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부터 EBS 클래스e에서는 노문학자 석영중 선생이 강의하는 '도스토옙스키와 여행을'을 방영하고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창작의 근원이 되었던 도시들과 여행지, 그곳에서 쓴 작품들에 대해서 들려준다. 먼저 '죄와 벌'이 다루어졌고, 오늘로 '백치'가 끝났다. '죄와 벌'은 읽은 책이라 이해가 쉬웠는데, '백치'는 오래 전에 도입부만 읽다가 그만 둔 소설이었다. 마침 자료 화면으로 나오는 영화가 1958년에 제작된 동명의 영화라서 찾아서 보았다. 꽤 두꺼운 이 소설에 대한 대략적인 이해라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 영화, 소설의 중간 부분에서 끝나버린다...

  원래 영화 '백치'는 2편으로 기획되었는데, 배우들의 일정이나 여러 문제 때문에 감독 이반 피리예프가 후속편을 찍는 것을 포기했다. 국영 영화사 Mosfilm에서도 별다른 의지를 갖고 있지 않았던 모양인지 영화는 결국 미완성으로 남았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뒷부분이 궁금하면 소설을 읽든가, 아니면 나중에 TV 시리즈로 제작된 것을 찾아서 보아야 한다.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들을 볼 때 거는 기대는 이런 것이다. 길고 두꺼운 소설을 짧은 시간에 이해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소설 속의 인물과 사건을 재현된 영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경우 그런 기대들은 완벽하게 충족되기 어렵다. 아니, 완벽은 커녕 소설과 영화 사이의 괴리를 절실히 느끼는 데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소설을 읽지 않은 관객이 '백치'를 영화로 본다고 해서 원작 소설을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까? 도스토옙스키의 경우, 그의 복잡하고 긴 소설에는 작가의 사상을 대변하는 인물들의 열변과 생각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인물들과 그들이 만들어낸 사건들이 주가 된 영화로 그의 소설에 접근하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생각도 든다. 그 때문에 나는 영화 '백치'에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소설의 영화화는 선택과 집중이 이루어지며, 그 결과물은 소설의 본질과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마거릿 미첼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빅터 플레밍 감독의 1939년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한번 보자. 영화는 남북 전쟁을 배경으로 스칼렛 오하라와 레트 버틀러, 애쉴리 윌크스의 애증에 찬 세월을 보여주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원작 소설에서 묘사된 남북 전쟁 전의 남부의 상황, 전쟁의 발발, 전후의 재건에 이르는 세부적 역사는 생략되어 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영화로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소설을 읽지 않은 관객이 이 영화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멋진 배우들과 화려한 세트, 유려한 영화 음악(이 영화의 타라의 테마는 유명하다)이 전부다.

  이것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데이비드 린 감독의 '닥터 지바고(1965)'는 소설을 영화로 만든 작품의 모범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원작 소설이 가진 깊은 사유의 맥락과 맞닿아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러시아 혁명에 이은 내전, 공산 정권의 수립이라는 역사적 상황이 주인공들의 상황과 맞물려 펼쳐지는데, 영화는 그런 배경을 과감하게 생략했다. 심지어 인물들에 대한 묘사도 축약되어 있다. 영화 초반부에 라라와 코마로프스키의 내연 관계가 애매하게 제시되는 것과 달리, 소설은 라라와 모친과의 사이에서 그가 가진 영향력을 잘 알 수 있다. 적군과 백군으로 대립해서 싸운 러시아 내전의 상황이라던가 지바고가 쓴 시들도 영화는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오마 샤리프와 줄리 크리스티, 알렉 기네스가 펼치는 명연기, 눈부신 설원의 풍경, 그리고 라라의 테마로 유명한 모리스 자르의 음악이 영화 '닥터 지바고'에 있다.

  결국 그런 영화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문학과 영화의 근원적 괴리이다. 그런 면에서 소설, 또는 희곡을 영화화한 작품들에서 원작 텍스트에 대한 이해없이 영화를 비평하는 행위는 무모한 것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내가 소설 '백치'를 읽지 않고 영화 '백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화적인 부분에 대해서이다. 주로 풀쇼트와 미디엄 쇼트로 제시된, 인물들의 대사와 표정 연기가 주가 되는 드라마라고 밖에는 말할 것이 없다.


