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해당 영화의 스포일러가 '약간' 들어 있습니다.


  미국 드라마 CSI 시리즈는 어떤 면에서 범죄 수사물의 이정표가 되었다. 그 드라마로 인해 시청자들은 범죄 현장에서의 증거 수집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증거 분석에 사용되는 온갖 첨단 기법과 부검 과정에서 밝혀지는 의학적 사실도 접할 수 있었다. 증거물의 분석 과정에서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된 놀랍도록 사실적인 화면에 감탄을 금치 못하기도 했다. 그런 것에 익숙한 오늘날의 관객에게 '나이브스 아웃(Knives Out, 2019)'은 좀 뜬금없는, 아주 구식의 추리물처럼 보인다.


  오랫동안 추리 소설 작가로 부와 명성을 쌓아온 할란 트롬비는 85세 생일 다음날, 자신의 저택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다. 타살 가능성을 조사하기 위해 경위 엘리엇과 부하 경관 와그너, 그리고 이 영화에서 실질적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사립 탐정 브누아 블랑(다니엘 크레이그 분)이 할란의 저택을 찾는다. 트롬비 일가는 생일 저녁 각자의 행적들에 대해서 진술하게 되고, 그 와중에 할란의 유언장이 공개되면서 일가족들의 혼란과 분노는 극에 달한다. 놀랍게도 할란의 저택, 책의 저작권을 비롯해 모든 재산이 그의 건강을 돌보던 고용 간호사 마르타(아나 데 아르마스 분)에게 상속된 것. 과연 할란의 죽음은 타살일까, 자살일까? 마르타가 그의 재산을 전부 상속받는 것은 아무 문제없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이 모든 이야기가 러닝 타임 130분에 걸쳐서 펼쳐진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을 영화화한 일련의 작품들을 기억하고 있는 영화팬들이라면 이런 고전 추리물의 귀환은 꽤나 반갑게 느껴진다. 아마도 그 영화들에서 가장 인상적인 에르큘 포와로를 꼽으라면 피터 유스티노프일 것이다. 가장 대중적인 작품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1974)'은 앨버트 피니가 포와로 역으로 나왔지만, '나일 강의 죽음(1978)'을 본 관객들은 유스티노프를 포와로의 환생으로 생각했을 법하다. 약간의 허세와 유머 감각 뒤에 숨겨진 치밀하고 이지적인 면모를 보여준 포와로의 모습을 유스티노프는 아주 잘 연기해냈다. '나이브스 아웃'의 사립 탐정 블랑은 그런 포와로의 모습과는 다소 이질적이다. 무뚝뚝하고 뭔가 어설픈듯이 보이지만 냉철한 수사 감각을 가지고 있는 그는 이 영화에서 균형감을 가진 심판자, 중재자 역할로 나온다. 


  '나이브스 아웃'은 130분에 이르는 러닝 타임을 즐겁게 속주(奏)한다. 트롬비 일가 구성원들 사이 얽히고 설킨 애증의 비밀이 잘 포장된 초콜릿들을 하나씩 까먹는 것처럼 펼쳐진다. 관객들은 마침내 노 추리작가의 죽음에 가려진 진실을 알게 되고, 마르타가 고귀한 승리를 쟁취했다는 데에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추리극의 외피 안쪽에 아주 분명한 정치적 서사를 펼쳐 놓는다.


  할란의 생일날 저녁에 일가족들이 모여서 트럼프의 이민 정책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할란의 셋째 아들 월트 부부와 그 아들은 트럼프의 정책을 지지한다. 그러나 둘째 며느리 조니와 그 딸 메그는 불법 이민자에 대한 비인간적인 처우에 대해 비판의 날을 세운다. 그렇게 트롬비 일가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다 보면, 뭐랄까, 미국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정치적 목소리들을 대변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서로 다른 정치적 의견을 가진 이들이 '돈' 앞에서는 하나로 똘똘 뭉친다. 정작 한 푼의 유산도 일가족 누구도 받을 수 없게 되자, 그들은 자신들에게 교양이라는 덕목으로 장착된 모든 것들을 내던진다. 셋째 아들 월트는 마르타의 어머니가 불법 체류자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상속 포기를 종용한다.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가졌다고 생각되는 메그조차 자신의 대학 등록금과 미래 앞에서 마르타와 대립한다.


