독 자신의 자전적 경험이 들어있으며, 그의 외할머니는 한국에서 미나리 씨앗을 미국으로 가져와서 심었다고 한다. '미나리'는 그에게 혈연과의 연결고리가 되며, 그의 근원이 되는 나라를 가리키는 것이다.


  어린 아들 데이비드는 심장이 약해서 부부의 근심거리인데, 가뜩이나 병원과 먼 곳의 시골 깡촌에 왔다고 생각하는 모니카는 어떻게든 떠나고 싶어한다. 그러나 남편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그곳에 커다란 농장을 일굴 생각이다. 한국인 이민자들을 위한 농산물을 심어서 근처 대도시에 내다팔 계획을 가지고 있다. 병아리 감별사 일과 병행하는 농장일은 결코 쉽지가 않다. 무엇보다 아이들을 낮에 돌봐줄 사람이 없는 것도 문제다. 모니카는 자신의 어머니(윤여정 분)를 모셔오기로 한다. 영어를 하지 못하는 외할머니와 아이들은 잘 지낼 수 있을까? 제이콥의 농장은 과연 잘 되어갈까? 그들 부부가 꿈꾸는 아메리칸 드림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이 영화의 대부분은 한국어 대사로 이루어져 있다. 모니카와 제이콥, 모니카의 어머니가 대화를 나눌 때 영어 자막이 화면에 뜬다. 앤과 데이비드는 주로 영어로 대화한다. 영어 대사는 당연히 자막으로 안나온다. 이 영화는 미국 제작사(브래드 피트가 만든 제작사)에서 만든 영화다. 감독도 한국계 미국인, 배우들도 한예리와 윤여정을 빼고 미국 국적이다. 당연히 스탭들도 그렇다. 그런데 이 영화는 미국의 영화제에서 '외국어 영화'로 분류되고 있어서, 이 부분이 과연 '미국적인' 영화가 무엇이냐에 대한 논란을 낳고 있다. 단지 한국어 대사가 주가 된다고 해서 미국 영화가 아니라고 보는 것에 이민자들, 특히 아시안 이민자들의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언어'라는 장벽이 가진 꽤나 견고한 힘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다.


  영화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아역 배우들이다. 특히 어린 아들 데이비드로 나온 앨런 킴은 타고난 연기자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이 아이에게는 현실과 배역의 경계가 드러나지 않는다. 극중에서 미국 태생으로 영어를 모국어로 쓰면서도 이민자 부모의 언어인 한국어도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연기가 아주 좋다. 그건 딸 역의 노엘 케이트 조도 마찬가지다. 이 두 아역 배우들을 보는 즐거움은 어쩌면 이 영화의 70프로, 아니 그 이상을 차지한다.


  배우 윤여정이 외할머니 역으로 주요 영화제의 연기상을 휩쓸고 있지만, 어쩐지 내게는 틀에 박힌 연기처럼 보인다. 윤여정은 오랫동안 TV의 일일 드라마, 주말 드라마 등에서 자신의 연기 이력을 이어오면서 그다지 인상적인 면은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나 현지 미국인들의 시각에서 윤여정의 연기가 다르게 평가받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스티븐 연의 연기도 평이하다. 뭔가 연극적인 대사 처리가 드문드문 드러나는 것이 낯설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한예리의 연기는 아주 좋다. 이 영화에서 한예리는 자신의 배우로서의 존재 가치를 명백하게 각인시킨다. 낯선 땅에서 어떻게든 뿌리내리고자 하는 이민자, 두 아이의 엄마로서 불안과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모습을 매우 잘 소화해냈다.


  '미나리'에서 특히 눈여겨 볼 부분은 1980년대 초반을 재현해낸 소품과 미술 세트들이다. 극중에서 모니카는 신실한 크리스찬으로 나오는데, 거실 벽면을 장식한 태피스트리에는 예수님이 보인다. 그 시절의 한국에서 그 자줏빛 태피스트리는 왠만한 집들마다 다 있는 벽장식품이었다. 성서적 내용부터 시작해서, 돈 잘벌게 해달라는 의미의 멧돼지 그림까지 다양한 무늬들이 짜여져 있었던 기억이 난다. 거기에 나온 컬러 TV는 대체 얼마만에 보는 것인지, 아니 저런 걸 지금도 소품으로 구할 수 있나 싶어서 놀랐다. 심지어 욕실에 있던 푸른색 '플라스틱 바가지'까지 미술에 신경을 정말 많이 썼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차들도 당연히 그 시대의 차들인데, 굴러가는 것이 신기하게 보일 정도다. 