  우리가 흔히 저지르기 쉬운 실수는 원작 텍스트와 따로 분리된 '영화'라는 텍스트가 완벽한 형태로 존재하며, 그것을 가지고 비평할 수 있다고 믿는 오만에서 기인한다. 문학 작품을 영화화한 경우, 적어도 번역된 저작물이 있다면 그걸 읽어 보고 나서 영화에 대해 분석하는 것이 비평의 기본 자세라는 생각을 늘 한다. 어떤 면에서 1958년작 영화 '백치'는 문학과 영화의 관계에 대한 은유적 텍스트인지도 모른다. 결코 만들어지지 못한 후속편은 영화가 소설의 절반 정도만을 이해할 수 있는, 비어있고 상상의 가능성을 남기는 다른 차원의 결과물임을 상기시키는듯 하다.  



*사진 출처: ru.kinorium.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영화는 중력을 무시한 쇼트로부터 시작한다. 허공을 가로지르는 카메라가 풍경을 훑어 내려간다. 소년은 꿈에서 깨어 현실로 돌아온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첫 장편 영화 '이반의 어린 시절(Ivan's Childhood, 1962)'의 도입부이다. 원래 이 영화는 찍기로 한 감독이 따로 있었다. 러시아 국영 영화사 Mosfilm은 소속 신인 감독 에두아드르 아발로프에게 영화를 배정했다. 그런데 이 감독의 초반 촬영분을 보고서 도저히 그대로 진행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타르코프스키는 대안으로 급조된 감독이었다. 기존의 촬영분은 모두 폐기되었다. 29살의 타르코프스키는 그렇게 자신의 첫 영화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 영화에는 이후 그의 영화들에 등장하는 여러 중요한 요소들, 어쩌면 그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단서들이 짜임새있게 배치되어 있다.

  영화의 배경은 2차 대전, 독일과 접전을 벌이는 국경 지대이다. 폭격으로 폐허가 된 교회는 군 주둔지가 되었다. 갈체프 중위는 피폐한 몰골의 소년을 데려왔다는 사병의 보고를 듣는다. 소년은 무조건 본부와의 교신을 요구한다. 갈체프는 곧 이 소년의 이름이 이반 본다레프이며, 정찰 척후병으로 복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온 이반을 본부의 콜린 대위는 후방의 군사학교로 보내려고 하지만, 소년은 그 결정을 거부한다. 독일군에 의해 가족이 희생된 이 소년은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다. 이반은 갈체프와 함께 지내면서 조금씩 마음을 터놓게 된다. 타르코프스키의 '잠입자(Stalker, 1979)'에서 영화를 지배하던 물 떨어지는 소리를 여기서도 들을 수 있다. 이반이 머무는 갈체프의 방에서 끊임없이 들리는 물방울 소리, 그 소리와 함께 관객은 이반이 거울 속에 비친 갈체프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보게 된다. 물 소리, 거울 덕후인 타르코프스키의 시작은 이러했다.

  '물'에 대한 타르코프스키의 사랑은 강박적으로 보일 정도이다. 이반이 꿈을 꾸는 장면에서 보이는 우물가에는 어머니가 서있다. 이 영화 속에서 현실과 꿈을 이어주는 매개체로서의 물의 의미는 너무도 다채로워서 어느 하나의 의미로 규정할 수 없다. 이반이 꾸는 또 다른 꿈에는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맞는 이반과 어린 여동생이 나온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 보여지는 회상의 장면에서 이반은 얕은 해변가를 여동생과 함께 가로질러 간다. 관객은 이제 이 감독의 '물 사랑'을 그의 전 작품에서 목격하게 될 터였다.

  타르코프스키가 그토록 좋아하는 '그림' 사랑도 엿볼 수 있다. 갈체프는 이반이 심심할까봐 자신이 독일군에게서 압수한 그림책들을 보여준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목판 연작 '요한묵시록'의 그림들이다. 지옥을 연상케 하는 무시무시한 그림들은 이반에게 자신이 겪은 전쟁의 참혹한 기억을 상기시킨다. 폐허가 된 교회의 십자가와 벽에 보이는 이콘(ikon)들은 타르코프스키가 1966년에 만들게 될 '안드레이 류블료프(Andrey Rublyov)'의 예고편처럼 보인다. 이런 그림에 대한 타르코프스키의 애정은 사실 그가 겪은 전쟁의 경험에서 기인했다. 전쟁 시기, 그와 가족은 모스크바의 빈집들을 전전하며 지냈다. 버려진 부유한 주택가에는 엄청나게 많은 화첩들이 있었고, 그 그림들이 타르코프스키의 정신 세계를 채웠다.

