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부터 EBS 클래스e에서는 노문학자 석영중 선생이 강의하는 '도스토옙스키와 여행을'을 방영하고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창작의 근원이 되었던 도시들과 여행지, 그곳에서 쓴 작품들에 대해서 들려준다. 먼저 '죄와 벌'이 다루어졌고, 오늘로 '백치'가 끝났다. '죄와 벌'은 읽은 책이라 이해가 쉬웠는데, '백치'는 오래 전에 도입부만 읽다가 그만 둔 소설이었다. 마침 자료 화면으로 나오는 영화가 1958년에 제작된 동명의 영화라서 찾아서 보았다. 꽤 두꺼운 이 소설에 대한 대략적인 이해라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 영화, 소설의 중간 부분에서 끝나버린다...

  원래 영화 '백치'는 2편으로 기획되었는데, 배우들의 일정이나 여러 문제 때문에 감독 이반 피리예프가 후속편을 찍는 것을 포기했다. 국영 영화사 Mosfilm에서도 별다른 의지를 갖고 있지 않았던 모양인지 영화는 결국 미완성으로 남았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뒷부분이 궁금하면 소설을 읽든가, 아니면 나중에 TV 시리즈로 제작된 것을 찾아서 보아야 한다.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들을 볼 때 거는 기대는 이런 것이다. 길고 두꺼운 소설을 짧은 시간에 이해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소설 속의 인물과 사건을 재현된 영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경우 그런 기대들은 완벽하게 충족되기 어렵다. 아니, 완벽은 커녕 소설과 영화 사이의 괴리를 절실히 느끼는 데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소설을 읽지 않은 관객이 '백치'를 영화로 본다고 해서 원작 소설을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까? 도스토옙스키의 경우, 그의 복잡하고 긴 소설에는 작가의 사상을 대변하는 인물들의 열변과 생각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인물들과 그들이 만들어낸 사건들이 주가 된 영화로 그의 소설에 접근하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생각도 든다. 그 때문에 나는 영화 '백치'에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소설의 영화화는 선택과 집중이 이루어지며, 그 결과물은 소설의 본질과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마거릿 미첼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빅터 플레밍 감독의 1939년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한번 보자. 영화는 남북 전쟁을 배경으로 스칼렛 오하라와 레트 버틀러, 애쉴리 윌크스의 애증에 찬 세월을 보여주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원작 소설에서 묘사된 남북 전쟁 전의 남부의 상황, 전쟁의 발발, 전후의 재건에 이르는 세부적 역사는 생략되어 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영화로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소설을 읽지 않은 관객이 이 영화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멋진 배우들과 화려한 세트, 유려한 영화 음악(이 영화의 타라의 테마는 유명하다)이 전부다.

  이것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데이비드 린 감독의 '닥터 지바고(1965)'는 소설을 영화로 만든 작품의 모범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원작 소설이 가진 깊은 사유의 맥락과 맞닿아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러시아 혁명에 이은 내전, 공산 정권의 수립이라는 역사적 상황이 주인공들의 상황과 맞물려 펼쳐지는데, 영화는 그런 배경을 과감하게 생략했다. 심지어 인물들에 대한 묘사도 축약되어 있다. 영화 초반부에 라라와 코마로프스키의 내연 관계가 애매하게 제시되는 것과 달리, 소설은 라라와 모친과의 사이에서 그가 가진 영향력을 잘 알 수 있다. 적군과 백군으로 대립해서 싸운 러시아 내전의 상황이라던가 지바고가 쓴 시들도 영화는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오마 샤리프와 줄리 크리스티, 알렉 기네스가 펼치는 명연기, 눈부신 설원의 풍경, 그리고 라라의 테마로 유명한 모리스 자르의 음악이 영화 '닥터 지바고'에 있다.

  결국 그런 영화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문학과 영화의 근원적 괴리이다. 그런 면에서 소설, 또는 희곡을 영화화한 작품들에서 원작 텍스트에 대한 이해없이 영화를 비평하는 행위는 무모한 것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내가 소설 '백치'를 읽지 않고 영화 '백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화적인 부분에 대해서이다. 주로 풀쇼트와 미디엄 쇼트로 제시된, 인물들의 대사와 표정 연기가 주가 되는 드라마라고 밖에는 말할 것이 없다.


  우리가 흔히 저지르기 쉬운 실수는 원작 텍스트와 따로 분리된 '영화'라는 텍스트가 완벽한 형태로 존재하며, 그것을 가지고 비평할 수 있다고 믿는 오만에서 기인한다. 문학 작품을 영화화한 경우, 적어도 번역된 저작물이 있다면 그걸 읽어 보고 나서 영화에 대해 분석하는 것이 비평의 기본 자세라는 생각을 늘 한다. 어떤 면에서 1958년작 영화 '백치'는 문학과 영화의 관계에 대한 은유적 텍스트인지도 모른다. 결코 만들어지지 못한 후속편은 영화가 소설의 절반 정도만을 이해할 수 있는, 비어있고 상상의 가능성을 남기는 다른 차원의 결과물임을 상기시키는듯 하다.  



*사진 출처: ru.kinorium.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