  감독 라이언 존슨은 이 추리극이 여러 정치적 수사로 가득차 있음을 감추지 않는다. 할란의 저택은 그 자체로 미국이라는 나라를 대변한다. 영화 말미에 블랑의 말에서 알 수 있듯, 그 집은 파키스탄 사람에게 헐값에 사들인 것으로 트롬비 일가의 근원적 부의 시작은 이민자의 집이었다. 거실을 장식하고 있는 온갖 종류의 단검이 장식된 의자는 폭력과 갈등으로 점철된 미국의 역사에 대한 은유이다. 원주민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과 박해, 시민 전쟁으로 부르는 남과 북의 피비린내 나는 혈투, 건국 초기부터 이어져온 노예제와 흑인 차별, 그리고 오늘날의 배타적인 이민자 정책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서로 다른 정치적 세력들 사이의 칼을 빼든(knives out) 대립의 역사였다.


  마침내 마르타는 정당하게 할란의 유산 상속자 자격을 획득한다. 할란이 늘 쓰던 컵을 들고 2층의 테라스에서 마당에 서있는 트롬비 일가를 바라본다. 컵에는 '내 집, 내 규칙, 내 커피(My House, My Rules, My Coffee)'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할란을 성심껏 간호한 노력을 봐서 나중에 보살펴 주겠다고 짐짓 선심을 썼던 셋째 아들 월트를 비롯해 나머지 가족들은 마르타의 호의를 기대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속물 근성에 찌들리고, 아무 능력도 없으면서 돈을 물쓰듯 하며, 속임수와 각자의 비밀을 가지고 서로를 위선으로 대했던 트롬비 일가는 할란의 진정한 상속자가 되지 못한다.


  이 영화의 결말은 마치 할란의 저택으로 상징되는 미국의 정당한 주인은 이민자들임을 상기시키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사건의 해결로 마르타의 결백을 입증한 탐정 브누아 블랑의 이름이 가진 뜻을 되새겨볼만 하다. 그의 이름 자체가 참 흥미로운데, '브누와 블랑(Benoit Blanc)'은 '축복받은 백색'이란 뜻이다. '백인됨(Whiteness)'은 미국의 역사에서 미국인들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단지 피부색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종교, 정치, 문화, 다양한 배경들이 직조된 미국의 주류 지배 계층의 특질이다. 감독 라이언 존슨은 '나이브스 아웃'을 통해 그 '백인됨'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트럼프 행정부 시기에 불법 이민자들을 향해 가해졌던 비인간적인 처우와 정책들은 '백인됨'의 극우적 속성을 보여준다. 그런 편향된 가치가 아니라 공정성과 합리성, 이성적 사고를 가진 '백인'으로서의 브누와 블랑 같은 이들이 오늘날의 미국에 필요함을 역설한다.  


  미국의 많은 정치학자들은 트럼프의 정책 기조를 뜻하는 'Trumpism'이 트럼프의 퇴임 이후에도 금새 청산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트럼프의 정책들이 가져온 분열과 대립, 백인우월주의와 극우주의 세력의 부상이 결코 쉽게 사그라들 수 없는 것임을 미국 내에서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이브스 아웃'은 오늘날의 미국이 직면한 정치적 격변기에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세련된 은유를 추리극의 외투를 덧입혀 보여준다. 이 영화의 관객들은 그 외투 안쪽에 자리한 정치적 서사를 놓치지 않고 볼 필요가 있다.



*사진 출처: newswee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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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레기 분리 수거를 하다 보면, 어떤 건 어디다 버려야할지 애매한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쓰지 않는 전선줄 같은 것들. 줄의 외피는 플라스틱인데 그 안에는 금속으로 되어 있으니 대체 어디다 버려야 맞는 걸까? 'Welcome to Sodom(2018)'을 보면 그 답을 알 수가 있다. 그냥 전자 제품과 같이 버리는 것이 제일 낫고, 따로 버려야 한다면 금속에다 넣는 것이 맞다. 해마다 25만톤에 해당하는 전자 제품 쓰레기들이 불법적으로 이 나라에 폐기된다. 이 나라의 북부에는 그렇게 쌓인 거대한 전자 쓰레기의 대지가 있고, 그것을 쓸모있는 자원으로 다시 살려내는 일로 먹고 사는 이들이 있다. 그 나라는 '가나(Ghana)'다.