  물과 함께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에서 보이는 수직 이미지가 '이반의 어린 시절'에서는 콜린과 간호 장교 마샤의 대화장면에서 등장한다. 빽빽하게 들어찬 자작나무들의 숲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속내를 들여다 본다. 비껴가는 대답들과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사랑의 감정은 쉽게 포착되지 않는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 명확하게 보이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 감독은 자신이 만드는 영화 안에서 될 수 있는대로 의미를 숨기는 것을 영화 철학으로 삼았다. 그 숨겨진 의미들은 그가 보여주는 이미지들 안에 자리한다. 영화의 이미지로 시를 써내려가는 시인이자 영화 감독의 탄생은 바로 이 영화에서부터이다.

  '이반의 어린 시절'은 전쟁의 참혹함을 그려내고 있음에도 관객은 슬픔의 감정과 함께 기이한 평온함과 마주하게 된다. 아마도 후자의 감정은 전쟁 이전의 이반의 기억들이 펼쳐지는 꿈의 이미지들에서 유래하는 잔향일 것이다. 시인이자 번역가였던 부친의 재능을 물려받은 타르코프스키는 문장이 아닌 이미지의 시들로 자신의 생을 채워나갔다. '이반의 어린 시절'은 그런 그의 예술적 첫 걸음인 동시에 영화사적으로도 매우 의미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업들을 통해 이제 영화는 이미지로 구현되는 정교한 예술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동시대를 비롯해 후대의 많은 영화인들이 그의 영화에서 영감을 받았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반의 어린 시절'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해변가의 고목은 그가 만들어갈 새로운 영화사적 흐름에 대한 이정표처럼 보인다.   



*사진 출처: zagonka.ru  이반 역의 니콜라이 부를리야예프. 타르코프스키는 1973년의 회고록에서 니콜라이의 연기가 너무 가식적이고 과장되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썼다. 그러나 자신의 첫 영화가 가지는 의미를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사진 출처: levelvan.ru  '이반의 어린 시절' 해변가 촬영 장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영화에도 유통기한이라는 것이 있을까? 우리가 '명화'라고 부르는 영화들은 아마도 유통기한이라는 것이 없거나, 있다 하더라도 매번 새롭게 갱신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명화와는 반대로 잊혀지는 영화도 있다. 작품성이 없어서 그런 것도 있고, 원래 가진 가치보다 저평가된 경우도 있다. 때론 세월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관객들과 평론가들에게 잊혀지는 영화들을 보면서 그 유통기한을 가늠해 보곤 한다. 피터 보그다노비치의 1992년작 '막을 올려라(Noises Off)'도 어쩌면 그렇게 잊혀지는 영화인지 모르겠다. 1982년에 영국의 작가 마이클 프레인이 쓴 동명의 희곡을 각색해서 만든 이 영화는 개봉 당시에 비평가들의 외면을 받았다. 피터 보그다노비치는 '라스트 픽처 쇼(The Last Picture Show, 1971)', '페이퍼 문(Paper Moon, 1973)'으로 1970년대 미국 영화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가 만든 영화들은 흥행에 연달아 실패하면서 서서히 잊혀져 갔다. 이 영화 '막을 올려라'도 그 쓸쓸한 영화 경력의 후반기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렇다면 '막을 올려라'는 정말 별 볼 일 없는 영화인가?

  연극 연출가 로이드(마이클 케인 분)는 'Nothing On'이라는 연극 상연을 준비하는 중이다. 촉박한 시한 때문에 테크니컬 리허설(음향과 조명, 배우들의 동선을 점검하는 리허설)을 생략하고 곧바로 드레스 리허설(공연 전 최종 리허설)에 들어간 배우들의 공연 준비는 삐걱거린다. 여배우 도티는 중요한 소품인 정어리(sardine,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읊어지는 단어다)와 신문을 자꾸 빼놓고 연기하는 문제로 로이드의 지적을 받는다. 도티가 맡은 역은 가정부로 주인 내외가 여행으로 집을 비운 사이에 혼자 시간을 보내려고 주인집에 와있다. 여기에 부동산 업자가 자신의 여자 친구와 들어오는데, 여행을 떠났다던 주인 내외도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이 와중에 도둑까지 든다. 이들 극중극의 인물들은 서로가 집에 있는지 모르고 있는 상태이다. 그들은 여러 방을 드나들면서 절묘하게 만남을 피하다가 결국에는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유발되는 웃음이 'Nothing On'의 핵심이다.

