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보석, 잉그리드 버그만의 초기 출연작 4편

1. 발푸르기스의 밤(Walpurgis Night, 1935), Gustaf Edgren 감독
2. 여자의 얼굴(A Woman’s Face, 1938), Gustaf Molander 감독
3. 간주곡(Intermezzo, 1939), Gregory Ratoff 감독
4. 6월의 밤(June Night, 1940), Per Lindberg 감독



  시작은 '발푸르기스의 밤(1935)'이었다. 'Foxtrot(2017)'과 'First Reformed(2017)'를 보고 무척 심드렁한 기분이 되었다. 'Foxtrot'은 작위적이었고, 'First Reformed'는 평범했다. 'First Reformed'는 폴 슈레이더가 이젠 영화를 그만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한가지 새롭게 발견한 것은 있었다. 에단 호크가 꽤 좋은 배우라는 사실. 명료한 발성과 세밀한 감정 표현이 인상적이었다. '죽은 시인의 사회(1989)'에서 그 맑고 앳된 얼굴의 배우는 이제 이마에 주름 선명한 중년이 되었다. 같이 나이먹어가는 느낌이 들어서 더 주의깊게 보았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매혹되지 않은 영화를 보고 리뷰를 쓰는 일은 이제 하고 싶지가 않다. 그냥 머리나 식히자며 본 것이 잉그리드 버그만의 스웨덴 시절 작품 '발푸르기스의 밤(1935)'이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버그만이 나오는 영화를 연달아 세 편을 보았다.

  '발푸르기스의 밤'을 찍을 때 버그만의 나이가 스물이었다. 무성 영화 시절을 연상케 하는 다른 배우들의 정형화된 연기들 속에서 버그만은 홀로 생동감을 내뿜는다. 마치 흑백 영화 속에 유일하게 칼라로 찍힌 배우처럼 보인다. 비서로 일하는 레나(잉그리드 버그만 분)는 자신의 상사 요한을 사랑하게 된다. 유부남인 요한은 아이 갖기를 거부하는 아내에게 상심한 상태다. 요한의 아내는 남편 몰래 중절 수술을 받는데, 병원이 당국의 단속에 걸리면서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인다. 거기에다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된 사기꾼은 신문사에 알리겠다고 돈을 요구하며 협박한다. 가정과 명성을 지키기 위해 사기꾼과 만난 요한은 뜻하지 않게 살인 사건에 말려드는데...

  유럽에서 전승되는 민속 축제인 발푸르기스의 밤은 봄의 생명력을 찬미하는 큰 축제이다. 영화는 스웨덴의 출산율 감소에 대한 언급에서부터 시작한다. 스웨덴 인구복지 협회에서 만든 것 같은 이 영화는 모성과 출산이 가지는 가치를 크게 부각시킨다. 요한의 아내는 인생을 즐기는 데에 아이가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한다. 영화 속에서 이 여성 캐릭터는 매우 이기적이고 속물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영화는 '낙태'를 한다는 것은 모성에 대한 거부이며, 그러한 여성은 바람직한 사회구성원이 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요한의 아내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죽음으로 댓가를 치룬다. 이후에 결혼한 레나가 아이를 요한에게 안겨주는 마지막 장면은 당시 스웨덴 사회가 지닌 여성과 가정에 대한 보수적 관점을 반영한다.

  '발푸르기스의 밤'에서 유부남을 사랑하게 된 젊은 여성의 내밀한 감정을 잘 보여주었던 버그만은 1936년에 Gustaf Molander 감독의 'Intermezzo'를 찍는다. 유부남 바이올리니스를 사랑하게 되는 피아니스트 역이었다. 이 영화는 버그만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된다. 헐리우드의 유명 제작자인 데이비드 셀즈닉이 'Intermezzo'에 나온 버그만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1939년, 셀즈닉은 버그만을 주연으로 같은 제목의 영화를 제작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에서 애쉴리 역을 연기했던 레슬리 하워드가 버그만의 상대역을 맡았다. '시민 케인(1941)'의 전설적인 촬영 감독 그레그 톨랜드가 담아낸 빼어난 화면은 버그만을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영화의 줄거리는 비교적 간명하다.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홀거는 딸의 피아노 선생인 아니타의 재능과 미모에 반한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연주 여행을 떠나지만, 아니타는 홀거가 아이들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알아챈다. 결국 아니타는 홀거를 떠나고, 남자는 가정으로 돌아간다. 이 영화에서 나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레슬리 하워드와 잉그리그 버그만의 연주 연기였다. 악기를 배운 사람들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연주 장면이 나오면 배우들이 어떻게 그 장면을 연기하는지 유심히 보게 된다. '간주곡'에서 레슬리 하워드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그런데 활쓰기와 지판을 짚는 법이 꽤 정확해서 좀 놀랐다. 그건 피아노를 치는 버그만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찾아보니, 두 배우에게 연주자들이 붙어서 특훈을 시켰던 모양이다. 물론 배우들이 실제 연주했던 것은 아니고, '연기'로 그럴듯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연기에도 상당한 기교와 노력이 필요한 것인데, 역시 뛰어난 배우들은 뭔가 확실히 달랐다.