  극중에서 윤여정은 미나리 씨앗을 한국에서 가져와 집 근처 냇가에 심어놓는다. 미국이라는 낯선 곳에서 힘들게 뿌리내리는 딸과 사위, 손주들의 미래가 어디서든 잘 번성하는 미나리처럼 되어가길 바라는 뜻이다. 미나리는 물이 있는 곳이면 마다하지 않고 잘 자란다. 물을 정화하는 수생식물의 특성이 있어서, 심지어 공장 폐수가 나오는 곳에서도 자란다. 아마 좀 나이가 있는 세대라면 공장 지대 폐수를 끌어다 미나리를 키워 팔다 적발된 뉴스를 심심치 않게 들었을 것이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희생해야 한다구."


  다시 도시로 돌아가서 살자는 아내의 요구에 제이콥은 그렇게 말한다. 그는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두 아이들에게 아버지로서 가치있는 무언가를 이루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거대한 정원(garden)을 가꾸는 것, 그것은 농작물을 길러내는 농장(farm)이기도 하지만 그가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어하는 정신적 가치가 들어있는 곳이기도 하다.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식물들처럼 이민자들은 새로운 곳에서 정착하고자 최선을 다한다. 때로 그것은 많은 희생을 수반한다.


  제이콥이 일하는 공장 굴뚝에서는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쓸모없다는 이유로 폐기처분되는 수평아리들을 소각하기 때문이다. 그 연기는 낯선 곳에서 자신들의 유용성을 입증해내지 못하면 언제든 밑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는 이민자들의 냉엄한 현실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나리'는 미국으로 떠난 한국인 이민자들의 이야기인 동시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애를 쓰는 모든 이민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정이삭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그렇게 자신의 어린 시절과 부모, 혈연으로 이어진 모국의 근원을 들여다 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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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 파리 영화로 만나는 도시
마르셀린 블록 지음, 서윤정 옮김 / 낭만북스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오래전에 사놓고 책장 한구석에 처박아 두고 있었다. 그러다가 엊그제 꺼내어 읽어보았다. 책의 제목처럼 파리를 배경으로 한 46편의 영화들에 대한 소고이다. 무려 31명의 다양한 필자들이 참여했다. 영화 관련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비교 문학, 미디어 연구자, 언어 전공자 등 여러 지적 배경을 가진 이들이 자신들이 본 영화들에 대해 짧은 리뷰를 썼다. 대개는 줄거리 요약에 그치고, 더러는 장면 분석이 심도있게 들어간 부분도 있다. 어떤 이는 자기가 연구한 프랑스 초기 영화 감독 알리스 기 블라쉐에 대한 장문의 글도 실었다. 솔직히 별다른 느낌은 없다. 


  파리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므로 프랑스 영화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이 책을 보고나서야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셉션(2010)'에서 주인공 코브와 에이드리언이 대화를 나누었던 거리의 배경이 파리라는 것을 알았다. 키에슬로프스의 '세 가지 색: 블루(1993)'도 파리에서 찍었다는 사실도 함께. 도시가 가진 오랜 역사와 전통이 어느 곳에 카메라를 들이대더라도 그냥 '그림'이 되어버리게 만든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번역은 별다른 흠은 없지만, 좋다고 말할 수도 없다. 31명의 필자가 쓴 글이 각기 다른 결의 문체로 느껴져야 할 텐데 번역자 자신의 문체로 죄다 통일되었다. 저자 한 명이 다 쓴 리뷰라고 읽다가 필자들이 여러 명이라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다양한 필자들의 고유한 문체를 살려내지 못한 이 책의 번역은 상당히 아쉽다.