  어렵사리 리허설을 마치고 마침내 오프닝 나이트 날, 로이드의 우려와는 달리 연극은 성공적인 초연을 한다. 이것이 1막이다. 2막의 배경은 순회 공연이 펼쳐지는 플로리다로 배우들의 극심한 갈등 때문에 혼란스러운 무대 뒷편을 보여준다. 3막의 클리블렌드에서는 꼬일대로 꼬여버린 배우들의 관계 속에 각자 제멋대로 대사를 하고 연기하는 엉망진창의 무대 공연 장면이다. 연극이 이렇게 되어버린 데에는 배우들이 서로 연애하는 과정에서 사랑싸움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연상의 여배우 도티와 연인 사이였던 게리는 도티가 프레데릭(크리스토퍼 리브 분)과 사귀는 것을 알게 되면서 연극을 하는 도중에 골탕을 먹인다. 그런가 하면 연출가 로이드는 조연출 포피와 출연 배우 브룩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 도둑 역으로 나오는 알콜 중독자인 노배우 셀스던은 소품으로 쓰이는 술에 눈독을 들이느라 동선과 대사를 까먹는다. 이들의 갈등은 연극을 진창 속에 빠져들게 만들지만, 영화의 관객에게는 포복절도할 슬랩스틱을 선사한다.

  '막을 올려라'를 보는 것은 꽤나 즐겁다. 보그다노비치가 '니켈로데온(Nickelodeon, 1976)'에서 보여주었던 독창적인 유머감각을 이 영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정교하게 짜여진 슬랩스틱, 그것이 유발하는 웃음을 담아내기 위해 잘 활용된 롱테이크, 적절한 편집, 배우들의 재치있고 뛰어난 연기, 그 모든 것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비평가들에게 혹평을 받았던 이유는 토니상을 여러 번 수상했던 원작 연극의 성공에 원인이 있었다. 연극을 본 이들은 영화가 원작의 본질을 되살리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거기에다 원작자 마이클 프레인은 희곡을 영화화 하는 과정에서 수정되고 덧붙여진 시나리오에 극심한 반감을 표현했다. 또 다른 비판으로는 원작 희곡이 영국식 영어와 영국을 배경으로 하는데, 그 모든 것이 '미국식'으로 '미국 배우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불평이었다. 연출가 역의 마이클 케인과 술꾼 배우 역으로 나온 덴홀름 엘리엇, 이 두 명의 영국 배우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처럼 연극을 못 본 관객의 입장에서는 정말 재미있는 영화이지만, 연극팬들에게는 '막을 올려라'가 연극에 비해 수준미달로 여겨졌던 것 같다. 원작 희곡이 어떤가 싶어서 영문 대본을 찾아봤는데, 무려 150쪽이 넘는 꽤 긴 분량이었다. 무척 길고 복잡한 내용의 희곡을 이 영화보다 얼마나 더 잘만들어야 한다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영화는 '웃음'에만 촛점을 둔 나머지, 캐릭터들간의 관계 설정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는 단점을 갖고 있기는 하다. 거기에다 저속한 '화장실 유머(toilet humor)'가 나온다는 점도 이 영화의 평판에 좋지않은 영향을 끼쳤다. '막을 올려라'는 경박스럽고, 연극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는 혹평을 받으면서 흥행에서도 실패했다. 보그다노비치에게는 이후 영화 경력의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영어 제목 'Noises Off'는 연극 용어에서 따온 것이다. 연극 상연시 필요한 효과음을 무대 밖 offstage에서 틀어주는데, 그것을 지시하는 용어가 'noises off'이다. '막을 올려라'의 극중극의 배우들은 원래 정해진 대사와 연출, 효과음은 죄다 무시하고 자신들 멋대로 공연하게 된다. 그 제멋대로의 공연은 결국 관객에게 큰 박수를 받는다. 나는 그 배우들처럼 보그다노비치의 유쾌한 일탈을 보여주는 이 영화의 유통기한이 좀 더 길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토록 재미있는 영화가 잊혀지기 보다는, 좀 더 오래 관객의 곁에 머무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사진 출처: movieforums.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1979년의 어느 토요일이었다. TV에서 워터쉽 다운이 나오고 있었다. 나는 친구와 함께 집에서 그것을 보았다. 친구는 보다가 너무 무섭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나는 토끼들의 흥미진진한 모험에 매료되었다. 다 보고난 뒤에 당장 책을 찾아서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1978년에 만들어진 이 애니메이션은 이듬해 BBC 방송을 통해 영국 전역에서 볼 수 있었다. 위에 언급한 글은 영국의 어느 평론가가 '워터십 다운(Watership Down, 1978)'에 대한 자신의 기억을 회고한 데에서 따왔다. 이 애니메이션에 대한 해외 비평을 읽어 보면, 영국 쪽에서 당시 BBC 방송을 통해 본 경험담이 꽤 나온다. 아동에게는 꽤 폭력적이고 잔인한 장면들이 들어가 있는 '워터쉽 다운'을 영국은 전 연령 시청가로 정했다. 과연 이 애니메이션을 아동에게 보여주기에 적합한가에 대해서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원작자 리처드 애덤스는 자신의 딸들에게 읽혀주기 위한 동화로 토끼들의 모험담을 썼다. 젊은 시절, 군 복무 중에 동료로부터 들은 토끼의 생활과 습성에 대한 이야기가 소재가 되었다. 그렇게 토끼들의 장대한 모험을 다룬 환타지 장편 소설 '워터십 다운(1972)'이 탄생했다.