  '간주곡'의 버그만은 연주 연기 뿐만 아니라 영어 대사도 잘 소화해 낸다. 제작자 셀즈닉은 버그만이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할까봐 걱정을 했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스크린을 압도하는 이 여배우의 미모와 재능은 일종의 계시처럼 보인다. 영화 '간주곡'은 스웨덴 여배우 버그만의 성공적인 헐리우드 진출작이 되었다. 향후 10년 동안 버그만은 헐리우드를 지배하는 아이콘으로 자리한다.

  '여자의 얼굴(A Woman’s Face, 1938)'은 버그만의 존재를 셀즈닉에게 알려준 1936년작 'Intermezzo'의 구스타프 몰란더 감독과 찍은 작품이다. 이 영화는 버그만의 필모그래피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버그만이 화상 흉터로 일그러진 여자 사기꾼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부유층의 불륜과 범죄를 캐내어 협박하는 사기꾼 안나는 뛰어난 외과의사를 만나 성형 수술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 한다. 그러나 과거의 그림자가 안나를 끈질기게 따라온다.

  틀니를 비롯해 특수분장을 하고 험악한 얼굴의 범죄자를 연기한 버그만의 모습은 매우 생소하게 보인다. 버그만이 연기한 안나는 그저 그런 사기꾼이 아니라 노회한 동료 범죄자들을 이끄는 강인한 보스이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버그만은 거칠고 높은 톤으로 발성한다. 이 여배우에게 스웨덴 시절의 영화들은 다양한 역할을 통해 연기력을 연마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6월의 밤(June Night, 1940)'은 이제 버그만의 연기 수련기가 끝났음을 알려주는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버그만은 자신이 가진 고유한 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시골 처녀 케르스틴은 연인의 총을 맞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다. 떠들썩한 재판을 거치면서 언론의 취재 대상이 된 케르스틴은 낯선 도시 스톡홀름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조용히 살려는 케르스틴의 바램은 찾아온 남자친구와 기자의 추적으로 깨어질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새롭게 시작된 사랑이 케르스틴을 장밋빛 미래로 이끈다.

  너무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이 여인이 변심한 것을 견딜 수 없는 남자는 총을 쏜다. 케르스틴을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그 매력에 빠져든다. 여성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들렀던 병원의 간호사는 살 곳을 찾는 케르스틴에게 자신의 거처로 안내한다. 심지어 케르스틴의 행방을 쫓는 기자마저 그 모습에 매혹되어 잊지 못한다. 그보다 더 심한 것은 말도 나누지 않고 얼굴 몇 번 본 것뿐인데도 이 아가씨와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간호사의 약혼자인 의사는 따뜻하고 헌신적인 연인을 내팽개치고 케르스틴과 떠나버린다...

  '6월의 밤'에서 버그만은 매혹 그 자체를 보여준다. 엉성한 내러티브와 몰입되지 않는 상대 배우들의 외모와 연기, 그 모든 것을 감내하고 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오직 '잉그리드 버그만'의 존재 때문이다. 정말이지 영화 4편을 보는 동안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른다. 버그만이 가진 강렬하고도 아름다운 아우라는 말 그대로 화면에 흘러 넘친다. 로베르토 로셀리니와의 떠들썩한 스캔들과 결국은 이혼으로 끝난 결혼 생활만 아니었다면, 우리는 버그만의 놀라운 영화들을 더 많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아쉬움을 스웨덴 시절에 찍었던 초창기 영화들은 충분히 달래준다. 숨겨진 보석, 그 영화들은 후대의 팬들을 위해 남겨둔 버그만의 깜짝 선물처럼 느껴진다. 



*사진 출처: torontofilmsociety.com  'Intermezzo(1939)'의 레슬리 하워드와 잉그리드 버그만


**사진 출처: criterion.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의식의 흐름에 따라 본 오늘의 영화들

The Grandmother(1970), 33분

Tribute: A Rockumentary(2001), 79분, 유튜브 검색 가능, 영어 자막.

Well Done, Now Sod Off(2000), 68분, 유튜브 검색 가능, 자막 없음.



1. 관성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The Grandmother(1970)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자신이 편하게 생각하고 좋아하는 것에 안주한다. 관성에 따르는 삶. 내가 다큐멘터리와 드라마 장르의 영화들을 주로 파고 보는 것도 그러하다. 문득 오늘은 좀 불편하게 생각되는 것을 봐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택한 영화는 데이비드 린치가 1970년에 만든 단편 'The Grandmother'. 33분 정도의 이 영화에는 린치 영감님의 각인이 쾅쾅 박혀있다. 실사와 애니메이션이 결합된 이 단편에 나오는 그림은 린치가 직접 그린 것이다. 미술을 전공한 린치가 이미지를 다루는 재능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초기 단편은 매우 흥미롭다.