  크리스티안 크뢰네스와 플로리안 바겐자머가 만든 'Welcome to Sodom'은 환경 문제를 다룬 다큐로 그 주제가 꽤나 묵직하다. 소돔은 구약 성서에 나오는 부패와 타락의 도시다. 가나 북부에 위치한 전자 쓰레기 평야를 그곳 사람들은 '소돔'이라고 부른다. 그곳에서는 말그대로 어떤 지옥도가 펼쳐진다. 어른들은 전자 제품을 분해하고 전선줄을 태우며, 아이들은 부서진 고철이 떨어진 땅바닥을 자석으로 훑고 다닌다. 더이상 쓸 수 없다고 버린 전자 제품들이 그곳에서는 소중한 돈벌이의 수단이 된다. 그곳의 풍경은 끊임없이 부수는 망치 소리와 화염, 그로 인해 엄청나게 뿜어져 나오는 유독 가스로 채워진다.


  "이 쓰레기들은 유럽에서 왔어요. 난 언젠가 그곳으로 가려구요. 여권도 만들어 놨어요. 여긴 아무 것도 없어요."


  쓰레기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 곳. 그런 곳에서도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있고, 소들이 쓰레기 더미를 헤치고 다니며, 아이들이 뛰논다. 이 다큐가 가진 가장 큰 미덕은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나름의 경쾌한 운율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망치 소리가 주된 배경음으로 깔리는 그곳 소돔에는 미친 설교자가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신의 심판을 부르짖는가 하면, 누군가는 즉석 공연을 하기도 한다. 쓰레기 수집상 래퍼는 자신의 일상을 랩으로 만들어 부르는데, 그는 소돔의 삶이 노래 그 자체라고 말한다. 그가 노래를 시작하면 젊은이들의 춤판이 벌어지고, 어느새 쓰레기장은 클럽으로 변모한다. 


  천막 식당, 야외 이발소,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생수를 파는 물장사꾼도 있다. 이 다큐의 관객들에게 소돔은 현실판 쓰레기 지옥이지만, 그곳 사람들에게는 삶의 터전이다. 도망자들에게는 그 어떤 걱정도 없는 안식처이기도 하다. 감비아에서 의대를 다녔다는 수집상은 자신의 나라에서 박해를 피해 도망쳤다. 그는 게이이고 유대인이다. 그런가 하면 우주인이 꿈인 어린 고철 수집가도 있다. 소년은 우주인이 되어 자신이 사는 땅을 멀리서 내려다 보고 싶다고 말한다.


  'Welcome to Sodom'은 그렇게 버려진 쓰레기들과 살아가는 이들의 여러 목소리들을 담아내면서, 지금 현재 전지구적으로 당면한 전자 쓰레기(Electronic waste) 문제를 조망한다. 관객들은 선진국에서 빈곤국으로 이동하는 폐기물들의 이면에 많은 비합법성과 불공정성이 존재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 엄청난 전자 쓰레기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환경적 문제와 그것을 떠맡은 이들의 삶에 미치는 해악도 마주한다.   


  이 다큐는 촬영이 무척 좋은데, 사방이 유독가스에 온갖 소음과 냄새로 진동하는 그곳에서 어떻게 그런 안정적인 구도로 찍을 수 있었나 내내 감탄하게 된다. 핸드헬드로 아이의 뒤를 따라가는 장면에서도 흔들림이 보이지 않는다. 또한 소돔의 래퍼가 노래 부르는 장면을 찍을 때는 다큐에서 뮤직 비디오로 전환되는 것 같은 생동감과 속도감을 보여주는 것도 흥미롭다.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다룬 다큐에서 그와 같은 장면은 나름의 볼거리와 영화적 리듬을 부여한다.


