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안 마이어 : 나는 카메라다 비비안 마이어 시리즈
비비안 마이어 지음, 박여진 옮김 / 윌북 / 201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5년 동안 내 책장 안에서 잠자고 있었다. 동생이 사서 보내준 것인데 한번 쓰윽 보고 그냥 넣어 두었다. 책 밑에 찍힌 서점의 붉은 도장의 날짜가 2015년 4월. 그렇게 5년이란 시간이 흘러간 뒤에야 다시 꺼내 보았다.


  평생을 가정부와 유모로 여러 집들을 전전했던 비비안 마이어는 자신의 전 생애에 걸쳐서 엄청나게 많은 사진을 찍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없었던 마이어는 죽은 후에서야 아주 우연한 기회에 그 사진들이 대중에게 선보이게 되었다. 수집가 존 말루프가 마이어가 남기고 간 대부분의 네거티브 필름과 사진들을 경매를 통해서 소장하고 있다. 그런데 마이어의 사진이 가진 진가가 알려지면서 저작권을 둘러싼 법적 다툼이 일어났다. 소송을 제기한 변호사는 말루프는 혈족이 아니므로 유산의 정당한 소유자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혈통 찾기 전문가, 족보 탐정들이 동원되어서 유럽에 있는 혈연들을 찾아냈고, 그 진흙탕 소송은 2021년 현재 아직도 진행 중이다.


  책에 실린 마이어의 사진을 본 내 느낌은 그렇다. 작가라는 호칭을 붙이려면, 그래도 나름의 독자적인 자기 세계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마이어에게는 그런 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마이어는 거리의 사진사는 될 수 있어도, 사진 작가라고 부르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마이어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그 시대의 유명한 사진 작가들 여럿이 떠오른다. 로버트 프랭크의 '아메리칸'이 보여줬던 미국의 시대적 초상, 다이앤 아버스가 탐험했던 기괴한 인물들과 비주류의 세계, 그리고 빌 커닝햄의 패션 스트리트도 겹쳐서 보인다. 마이어의 사진들은 무어라 규정하기 어려운 온갖 잡동사니들의 총집합 같다. 


  마이어는 정말로 평생에 걸쳐서 대단히 많은 사진을 찍었고, 어쩌면 자신의 생계를 위해 가정부와 유모로 일했던 시간 빼고 나머지를 사진기와 함께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일종의 저장 강박증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도 같다. 자신이 찍은 사진과 필름, 그리고 그 밖의 많은 영수증과 서류도 마이어의 수집 목록에 들어 있었고, 그것이 창고 몇 개의 분량이었다고 한다. 마이어의 사진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것도 사후에 창고 보관비를 내지못해서 경매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이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수집하고 쌓아놓기만 했을 뿐, 마이어는 정리를 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적어도 생전에 유언장이라던가, 말년에 자신의 물품과 관련해서 무언가 법적인 조치라도 취했다면 지금의 지저분한 소송은 없었을 것이다. 마이어의 사진들은 그 소송 지옥에 갇혀서 대중들과 만날 기회를 기약없이 기다리는 중이다. 카메라와 함께 평생을 보내면서 삶의 무게를 지탱했던 이가 남긴 사진이라도 빨리 빛을 볼 수 있기만을 바랄 밖에.


  마이어의 사진들 가운데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사진기를 들고 찍은 자신의 많은 초상 사진이다. 그 사진들은 사진기가 마이어 자신의 생의 근원임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진을 찍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서, 사진기를 들고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세상과 사람들을 담아낸 사람. 이 책의 제목 '나는 카메라다'는 마이어를 나타내는 가장 명징한 명제이기도 하다.


  따뜻한 가족이 있는 가정, 안정된 직업, 평온한 일상, 이런 것들은 모두 마이어가 갖지 못한 것들이었다. 오직 '카메라'만이 마이어가 가진 전부였고, 그 카메라가 마이어의 인생 그 자체였다. 그렇게라도 버거웠던 삶을 견딜 수 있었다면 그것도 어떤 면에서는 행운이고 축복일지 모른다. 온 생애를 걸쳐 평범한 행복에는 도달할 수 없었지만, 마이어는 자신이 남긴 사진을 통해 특별한 삶을 지속할 토대를 마련했다. 마이어의 사진을 만나는 이들은 마이어를 어떤 식으로든 기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진들에 빛나는 재능과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음에도 거기에는 번득이는 열정과 도저한 그 무언가가 자리하고 있다. 이 책은 그런 마이어의 사진 세계로 가는 작은 입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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