  영화는 시작부터 범상치가 않다. 남자와 여자로 상징되는 두 개의 줄기가 뻗어나가면서 하나로 엉킨다. 그리고 숲속에서 기괴한 한쌍의 남녀가 나온다. 흰색의 분칠을 한 그들은 동물같은 소리를 낸다. 남자는 조커처럼 찢어진 입 모양을 하고 있다. 진짜 도입부부터 무시무시하지 않은가? 거기에다 음악도 으스스하다. 신경을 긁는듯한 음악은 영화 내내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한 아이가 등장한다. 남자는 아이를 때리고 학대한다.

  아이는 아버지의 학대를 피할 방법이 없다. 엄마조차도 아이에게 관심이 없고, 남편이 가하는 학대에도 무감각하다. 어느 날 아이는 씨앗 자루를 발견한다. 침대에 흙을 뿌려 씨앗을 심고 열심히 가꾼다. 기이한 형상으로 자라난 덩어리에서 마침내 무언가가 나온다. 영화 '에이리언(Alien, 1979)'에서 에이리언 새끼가 나오는 장면을 연상케 하는 그로테스크한 식물의 출산(?) 장면이 나온다. 변변찮은 당시의 특수효과로도 린치는 자신만의 고유한 공포를 생성해낸다. 아이는 그렇게 'grandmother'를 만난다.

  린치가 만들어낸 이 grandmother의 형상은 결코 따뜻함과는 거리가 멀다. 꿈에 볼까 무섭지만, 아이에게 할머니는 유일한 위로로 자리한다. 아이가 할머니와 나누는 교감의 장면도 괴상한데, 서로 얼굴을 찔러가며 장난을 친다. 할머니에게 애착하는 아이를 보면서 관객이 안도하는 것도 잠시, 곧 린치의 비틀린 세계에 진정한 평화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스스로 목이 졸려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는 할머니를 보며 아이는 절규한다.
 
  영화 내내 아이의 부모가 내는 소리는 개 짖는 소리를 비롯해 괴이한 단음들이다. 짐승같은 부모는 아이를 학대하고, 아이의 내면은 파괴적인 영향을 받는다. 부모를 죽이는 아이의 상상은 애니메이션으로 살벌하게 묘사된다. 'The Grandmother'가 보여주는 가족의 모습은 고통과 불행의 집합체 같다. 영화 도입부에 애니메이션으로 제시된 남녀간의 상징적 결합은 근원적 죄와 폭력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거기에서 태어난 아이는 그러한 부모의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 출구없는 비극의 세계를 린치는 초현실주의적인 이미지로 그려낸다.

  데이비드 린치에 대한 좋고 싫음을 떠나, 영화를 공부하는 이들이라면 그를 피해갈 수가 없다. 린치는 영화가 가진 고유한 특질, 즉 '이미지'의 언어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여전히 불편한 감독이지만, 이런 영화를 한 번 보고 나면 뭔가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 든다. 린치가 만들어내는 '매운맛' 이미지의 세계는 33분짜리 영화로도 관객을 충분히 흔들어 놓는다.


2. 밴드 사람들, 'Tribute: A Rockumentary(2001)'와 'Well Done, Now Sod Off(2000)'

  린치 영감님의 이미지 강타에 약간 얼얼해진 상태에서 그 다음으로 본 것은 Tribute 밴드에 대한 다큐이다. 'Tribute: A Rockumentary(2001)'는 유명 록 밴드를 열렬히 흠모해서 그들의 음악과 스타일을 그대로 모사하는 헌정 밴드 사람들을 담았다. Judas Priest, KISS, The Monkees, Queen을 따라 밴드를 결성한 일반인들이 있다. 직업도 다양하다. 고물상, 우편 배달부, 타이어 가게 주인... 그들은 생업에 종사하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 모두를 온전히 음악에 헌신한다.

  마치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의 미국 현실 버전 같은 이 다큐를 보고 있노라면 그저 짠한 생각만 든다. 결코 tribute band 활동을 하는 이들의 열정과 노력을 폄하하는 뜻에서 그런 것이 아니다. 너무나도 진지하고 열성적인 그들의 모습을 비웃을 수 있는 관객은 드물 것이다. 다만 우리 모두는 '재능이 깡패'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저 그런, 대단치 않은 재능을 가진 일반인이 프로의 세계에 근접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무익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시도하고 노력한다. 누군가는 '짝퉁 밴드'라고 냉소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밴드의 공연을 따라다니는 팬들도 있다. 열정이 밥을 먹여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tribute band 구성원들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다.   