  이 책에 나온 영화 속의 파리를 구경하고자 여행을 떠나는 이들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에 대해 나는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는 못한다. 그냥 이 영화 속에 나온 장소는 파리의 어디구나, 라고 새롭게 알게 된 것에 그칠 뿐이다. 그러고 보니, 대체 이런 책의 기획은 왜 했을까 싶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미국에서 기획된 이 책은 영화 촬영지로 유명한 대도시 시리즈로 기획된 모양이다. 같은 출판사의 '필름, 뉴욕'도 있다. 책 뒷부분에 나온 필자들 소개를 들여다 보다 문득 어느 국적인가 궁금해져서 국적별로 분류해 보았다. 호주 1명, 프랑스 1명, 이탈리아 1명, 영국 8명, 그리고 미국이 20명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미국의 연구자들이 바라본 파리 배경 영화들 분석인 셈이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기는 한가...


  연구자들의 이력은 무척 화려한데, 특히 미국 필자들은 여러 대학의 영화 관련 학과에 소속되어 있었다. 내가 느낀 것은 그렇다. 세계 영화 산업을 이끌어가는 것이 주류 헐리우드 영화이므로 그것을 뒷받침하는 학문적 영역도 넓게 구축되어 있구나 하는. 어쨌든 영화와 매체 관련 글을 써서 많은 이들이 먹고 살 수 있는 '판'이 있다는 건 한편으로는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책을 다 보고 났더니 눈이 피로하다. 이 책의 활자는 무지 작다. 정말 깨알처럼 작다. 아직 노안이 오지 않는 젊은 친구들, 그리고 파리를 배경으로 한 오래전 영화부터 최신 영화가 궁금한 이들은 한 번 읽어볼 법하다. 영화들에 대한 깊이있는 분석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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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지지 마, 불결해!"


  미카(히로스에 료코 분)는 남편 다이고(모토키 마사히로 분)에게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뜬다. 도대체 이 부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다키타 요지로 감독의 '굿바이(영문 제목 Departures, 2008)'는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룬다. 첼리스트에서 졸지에 납관사(우리나라의 장례지도사에 해당함)가 된 다이고의 이야기가 주된 줄거리다. 아내 미카는 이제 막 남편이 새로 얻은 직업에 대해 알게 되었다. 직업을 바꾸지 않으면 떠나겠다고 하면서 그렇게 소리친다.


  자신이 단원으로 있던 교향악단이 해산되자 다이고는 첼로를 팔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새 직업을 찾던 다이고는 여행 가이드 모집 공고를 보고 찾아간 사무실에서 엉겁결에 채용된다. 그곳은 장의사들에게 일감을 받아 납관일을 하는 곳이다. 다이고의 새 직장 'NK에이전트'는 어떤 의미에서 여행사가 맞기는 맞다. 사장 이쿠에이(야마자키 츠토무 분)는 '영원으로 향하는 여행'을 안내하는 가이드라고 말한다.  


  다이고는 납관사 일을 하면서 자신이 모르는 세상을 배워나간다. 물론 그가 맞부닥치는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다. 기껏해야 시체 닦아주는 천한 일이라는 세간의 편견은 아내를 비롯해 그의 고향 친구의 말에서도 드러난다. 일하러 간 상갓집에서도 다이고와 사장은 때로 대놓고 하대를 받기도 한다. 


  "당신들 말야, 죽은 사람이나 팔아먹고 살면서."


  약속 시간이 5분이나 늦었다는 이유로 상주는 대놓고 성질을 부린다. 일본 사회의 큰 문제로 자리잡은 '고독사' 이야기도 나온다. 다이고는 여러 죽음을 접하면서, 자신이 하는 일의 소중한 의미와 보람을 찾아가지만 결국 아내는 그를 떠난다. 과연 다이고는 납관사 일을 계속 할 수 있을까...


  '굿바이'는 일견 무거워 보이는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다. 그러한 균형 감각이말로 이 영화가 가진 장점이다. 다이고 역을 맡은 모토키 마사히로의 연기는 아주 자연스럽고 지나침이 없다. 그는 이 영화를 위해 첼로는 물론 납관사 일도 열심히 배웠다. 특히 그가 영화 속에서 직접 연주하는 첼로는 색다른 감동을 준다. 영화의 음악을 담당한 히사이시 조의 따뜻하고 아름다운 선율이 그렇게 관객의 마음을 가득 채운다.