  원작 소설은 꽤나 두껍고, 나름대로 정교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솔직히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초등 고학년 수준에서도 좀 버겁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이 동화는 어른들에게도 매력적인 이야기로 큰 인기를 끌었고, 마틴 로젠은 애니메이션으로 재현했다. '워터십 다운'의 그림체는 상당히 사실적이고, 어떤 부분에서는 거칠다. 토끼들끼리 싸우는 장면에서의 피와 폭력의 묘사도 구체적이다. 이쯤되면 이 애니메이션이 정말로 아이들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주 관객층을 성인으로 한 것인지 의문이 들 법도 하다. 그러나 그림체와 묘사의 수위, 서사의 전개가 어른들에게는 밋밋하게 느껴진다. 요즘 아이들에게 이 정도 표현 수위는 그다지 충격이랄 것도 없다. 그보다는 오래전의 투박한 색감과 그림체를 좋아할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소설을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선택과 집중이 이루어진 탓에, 애니메이션은 아주 속도감있고 단순 명확한 설정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그 점 때문에 원작 소설의 팬들은 이 애니메이션이 원작의 본질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스트리밍 서비스사 N사에서는 2018년에 4부작으로 원작을 충실하게 반영한 시리즈물을 내놓기도 했다.

  '워터십 다운'은 예언적 능력을 가진 토끼 파이버가 계시적 환상을 보는 데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형 헤이즐은 자신들이 사는 곳에 재앙이 닥칠 것이라는 파이버의 말을 전적으로 믿는다. 새롭게 살 곳을 찾아 동료 토끼들을 이끌고 떠나는데, 그들이 그 과정에서 겪는 파란만장한 모험담이 워터십 다운의 뼈대를 이룬다. 여기에는 야생동물과 인간과의 갈등을 비롯해 환경 파괴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 토끼 사회에서 존재하는 계급적 갈등, 잔혹무도한 독재자 운드워트의 존재까지 아주 다양한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워터십 다운'의 원작 텍스트 해석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이들은 좌파주의적 시각을 가진 비평가들이었다. 그들은 이 동화가 명백한 계급 투쟁과 그 승리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해석한다. 이에 대해 원작자 리처드 애덤스는 자신은 어떤 정치적인 의도를 갖고 쓴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혔지만, 원작자의 품을 떠난 텍스트는 해석의 공공재나 마찬가지다.