  'Well Done, Now Sod Off(2000)'는 음악에 대한 열정에 정치적 운동을 결합한 영국 밴드 'Chumbawamba'의 20여년 세월을 간략하게 스케치한다. 이 밴드의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가? 그렇다면 인터넷에서 'Tubthumping'을 한 번 검색해 보라. 1997년에 밴드가 발표한 이 노래는 단번에 세계적인 대히트곡이 되었고, 스포츠 경기장의 응원가로 자리잡았다. 1982년에 결성되어 2012년에 해체되기까지 첨바왐바는 다채로운 활동을 보여주었다. 무정부주의자 밴드로 불릴 정도로 이들은 기존의 사회 질서와 제도에 반하는 정치적 메시지를 음악에 담아서 불렀다. 다큐는 초창기 그들의 공연 모습과 TV 출연 장면들, 그리고 제작 당시의 활동 모습을 담았다.

  "첨바왐바는 음악적으로도 별로였고, 정치 운동 면에서도 시원찮았어요."

  다큐에 출연한 음악 평론가는 그렇게 신랄하게 까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다큐 속 그들의 모습은 정치 운동을 하기 위해 음악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음악에 정치적 메시지를 곁들인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첨바왐바는 공산주의, 페미니즘, LGBT 운동, 평화 운동, 동물의 권익 보호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회적 관심사를 보여주었다. 이 다큐를 보다 보면, 한 펑크 밴드가 상업성과 사회적 대의 명분 사이에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나갔음을 알게 된다. 이제는 해체된, 그러나 독특하고 강렬한 이력을 가진 밴드의 역사 속에 격동의 현대사도 겹쳐져 있다. 이렇게 의식의 흐름에 따라 오늘 본 영화들에 대한 리뷰를 끝마친다.    



*사진 출처: criterionchannel.com

   
**사진 출처: eirewave.co.uk


***사진 출처: moviechat.org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어느 쓸쓸한 사랑의 풍경, Chilly Scenes of Winter(1979)

  영화는 한 남자가 눈오는 겨울 날, 퇴근 하는 차 안에서 1년 전을 회상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플래시백으로 제시되는 이 남자의 사랑 이야기는 2개의 결말을 가진 사연있는 영화가 되었다. Joan Micklin Silver 감독의 1979년작 'Chilly Scenes of Winter'는 Ann Beattie가 쓴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다. 영화가 처음 개봉되었을 때의 제목은 'Head over Heels'였고, 원작에 따른 해피 엔딩이었다. 그러나 제작사 United Artists가 1982년에 재개봉하면서 제목은 원작의 것으로 하면서, 정작 중요한 결말을 바꾸었다. 왜 그랬을까? 재개봉 될 당시는 레이건의 시대였다. 레이건이 집권한 1980년대는 우드스탁을 경험한 히피 세대들에게는 암울한 시절이었다. 소설가 스티븐 킹은 그 시절을 견디는 것이 '매우 수치스러웠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어쨌든 제작사가 입맛대로 재단한 쓸쓸한 결말은 이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 효과를 낳았다.

  솔트레이크 시티의 주정부 공무원인 찰스는 자료 보관 부서의 로라에게 첫눈에 반한다. 남편과 별거 중인 로라는 의붓딸에 대한 애정 때문에 결혼 생활을 끝내길 주저한다. 찰스는 로라를 운명의 사랑이라 믿고 열렬히 구애한다. 둘은 연인으로 좋은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로라는 자신에 대한 지나친 기대, 거기에다 일상의 모든 것을 함께 해야한다고 믿는 찰스의 집착에 점점 거리감을 느낀다. 로라가 남편에게 돌아가자, 그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찰스는 괴로워 한다. 우연히 로라가 결국 남편과 헤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찰스는 마지막으로 로라를 찾아가 청혼한다.

  조앤 미클린 실버는 헐리우드에서 여성 영화 감독으로 생존하는 것의 어려움을 토로한 바 있다. 'Chilly Scenes of Winter'는 로맨틱 코미디에 대한 이 여성 감독의 재능을 입증한다. 섬세한 감정 묘사가 돋보이는 이 영화는 조앤 미클린 실버가 1990년대의 로맨틱 코디미 붐을 이끌었던 노라 에프론의 선배임을 상기시킨다. 비선형적인 시간 구조 속에 주인공 찰스가 중간 중간 화면을 응시하면서 관객에게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는 장면은 우디 앨런의 유머와 닮았다. 찰스 역을 연기한 존 허드(John Heard)는 사랑의 감정과 집착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남자의 모습을 충실하게 보여준다.