  아마도 이 작품에서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소돔의 전자 쓰레기들에서 나온 금속으로 그곳 철공소에서 커다란 냄비를 만들어 내는 장면이다. 끊임없이 타오르는 쓰레기 지옥의 불에서 다시 태어난 순수한 금속이 다시 사람의 일상으로 들어오는 순간이다. 그러나 그 은색 냄비를 만들어내기까지 누군가는 영구적인 장애를 일으킬 수 있는 유독 가스를 들이마셔야 했으며, 아이들은 학교에 가는 대신 땅바닥의 고철을 찾으러 다녀야 했다는 것을 안다. 그 모든 사람들이 쓰레기 지옥의 연금술사들이었다. 한 때는 사바나였던 곳은 앞으로도 쏟아지는 폐기물로 계속 덮이며, 소돔 사람들의 삶도 변함없이 이어질 것이다. 'Welcome to Sodom'은 그런 음울한 현실에서 관객들에게 전자 제품의 소비와 폐기에 이르는 그 전과정에 대한 윤리적 성찰을 촉구한다.


 

*사진 출처: welcome-to-sodo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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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가 들수록 긴 영화를 보는 일이 버겁게 느껴진다. 왕 샤오슈아이의 2019년 영화 '나의 아들에게(So Long, My Son)'는 러닝 타임이 무려 3시간이다. 이틀 동안 나누어서 보았다. 보고나서 내가 느낀 것은 그렇다. 아니,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나 길게 영화를 찍다니... 이 영화는 이야기가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지 않고, 인물들의 내면을 따라간다. 과거와 현재가 그렇게 뒤섞여서 흘러가기 때문에 관객에게 꽤나 집중을 요구한다. 과거의 커다란 슬픔과 상처를 지닌 인물의 내면은 현재까지도 황폐하고 쓸쓸하다. 영화는 나름대로 치유와 용서에 이르는 여정을 보여주고 싶어하지만, 그 모든 시도는 피상적이고 작위적으로 느껴진다.


  야오쥔(왕징춘 분)과 리윈(융메이 분), 잉밍과 하이옌 부부는 국영 기업에서 오랫동안 친한 동료로 지내왔다. 그러나 야오쥔의 아들 싱싱이 잉밍의 아들 하오와 댐에서 놀다가 빠져 죽는 비극적인 일이 생긴다. 야오쥔과 리윈은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벗어나고자 도망치듯이 그곳을 떠나 다른 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아이를 입양해 싱싱이라는 이름으로 키운다. 그러나 삶은 결코 쉽게 풀리질 않는다. 고등학생이 된 새 아들 싱싱은 사고뭉치로 자라났다. 그럴수록 야오쥔의 마음속에는 죽은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어야 했던 아이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난다. 정부의 강력한 산아제한 정책 때문에 아내 리윈은 억지로 중절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그런데 리윈의 임신 사실을 당국에 고발한 사람은 다름 아닌 하이옌이었다. 그렇게 두 가족 사이에 얽힌 슬픔과 원망의 실타래는 깊다. 그로 인해 드리워진 과거의 그림자에서 그들이 벗어나는 것은 과연 가능할까...


  중국 영화에서 6세대로 분류되는 왕 샤오슈아이는 베를린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북경자전거(2000)'로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대도시의 주변부를 맴도는 소년의 일상을 통해 급변하는 중국의 현실을 담아낸 그 작품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아마도 6세대의 감독들이 이전의 5세대로 대변되는 장예모, 첸카이거와 차별되는 지점이라면 개혁 개방 시대의 중국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담아냈다는 것이다. 6세대에 속하는 리위의 '둑길(2005)', '로스트 인 베이징(2007)'에는 개혁 개방 시기를 지나는 중국의 시골과 도시의 풍경이 펼쳐진다. 그런데 그렇게 초기작에서는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던 이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당국의 정책 기조에 적당히 타협하고 안주하면서 그들의 영화에서 사회비판적인 목소리는 사라진다. 아마도 중국 내에서의 영화 제작 현실이 그만큼 녹록지가 않기 때문이리라.


  '나의 아들에게'에 나오는 두 가족의 얽히고 설킨 애증의 역사에서 당시 정부 당국의 억압적인 정책에 대한 비판은 보기 어렵다. 여성의 몸을 통제하고 거리낌없이 생명을 거두는 강제적인 산아제한 정책은 거의 국가적인 폭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도, 왕 샤오슈아이는 그 문제와 직면하는 것을 회피한다. 그것을 리윈의 임신 사실을 고발한 하이옌 개인의 고통스러운 속죄의 차원으로 돌려버리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하이옌은 자신의 아들이 리윈의 아들 싱싱을 죽게 만든 것에 더해 리윈이 낳을 수 있는 또 다른 아이의 출생을 막았다는 것에 평생을 두고 죄책감을 갖는다. 죽음을 앞둔 하이옌이 마음의 짐을 덜어내기 위해 택하는 방식도 개인적인 참회와 야오쥔과 리윈 부부에게 용서를 구하는 일이다. 3시간에 이르는 영화의 마지막 여정에는 용서와 축복이 자리한다. 그렇게 그 두 부부의 기나긴 고통의 시간은 화해로 마무리된다.