  다이고의 아내 역으로 나온 히로스에 료코의 연기도 좋다. 사생활로 이런 저런 말이 끊이질 않는 배우이지만, 료코는 카메라만 돌아가면 배역 그 자체가 되는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나는 히로스에 료코가 나온 영화와 드라마에서 연기에 불만을 가져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영화 '비밀(1999)', 드라마 '썸머 스노우(2000)', '사랑 따윈 필요없어, 여름(2002)'의 눈부신 연기를 기억한다. 사장으로 나온 야마자키 츠토무의 연기는 이 영화의 무게 중심을 잘 잡아 준다. 이 영화는 시신으로 나오는 단역 배우들까지도 눈길을 끌게 만든다. 결코 움직여서는 안되는 '시신 역할'을 위해서 제작사는 오디션까지 보고 뽑았다. 무려 200대 1의 경쟁률이었다고 한다.


  이 영화의 원제 'おくりびと'는 '보내주는 사람'을 뜻한다. 영화 속의 납관사를 뜻한다. 영어 제목은 'Departures', 죽음은 새로운 세계로의 떠남을 의미한다. 한글 제목은 좀 뭔가 뜬금없기는 하다. 굿'바이, 안녕이란 뜻 자체 보다는 'Good and Bye'로 산자와 망자 사이의 좋은 이별을 뜻하는 의미로 지은듯 하다. 각각의 다른 언어의 제목들은 결국 죽음이 가리키는 것들에 대해서 성찰하게 만든다. 그것은 마냥 비통해하고 고통스러운 일이라기 보다는 인생의 자연스러운 마지막 과정이며 언젠가 우리 모두 마주해야할 미래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나는 영어 제목의 '떠남'이란 의미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곳으로의 새로운 여행일런지도 모른다. 왜 단수가 아닌 복수 형태의 'Departures'가 된 것일까? 그건 영화 속에서 다이고가 마주한 여러 죽음들을 뜻하기도 하고, 모든 죽음의 모습은 각각이 가진 사연과 그 죽음을 둘러싼 많은 이야기들이 있음을 보여주기에 그리 된 것이리라.


  영화의 마지막에 다이고는 어릴 때 자신을 버리고 간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과 조우한다.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해내지 못하는 다이고는 자신이 직접 납관 의식을 하면서 비로소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망자는 산자의 기억 속에 남는다. '납관사'라는 직업을 통해 죽음의 의미뿐만 아니라, 살아있음의 의미까지 되새겨 보게 만드는 '굿바이'는 꽤 괜찮은 영화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지금의 나 자신과 사랑하는 가족의 모습을 다시 한번 찬찬히, 고요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사진 출처: asianwik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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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EBS '세계의 명화'에서는 '말할 수 없는 비밀(2007)'을 방영해 주었다. 이 영화에서 주걸륜이 피아노 배틀을 할 때 나왔던 곡들은 라디오의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에서 매우 인기있는 신청곡이다. 그동안 음악으로만 듣다가, 그걸 영화에서 직접 보았다. 이 영화를 만든 주걸륜은 자신이 주연 배우를 맡아서 피아노도 직접 친다. 아주 잘 친다. 그냥 그 뿐이다.


  이 영화의 만듦새는 나름대로 괜찮다. 로맨스 영화의 일반적 공식을 따라가는 듯하다가 중간 부분부터 확 틀어버린다. 시간대를 비틀어 버림으로써 영화는 긴장감과 활력을 띄게 된다. '비밀(Secret)'이라고 적혀진 마법의 악보가 매개체로 등장하는 것도 나름대로 설득력을 가진다. 배우들의 연기, 특히 샤오위 역을 맡은 계륜미의 다채로운 얼굴 표정과 청순한 매력도 빛난다. 예상륜 역의 주걸륜은 솔직히 복학생이 고등학생 교복입고 연기한다는 느낌이다. 뭔가 어색한 주걸륜의 대사 처리는 영화의 음악이 그럭저럭 메꿔준다. 클래식 음악과 함께 대만의 대중가요도 나오는데, 이 영화에서 음악은 아주 중요한 요소로 작동한다. 예술 고등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주걸륜은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맘껏 펼쳐 보인다. 영화의 촬영 장소도 그의 모교를 택했다. 이 영화를 보고 감명을 받은 팬들은 그 고등학교를 직접 방문하기도 한다고 들었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보고 나서 든 생각은 그렇다. 과연 이 영화는 '명화()'인가? EBS에서 '세계의 명화'로 방영하는 영화를 선정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괜찮은 줄거리, 적당한 감동이 있으면 '명화'의 요건을 갖추는 것인가? 그런 일련의 질문들이 머릿속에서 끊이질 않았다. 만약 다른 공중파 방송에서 '명화 극장'이란 프로그램으로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방영했다면 그다지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오래전의 EBS '세계의 명화'는 영화를 보는 눈을 열어 준 좋은 안내자였다. 친절하고 유능한 그 안내자를 따라 나는 명화의 세계를 탐험했다. 정말로 많은 명화들을 '세계의 명화'를 통해서 만났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전함 포템킨(1925)'를 영화 교과서에 제목으로만 볼 수 있는 시절이 있었다. 이 영화는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금지 목록에 올라 있었다. 조악한 화질의 복제 비디오테이프로 떠돌아 다니며, 알음알이로 보던 시절이었다. 그걸 EBS에서 1994년 3월에 방영하기로 결정했다. 당시의 신문과 방송에서는 공중파로 이 영화가 처음 방영된다며 대대적으로 보도할 정도로 화제였다. 그러나 '모종의 입김'에 의해 방영은 불발되었다. 좀 시간이 지난 후에 어쨌든 EBS는 그 약속을 지켰다. 그렇게 나는 '전함 포템킨'을 보았다.