  오늘날의 관객 입장에서 1978년에 만들어진 이 애니메이션은 얼마나 호소력을 가지고 있을까? 원작에 대한 이해를 떠나서 '워터쉽 다운'은 어둡고 지루하다. 토끼들의 모습은 귀여움과는 거리가 멀다. 토끼들 사이의 생존 경쟁은 인간 사회에 못지않게 처절하다. 그들의 세계는 절대로 평화롭지 않으며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쥐어짜내서 하루하루를 버텨내야 한다. 엄격한 계급이 존재하기에 약육강식의 냉혹함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왜소한 체구(애니메이션에서도 파이버는 다른 토끼들에 비해 작게 나온다)의 토끼 파이버가 예언자로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다. 낮은 계급의 약자가 자신이 가진 예언적 능력으로 위기에 처한 토끼 무리의 활로를 열어주기 때문이다.

  상처를 입은 갈매기 키하르를 도와주고, 그렇게 쌓은 유대감으로 함께 연대해가는 모습은 생명체들 사이의 협동과 유기적인 관계를 상징한다. 오직 인간만이 그 연결 고리에서 따로 떨어져 있다. 토끼를 가축으로 길들이려고 하며, 자신들의 목적에 따라 토끼들의 서식지를 파괴하고 죽이는 모습은 지구상에서 인간이 가진 독점적인 지위의 폐해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생태학적 교훈의 메시지는 1시간 40분짜리 애니메이션에서 피상적으로 보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 칙칙하고 별 다른 재미가 없는 토끼들의 모험에는 삶에 대한 근원적 메시지가 담겨있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모험을 해야하고, 지혜와 용기를 가지고 투쟁해야 하며, 같은 목적을 가진 동료들과 협동해야한다는 삶의 진리. 결국 관객들은 토끼들의 이야기에서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사진 출처: wikipedia.org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이 영화는 오프닝부터 눈길을 끈다. 히치콕의 '사이코(Psycho, 1960)'를 본 이들이라면 검정 바탕에 기하학적인 도형들이 멋지게 배열되는 오프닝 타이틀을 기억할 것이다. '새장 속의 여인(Lady in a Cage, 1964)'의 오프닝 타이틀도 그에 못지않게 강렬하다. 마치 관객들에게 앞으로 볼 이 영화에 대한 선명한 단서를 제공하는 것 같다. 영화를 본 이들은 이 영화가 보여주는 폭력성과 잔혹성에 놀라게 된다. 1960년대에 이렇게 대담하고 노골적으로 폭력과 광기에 대해 다루었던 영화가 있었던가?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아도 이 영화는 기괴한 불안함과 두려움을 안겨준다.

  부유한 힐야드 부인(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분)은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골절상을 입은 후로 집에서 이동하기 쉽게 엘리베이터를 설치했다. 그런데 아들이 주말 휴가를 떠난 사이, 전기에 문제가 생겨서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던 힐야드는 그대로 갇혀 버린다. 엘리베이터에 있는 비상벨을 누르면 집밖에서 경보음으로 들리게 되어있는데, 독립기념일 행사로 시끄러운 거리에서 그 소리를 듣는 이는 아무도 없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노숙자 술꾼 조지는 힐야드의 집을 기웃거리다 침입하게 되고, 힐야드가 갇힌 것을 보고는 크게 도둑질을 할 기회로 여긴다. 조지는 매춘부 세이디를 불러서 같이 집을 털기로 한다. 그런 그들을 불량배 3인방이 몰래 뒤따라 온다. 랜들(제임스 칸 분), 일레인, 에시는 조지와 세이디를 제압하고 힐야드의 집을 난장판으로 만든다. 힐야드는 필사적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빠져나가려고 애를 쓰지만, 공중에 매달린 새장이 되어버린 그곳에서 나갈 방법이 없다. 자신들의 얼굴을 보았다는 이유로 조지와 세이디, 힐야드를 모두 죽이겠다고 선언한 랜들. 과연 힐야드 부인은 이 엄청난 재앙에서 목숨을 건질 수 있을까?