  공무원이라는 안정된 직업에, 괜찮은 외모, 따뜻하고 관대한 품성을 지닌 찰스를 로라는 결국 거부한다. 왜 그랬을까? 사실 찰스가 로라에게 보여주는 사랑의 감정은 자신의 연인을 극도로 이상화시킨 데에서 기인한다. 로라는 찰스에게 완벽한 운명의 연인이다. 그러나 로라는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인 자신에 대한 그러한 기대가 버겁게 느껴진다. 그러므로 로라는 거기에서 도망치고 싶어한다. 그 기대가 언젠가는 깨질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찰스에게 어떤 면에서 연애는 답답한 삶에서의 출구였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주변 사람들에게 싫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착하고 내성적인 남자 찰스의 일상을 비춰준다. 찰스는 매일 상사가 아들의 성생활 문제를 지겹도록 상담하는 것을 참아내며, 실업자 친구 샘이 자신의 집에 염치없이 빌붙어 사는 것도 용인한다. 정서불안인 엄마는 주기적으로 자살 소동을 벌인다. 그 모든 것을 묵묵히 감당하는 찰스에게 로라와의 사랑은 유일한 삶의 활력소가 된다.

  사랑은 우리의 삶을 구원할 수 있을까? 인생의 문제들은 사랑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자신의 괴로움과 고통을 이상화된 사랑의 감정에 투사하는 것은 일종의 도피일 수도 있다. 로라에 대한 찰스의 사랑은 실패로 끝난다. 원래의 해피 엔딩에서 수정된 결말은 레이건 시대의 히피 세대가 느끼는 좌절과도 맞닿아 있다. 끓어오르는 열정과 이상만으로 무언가를 얻어낼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은 끝났다. 이 서늘하고도 쓸쓸한 사랑의 이야기가 솔트레이크의 겨울 풍경 속에 펼쳐진다.




2. 중년 여성은 무엇으로 사는가, Happy Hour(2015)

  하마구치 류스케의 'Happy Hour(2015)를 보고 나는 로베르트 무질의 단편집 '세 여인'의 첫 구절을 떠올렸다. '살다 보면 그냥 이대로 갈까, 아니면 되돌아 가야할까 고민하는 때가 있다. 그 시기에 인간은 불행해지기 쉽다.' 어쩌면 중년은 그런 시기에 속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러닝타임이 무려 5시간 17분인 이 영화에는 4명의 중년 여성이 나온다. 고베에 살고 있는 준과 사쿠라코, 후미와 아카리는 친한 친구들로 우정이 주는 위안으로 중년의 삶을 견딘다. 그러나 견고한 것 같았던 우정은 시간의 흐름 속에 균열을 일으키고, 그들 각자의 삶에도 위기가 찾아온다. 존 카사베츠의 'Husbands(1970)'를 인상깊게 보았다는 이 감독은 그 영화와 기묘한 짝을 이루는 '아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5시간이 넘는 어마무시한 러닝타임을 어떻게 견디고 볼 것인가, 를 미리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영화는 시간의 순서에 따른 선형적 내러티브의 구조를 따라간다. 이토록 영화가 길어진 것에 대해 하마구치 류스케는 영화를 다 찍고 보니, 도저히 줄일 수가 없어서 그랬다고 인터뷰에서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어느 정도는 그러한 감독의 의도에 동의하게 된다. 4명의 주인공들이 참여하게 되는 워크숍 강의, 이혼 법정의 재판 과정, 작가의 낭독회 같은 장면들이 꽤나 긴 시간을 잡아먹는다. 솔직히 지루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이지만, 그것이 영화 속 인물들의 감정의 변화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줄이거나 빼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간호사로 일하는 아카리는 환자의 생명과 직결되는 직업에서 오는 스트레스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 강인함과 단호함으로 무장하고 있지만, 일상에서 결코 긴장을 풀지 못하는 이 여성은 이혼 후 그 어떤 연애도 거부한다. 과학자 남편과 잘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던 준은 남편의 냉담함이 자신을 죽이고 있다면서 이혼 소송 중이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사쿠라코는 일만을 중시하는 남편,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을 두고 있다. 4명 가운데 가장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후미는 출판사 편집자인 남편과 무미건조한 결혼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비영리 문화 공간을 운영하고 있는 후미는 독특한 워크숍에 친구들을 초대한다. 의자를 다리 한 부분으로 세우는 재주가 있는 강사 우카이는 타인과의 소통에 있어서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놀랍지만 어두운 면이 있는 구루(guru)처럼 우카이는 결코 속내를 알 수 없는 인물로 4명의 여성들의 삶과 이어져 영화 전체를 휘젓는다. 나는 그를 '선동자(agitator)'로 부르고 싶다. 그 워크숍 이후로 주인공들의 삶은 위태위태하게 유지해온 균형들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사실 영화의 줄거리로만 요약해서 보여준다면 1시간 반 정도에서 2시간 이내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마구치 류스케는 인물들의 감정 변화를 보여주기 위해 자신이 설계한 내러티브를 순차적으로 풀어놓는다. 마치 연기과의 움직임 수업 같은 워크숍은 4명의 친구들이 현재의 삶에 대해 돌아보게 만든다. 우카이는 힘의 균형에 대해 말한다. '해피 아워'의 아내들(이혼녀 아카리도 한때 누군가의 아내였다)의 삶에는 똑바로 설 수 있는 중심의 힘이 없다.