  누군가에게 그러한 결말은 어둡고 힘들었던 폭압의 시대를 견뎌낸 인간 본성의 고결함을 증명하는 것일 수도 있다. 미움을 복수로 되갚지 않고, 인내와 사랑으로 삶의 고통에 맞선 야오쥔과 리윈의 삶에 그 누구라도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건 정부 당국에서 예산 받아 만든 문예 영화 같다. 그들 부부는 그 오랜 아픔의 세월 동안 큰소리를 내거나 고통을 토로한 적이 거의 없다. 아마도 폭풍같았던 문화 혁명기, 1980년대의 개혁 개방의 시기를 거치면서 중국의 대다수 민중의 삶은 생존 그 자체가 제일 중요했을 것이다. 비바람을 견디는 풀처럼 눕고 또 눕는 삶. 아들의 죽음을 잊기 위해 발버둥치며 살다가 2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고서야 아들의 무덤을 찾아와서 눈물을 삼키는 부모의 모습. 그들 부부의 삶에 가해졌던 역사적인 과오는 개인의 덕성과 시간에 의해 묻혀진다.


  주인공 야오쥔과 리윈 부부를 연기한 왕징춘과 융메이는 이 영화로 각각 베를린 영화제 남우주연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좋은 연기이기는 했으나, 솔직히 두 주인공의 감정선에 깊이 공감하는 것이 내게는 어려웠다. 영화제 수상에도 지역과 국가에 대한 안배라는 것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나의 아들에게'를 오늘날 중국 영화가 거둔 예술성의 쾌거라고 보기는 어렵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그 한계를 명백히 드러낸다. 중국 영화가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직면하는 데에서 유형 무형의 어려움을 겪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창작의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중국의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모옌의 소설 '개구리'를 떠올렸다. 그 작품에는 무지막지한 산아제한 정책의 선봉장에 섰던 여성 의사가 나온다. 모옌의 소설은 그 엄혹했던 시절을 아주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풀어내는데, 여기에도 개인의 반성과 참회는 나오지만 국가와 당국에 대한 비난은 슬그머니 뒤로 빠져있다. 오늘날 중국에서 어떤 식으로든 생존하고 성공한 창작자들은 그렇게 과거가 드리운 어둡고 긴 그림자를 묘사하는 것에서 자유롭지 않다. 마찬가지로 왕 샤오슈아이의 '나의 아들에게' 또한 그 그림자를 감상적으로 그려내고, 폭압의 시대를 비판하기 보다는 우회하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영화의 감동을 인위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 영화의 러닝타임 3시간은 눈물을 짜내기 위한 영화적 낭비처럼 느껴진다.



*사진 출처: theguard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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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쉬운 건 하나도 없어. 이 큰 도시에서 우리 같은 건 아무 것도 아니지."


  흐느껴 우는 난펑(판빙빙 분)을 위로하며 친구가 하는 말이다. 난펑은 재혼한 엄마에게 생활비를 보낸다. 술집에서 노래부르고 웃음 팔며 버는 돈이다. 술주정뱅이에 폭력까지 휘두르는 남자를 떠나지 못하는 엄마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술병이 나서 입원한 남자를 찾아온 난펑은 술 마시고 죽어버리겠다고 난동을 부린다. 이렇게 마음 둘 데가 없기는 난펑의 남자 친구 딩보(진백림 분)도 마찬가지. 병으로 죽은 엄마를 잃은 슬픔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여자 생겨서 재혼하는 아버지가 밉다. 페이저우라는 이름 대신 뚱보로 불리우는 친구는 부모와 불화로 집을 나왔다. 이들 셋은 버려진 빈집에 거주하고 있다. 그러다 집이 철거를 하게 되자, 셋집을 알아 보다 경극을 가르치는 창 여사의 집에 방을 얻는다. 뭔가 잘 어울리지 않을 이 네 사람들은 별 문제 없이 같이 살 수 있을까...