  EBS에는 다양하고 깊이있는 세계의 명화들을 소개하는 '세계의 명화'와 함께 일요일 낮에 좀더 대중적인 영화를 방영하는 '일요 시네마' 프로그램도 있다. '한국 영화 특선'도 오래된 흑백 한국 영화들을 방영함으로써 한국 영화가 가진 역사성을 새롭게 부각시켰다. 나는 그 세 개의 영화 프로그램들을 보면서 영화를 사랑하게 되었다. EBS는 나에게 진정한 영화의 보고였던 셈이다. 그러던 것이 어느 시점부터 EBS의 영화 프로그램들은 그 빛을 잃고 표류하기 시작했다. 방영되는 영화들의 목록에 나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다. 그 영화들의 목록은 비디오 테이프가 사라져 가던 시절, 폐업하는 비디오 가게에서 그나마 볼만한 테이프들을 골라서 담아놓은 것 같다. 그저 그런 영화들의 나열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무엇보다 좋은 영화를 가려내는 선구안의 부재가 심각하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은 그다지 큰 흠이 드러나지 않는 평범한 영화이지, 좋은 영화라고 볼 수는 없다. 한마디로 '명화'의 범주에 넣기에는 영화적 힘이 상당히 딸린다. 심심할 때 보기 좋은 영화 추천해 달라고 누가 묻는다면 주저없이 말할 수 있을 정도는 된다. 명화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 영화의 만들어진 시대적 의미와 함께 영화적 성취도 고려해 봐야 한다. 무조건 '예술 영화'를 틀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영화적 재미와 함께 영화의 내적 완성도가 높은 영화들, 예를 들어 스필버그의 '레이더스' 시리즈를 '세계의 명화'에서 방영한다면 나는 충분히 수긍할 것이다.


  지금의 EBS에서 방영하는 '세계의 명화' 라인업은 방영권을 사오는 배급사에서 그냥 떠넘긴 영화 목록들 같다. 한물간 1990년대와 2000년대 헐리우드 메이저 영화사들의 영화 목록들이다. 그렇다고 다른 유럽이나 제 3세계의 영화들을 열심히 소개하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그런 면에서 국회방송(NATV)의 '명화 극장'은 더 나은 면모를 보인다. 마티유 카소비츠의 '크림슨 리버(2000)', 라세 할스트롬의 '개 같은 내 인생(1985)'이 '명화 극장'의 방영 목록에 들어 있다. 진정한 '세계의 명화'를 선정할 자신이 없다면, 차라리 특정 감독 특집이나, 영화제 수상작들을 선별해서 방영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코폴라의 '컨버세이션(Conversation, 1974)'와 데이비드 헤어의 '웨더비(Wetherby, 1985)'를 본 것도 EBS의 '세계의 명화'에서였다. 오로지 영화관, 공중파 방송, 비디오 테이프만이 영화를 보는 방식들이었던 시절에 EBS는 좋은 영화에 목마른 이들의 마르지 않는 샘물이었다. 물론 이제는 시대가 바뀌어서 구태여 EBS가 예술 영화 소개의 첨단에 있을 필요가 없어지기도 했다. 영화를 좋아하고, 영화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EBS가 아니더라도 자신들이 다 알아서 영화를 찾아서 본다. 그럼에도 나는 영화라는 아름다운 세상에 처음으로 들어선 이들에게 EBS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의 명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별한 지점이 있을 것이다. 그걸 찾아내는 것이 제작진의 몫이다.