  투철한 직업의식으로 환자들을 보살피는 아카리에게는 오직 강인함만이 있고 부드러움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므로 아카리의 환자는 아카리가 갖지 못한 다른 간호사의 부드러움에 대해 언급한다. 사쿠라코는 집에 오면 명령조로 밥과 차를 내오라고 말하는 가부장적인 남편과 섹스리스로 산지 오래되었다. 후미는 편집자 남편이 젊고 예쁜 여자 작가에게 마음을 빼앗겼다는 것을 알게 된다. 준은 결혼을 불변의 계약으로 받아들이는 고루한 남편을 피해 잠적한다. 영화는 그렇게 중년 여성들의 삶의 구부러진 부분을 드러낸다. 이대로 계속 살아도 괜찮은 걸까, 그들은 모두 고민에 빠진다.

  워크숍에서 우카이가 한쪽 부분으로만 세운 의자를 똑같이 따라해보려는 수강생들은 모두 실패한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삶의 균형을 잃은 4명의 여성들의 모습을 차례로 보여준다. 준은 지하철 승강장에서 갑자기 쓰러지며, 아카리는 계단에서 넘어져 발목이 부러진다. 사쿠라코는 식탁에서 죽은 것처럼 엎드려 자고 있다가 눈을 뜬다. 남편에게 이혼을 선언한 후미는 거실 바닥에 엎어지듯 쓰러진다. 이러한 장면들에서 보여지는 신체의 외연적 상태는 중년의 내적 위기에 대한 명백한 은유이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해피 아워'의 아내들에게 쉽사리 자유와 평화를 선물하지 않는다. 중년의 나이는 마치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인생의 구멍 같은 것이며, 그것은 점점 더 커지며 우리 자신을 괴롭게 만든다. 유일한 해결책이 있다면 그 구멍으로 시간과 고통이 흘러가도록 놔두는 것이다. 잃어버린 힘의 균형은 다시 찾을 수 없다. 우카이는 의자를 세우는 방법은 힘이 느껴지지 않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힘을 빼는 것이 중년의 위기를 넘기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된다. 그러므로 부러진 다리로 우카이와 클럽에 갔던 아카리는 여러 사람들에 의해 공중에 들어올려진 순간에 자유를 느낀다. 병원으로 복귀한 아카리는 그동안 혹독하게 대했던 후배에게 이전과는 달리 부드럽게 말한다.

  5시간이 넘는 '해피 아워'는 하마구치 류스케가 탐구한 중년의 내면에 대한 성찰이라고 할 수 있다. 긴 여정의 내러티브는 이 감독이 생각하는 연출론의 다층적 구조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물론 마냥 즐겁기만 한 시간은 아니다. 지루함과 뻣뻣함이 공존하는 이 영화는 그럼에도 끝까지 길을 잃지 않는 집중력을 갖고 있다. '해피 아워'는 효율성 대신에 과정의 세밀함을 택했고, 그것은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하마구치 류스케가 담아낸 4명의 '아내들'의 이야기는 그런 면에서 존 카사베츠의 'Husbands(1970)'와는 다른 진정성을 보여준다.      



*사진 출처: mubi.com



**사진 출처: reelgood.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세 편의 영화 리뷰: Husbands(1970), 'Melancholia(2011)', National Gallery(2014)


1. 난파선 같은 영화, Husbands(1970)

  '우연과 상상(Wheel of Fortune and Fantasy, 2021)'의 하마구치 류스케의 인터뷰를 읽다가 그가 좋다고 생각하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존 카사베츠의 'Husbands(1970)'였다. 사실 그 영화는 전에 보려고 하다가 그다지 평이 좋지 않아서 미뤄둔 영화였다. 도대체 영화의 어떤 점을 하마구치 류스케는 좋게 평가한 것일까 궁금해졌다. 그렇게 해서 본 'Husbands'는 정말이지 영화 보기의 '극한 체험'이 무엇인지를 실감하게 해주었다.

  거스(존 카사베츠 분), 해리(벤 가자라 분), 아치(피터 포크 분)는 절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장례식에 모인다. 뉴욕 교외에 살고 있으며, 전문직에 종사하는 부유한 중년의 세 남자는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자신들의 현재를 돌아본다. 술집에서의 폭음, 길거리의 치기어린 달리기 경주, 그리고 체육관의 농구 연습. 그렇게 같이 시간을 보내던 그들은 즉흥적으로 런던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여자들과 짧은 유흥을 즐긴다. 거스와 아치는 뉴욕으로 돌아오지만 해리는 런던에 남는다.  