  '둑길(2005)', '로스트 인 베이징(2007)', 이 두 작품에 이은 리위 감독의 '관음산(2010)'은 방황하는 젊은이들과 인생의 상처에 대해 이야기한다. 만듦새는 나쁘지 않다. 그러나 이야기를 좀 편하고 쉽게 끌어가려다 보니, 인물들 간의 관계는 헐겁고 내적인 유기성은 떨어진다. 이 영화는 리위 감독에게 중국 내 흥행으로 큰 성공을 가져다 주었고, 주연 배우인 판빙빙의 연기도 꽤 좋은 편이어서 이 영화로 동경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대중성을 위해 자신만의 개성을 죽이고 적당히 타협한 결과인지도 모르지만, 영화는 다소 진부하게까지 느껴진다.


  영화 속 난펑과 딩보, 뚱보가 직면한 현실의 괴로움은 그들만이 겪는 특출난 것이 아니다. 부모와의 갈등, 진로에 대한 고민, 연애와 생계의 문제, 이런 고민을 갖고 있는 젊은이들이 어디 한둘인가? '관음산'의 세 친구들이 좀 다르게 보일 수 있다면 대지진의 상흔을 가진 도시의 풍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도피하듯이 도시 근처에 자리한 장대한 관음산을 자주 찾는다. 기차에 몰래 타고, 하염없이 걸으며, 관음산과 도시를 왕복한다. 길 위에서 그들은 자유로워 보이고 맘껏 웃으며 떠드는 것 같지만, 그곳에서 살 수는 없다. 그들이 결국 찾는 것은 편히 살 수 있는 자신만의 '집'이다. 이전의 가족과 집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세 친구의 관계는 마치 진짜 가족 같다. 영화 초반부에 뚱보가 동네 불량배 무리에게 돈을 뜯기고 괴롭힘을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자 난펑은 뚱보를 데리고 무리를 찾아가서 자신의 기세를 보여준다. 병을 깨서 자해를 하고 피가 줄줄 흐르는 채로 무리의 여자애와 강제로 입을 맞추는데, 그 장면을 본 패거리들은 놀라서 당황한다. 여성인 난펑이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가면서까지 뚱보 친구를 보호하고 지켜내려고 하는 모습은 마치 가족을 지키는 모성의 발현 같기도 하다. 어쩌면 난펑에게 두 친구가 진정한 가족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난펑의 유사 가족에 지진으로 아들을 잃은 창 여사가 합류하면서 가족 구성원은 넷이 된다. 그렇게 집과 가족이 생겼고, 소소하지만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행복이 이어진다.


  세 명의 젊은이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면서 아들을 잃은 슬픔에서 조금씩 벗어나던 창 여사는 왠지 자신이 다시 찾은 일상의 행복이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결국 창 여사는 새로운 가족에서 이탈하게 되고, 난펑과 딩보, 뚱보는 다시 길 위에 선다. 영화의 결말은 그들이 진정한 가족과 안정된 집을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흔들리는 화물차의 뒷편에서 허탈한 표정으로 울어버릴 것 같은 표정을 짓는 세 친구의 젊은 날에서 확실한 것은 삶은 여전히 쉽지 않을 거라는 점 뿐이다. 재건되고 있는 거대한 도시의 한 켠에서 그들은 앞으로도 주변인으로 살아갈 것이며, 그런 그들이 정착할 집은 어쩌면 영영 없을지도 모른다. 청춘의 어두운 그늘이 그들이 관음산을 나올 때 지나는 터널처럼 끝이 있다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리위 감독의 '관음산'은 집을 찾아가는 여정의 청춘들을 도시와 거대한 자연 풍광 속에 녹여내서 보여준다. 이전 작품들에서 보여주었던 밀도 있는 연출과 이야기의 핍진성은 떨어진다. 재능에도 '총량의 법칙'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처음에는 마법 구두를 신고 마치 날아다니는 것 같은 이들의 재능은 시간이 지나면 닳아버린 구두 뒷굽처럼 직직 끌리는 소리를 낸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관음산'을 만든 리위를 보며 새삼 느꼈다.