  오늘 아침, 늘 듣던 라디오를 어떻게 하다가 떨어뜨렸다. 켜보니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럴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이 취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인터넷 검색에서 가전 제품이나 컴퓨터가 작동이 되지 않아요, 란 질문에 올라온 대답의 1위는 '우선 한 번 두드려 보세요'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방법을 시도한다. 나도 그렇게 했다. 몇 번을 가볍게, 부서지지 않을 정도로 두들겼다. 전원이 들어온다. 아마 내부 기판의 납땜이 떨어져 버린 것이라면 소용이 없는 방법이겠지만, 운좋게도 라디오는 다시 소생했다. 그러나 뭔가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면, 어디까지나 이 방법은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EBS의 '세계의 명화'에는 그런 임시방편, 미봉책과 같은 대책이 아니라 이 프로그램에 대한 근본적인 숙고와 성찰이 필요하다. 너무나 오랫동안 그 프로그램을 아끼고 사랑한 시청자가 남기는 조언이다.



*사진 출처: cine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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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크맨(Pac-Man)을 해보았던 때가 생각난다. 가정용 컴퓨터가 처음으로 나왔던 때가 1980년대 중반 즈음이었다. 가격도 엄청나게 비쌌는데, 그걸 친구네 집에서 처음으로 보았다. 연초록색 화면에 동글뱅이 녀석이 과일이며 이것저것 먹으며 점수를 쌓는 게임. 동네 오락실은 아이들로 북적였고, 갤러그는 아주 인기가 많은 게임이었다. 그 시절의 오락실 기계들은 아이들의 용돈을 미친듯이 먹어치웠더랬다.


  제임스 스월스키와 리잔 패조의 다큐 '인디 게임(Indie Game: The Movie, 2012)'은 게임 개발자의 일상과 삶에 대해 살펴볼 수 있게 만든다. 이 다큐는 'Braid', 'Fez', 'Super Meat Boy'의 게임이 발매되기까지의 과정을 주로 다룬다. 그 게임을 만드는 이들은 거대 게임 회사가 아닌 독립적인 개발자로 자금난과 이런저런 난관에 부딪히는데, 다큐의 제목 '인디 게임'은 그런 그들이 개발하는 게임을 지칭하는 말이다. 영화계에서도 인디 영화가 있듯, 게임의 세계에서도 인디 개발자들이 있다. 어디서나 자본과 설비가 우세한 거대 기업 보다 개인이 밀리는 것은 당연하다. 이 다큐에 나오는 게임 개발자들도 자신들이 원하는 게임을 만들어 내기 위해 그야말로 악전고투를 치룬다.


  'Fez'를 만드는 필 피쉬는 4년째 게임 개발에 매달리는 중이다. 그는 그 과정에서 동업자가 떠났고, 재정적으로도 파산 직전이며, 개인적으로는 여자친구와도 결별한다. 결국 모든 어려움을 딛고 자신의 게임을 발매하고, 게임은 큰 성공을 거둔다. 'Super Meat Boy'의 개발자 에드먼드와 토미 또한 어려움을 겪는다. 그들의 일상은 밤낮이 따로 없다. 모니터 화면에 늘 고정되어 있는 붙박이로, 에드먼드의 아내는 남편의 등만 보고 산다며 푸념을 하기도 한다.


  "난 일상을 잃어버렸어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외출을 하지 않아요. 사회활동이랄게 없죠. 가진 돈이 없으니 쓸 돈도 없거든요. 데이트를 한다고 해도 태워줄 차도 없고 식사할 돈도 없어요. 혼자 먹을 밥은 살 수 있겠지만... 내가 희생한 건 인간 관계에요."