  러닝 타임 2시간 22분 동안 이 영화는 끊임없이 관객의 인내심을 시험한다. 장례식이 끝난 후, 세 친구는 술집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신다. 그들은 술자리에 있던 중년 여인을 집요하게 희롱하고 모욕을 준다. 엄청나게 퍼마신 이들은 화장실에서 구토를 하고 거기에서 지리한 대화를 나눈다. 그 화장실 장면이 무려 20여분에 달한다. 도대체 이 영화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중년 남자의 공허한 내면과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파괴적인 몸부림에 대한 묘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영화가 미국에서 개봉 당시 폴린 카엘과 같은 당대의 평론가에게 혹평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카사베츠는 관객들을 중년 남자의 내면에 자리한 지하 하수구로 질질 끌고 간다. 그것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영화를 익스트림 스포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미덕을 찾는 일은 나에게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정말이지 끔찍한 재난과도 같은 영화였다. 이 영화를 보고 무려 이틀 동안 난파선의 승객이 된 듯한 비참한 기분을 느꼈다. 


2. 요란한 빈 수레, 'Melancholia(2011)'

  2011년을 휩쓸었던 영화, 아마도 라스 폰 트리에의 전성기를 마감하는 작품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해 칸 영화제에서 폭탄 같은 발언(나는 히틀러를 이해하고 동정한다)으로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던 이 감독은 허세 쩌는 예술 영화의 끝판을 보여준다. 나에게 이 감독은 도그마 선언(Dogma 95)으로 질기게 우려먹은, 그로 인해 지나치게 고평가된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 지긋지긋한 핸드 헬드는 영화 내내 울렁증을 일으킨다.

  영화는 지구에 충돌하는 행성 멜랑콜리아를 두고 저스틴과 클레어 자매에게 일어나는 일을 담는다. 1부는 저스틴의 시점에서, 2부는 클레어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딥 임팩트(Deep Impact, 1998)'의 고상한 유럽 예술 영화 버전처럼 보이는 이 영화는 포장만 그럴 듯하다. 서양미술사의 주요한 회화 작품을 명백하게 차용한 장면들(영화 포스터에 쓰인 John Everett Millais의 그림 '오필리아'를 비롯해) 별 의미도 없는 알레고리, 영화 전편을 흐르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음악이 비장함을 더할 뿐이다.

  언니 클레어가 사는 고풍스러운 성채에서의 결혼식, 저스틴은 인생의 정점에 서있다. 잘 생기고 애정 넘치는 멋진 남편이 옆에 서 있고, 결혼식장의 상사는 저스틴의 승진을 선언한다. 그러나 저스틴의 내면을 채우는 알 수 없는 우울감은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든다. 결혼은 무효가 되며, 직장에서는 잘리고, 자신은 심각한 우울증 상태에 빠진다. 1부에서 흥미있는 장면은 감정이 급변한 저스틴이 서재의 서가에 진열된 화첩들을 바꾸어 놓는 부분이다. 20세기의 추상표현주의 화가 말레비치(Kazimir Malevich)의 그림은 16세기 풍속화의 대가 브뤼겔(Pieter Bruegel the Elder)의 그림으로 바뀐다.

  라스 폰 트리에는 행성의 충돌로 결국 절멸될 지구의 운명은 고도화된 문명과 인간의 탐욕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1부에서 저스틴의 모든 것이 망가지고 무너진다. 화첩의 20세기는 16세기로 되돌아갔다. 그러더니 2부에서는 나무로 얼기설기 세운 티피(tepee,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원뿔형 천막)가 등장한다. 그것은 저스틴이 임박한 종말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이다. 지구 최후의 날, 저스틴은 클레어에게 테라스에서 와인을 마시거나,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듣는 것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2부의 처음에 우울증으로 거의 죽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저스틴은 원시성에 근접하면서 활기를 되찾는다. 잼을 손으로 퍼먹고, 나체로 한밤중에 달빛 아래 풀밭에 누워 있기도 한다. 영화는 오늘날의 사람들 내면을 병들게 하는 것이 현대성(modernity)이라고 부르짖는 것 같다. 겉만 번지르르한, 요란한 빈 수레 같은 이 영화는 모호함을 예술성으로 포장한다.


3. 거장의 지루한 설교, National Gallery(2014)