  영화 '대부(1972)'에서 콜레오네 가문의 장남 소니로 나왔던 제임스 칸은 이 영화가 실질적인 데뷔작이다. 당시 24살의 제임스 칸은 미친 것 같은 폭력성과 잔혹성을 지닌 인물 랜들을 연기한다. 랜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상스럽기 짝이 없고, 온 집안을 헤집으며 일으키는 난동에서는 살기가 뿜어져 나온다. 힐야드는 그런 랜들을 '짐승'이라고 부른다. 랜들은 힐야드를 마음껏 조롱하고 모욕을 주면서 금새라도 죽여버릴 것처럼 위협한다. 값비싼 장식품과 귀금속에 둘러싸여서 시를 읊고, 화병의 꽃이나 신경쓰며 살아온 힐야드의 일상은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모한다. 휴가를 떠난 아들, 길거리의 행인, 경찰, 그 누구도 힐야드를 도울 수 없다. 게다가 애지중지 아끼던 아들은 엄마의 지나친 애정에 더이상 함께 있을 수 없다며 편지를 써놓고 가버렸다. 랜들이 읽어준 아들의 편지는 힐야드를 극도의 공황 상태로 몰아간다.

  '새장 속의 여인'에서 힐야드 부인에게 닥친 재난은 부유한 중산층이 가진 무의식적인 공포를 형상화한다.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안락한 삶이 언제든 원치않는 타자에 의해 위협받고 파괴될 수 있다는 공포. 영화의 도입부에 보이는 이 집안의 화려한 실내 장식들은 침입자들에 의해 무참하게 부서지고 귀중품은 노략질의 대상이 된다. 힐야드가 '짐승'과 '쓰레기'로 부르는 도둑들은 계층적으로는 맨 밑바닥에 있는 이들이다. 술꾼과 매춘부, 불량배, 이들은 모두 힐야드의 안위에는 관심이 없고 크게 한탕해먹을 궁리만 하고 있다. 그 도둑들 사이에서도 위계가 존재한다. 마치 약육강식의 세계처럼 힘없는 술꾼은 곧 죽임을 당한다. 랜들과 일레인, 에시가 저지르는 폭력과 광기의 행동은 시간이 갈수록 도를 더해갈 뿐이다. 이 상황에서 철저하게 무력한 힐야드에게 구조의 손길은 멀기만 하다.

  조화롭고 안온하게 보이는 일상의 삶이 언제든 파괴될 수 있다는 공포를 당시의 미국인들은 이미 겪었다.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사태는 미국과 소련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핵전쟁의 위험을 상기시켰다. 그런 정치적 사태에 더해 1964년에 있었던 키티 데이비스 사건은 일상 속에서의 두려움을 극대화시켰다. 새벽에 귀가하던 여성이 주택가에서 칼에 찔려서 죽어가는 데도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다. 35분 동안의 비명과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상당수 불이 켜진 집에서 그 누구 하나 나와보는 사람이 없었다. 낯선 타자에 대한 극단의 공포는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루터 데이비스는 대낮의 고장난 엘리베이터에 갇힌 여성이 당한 범죄 사건에서 설정을 따왔다. 일상은 언제든 범죄와 폭력이 발생할 수 있는 지옥으로 변할 수 있음을 당시의 사람들은 체감했다.

  이 영화에는 언제든 폭발할 것 같은 엄청난 폭력성이 시종일관 흘러내린다. 관객들은 엘리베이터 속에 갇혀서 무기력하게 그 폭력과 광기를 목도하는 힐야드 부인이 된다. 1964년에 이 영화가 보여주는 묘사의 수위는 충격적이었고, 그 때문에 '새장 속의 여인'은 결코 호평을 받는 작품은 아니었다. 영국에서는 이 영화를 TV 방영은 물론 극장 개봉도 하지 않았다. 무려 36년 동안 모종의 금지 조치가 이어졌다(indiwire.com 기사 참조). 오늘날의 관객들에게도 이 영화가 보여주는 극대화된 폭력의 정서는 쉽게 익숙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감독 윌터 그라우만은 일상을 틈입하는 범죄가 가져오는 충격과 공포, 두려움을 놀랍도록 생생하게 그려낸다. 그것은 계층적 갈등과 충돌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중산층의 하층 계급에 대한 은밀한 멸시와 두려움은 침입과 상해, 파손과 같은 형태로 구현된다. 마침내 구조된 힐야드 부인의 흐느낌과 절망스런 표정 위로 찍히는 'The End'는 그 악몽과도 같은 일이 언제든 재현될 수 있음에 대한 역설적인 각인처럼 보인다. 



*사진 출처: binged.com 힐야드 역의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는 온몸을 내던지는 열연을 펼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