*사진 출처: sinethetamagazine.tumbl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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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죽기 전에 꼭 1001가지 시리즈
스티븐 제이 슈나이더.이언 헤이든 스미스 책임편집, 정지인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읽을 만한 책이 뭐 없나 책장을 살펴보다가, 이 책을 발견했다. 동생이 사서 보내준 책인데, 비닐 포장도 안뜯고 6년째 책장 안쪽에 처박혀 있었다. 왜 안보고 그렇게 놔두었을까? 거의 10년 가까이 영화를 안봤다. 영화라면 지겹고 신물이 났던 것도 같다.


  포장을 뜯고서 안쪽에 발행 년도를 보니 2014년. 책이 나오고 4판까지 찍어냈으니, 이 책은 꽤나 잘 팔린 책 같다. 이 판본 이후로도 2번이나 증보판이 나온 것을 봐도 그렇다.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이 이렇게나 많은가... 아무튼 책을 읽기 시작했다. 영화 제목만 보는 데에 2시간이 좀 넘게 걸린 것 같다. 내가 보았던 그 많은 영화들에 대한 추억과 이런 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 책은 어쩌면 내 젊은 날을 삼켰던 무수한 영화들의 목록인지도 모르겠다.


  D.W.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1915)', '인톨러런스(1916)'를 지금의 나에게 다시 보라고 하면 못볼 것 같다. 전공이었고, 내가 정말로 영화를 좋아하기도 했으니까 열정을 가지고 보았었다. 책에 나온 그 많은 영화들을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봤을까 싶기도 하다. 시간과 노력과 청춘의 시간들이 그 영화들과 함께 흘러갔다. 말하자면 나는 영화를 제대로 보기 위한 훈련을 받은 셈이었다. 굳이 '1만 시간의 법칙' 같은 것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영화를 보아야 영화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될까... 어쨌든 이 책에 나온 영화들은 꽤 괜찮은 길잡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절대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책에 언급된 영화들은 대부분 미국 영화들이다. 세계 영화사는 어떤 면에서는 미국 영화사이기도 하다. 그걸 부인할 수는 없다. 이 책의 편집자들도 대부분 미국의 학자들이므로 그런 시각에서 자유롭지도 않다. 유럽 영화사는 좀 쳐주기는 했다. 일본과 대만 영화들도 부록처럼 들어가 있다. 한국 영화는 단 두 편이다. '하녀(1960)'와 '올드보이(2003)'. 새롭게 증보판을 낸다면 '기생충(2019)'이 들어가겠지. 이 책이 미국과 유럽 위주의 시각에서 만들어진 책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드러낸다.


  책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내 영화 공부의 많은 부분을 EBS에 빚졌다는 사실이다. 초창기 헐리우드 흑백 영화들, 다양한 유럽 예술 영화들을 EBS에서 만났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이 책에 나온 켄 러셀의 '악령들(The Devils, 1971)'을 EBS '세계의 명화'에서 봤다. 물론 지금의 EBS의 영화 선정 안목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어쩌다가 '세계의 명화'가 망해가는 동네 비디오 가게처럼 되었는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앉아서 2시간 넘게 영화 제목을 들여다 보고 마침내 마지막 장을 덮고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비로소, 오래전에 본 영화들과 함께 젊은 날의 시간들은 온데간데없고 나이든 영화광이 서있음을 깨닫는다. 영화는 나에게 대체 뭐였을까? 그 해답을 아직도 찾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책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 '올드 보이'가 나온 페이지는 900인데 뒷편의 색인에는 898쪽으로 나와있다. 단 2편의 한국 영화를 올리면서 쪽수까지 틀렸다. 단순한 실수일 수도 있겠지. 한국 영화가 아무리 성장했다 하더라도, 미국과 서구 유럽의 영화 학자들 시각에서는 아직도 비주류일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좀 컸네, 그래 끼워주지, 하는 느낌이랄까. 이제 영화는 산업의 영역에 종속되었고, 그걸 예술로 보기는 어렵지 않나 싶다. 자본주의 시대에 돈이 되는 영화를 찍는 것이 영화인들에게 지상 최대의 과제가 된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고, 매혹시키고, 많은 이들로 하여금 젊은 날을 앞다투어 내던지게 만드는 이 요망한 영화의 알 수 없는 마력을 뿌리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누군가에게는 영화와 함께 그렇게 지나간 시간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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