  다큐멘터리의 거장 프레데릭 와이즈먼의 2014년작 다큐 'National Gallery(2014)'는 러닝 타임이 무려 3시간에 달한다. 다큐는 미술사의 보고인 런던 내셔널 갤러리를 속속들이 들여다 본다. 와이즈먼은 관객들을 박물관 이곳저곳으로 안내한다. 그림이 걸려있는 전시실부터 관람객들은 볼 수 없는 직원들의 사무실과 복원 작업실, 다양한 강좌가 이루어지는 세미나실의 풍경이 펼쳐진다. 이 다큐에서 가장 말을 많이 하는 이들은 박물관 사람들이다. 직원들은 어떻게 하면 많은 관객들을 오게 할 수 있는지 박물관의 상업성에 대해 고민하며, 예산 삭감에 따른 대책을 지루하게 토론한다. 도슨트들의 유창한 설명에 관람객들은 압도당해 그저 조용히 들을 뿐이다. 전시실 내부를 청소하는 청소부들, 인테리어 작업을 하는 인부들은 비춰지기만 할 뿐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와이즈먼은 거대한 박물관이 어떻게 기능하고 작동하는지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한 것처럼 보인다. 일반 관객들이 비오는 날 긴긴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는 장면이 있는 반면, 박물관 측에서 특별히 초청한 귀빈들은 비싼 음식과 술이 대접되는 전시실에서 박물관장의 설명을 듣는다. 그림의 복원 작업은 다양한 학계 인사들의 의견을 취합해서 신중하게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시각 장애인들의 그림 감상을 돕는 수업과 일반인 대상의 크로키 수업도 있다. 그린피스 운동가들이 기습적으로 박물관 외벽에 시위 걸개를 내거는 장면도 포착된다.

  '내셔널 갤러리'는 과거의 약탈과 착취의 그림자를 가진 박물관이 어떻게 현대 사회에서 생존을 모색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공공의 이익과 학술적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 그곳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한다. 그럼에도 그 공간에는 계층적 위화감이 내재되어 있으며, 자본과 상업성의 압박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노대가는 느리고 진중한 호흡으로 자신의 탐험 경로를 철저히 복기한다. 친절한 내레이션도 듣기 좋은 음악도 없지만, 이 다큐는 우직한 진정성으로 관객을 붙잡는다. 그러나 거장의 스타일은 지루하고 구식이다. 그나마 3시간을 견딜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다큐에 등장하는 서양 미술사의 걸작들이다. 렘브란트, 루벤스, 홀바인, 카라바지오, 베르메르, 고야, 고흐... 다큐에 촘촘히 박힌 위대한 화가들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거장의 긴 설교는 충분히 견딜 만한 것이 된다.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사진 출처: filmquarterly.org


***사진 출처: amanecemetropolis.net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러시아 영화를 보고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Mosfilm 홈페이지가 이제는 꽤 정겹게 느껴진다. 그런데 최근 들어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좋은 러시아 영화인데 막상 보려고 하면 영어 자막이 지원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영화들에는 오직 러시아어 자막만 지원된다. 그럴 때 아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막없이 그냥 영화를 본 다음에 나중에 자막을 따로 구해서 살펴볼 수도 있다. 고맙게도 러시아어로 된 영상물의 자막을 제공하는 사이트가 있다. 이 경우에는 여러 단계의 복잡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1. 러시아어 자막 사이트에서 영화 제목을 검색한다. 이것도 러시아어로만 검색이 가능하다.
2. 결과로 뜬 목록에서 정확한 제목을 찾아낸다. 그리고 자막을 다운받는다.
3. 자막을 다운받아서 메모장에서 열면 깨진 문자의 외계어만이 보인다. 그럴 땐 Microsoft word를 연결 프로그램으로 지정한다.
4. Microsoft word에서 키릴 문자로 변환시켜준다.
5. 구글 번역기의 도움을 받는다.

  이렇게 쓰다 보니 뭔가 한숨이 나온다. 그동안 나름대로 러시아 영화를 열심히 보았지만, 내가 알아듣는 러시아어는 세 가지이다. 스파시바(고마워요 Thank you), 다(네 Yes), 가꼬이(무엇 what). 아무리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이 커도, 생판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의 영화를 자막없이 보는 것은 고역이다. 그나마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는 영어와 일어의 경우는 자막이 없더라도 심한 답답함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아주 오래전에도 자막없이 러시아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경험이 있었다.

  홍콩 무협 영화를 열심히 보던 때가 있었다. Shaw Brothers사의 무협 영화들에는 종종 자막이 없는 것들이 있었다. 그래도 그냥 영화를 보았다. 무협 영화의 이야기 구조가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지만 약간의 답답함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중에는 나 혼자 대사를 만들어 읊어가면서(!) 영화를 보는 경지에 이르렀다. 지금처럼 자막 제공 사이트가 있지도 않던 시절이었다.

  어제 '터닝 포인트(Поворот, Turning Point, 1978)'란 소련 시절 영화를 자막 없이 보았다. 나중에 자막을 구해서 대충 무슨 내용인지 이해는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영화를 제대로 보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오늘은 궁리 끝에 모스 필름 홈페이지를 뒤적거려서 대표 이메일 주소를 찾아냈다. 그리고 메일을 보냈다. 영어 자막이 제공되는 영화들을 더 많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는 편지 글을 구글 번역기의 도움을 빌어서 작성했다. 번역된 러시아어 글을 다시 우리말로 변환해 보니 어색하기 짝이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모스 필름 영화사에 한국어 능통자가 있을 수도 있으니 한글 편지글도 함께 붙여서 썼다. 운이 좋다면, 모스 필름의 영어 자막 제작팀이 열심히 일한 결과물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ru.wikipedia.org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