  토미는 저녁의 동네 식당에서 혼자 그런 넋두리를 한다. 인디 게임 개발자의 자조적인 독백은 뭔가 짠한 구석이 있다. 그런데 그 부분을 보다 보면 그렇다. 저것이 과연 인디 게임 개발자만의 고민이고 궁상맞은 삶인가? 예술의 다른 분야에서 창작을 하는 이들은 다 그와 비슷한 고민을 하며 살아간다. 글을 쓰는 작가, 영화 만드는 이들, 음악하는 사람들, 그림 그리는 화가, 각양각색의 창작 활동을 하는 이들의 고민은 거의 엇비슷하다. 어떻게 자신의 작품을 통해 세상 사람들과 소통할 것인가와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고민이 그러하다. 토미의 독백은 지나치게 감상적이다. 비슷한 처지의 누군가는 그에 대해 '징징거리지 말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솔직히 이 다큐에서 아주 불편한 부분이다.   


  일상과 인간 관계를 희생하면서 그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자신들이 만들어 내는 게임으로 현실의 유저들과 소통하는 일이다. 다큐에 나온 인디 개발자들은 그간의 노고를 보상받는다. 천신만고 끝에 발매된 게임은 성공적인 반응을 얻고, 토미와 에드먼드는 집도 장만한다. 토미의 '징징거림'은 그야말로 과거의 추억이 되어버렸다. 이른바 게임이 대박을 치면서, 인생도 순풍을 타고 나아간다. '인디 게임'에 나온 개발자들은 현재도 잘 나가고 있는 중이다. 


  '인디 게임'은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게임 개발자의 고충과 삶의 단면을 들여다 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 다큐는 미시적인 면에만 초점을 맞춘 나머지 거대 게임 산업 뒤에 가려진 불합리한 면이나 문제점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인디 게임과 그 유통 방식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는 관객을 위해서 친절한 설명이 필요한데도, '스팀(Steam)'은 새로운 판매 방식이라는 그냥 짤막한 말 한마디로 퉁치고 넘어간다. 다큐멘터리가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주는 무수히 많은 창들이라고 본다면, 인디 게임이란 세계를 처음 들여다 보는 관객들을 위한 어느 정도의 배려는 있어야 했다.


  그런 문제점 이외에도 이 다큐는 객관성 면에서도 실패한 지점이 있었다. 다큐에 나온 'Fez'의 개발자 필 피쉬가 동업자와의 결별에 대해 불만과 악감정을 토로하는 부분이 있는데, 막상 그 당사자인 동업자 디그루트에게 발언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다큐의 개봉 초기에는 동업자가 '인터뷰를 거부했다'고 엔딩 크레딧에 올라갔는데, 그걸 보고 격분한 디그루트가 항의하자 '인터뷰를 요청한 적이 없다'고 나중에 고쳤다. 뭔가 실수라고 보기에는 다큐 제작자로서 윤리적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름의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인디 게임'은 자신이 꿈꾸는 것을 게임을 통해 실현하려는 게임 개발자의 인간적 목소리를 잘 담아냈다. 그들은 단순히 큰 돈을 벌기 위해 그 일을 택한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꿈꿔오던 것들을 게임의 세계에 펼쳐놓고, 유저들이 그 게임의 세계에 환호하고 열광하는 것을 보면서 보람을 느끼는 이들이다. 창작자로서 그들에게 게임이란 세상을 향해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며 희망인 셈이다.


  "인디 게임을 만든다는 건, 제 안에 있는 약함(vulnerability)을 게임 안에 집어 넣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는 겁니다."


  'Braid'의 개발자 조나단 블로우는 다큐의 마지막에 그런 말을 한다. 나는 그 말이 참 마음에 들었다. 그것은 비단 게임 개발에만 한정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모든 예술 창작의 과정은 예술가 자신이 가진 내면적 약함과 불완전성에 기대고 있다. 그것을 작품 속에 집어넣고 그 어떤 무언가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인내하는 사람. 그 과정에서 '약함'이 빛나는 성취를 이루어내는 것을 '예술 작품'이라고 한다면, 인디 게임 개발자들이 만드는 게임도 어떤 면에서는 새로운 시대의 예술 작품이다. '인디 게임'은 그 작품을 만들기 위해 '갈아 넣어진' 많은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이 다큐의 출연자들은 모두 성공했으나, 세상에는 그렇게 노력하고도 성공하지 못한 이들이 많음을 우리는 잘 안다.



*사진 출처: gameplanet.co.nz('Super Meat Boy'의 공동 개발자 에드먼드와 토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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